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연재수 :
287 회
조회수 :
295,575
추천수 :
14,095
글자수 :
1,877,846

작성
21.01.24 20:05
조회
751
추천
46
글자
25쪽

시장바닥의 대왕들(2)

DUMMY

한 마을이 있었다.


몹시 괴이한 마을이었다.


때는 핵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절.

멸망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던 세상의 한곳, 방사능 가득한 점액의 습지 한곳에 그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질퍽한 뭍 위에 세워진 인간들의 마을.

오염된 액체를 들이마시고 시든 식물들을 씹으며, 그들은 죽은 것들처럼 비척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가 의문이었다.


그가 직접 확인해 본 바, 인근의 방사성 늪지는 결코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본래 습지는 여러 생명들의 터전이 아니었던가.

세상이 괴수들의 것으로 바뀐 후에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습지는 수많은 괴수들의 요람이었다.


오염된 늪지 속에는 수만 가지 괴물들의 둥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방사능의 영향으로 이전의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변모한 변종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 저 싸울 능력 하나 없어 보이는 병약자들의 마을이 그 복마전伏魔殿 틈에서 멀쩡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이해 가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다들 입 안이 헐고 이빨이 물렁해져 알아듣지 못할 웅얼거리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던 것은 마을의 촌장쯤 되어 보이는 자가 바닥에 그린 그림.


그 속에서는 거대한 녹색 괴물이 늪지 한가운데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괴물을 죽여 달라는 소리였다.


마을에는 당연하게도 의뢰의 보수로 지불할 돈 한 푼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유논이 세상을 어떻게든 구해야만 한다는 죄의식과 의무감에 미쳐 날뛰던 때였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면 무상으로라도 무슨 일이건 하던 시절이었다.


찝찝한 구석이 많은 의뢰였지만, 결국 그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조금도 쉬지 않고 거대한 녹색 괴물을 죽이기 위해 곧바로 길을 떠났다.


괴물의 정체는 대략 짐작이 갔다.


촌장의 묘사가 마냥 정확하다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그와 유사한 변종 괴수들 중에 습지에서 생활하며 저리 광폭한 모습을 보이는 종이라면 생각나는 게 하나밖에 없었다.


‘변종 트롤Troll이 분명하다···쉽지 않겠군.’


공략하기 대단히 어려운 축에 속하는 대형종 괴수였다.


본래 온순하기 그지없던 트롤들이 방사성 낙진과 오염된 마력으로 인해 끔찍하게 변모한 결과물.


그것들은 전신을 뒤덮은 방사능으로 세포가 붕괴하고, 또 종 특유의 재생력으로 곧바로 다시 재생되기를 반복하는 고통을 평생토록 매 순간마다 겪는다.


때문에 모든 트롤들은 그 변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렸다.

가장 무해한 축에 속하던 괴물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짓밟고 때려 부수는 가장 난폭하고 또 위험한 변종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광기와 방사능의 여파가 골수까지 미친 덕분에, 행동양식이 오히려 단순해지기도 했다. 미쳐 날뛰는 것을 회피할 수 있는 순발력, 그리고 단단한 가죽과 초고속 재생의 형질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방법만 있다면 얼마든지 사냥할 수 있는 수준.’


물론 그만한 순발력과 방법을 둘 다 갖춘 괴물사냥꾼은 흔치 않다. 변종 트롤이 공략하기 까다로운 괴물로 통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논은 그 흔치 않게도 유능한 괴물사냥꾼 축에 속하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변종 트롤을 잡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사내아이.’


유논은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줄지어 서 있던 마을의 사람들, 그 대열의 끝에서 홀로 웃고 있던 소년을 떠올렸다.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눈매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던 사내아이와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소년은 사라져 있었다.


마력으로 기감을 뿜어도 온데간데없다. 흔적도 없이 귀신처럼 없어졌다. 마을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묵묵부답이었다.


