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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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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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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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3)

DUMMY

“벨리안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벨리안느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었고, 그 사실에 당황하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거야?”


그 다지 들을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기에 벨리안느는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고민하던 벨리안느는 곧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뚜렷해지는 것과 동시에 다른 소리들 또한 조금씩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그녀가 온전히 돌아온 시야로 마주보게 된 것은 뭉게뭉게 피어 올라가는 검은 연기와 붉게 타오르는 도시의 전경이었다.


‘꿈이구나.’


그것도 완벽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잔인하고 매정한 꿈.

아니, 어쩌면 과거의 기억 그 자체.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거야?”


그 경계가 모호한 공간 속에서 벨리안느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과거 자신의 모습 또한 타인을 바라보듯이 볼 수 있었다.


그 소녀는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얼굴에 윤기나는 밝은 황금빛 긴 머리를 땋은 채, 아이보리 빛 드레스를 입고 있어, 지금에 비하면 더 할나위 없이 가꿔진 차림새였다.


하지만 드레스 끝자락은 그을림과 먼지 범벅인 상태였으며, 얼굴 또한 무엇이 그리 서글픈지 눈물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언덕위에 활활 타오르는 도시를 내려 보고 있었다.


“아르센 뭐라고 대답을 해봐.”


결국 댐이 터지듯 두 줄기의 눈물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간이든 인형이든 어짜피 이런 일을 누군가는 먼저 벌려야 했을 거야.”


긴긴 침묵 끝에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벨리안느가 아닌 활활 타오르는 도시를 바라본 채 였고, 그러다 다시 그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일을 먼저 벌였다면, 우리 인형들은 흔적도 없이 살라지고 말았을테지.”


“아닐거야..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벨리안느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옛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런 말을 당당하게 입밖에 내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어.’


벨리안느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꿈속의 아르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시대에서는 아니야. 나도 네가 꿈꾸는 세상을 볼 수 있을거라 희망하고 있어. 이왕이면 둘이 함께 보는 것이 좋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벨.”


아르센은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입을 닫았고, 그러자 또 다시 그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억 속의 두 사람에게는 영원 같았을 침묵이었으나, 이미 그 순간을 헤쳐온 벨리안느는 곧 이어 어떤 말이 이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주워담을 수 없는 그 말. 모든 것을 바꿔 버렸던 그 대화의 시작을 벨리안느는 꿈속의 자신보더 먼저 되뇌였다.


‘아르센... 나.... 이용당한 거야?’

“아르센... 나.... 이용당한 거야?”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 그 말....


그 말을 듣자마자 도시를 바라보고 있던 아르센이 무서운 속도로 벨리안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억 속의 자신이 서 있는 곳에 함께 있었던 벨리안느는 그렇게 아르센과 눈이 마주쳤고, 숨이 턱 막혔다.


어렸을 적 자신의 모든 능력과 시간을 들여서 만든 얼굴과 마주치게 되자 벨리안느는 자신도 모르게 아르센에게 다가갈 뻔했다.


치켜 올라간 눈썹. 눈가와 미간의 미세한 주름. 도저히 인형이라 생각되지 않는 아르센은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으며 벨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벨리안느......”


“말해줘. 내가... 도구에 불과했던 거야?”


“도구라니... 그런....”


“그럼? 왜 내가 이런 장면을 봐야 하는 거야?”


꿈속의 벨리안느가 불타는 도시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아르센은 또다시 고개를 돌려 벨리안느를 외면했고, 그런 아르센의 행동에 벨리안느는 더 이상 참지 못하였다.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아르센의 어깨를 힘껏 당겼다. 그렇게 벨리안느는 다시 아르센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대답해줘... 제발.”


“인간과 인형은 이렇게도 다르구나... 이제 확실히 알겠어. 타인에게 항상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있고 싶은 마음... 자신이 소중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인간의 특성.

나로서는 이해는 하지만 느낄 수 없어. 인형에게는 자신 이외의 존재는 어떠한 결과를 내기위해서 존재하니까. 그 결과를 위해 누군가의 도구가 되든, 누구를 도구로 사용하든지 개이치 않으며.”


