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현수 돌아오다. (2)
한참 술잔의 술을 바라보던 현수가 물끄러미 경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한테 동생이 하나 있거든. 그 새끼가 나하고 똑같이 생겼어. 그런데 걔는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 나는 똑같이 생겼는데 아무리 공부해도 걔를 따라갈 수가 없는 거야. 엄마라는 여자는 그걸 알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동생을 더 챙겼어. 그래도 좋았어. 늘 동생과 나를 두고 사라지는 그 여자 대신 동생은 내가 챙겨야지 싶었거든. 나는 동생이 나에게 많이 의지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걔가 잘못하면 내가 뒤집어쓰곤 했지.”
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잘못한 것도 많았고. 그런데 말이야.”
현수가 고개를 숙인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새끼가 나를 호구로 본거야. 자기 대신 모든 잘못을 뒤집어쓸 대용품으로 생각했더란 말이지. 또 어떻게 해야 엄마라는 여자가 제 편을 드는지도 너무 영악하게 알아버렸어. 내가 그걸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외국인학교에서였어. 애들을 때리고는 항상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처음엔 동생 대신 뒤집어쓰는 게 내 동생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알아버린 거야. 저 새끼가 나를 형으로 생각한 것도, 형제로 생각한 것도 아니란 것을. 그래서 일반 초등학교로 전학 왔어.”
목이 타는지 현수가 술을 한모금 마셨다.
“그 무렵 그 새끼가 사고를 친 거야. 영재 형한테 마치 내가 빌린 것처럼 반츠를 타고 나가 뺑소니 사고를 친 거야. 경수야, 기억나, 그 사건?”
숨소리 한번 내지 않고 이야기를 듣던 경수가 말을 받았다.
“그, 그, 그럼 인한이네 부모님?”
“그래, 그거. 그 사건 우리 꼰대가 조용히 물 밑으로 덮었다. 그런데 우리 꼰대는 그걸 내가 친 사고로 알고 있어. 왠 줄 알아? 바로 엄마라는 여자 때문에.”
경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현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라는 여자가 내게 거래를 한 거야. 아빠가 어차피 네가 한 일로 알고 있고, 그 일은 미성년자라 알려져도 처벌받지는 않는다. 대신 내 앞으로 5억을 몰래 넣어서 네 앞으로 해주마. 그런데 내가 정말 병신인게 그걸 받아들였다니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병신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돼.”
“단지 돈 때문에 받아들였다고?”
“사실 그것만은 아니었어. 우리 엄마, 세컨드야. 우린 정실 자식으로 인정받기 어렵고, 그러니 돈이라도 챙겨놔야 한다는 게 우리 엄마 소신이거든. 어려서 돈, 돈, 그러니까 나도 내 앞으로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웃기는 게 뭔지 알아? 나, 그 돈, 만져보지도 못했다는 거야.”
“왜?”
“엄마라는 여자한테 속은 거지.”
현수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웃는 현수의 눈이 많이 슬퍼보였다.
“이번에는 어쩌면 미국에서 죽겠구나 싶었다. 근처에 아무 것도 없었어. 아주 작은 마을에, 그것도 좀 떨어진 숲속이라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어. 개인 교수 들여서 겨우 영어 배우고, 집에만 갇혀 있었지. 언제나 3명이 번갈아가며 나를 지켰어. 전화, 술, 담배, 어떤 것도 허용이 안 되었고. 나중에 술은 좀 허용해 줬지만···. 그러다보니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 그러던 차에 갑자기 어제 전화가 온 거야. 비행기 예약되었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
“나도 그곳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일단 들어왔는데··· 이상하잖아? 집에 도착해서야 알았어. 그 새끼가 또 사고를 쳤다는 것을. 지금 방송에도 안 나오고 있을 걸? 이번에도 뺑소니라는데, 지난번처럼 완전히 덮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야. 잘못하면 빵에 3년은 들어가 있어야 할 것 같다더라. 그걸 내가 대신 한 것으로 하라는 거지. 믿겨지냐? 대신 20억을 내 앞으로 해놓겠단다. 빵에서 나오면 사업체 하나 만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현수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너무 슬퍼서 경수는 제 가슴이 다 답답했다.
“그런데 말이야. 나 이번에는 그렇게 못 하겠더라. 두 번은 못 뒤집어쓰겠다고! 그래서 너 부른 거야. 경수야, 부탁 좀 하자.”
현수가 해준 이야기를 되씹어본 경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경수 생각에 돈을 빼면 제 입장이 현수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속내를 털어놓은 현수가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다며 경수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현수의 부탁을 들어줄 때였다.
경수는 불룩한 제 윗옷 주머니를 쓸어내렸다.
현수가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달라며 준 돈이었다.
***
다음날 오후, 용산 전자랜드 등을 바쁘게 다닌 경수가 현수에게 전화했다.
“준비 됐어. 갈까?”
- 클클클. 너 밖에 없다. 와라.
경수가 준비한 물품을 챙겨서 인천으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운서역까지 왔을 때 경수의 전화벨이 울렸다.
인한이었다.
“여어, 오랜만이다.”
- 지난 주 통화하고선 무슨 오랜만이야?
“흐흐흐흐흐. 그랬냐?”
- 현수는 아직 연락 없냐?
“어···, 현수?”
경수는 잠시 고민했다. 현수가 왔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 인한아, 5분 뒤에 통화하자. 끊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경수가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 아직 안 오냐?
“현수야, 인한이가 너 많이 찾았어. 지금도 전화 왔었거든. 너 왔다고 해, 말아?”
- 인한이가? 왜?
“나야 모르지. 그런데 너한테 꼭 물어볼 게 있대. 어쩌냐? 말해, 말어?”
- ···.
경수의 말을 들은 현수가 바로 대답을 못 했다.
잠시 기다리자 현수가 말했다.
- 말해. 나 왔다고.
“그럼 바로 너 보려고 할 텐데, 어딘지 알려줘?”
- 음···, 그러지 말고··· 내일 오전 10시에 여기로 오라고 해. 주소 알려주고.
“어? 그 시간이면··· 네 동생 만나기로 한 시간 무렵이잖아? 괜찮겠어?”
- ··· 걔도 억울한 거, 좀 풀어야지. 알려줘.
“정말? 정말 알려주려고? 이거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냐?”
- 왜? 무서워?
“아니···, 그게··· 현수야, 나 무섭다···.”
- 새꺄, 나도 무섭다. 하지만 어쩌겠어? 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머리 크니까 알겠더라. 지금 매장되면 내 인생 완전 쪽 나는 거라는 거. 지금 나한테 너뿐이야.
현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 까짓 거.
경수가 현수에게 말했다.
“까짓 거 하자. 그래, 맞다. 그 새끼라도 있으면 지푸라기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겠지. 곧 갈게.”
경수는 전화를 끊고 인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한아, 현수 왔어.”
- 뭐? 언제? 어딨어?
“야, 야! 하나씩 물어!”
-··· 어딨어?
“어제 왔고, 영종도에 있다.”
핸드폰 너머로 인한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지금 바로 갈게, 30분, 30분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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