‘별 일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잠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 소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해서 무작정 추격하고 죽이려 들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우선은 변종 트롤을 잡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런 생각에 발 푹푹 박히는 늪지를 서둘러 건너던 와중이었다.


그워어어어어어어어──!


괴성과 함께 늪이 울렸다.

나무가 부서지고 땅이 헤집어지는 폭음이 들려왔다.


유논은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놀란 새들이 녹색 점액질 뒤집어쓴 채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런 일을 저지를만한 건 변종 트롤밖에 없다. 포효도 변종 트롤의 그것이었다.

고통과 광기에 몸부림치며 체액 토해내는 특유의 고함소리.


도대체 무엇이 변종 트롤을 저렇게까지 광분하게끔 자극했는지는 몰라도, 마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도록 막아야만 할 터였다.


서둘러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갔다. 사방이 전부 난장판이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뒤집어진 늪, 뿌리째 뽑히고 부서져 꽂혀 있는 나무들. 눈먼 폭력에 맞아 죽은 괴수들마저 심심찮게 보였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 쑥대밭이 되어버린 지형을 헤치고 마침내 도달했을 때.


늪지는 언제 무너질 듯 요란했다는 듯 고요해져 있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모든 생명들이 다 숨죽여 떨고 있는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고요함.


게걸스러운 소음이 들렸다.


쩝···쩝···아그작···까드득, 츄릅.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을 먹어치우는 추잡하며 또 야성적인 소리.


변종 트롤은 아니었다.

트롤은 저런 식으로 먹이를 먹지 않는다.


먹잇감을 단번에 낚아채 한입에 삼키고, 씹지도 않고 곧바로 위장으로 보내 녹이는 것이 트롤 특유의 식습관이다.

저런 식으로 씹고 뜯는 소리가 날 까닭이 없다.


그렇지만, 변종 트롤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늪지를 침대 삼아 대자로 뻗어 있는 거대한 트롤.

덩치가 거대한 탓에 쉽사리 가라앉지도 않는 부피로 전신에서 핏물을 뿜는다. 늪 전체가 붉게 물들어 버렸다.


그 육중한 사체 위에 올라타, 트롤의 가슴팍의 심장과 장기, 살점들을 집어삼키는 한 소년.


한참을 고개 박고 물어뜯던 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악귀처럼 잔인하게 웃는다.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어···생각보다 빨리 왔네, 당신. 보다시피 좀 어수선하지? 일단 먹던 것만 다 먹게 기다려봐.”


그 순간, 유논은 간격을 재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눈앞의 소년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경계선.

손에 들린 핸드캐논의 방아쇠가 딸깍였다.


“······.”


결국은 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위험하고 잔혹한 낌새를 받는다고는 하나, 상대는 어디까지나 같은 사람이다.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다.

동족을 먹이로 삼았다면 모를까, 괴수를 날것 그대로 뜯어먹는 습성은 거부감이 생길지언정 잘못되었다 말할 수는 없다.

그의 기준으로 저 소년은 여전히 사람이었다.


‘게다가, 악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오히려 이쪽을 향해 웃는 모습에 꽤나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

일단은 트롤의 피와 살을 씹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으니, 한동안 지켜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게 곧 아무런 방비도 없이 마음을 놓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현장을 관찰하고 있었다.


변종 트롤의 시체에 남은 전투의 흔적과, 소년과의 싸움이 남긴 격전지의 모습을 통해 상대를 읽는다.


‘광란하는 트롤의 발작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낼 수 있을 정도의 반사 신경과 민첩함. 거기에 트롤의 심장에 충분히 닿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일격까지 갖췄다.’


그게 끝이 아니다.


‘트롤이 마냥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군. 몇 대 정도는 후려치는 데에 성공했어. 소년의 피가 곳곳에 떨어져 있다.’


인근은 전부 트롤의 피로 흥건했지만, 그렇다 해도 사람의 피는 변종의 피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특징점이 있다. 점도도 훨씬 낮고, 색상도 훨씬 채도가 높다.


유논은 곳곳에 흩뿌려진 소년의 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한데···.’