“그래서 나를 도구로 썼다는 거야? 인형에게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날 속였다는 거야?”


“인간도 다른 사람에 의해 충분히 도구화 될 수 있어.

자신의 외로움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족이라는 체제, 그리고 삶을 온전히 보존코자 사회와 국가를 세웠잖아.

이렇게 인간 또한 타인을 도구화 시킬 수 있다는걸 모르겠니?”


“그렇다고 누군가를 도구로 사용하길 작정하고 삶을 살아가진 않아, 아르센!”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삶. 마침내 죽음으로서 그 존재를 다하는 존재에게 무한한 삶을 사는 우리 인형은 그들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서 똑같은 가치를 바랄 수 없어. 그러니까.....”


“돌려서 말하지 말고 내 질문에 대답해 아르센!

네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를 속이고 이용 했던거야, 그치?

그것도 내가 괴로워할 것을 알면서 말이야.”


벨리안느는 꿈속의 아르센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인상을 쓴 사람의 얼굴.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빛을 받은 얼굴 면은 인간의 얼굴과 다를 바 없었으나, 빛을 등진 얼굴면은 인형과 인간의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감처럼 새까만 그늘이 져 있었다.


때마침 도시 어딘가에서 불길이 크게 일렁이며 순식간에 주위가 밝아졌고, 그러자 그늘져 있던 아르센의 반쪽 얼굴 면이 드러났다.


그렇게 드러난 그의 얼굴 반쪽은 그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은 인형의 얼굴이었다.


“그래. 벨리안느. 나도 어쩔 수 없는 인형인가봐. 결과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이야.”


아르센의 입에서 거침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나........”


꿈속에서의 벨리안느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어떻게....”


벨리안느는 입을 두손으로 막은 채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해할 것이라고 믿어 벨리안느.”


아르센은 뒷걸음질 치는 벨리안느를 내버려 둔 채, 다시 시선을 돌려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벨리안느와 꿈속의 벨리안느 그리고 아르센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동작 그대로 멈춰있었다.


아니, 실제로 꿈속의 시간이 멈춘 것일 수도 있다고 벨리안느는 생각을 했다.

그 침묵 속에서 벨리안느는 과거의 자신, 꿈속의 자기 모습을 눈동자를 굴려 바라보았다.


13살의 어린 그녀.. 마치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소녀의 얼굴과 비슷한 그녀의 얼굴은 공포, 불안, 두려움, 그리고 슬픔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8년 전, 이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 단어들이 자신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르센.”

그런 부정적인 단어들 속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인 단어였던 그.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이름마저 부정적인 의미로 퇴색되어 그녀의 삶에 검은 덩어리처럼 엉겨붙어 버렸다.


붉게 때론 검게 타오르는 도시. 차디찬 바다빛 말들, 투명한 눈물.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감정들. 그리고 무표정한 아르센의 얼굴...


“아르센!”


벨리안느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별빛이었다.

곧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사이에 갇혀있는 달빛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빛들이 불투명하게 보인 채였다.


이상하게 느낀 벨리안느는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눈가를 만져보았고, 꿈속에서 13살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다........”


벨리안느가 잠시 멍하게 있다 그렇게 중얼거렸다.


“꿈이다.”


그녀가 한번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동안 별빛과 달빛에 눈물을 말렸다.


그렇게 13살 소녀가 흘렸던 눈물이 마르자, 벨리안느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올라 일어났다.

그리고는 슬프고, 아련했던 꿈에서 벗어나게 한 현실의 문제를 직면하기로 했다.


벨리안느의 마력 감지 범위네 수십의 마력 기운들이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필시 초저녁에 만났던 인형 정찰대의 본대일 것임이 분명했고, 그 속에 아르센이 있을 지는 미지수였지만 관계 없었다.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꿈속에서 보았던 아르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무시무시 할 정도로 냉정한 그 가면을 쓴 채, 벨리안느는 인형들에 한때 이용당했던 소녀가 동시에 왜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불렸는지 보여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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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4) +1 20.07.24 40 2 8쪽
» [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3) +1 20.07.16 43 2 10쪽
68 [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2) +1 20.07.14 40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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