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장에 돌아오다(1).
<해월장에 돌아오다.>
전귀는 그렇게 미련 많은 세상을 떠났다.
하림이 도룡비로 그의 목을 따낸 것이다.
마치 전귀가 예전에 공호광과 마철상에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똑같이......
금전만 보면 눈이 뒤집혀서 사람의 귀중한 목숨도 한낱 파리 목숨보다 가볍게 여겨왔던 전귀는, 세상을 떠날 때 아쉽게도 구리동전 한 닢 가지고 가지 못했다.
전귀가 없어도 세상의 아침은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눈부시게 찾아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세상은 다시 시끌벅적하게 삐거덕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정오가 지나고 태양의 강렬한 기운이 수그러들기 시작할 때, 하림은 희화루 꼭대기 층에 모처럼 편안한 상태로 쉬고 있었다.
이곳 또한 하오문의 분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가 원하면 통째로 비울 수 있는 곳이다.
-똑똑...!
“주군 들어가겠습니다.”
팽도림의 목소리가 모처럼 하림의 사색을 깨웠다.
“들어와!”
방문을 밀고 들어서는 팽도림은 혼자가 아니었다.
황충이 커다란 궤를 메고 안으로 같이 들어서고 있었다.
-쿵!
“저건가?”
“예, 주공, 하나같이 금원보로 삼만 냥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휘유....많이도 모아놨군. 누가 알았겠어, 관제묘 바닥 땅속에 저런 거금이 들어 있을 줄을 말이야.”
“죽으면 썩지도 않는 재물을 두고, 세상을 떠나기가 너무 억울해서, 아마 구천을 떠도는 것 아닐까요?”
“세상 멍청한 놈이지, 금덩이만 보면 환장하는 아마도 일종의 정신병일거야. 도림?”
“예, 주공.”
“대원들에게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마침 일찍 해월장으로 돌아간다.”
“예, 주공,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하림이 고개를 끄덕이고 팽도림과 황충이 몸을 돌리려할 때, 운령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공, 점창의 손소협이 밖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참....여기서 보기로 했었지, 잊을 뻔했네, 들어오라 해!”
운령이 밖으로 나가 청삼을 입은 손광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온다.
손광표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무림대회 때보다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마주 다가간다.
“손소협, 이곳에서 뵙는군요.”
“천룡대주에 오르심을 축하드립니다, 대주.”
그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아 포권하며 하림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이번에 큰일을 당하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불민한 탓입니다. 하지만 대주님 배려에 이 한 많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은공을 어떻게 갚아나가야 할지..........”
그는 하림을 향해 얼굴가득 떠오른 경배심을 지우지 않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으리라.
하림은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별말씀을, 아직은 소협의 할일이,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하림의 위로에 그는 숙였던 고개를 가만히 치켜들었다.
“대주님, 정말로 이 쓸모없는 놈도 아직은 이 세상에서 할일이 남아 있을까요?”
“이런 이런, 우리 손소협의 마음이 많이 다치셨군요.”
“대주,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손광표가 돌연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서 하림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소리친다.
그는 옆에 있는 인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하림에게 통곡을 하면서 매달린다.
하림은 그의 돌발행동에 뒤통수만 긁적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통곡, 저 절망감, 왜 모르겠는가?
불과 육년 전, 나날이 자신도 수없이 느꼈던 좌절과 상실감들, 그리고 절망감이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한참동안 흐느끼는 그를 내려다본 하림이, 이윽고 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운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탁자에 앉아서 잠시 이야기 나눠보죠.”
“.......?”
하림의 힘에 이끌려 일어난 그가 그제야 겨우 진정이 되는 듯, 묵묵히 하림의 뒤를 따른다.
잠시 후, 운령이 들고 온 냉수를 쉬지 않고 들이키던 그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한다.
“이 나이에 좀 추하지요?”
“아니, 난 충분히 이해해요. 그래서 물어 볼 것이 있어요.”
“예, 대주님, 뭐든 물어 보십시오.”
“점창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눈치 채고 미안하지만, 손소협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요, 왜 그들이 손소협을 이토록 못살게 구는지가 궁금했거든요.”
“예에...?”
손광표는 하림의 말이 뜻밖이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뜬다.
“알아보니 손소협의 증조부께서 약 백년쯤에 점창의 장문인 이었더군요.”
“옛? 아니 그걸 어떻게......?”
저건 점창파에서 조차 손광표의 정통성이 대두될까 두려워 쉬쉬하는 통에, 아는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잊었습니까? 내신분이 하오문라는 사실을.....”
“아.....!”