그러나 정신없이 트롤의 살점을 뜯는 소년의 몸에는 어떠한 부상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뒤집어쓰고 있는 것도 전부 트롤의 혈액이다.


순간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 가설.


첫째, 스스로가 잘못 보았다는 것. 사실 소년은 애초에 변종 트롤에게 다친 적이 없고, 상처 하나 없이 싸움을 끝마쳤다는 것.


둘째, 소년이 트롤의 그것과 비견될 만한, 순식간에 상처가 전부 아물어 버리는 초고속의 재생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가설들 각각이 저마다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내가 잘못 보았을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문제.’


변종 트롤의 혈액과는 명백히 구분되는 주변의 핏자국. 거기다 더해 트롤의 움직임 탓에 남은 흔적이라 볼 수 없을 주위 자그마한 관목들의 부러진 자리.

소년의 몸이 무언가에 맞아 굴렀다면 딱 저런 자취가 남았을 법 하다.


‘둘째는, 저 소년의 변이 형질이 재생능력이라면, 날뛰는 트롤을 피할 수 있는 순발력과 놈을 죽인 탁월한 공격능력, 그리고 놈에게 몇 대나 맞고도 버틸 수 있는 맷집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다재다능한 능력들은 재생이라는 한 범주로 묶이기에는 지나치게 다양하다.’


돌연변이 능력자라는 점은 첫 만남에서부터 짐작했었다. 순수한 루비 빛의 붉은 눈이 아니라, 탁한 검은 점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는 눈. 거기다 날카로운 귓바퀴, 이질적인 체형 등등까지.

문제는 어떤 능력을 지녔느냐 하는 것인데.


‘단순한 재생능력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두 가지 이상의 능력일 수도 있겠지만···그런 경우는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가능성으로는 남겨두되, 그리 큰 비중을 둘 수는 없는 가설이야.’


순간 퍼뜩 스치는 발상.


‘괴수의 날고기와 피, 심장과 살점을 뜯는 것이 쾌락과 허기를 해소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변이 능력을 발동시키는 트리거의 일종이라면.’


“아───다 먹었다.”


유논의 상념을 깨고 소년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기지개 피며 일어나는 그 작지만 옹골찬 육체 한구석에 보이는 녹색 혈관.


‘···대충 알겠군.’


트롤에 맞먹는 재생능력이 어디서 나왔을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내 발상이 둔했다. 변종 트롤에 비견될 만한 재생능력이 튀어나올 구석은 원점으로 돌아가, 결국은 변종 트롤 그 자체밖에 없다는 사실을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유논은 트롤의 정수를 전부 먹어치운 소년에게 물었다.


“맛있었나 보군?”

“응. 엄청 맛있었어. 내 몸이 실시간으로 튼튼하면서 또 강해지는 게 느껴지는 기분이야. 더 빠르게, 더 무겁게──.”


말을 이을수록 사람의 성대보다는 괴물의 아가리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으르렁대는 소음이 된다.

소년의 팔은 녹색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트롤의 그것처럼 묵직하고 거대하게 변모해, 대지를 내려찍는다.


쿵───


질퍽한 대지가 갈라지고 진흙이 튄다. 늪이 흔들렸다.


그러나 유논은 개의치 않고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마을이 멀쩡했던 건 네 덕분이었나 보지.”


약간 놀란 얼굴.


“오···어떻게 알았어?”

“마을사람들은 자력으로 자기네들을 구제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데, 그럼에도 평소에 괴수들의 공격을 받지 않고 또 가끔 가다 괴수들이 쳐들어오는 경우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결론이 나오지.”


그 강력한 괴수들을 전부 죽일 수 있는, 그리고 다른 하찮은 괴수들을 상대로 마을이 자신의 영역이라 선포할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괴물이 마을 안에 있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결론.

소년은 호오-하며 감탄하는 소리를 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 사람들이 예뻐서 살려둔 건 아니야.”

