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인한의 데이트(3)
겨우 쌈을 삼킨 민정이 의아한 얼굴로 인한에게 물었다.
“왜-에?”
“너하고 나 오늘 첫 데이트다. 그런데 넌 어째 내숭이 없냐?”
민정이 인한을 흘겨보았다.
“그럼 내숭 떨어? 내가 지금 소개팅 하니?”
“아니, 그런 얘기는 아니고···. 참 너다워서 좋아.”
그 말 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진 인한이었다.
‘짜식, 순진하긴···.’
민정이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꾹 삼키고, 마침 쌈을 입에 넣은 인한에게 말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좋아하던 선배가 한 얘기가 있어. 군대에서 장교가 결혼을 했는데 첫날밤 지내고 보니까 다른 여자가 제 옆에 누워 있더래. 기겁해서 ‘누구세요?’하니까 ‘나야, 나.’하더래.”
“우은(무슨) 애이야(얘기야)?”
입에 있는 쌈밥을 미처 삼키지 못한 인한이 물었다.
“화장이 지워지니까 전혀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것처럼 보인 거지. 나 봐봐. 만약에 내 민얼굴이 눈썹도 없고, 총명해보이던 눈도 크기가 반으로 줄고···. 그러면 어떨 거 같아? 나도 그렇게 진하게 화장하고, 내숭 떨까? 응? 응? 나도 내숭 떨 줄 알아.”
민정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렸다.
입에 있던 음식을 뿜을 뻔한 인한이 재빨리 제 앞에 놓인 냅킨으로 입을 가렸다.
쌈을 다 삼키고, 입안을 정리한 인한이 언성을 높였다.
“야! 먹다가 뿜을 뻔 했잖아. 아-으, 눈썹이 없는 건 좀 그렇다.”
민정의 눈썹을 다시 제 엄지로 가려본 인한이 몸서리를 쳤다.
민정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화장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그 얘기 듣고, 이다음에 나는 내 남편이 나 못 알아볼 만큼 화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거든. 내 남편이 ‘누구세요?’ 이러면 기분 더러울 거 같아.”
인한이 민정을 보고 웃었다.
“넌 안 그래서 좋아. 너 무지 예쁘거든. 그러니 그런 생각 안 해도 돼. 다 똑같은 얼굴보다 네 얼굴이 개성 있어.”
‘이게 예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물끄러미 인한을 바라보던 민정이 입을 열었다.
“개성은 개 같은 성질의 줄임말이라던데···.”
“민정아, 우리 말 왜곡은 하지 말자. 응? 개가 어때서? 개만큼만 성격 좋아보라 그래. 어디서 개를 비하하고 있어! 우리 집 할머니와 검둥이 봐. 다 성격 좋잖아.”
민정이 인한의 말에 수긍했다.
“인한아, 그런데 왜 개 이름이 할머니야? 진작부터 궁금했는데 물어볼 여유가 없었어.”
민정의 질문에 잠깐 멈칫하던 인한이 다시 쌈밥을 싸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지은 것은 아니고, 인희가 어느 날 바꿨더라고. 본래 이름은 흰둥이였는데, 그냥 인희가 그게 좋다고 바꿨어. 자기 말로는 그래야 오래 산다나, 뭐라나···.”
“푸훗, 인희가 지은 거야? 엉뚱 발랄하네. 그런데 인희가 나 못 알아보는 것 같던데?”
“알아보기 좀 힘들겠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가 동생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좀 강했어. 그래서 종례 끝나자마자 인희 데리고 집에 갔지. 인희도 수업 끝나면 꼭 우리 반 앞에 와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어. 당시 인희도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한동안 말도 못 했거든. 다른 사람 얼굴이 보였겠냐?”
듣던 민정의 마음에 어린 시절의 두 사람 모습이 떠오르며 안쓰러움도 함께 몰려왔다.
민정이 보았던 어린 인희는 웃지도 않고, 말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시선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듯 늘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던 인희였다.
그런 인희에게 가장 든든했던 기둥이 인한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세월과 함께 인희가 지금처럼 밝은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민정아, 아까 네 말로는 지금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때 비하면 집안이 어느 정도나 어려워진 거야?”
인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인한의 진지한 표정을 본 민정이 씩 웃었다.
“고등학교 올라가서 1학년 1학기 마칠 무렵에 아버지가 권고사직을 당하셨어. 우리 아버지, 그래도 남들이 알아주는 대기업에 다니셨는데, 그거 속빈 강정이었어. 젊은 시절 내내 대기업에서 뼈 빠지게 일하시느라 청춘을 다 바치셨지. 그 바람에 우리 오빠나 나나 아버지 얼굴 한번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잠시 호흡을 고른 민정이 말을 이었다.
“대기업이니 돈은 많이 줬지만 나이 오십도 되기 전에 갑자기 권고사직 되시니까 많이 흔들리시더라고. 그때 엄마라도 직업이 있으셨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 우리 엄마 전업주부시거든. 나하고 오빠, 명문대 보내겠다고 그 돈 우리 과외비에 엄청 쏟아 넣고, 곗돈 만들어 넣고 하셨다는데, 집안이 안 되려고 그랬나? 그거 다 공염불이 된 거야. 돈만 날렸지.”
“왜? 너네 형,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사교성도 좋고, 공부도 잘 한다 하지 않았어?”
피식 웃은 민정이 말했다.
“잘 하긴, 그거 다 과외다 학원이다 해서 억지로 만든 거지. 아빠 직장 잃고, 엄마 곗돈 떼이고, 오빠는 엄마가 가라는 대학 떨어지고 나니 뭐가 남겠어?”
“그럼 너네 형은 지금 뭐 해?”
“군대 갔지. 내년 초에 제대할 거야. 나오면 제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겠대.”
“하고 싶은 게 뭔데?”
인한의 물음에 슬그머니 웃던 민정이 물었다.
“인한아, 너 기억나? 초등학교 때 내 헤어스타일.”
“아, 그 바가지 머리?”
“그거 우리 오빠 솜씨다. 그때가 벌써 6년이 넘었잖아. 우리 오빠, 다니라는 학원은 안 다니고 미용기술 배우러 다녔다. 아직도 부모님은 몰라.”
“헐!”
“우리 오빠는 화장술, 미용기술, 패션, 이런 거에 관심이 되게 많아.”
“아, 생각났다. 그 형 예전에도 옷 되게 멋있게 입었던 거 기억난다.”
“그러니 엄마가 오빠한테 들인 정성이 공염불이라는 거야.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데···.”
“콩밭? 패션 뭐 미용, 이런 거?”
“그래.”
인한이 민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후회가 없지. 우리 할머니가 음식을 잘 하셔. 예전에 시골에 계실 때에도 동네에 잔치가 열리면 할머니가 앞장서서 그 음식을 다 하셨대. 우리가 고아가 될 뻔 했을 때에도 지금의 뼈해장국집 본가에 취직하셔서 일을 하셨거든. 그게 인연이 돼서 지금의 뼈해장국집을 차리신 거야. 나도 할머니 옆에 있다 보니 요리하는 모습을 자주 봤어. 그런데 그게 너무 좋은 거야. ‘아, 이게 내가 갈 길이구나.’ 했다니까. 그래서 생활과학고로 진학했어. 할머니도 좋아하셔서 그게 더 좋았지. 만약 가족이 반대했다면 어땠을까? 어휴, 생각도 하기 싫다.”
인한이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말하는 인한의 얼굴에 떠오른 행복감을 보면서 민정은 제 오빠도 인한처럼 원하는 길을 가서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물론 자기 또한 그렇게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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