“그래서 따지고 보면 손소협은 점창의 적통이자 추후 장문인이 될 수 있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의 청장문은 자신의 후대를 이어가려하니까, 당연히 손소협이 껄끄럽겠죠. 맞죠?”
“.......?”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지 손광표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림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물론 이전에 손소협의 조부나 부모님께서 어쩐 일인지 젊은 나이에 모두 요절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청장문인은 장문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겠죠.”
“정말 하오문의 정보는 놀랍군요. 대주, 탄복했습니다. 이런 불행한 과거를 가진 채 너덜너덜해진 저를, 대주의 휘하에 넣어 주시겠습니까?”
그는 하림을 바라보며 다시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려했다.
하지만 하림이 암암리에 내력으로 찍어 누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하죠, 단, 내 휘하로 들어오게 된다면 각오해야 할 겁니다.”
“감...감사합니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 주실 줄이야.....”
“하나 더 묻지, 광표.”
하림의 말투가 어느새 바뀌어있었다.
손광표는 오히려 그것이 더욱 기꺼워서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큰소리로 대답한다.
“대주, 물어만 주십시오. 뭐든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후훗....점창, 네가 원한다면 점창을 가질 수 있도록 나는 만들 수가 있는데, 너의 생각은....?”
“옛? 정....정말이십니까? 대주?”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점창의 약점으로 도덕성을 문제 삼아 무림맹으로부터 떨궈 놓은 다음, 야금야금 점창을 먹어 치울 수가 있거든. 어때, 광표의 가문이나 마찬가지인 점창을 직접 되찾아야 되지 않겠어?”
“아아.....!”
손광표의 두 눈에 고심의 빛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가문의 영광이었던 백여 년 전에, 기울어져가는 점창을 일으켜 세운 증조부가 점창의 문인들의 자랑이자 영웅이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자신은 말로만 들었었지만......
오랜 숙원이었던 구파일방사이에 점창의 이름도 당당히 올렸고, 드넓은 강호를 휘젓고 다녔던 그 시절의 점창의 명성은 드높기만 했었다한다.
그러나 어떤 까닭인지 증조부에게 장문위를 물려받은 조부가, 강호행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모마저 강호행을 하던 중에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고 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그의 부모의 사인은 밝혀진 바 없는 의문의 죽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온갖 시련과 학대와 냉대가 당연히 그를 괴롭혔다.
그는 그렇게 삼십년이라는 생을 점창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고 하림만 바라보던 손광표가 언뜻 쓴웃음을 자아낸다.
“아니오, 대주, 안 할 랍니다. 이제 점창이라 하면 지긋지긋합니다.”
“정말인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예, 대주, 잊을랍니다, 점창의 그 더러웠던 기억들을요.”
하림은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풀고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이거 꽤 실망인데? 부모의 사인도 묻어버린다는 말로 들리는군.”
“헉....대주....제발 그런 말씀은.....”
“왜? 나약하게 살아 어쩌면 타살이 분명한데도, 묻어 버리려했던 양친의 사인을, 내가 거론하니 마음이 찔려서...?”
“아아.......!”
손광표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괴로운 신음을 쏟아낸다.
한참동안 머리를 학대하던 그가 고개를 치켜들며, 하림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본다.
“대주,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소, 난 나약하고 힘조차 없소, 어쩌면 대주의 말대로 양친을 살해한 불구대천의 원수가, 지금 이 시각에도 어디선가 날 비웃고 있을지 모르오. 하지만 지금은 아니오, 내가 지금 대주말씀대로 무작정 원수를 찾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만용에 불과하오, 군자의 복수는 십년도 늦지 않는다는 말이 있소. 그렇소, 만약에 원수가 점창을 차지하기 위해서 저의 부모를 해하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범인이 나타나겠지요, 기다리렵니다. 그리고 그때 생사필(生死必)을 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 하여도 점창에 돌아갈 마음은 이제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대주!”
손광표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하림은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문득 뇌리에 그에 관한 문서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서찰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의 조부와 부모를 해한 자는 역시 지금의 장문인인 운남신검 청일기였다.
문서에는 더욱 자세한 이야기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하림은 애잔한 눈동자로 송광표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한숨을 불어냈다.
인과응보,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손광표로 하여금, 그 살부지수의 빛을 받아내게 하리라.
그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사실들을 잠시 뇌리에 집어넣고 감춰두기로 했다.
“정말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군.”
“예, 대주, 이제 대주만 쫒으며 살겠습니다. 이끌어 주시지요.”
“좋아! 하지만 좀 아쉬운데?”
“예? 뭐...뭐가......?”
하림의 말에 손광표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꼿꼿하게 세웠다.