“그렇다면? 가축 용도로 수를 불리기 위해 놔두기라도 한 거냐.”

“미쳤어?”


질색하는 표정과 함께 말한다.


“그치들이 얼마나 더럽게 맛이 없는데 그래. 먹어보긴 먹어봤는데, 영 아니야. 왜 괴수들은 저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먹어봤자 너무 허약해서 먹은 느낌도 안 나는걸. 상한 음식들로 배를 채운 기분이야. 나는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져야 하는데, 그것들은 먹으면 오히려 이전보다 약해진다고.”


이건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왜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소년이 알아서 말했다.


“그것들은 그냥 미끼야.”

“미끼?”

“그래. 인간의 냄새가 풍겨야 괴물들이 잘 찾아오거든. 다른 동물이나 괴수들로도 실험해 봤는데, 인간이 제일 잘 먹혀. 피 냄새를 몇 번씩 풍겨주면 발정한 것처럼 달려오는데, 여기 강한 괴물들이 참 많다 보니 덕분에 진수성찬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어.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더라고.”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저 소년에게 이곳의 인간 마을은 사냥해서 먹을 괴수들을 불러들일 낚시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 못 가서, 이제는 주변 괴물들이 내 존재를 거의 다 눈치 챈 것 같더라고. 마을을 내 영역으로 인지하는지 아무리 피를 뿌려도 안 다가와. 그래서 마지막으로 눈여겨봤던 이 트롤만 잡아먹고 떠나려 했지.”


그런데 짜잔-! 당신이 나타났네?


소년은 즐겁고 행복해 죽겠다는 듯 말했다.


“마침 아쉬웠는데 잘 됐어. 참 좋은 시기에 찾아와 줬어.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사람이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난 참 운도 좋아. 이제 당신만 먹어치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되겠네.”

“···사람은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응? 내가 언제.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순수한 악이 있다면 저러한 표정을 지을까. 더없이 천진난만한 검붉은 눈으로 말한다.


“맛없는 사람을 안 먹는다고 했지. 맛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그리고 당신은, 맛있어 보여. 딱 봐도 강해 보이잖아. 먹어치우면 내가 여기서 더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똑똑해 보이는데, 뇌는 또 얼마나 쫄깃할까? 거기서 끝이 아니지. 심장, 간, 폐 다 먹음직스러워. 진짜 세포 하나하나가 다 탐스러워 보이네.”


방금 전까지 트롤 고기를 걸신들린 듯 집어삼키고 있었으면서, 아직도 허기가 가시지 않은 듯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내 먹이가 될, 나한테 먹힐 기회를 줄게.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질 기회야. 아주 맛있게 먹어줄게. 약속할 수 있어.”


유논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왜? 내가 선뜻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건 흔한 경우가 아닌데···어떻게 이런 관대한 제안을 거절할 수가 있지.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주겠다는데도. 믿을 수가 없네. 남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내팽개치다니. 실망이 커, 당신.”


유논은 그제야 소년이 보였던 호의의 근원을, 어째서 그가 그것을 악의라 느끼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사내아이는 진심으로 유논을 먹는 것이 유논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자기와 하나 되게끔 포식하는 것이 남에게 내려주는 축복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논을 잡아먹을 생각 만반인 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호의 가득한 표정으로 보였던 것.


소년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뭐, 거절해봤자 상관없어. 당신의 의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미 먹어치우기로 결정했고, 그건 바뀌지 않아. 저항해봤자 의미 없어. 난 당신을 잡아먹고, 당신과 하나가 되어 이전보다 더욱 강해질 거야.”


그리 외친 후, 소년은 쾌속으로 달려들었다.

트롤의 것을 빼다 박은 녹색 혈관이 목에서부터 올라온다. 다리는 습지에서 움직이기에 최적화된 괴수의 갑각질로 바뀌고, 발톱은 길고 날카롭게 돋아난다.

순식간에 다가와 유논을 향해 입을 활짝 열고, 이빨을 들이민다.


그와 동시에 유논은 계산을 끝마쳤다.


그가 판단하기에, 눈앞의 저건 더는 사람이라 볼 수 없었다. 동족포식을 저지른 순간부터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포기했다고 봐야 한다.


저건 괴물이다.


그리고 모든 괴물은 박멸해야 함이 옳다.


그 판단이 섬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빛살이 터진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탕─────!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고, 총격의 여파로 매캐한 화약의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날 잡아먹겠다고.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다만 쉽지는 않을 거다.”


유논은 입에 마탄 한 다발이 잔뜩 박힌 채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년에게 그리 말했더랬다.




* * *




지금과는 거리가 먼 십수 년 전의 일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잡아먹으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간의 혈투, 그날의 싸움은 유논의 승리로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년이 지닌 변이 능력의 명칭은 포식捕食.


먹어치운 괴수의 신체적 형질을 그대로 제 몸에 세포 단위로 복제해 변이할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강력한 능력이다.


그는 당시 그것을 통해 트롤의 재생능력과 근육, 그리고 다른 각종 괴수들의 신체 일부를 자기 것으로 만든 상태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강력했지만, 달리 이야기하자면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


트롤만큼이나 강하고 늪지의 다른 어떤 괴수들보다도 재빨랐지만, 유논은 그에 대응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정석에 의존하는 신체의 특성상 유지력이 떨어지고, 또 순간적인 출력도 트롤의 그것에 비하면 모자랐지만 유논에게는 거리의 이점이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지 못하게끔 마탄으로 취약한 부위들을 노리고, 그리하여 생긴 상처들마저 초고속으로 재생시키며 뛰어들자 미리 설치해 두었던 마력 지뢰나 수류탄 따위로 재생능력조차 무의미한 마력의 불길에 지져 버린다.

대단한 근성으로 그것조차 뚫고 다가온다 하더라도, 유논은 근접전에 약하지 않다.


오히려 덩치 크고 힘과 속도만 강해진 애송이 따위는 그의 검으로 베어 가르기에 딱 좋은 표적이었다.


소년은 아직 부족했다.

유논을 이기기에는 경험도 모자랐고, 능력도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습지의 강한 괴수들 몇몇을 잡아먹은 것 정도로 유논을 꺾을 수 있을 리 없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능력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직 완전히 개화되지 않은 채였다. 형편없이 밀릴 수밖에.


그러나 트롤의 재생능력을 얻은 탓에 유논도 소년의 팔다리를 잘랐을지언정 끝내 목숨을 끊어놓지는 못했고,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 놈이 패한 후 도망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달리는 속도 자체는 괴수의 다리를 포식한 소년이 유논보다 훨씬 민첩했기에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도망치면서 소년이 남겼던 말.


‘다음에 만날 땐, 다를 거다! 반드시 널 먹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찢어발겨서, 네 심장과 뇌를 먹어치우고 말 거다!’


유논이 받아치기를,


‘오냐, 나야말로 다시 만난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네놈을 죽여주마.’


그리 소년을 놓친 뒤 되돌아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전부 신체 일부분이 손실된 채였다. 팔이든, 머리든, 심장이든 어딘가 한 구석은 거칠게 뜯겨 사라져 있다.

유논에게 당한 뒤 마을로 도망친 소년이 보란 듯이 분풀이 삼아 하나씩 먹어치워 버린 것이다.


그게 소년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이후로는 추적할 수 있는 발자취 하나 남지 않았다.


결국 소년은 괴물이 맞았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에는 스스로 괴물들의 왕국을 세운 뒤였다.


어린 시절에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괴물이다 싶었으나, 자라서는 그보다도 더한 악마가 되어버렸다.


소년의 미래.


방사능의 아이들 세 거대 분파 중 하나, 식인종들의 거대 집단인 월드 이터즈의 대왕.

세간에서 가장 강력한 돌연변이라 부르는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동족포식자.


포식왕 카르발네스.


그의 유년기는 유논의 과거와 맞닿아 있었다.


거한이 붉은 눈을 빛냈다.