“하하...만일 점창을 찾아 달라는 요청을 했다면, 아마도 나는 광표 너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야?”
“예? 그럼 대주가 절 시험하신 것이군요.”
“하하....하여튼 결과가 좋으니 마음에 드는군. 도림?”
“예, 주공!”
“광표를 데리고 가서 모두에게 소개 시켜줘, 이제 한 식구다!”
“예, 주공!”
“운령?”
“예, 주공,”
“희화루주를 만나 오늘저녁에 한상 거하게 차리라 일러, 우리 모두 실컷 먹고 내일부터 또 치열하게 살아가야하니 말이야!”
“예, 주공!”
“무슨 일인지 안 먹던 술이 생각나는구나! 하핫....!”
하림은 일부러 유쾌하게 웃었다.
속에서 쓰디쓴 무언가가 훅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한 무리의 인마가 관도 위를 온통 먼지구름으로 덮어씌우면서, 영파현 중심가를 지나 커다란 소슬 정문이 있는 장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히이이이잉....!
-히이이이이잉!
-푸들.....푸들.....!
급하게 잡아당기는 말고삐에 코를 씩씩거리던 준마들이 사납게 울부짖는다.
스무 기가 넘는 인영들이 소슬 정문위에 편액을 바라보며 제각기 말에서 뛰어 내린다.
해월장.
하림과 천룡대원들이 드디어 해월장에 돌아온 것이다.
요란하게 들려오는 말울음소리에 장원 안쪽에서 몇 사람이 부리나케 뛰어 나온다.
하림은 그들을 바라보고 만면에 웃음을 자아냈다.
“하하...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아우...무림맹에서는 자네가 너무 바빠서 이 우형조차 만나기 어렵더군.”
남궁필도, 여전히 얼굴가득 떠올라있는 미소는 하림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하하....그거 반대로 아닌가요? 강호팔협의 우애가 너무 좋아서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그러니 좀처럼 시간 내시기가 어려웠었던 것이 아니고요?”
“예끼..이사람...하하......아우, 잘 왔네, 잘 왔어....”
하림에게 다가선 남궁필도가 그를 품에 안아준다.
빙긋 웃는 하림은 안긴 남궁필도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네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씨익 웃는다.
“형들! 오랜만!”
하림이 남궁필도를 지나며 네 사람에게 다가서며 양팔을 벌린다.
네 사람은 그런 하림의 품으로 서로가 당겨 안으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막내야! 네가 돌아왔구나. 장하다, 장해”
“하하...적혈마도, 금의환향이로구나....”
네 사람, 즉, 하림과 의형제들인 하후복상과 모용금성, 언무쌍과 제갈성혁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림은 자신이 드디어 해월장으로 돌아온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떠들썩하던 환영식에 한참을 술렁이던 해월장이, 모두가 안채로 사라지자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땅...땅....땅.....!
그러나 어디선가 들리는 잡다한 공사 소음들은 이곳이 큰 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묻지 않아도 일수 있었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청해각이라 쓰인 커다란 전각으로 들어서는 하림을 향해 일단의 무리들이 오체투지 하듯 엎드린다.
바로 전 하오문 문주였던 전횡과 비돈, 그리고 귀영살막의 세 사형제등이 그 사람들이다.
하림은 안으로 들어서며 눈살을 찌푸린다.
“모두 일어나, 앞으로 그런 예의는 차릴 필요 없어!”
그들도 하림이 이런 식의 예를 싫어한다는 것을 익히 아는지라, 군소리하지 않고 일어나 그의 앞에 시립했다.
하림의 시선이 귀영살막의 사형제들을 바라본다.
“나름 열심히 했군, 이제 세 사람에게 내 뒤를 맡기도록 하지. 삼비라 부르겠어!”
하림의 말에 온혁세, 담운천, 설예주가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주군,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그들의 눈가가 밀려오는 격동으로 인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하림이 무언가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고, 그들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숙여 복창한다.
“존명!”
-파팟......파밧!
약간의 소음이 일면서 중인들은 환상처럼 사라지는 그들을 목격하고 두 눈을 비비기까지 한다.
극성으로 익힌 신행만환보,
쓰기에 따라서 어쩌면 귀영신보보다 활용성은 더 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바로 하림의 손에 의에 재탄생된 무공이니 이미 상고의 무공이 돼버렸다.
허공중으로 몸을 숨긴 삼비들의 모습은 이제 그 존재마저 지워 버린다.
하림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떡거렸다.
- 작가의말
하림의 행보가 본격 하오문으로 향했네요,
어떤 일들이 있을지 저도 기다려 볼랍니다.ㅎㅎ...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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