과거 그 소년과 겹쳐보이는 모양새로 내뱉는다.


“그래, 그러셨었지. 나를 죽이겠다고 하셨어. 그런데 하필 지금,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났구려. 감상은 어떠하오?”


포식의 왕은 그가 먹어치운 수많은 괴수들의 세포 형질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그 들끓는 야성과 광기와 식욕 속에 몸을 떨며 웃었다.


“죽이실 수 있겠소?”

“······.”


전신을 옥죄는 진득한 살의. 너를 산 채로 잡아서, 나의 입속에 집어넣고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의 아우라.


유논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 냉랭히 내뱉었다.


“십수 년 전의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크하하하하하────!


포식왕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배꼽을 잡으며 웃어젖혔다. 무표정한 유논을 향해 낄낄대며 말한다.


“그것 참 재미있군 그래. 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아. 그렇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 과거는 나에게도 뼈아픈 기억이긴 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지.”

“그런가.”

“그래. 지닌 힘을 깨달은 뒤로, 남에게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 그 습지에서 당신에게 무참히 당하고 말았지. 그때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인식하는 것보다도 빠른 신비한 공격들에 얻어맞아 완전히 겁먹고는 도망쳤었지만···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지.”


포식왕 카르발네스는 이를 갈았다.


“그때는 몰랐지. 마법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들이 조준하고 방아쇠 당기기만 하면 되는 총에서 나오는 공격이었을 줄은, 마력을 담아 만든 폭탄의 불길들이었을 줄은. 나중에 세상을 더 돌아다니고 견문이 넓어진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어.”

“······.”

“내가 멍청했던 거지. 인정하는 바야. 그런데, 이제 보니 당신도 만만찮게 멍청하군 그래. 십수 년 전의 과거를 되풀이하겠다고? 가능하겠어? 그게 지금까지 통할 거라고 보나, 이 몸을 상대로? 본좌가 그깟 총알과 폭탄의 대비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나?”


당연하게도, 그때는 잘 먹혔던 공격들이 이제는 전혀 통하지 않을 터였다.

포식왕은 바보가 아니었다. 지난 세월동안 당연히 드워프제 총알과 마력 폭탄들의 대비책을 세워놓았을 것이고, 그 파괴력을 전부 막아낼 수 있는 형질을 지닌 괴수를 뜯어먹은 지 한참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총알도, 폭탄도 괴물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인지 괴물은 아주 기세등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당신을 만나게 되었을 때 안도했다.”

“······?”

“나에게 유일한 패배의 경험을 선사한 자가, 쓰라린 흉터를 안긴 사냥감이 혹여나 세월에 늙고 지쳐 연약한 노인이라도 되어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었지. 그랬다가는 죽이는 맛도, 먹는 맛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때도 말했듯이, 연약한 고기는 맛이 없거든.”


하지만 유논은 늙지 않았다.


“얼마나 기뻤는지. 그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외모가 그대로더군. 아까 시험해보니, 신체 능력도 그대로인 것 같고. 지구숭배자들의 노화 억제제라도 맞은 건가? 그게 이만큼 효과가 좋은 약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무튼 참 다행이야. 여전히 맛있어 보여서, 여전히 먹을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포식왕이 웃었다.


그의 머리에서는 검은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양팔은 암녹빛 비늘이 돋아나며 날카롭게 발톱이 길어진다. 다리의 근육이 부풀며 무게만으로도 지반이 움푹 파인다.

뒤쪽에는 붉은 꼬리가 돋아나 거대한 뱀처럼 수로를 휘감았다.


마왕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세상천지의 강력한 괴수들을 전부 먹어치웠다는 가장 강력한 돌연변이가.


과거에는 덜 여물었었던 능력과 경험 전부를 온전히 개화시킨 괴물이.


모든 포식자들의 왕이 입 밖으로 돋아난 이를 긁으며 말했다.


[다시 묻지. 약속을 지킬 수 있겠나? 이 나를 죽이겠나는 약속을.]

“······.”

[나는 지킬 자신이 있는데 말이지. 당신을 잡아먹겠다는 약속, 아주 기쁘게 수행해낼 마음이 있거든.]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본좌의 너그러운 은혜와 축복을 받아들여 하나가 되지 않겠는가───?


괴물의 모습을 한 거인이 으르렁대며 그리 물었다.


유논은 높이 솟은 교각에 뿔을 부딪치는 그것의 핏빛 충혈된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차라리 몇 달 전에 찾아오지 그랬나.”


그랬다면 승산이 있었을 텐데.


아니, 승산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의 그는 포식왕에게 십중팔구는 무참히 당했을 것인데.


전력에서부터 너무 큰 격차가 있었다.

그때 그 어쭙잖게 마정석의 마력으로 강화되던 육체와 여러 도구들, 불완전한 약식마법과 검술의 힘을 빌려 힘겹게 싸우던 마법사는 쇠락한 지 오래되어 괴물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총알과 폭탄의 방비를 완전히 끝마치고,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괴수들의 형질을 몸에 받아들여 극한까지 강력해지고 또 완전해진 돌연변이들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흑색마나를 되찾은 지금은 전혀 달랐다.


유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나를 먹는 게 조금 힘들 텐데.”


흑색마법을 다시 부릴 수 있게 된 지금.


유논은 눈앞의 괴물에게 져서 잡아먹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패하고 싶어도 패할 자신이, 먹히고 싶어도 먹힐 자신이 없다.


작가의말

요즘 미용실을 가지 않은 지가 한참 되었다 보니 앞머리가 지나치게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빌려주신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고 다니는 중입니다. 은근히 편하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시장바닥의 대왕들(2) +12 21.01.24 752 46 25쪽
139 시장바닥의 대왕들(1) +11 21.01.23 752 37 13쪽
138 드워프(4) +12 21.01.22 746 43 17쪽
137 드워프(3) +13 21.01.21 738 40 14쪽
136 드워프(2) +8 21.01.20 728 43 13쪽
135 드워프(1) +12 21.01.19 759 45 14쪽
134 지저의 도시(7) +10 21.01.18 781 42 13쪽
133 지저의 도시(6) +15 21.01.17 784 48 16쪽
132 지저의 도시(5) +4 21.01.17 735 43 12쪽
131 지저의 도시(4) +12 21.01.16 756 45 15쪽
130 지저의 도시(3) +14 21.01.15 769 45 15쪽
129 지저의 도시(2) +19 21.01.14 802 43 17쪽
128 지저의 도시(1) +30 21.01.13 830 50 18쪽
127 막간-윌리엄 스왈로우(William Swallow)(3) +10 21.01.12 779 47 18쪽
126 막간-윌리엄 스왈로우(William Swallow)(2) +6 21.01.12 737 36 14쪽
125 막간-윌리엄 스왈로우(William Swallow)(1) +12 21.01.11 802 47 16쪽
124 막간-피오네(Fionne)(4) +20 21.01.10 812 48 20쪽
123 막간-피오네(Fionne)(3) +17 21.01.09 863 48 17쪽
122 막간-피오네(Fionne)(2) +6 21.01.09 797 37 18쪽
121 막간-피오네(Fionne)(1) +14 21.01.08 840 49 13쪽
120 흑색의 마법사(3) +27 21.01.07 909 57 20쪽
119 흑색의 마법사(2) +18 21.01.06 885 48 17쪽
118 흑색의 마법사(1) +18 21.01.05 888 53 14쪽
117 유논(12) +17 21.01.04 829 52 13쪽
116 유논(11) +9 21.01.04 770 44 16쪽
115 유논(10) +10 21.01.03 797 45 16쪽
114 유논(9) +12 21.01.02 773 40 12쪽
113 유논(8) +7 21.01.01 780 45 14쪽
112 유논(7) +9 20.12.31 807 46 17쪽
111 유논(6) +7 20.12.30 832 4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