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님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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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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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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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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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화.

DUMMY

체이스 브라이언 명예 자작이 레이시아와의 혼담을 꾀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자작님!”

“뭔데?”

“듀오랄 시에 강철목이 대거 풀렸다고 합니다!”


마침 강철목을 구하고 있던 체이스 브라이언은 듀오랄 시를 찾았고, 엄청난 미모의 여기사가 강철목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정도로 예쁘다고?”

“예, 예. 제, 제가 살면서 가장 예쁜 기사님이셨습니다요.”

“풉. 얘보다 예뻐?”


듀오랄 시는 무역도시라서 제법 큰 성이지만, 그래도 동부의 본성에서 살던 체이스의 기준에서는 촌동네. 촌동네 상인의 안목을 아직 믿지 못하는 체이스는 항시 대동하고 다니는 하녀를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밤시중을 드는 일종의 성노 같은 하녀였다.


“...그, 그게.”

“똑바로 보고 말해. 얘보다 예쁘냐고.”


어디 촌구석의 여기사 중에 그런 존재가 있을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단순히 상인을 깔보려고 말을 꺼낸 체이스였지만, 상인의 대답은 체이스의 기대를 저버렸다.


“예, 예. 송, 송구스럽지만,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뭐?”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여기사 베렌 상단과 함께 동행 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베렌령의 현재 영주가 타나티안 백작의 장남이었던 제이크이며, 그를 따라서 레이시아 쥬시트라는 여기사가 베렌령으로 향했음을 알게 되었다.


“레이시아...?”


그 순간 체이스 브라이언은 수도의 기사 학교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여기사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베렌령이라... 영지라도 촌동네잖아. 아무리 영지의 주인이라고 해도 고작 남작이야. 타나티안 백작가에서도 끈이 떨어진 상대라면... 흐흐흐.’


비록 진짜 명문가의 자손들은 가지 않는 곳이 기사학교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기사 학교는 새로운 재능들이 모인 곳. 그 곳에서 차석으로 졸업할 정도의 재능이라면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어중간한 직계 따위들보다야 훨씬 뛰어나다. 그런데 얼굴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대동하고 다니던 하녀가 못나 보일 정도로 미모까지 갖춘 상대라면?


‘...만약 애라도 잘 낳는다면?’


세습이 되지 않는 명예작위가 세습이 되는 귀족이 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3대 연속으로 기사를 배출해내는 것. 그런 의미에서 레이시아는 어중간한 귀족 가문의 멍청한 여식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곳으로 간 거지? 설마 타나티안 백작가에는 인물이 없나?”


혹여 보물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북부의 촌놈들이라면 그럴지도?’


체이스 브라이언의 머릿속에서 타나티안 백작가는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고 점점 저물어가는 멍청한 귀족가문이었다.


“제발 잘 물어라.”


그렇지만 기대가 무색하게 백작가에 보낸 혼담제의는 거절당했다.


“젠장.”


비록 타나티안 백작가는 저물어가는 태양이라고 하나, 현 백작부인의 친정인 덴프 후작가는 최근에 무섭게 힘을 키워가고 있는 가문. 강약약강의 전형적인 타입인 체이스 브라이언은 덴프 후작가의 눈치가 보여 짜증만 부리던 찰나에 은밀한 연락을 받았다.


“...응? 백작 부인이?”


현 백작 부인의 측근에게 받은 연락은 제이크와 레이시아는 끈 떨어진 연이라는 말이었다. 덴프 후작가는 전혀 관여치 않을 것이고, 현 백작도 영향력을 행세할 수는 없을 거라는 이야기. 귀족가에서는 후계자 경쟁을 앞두고 흔히 있는 암투라서 의심할 거리도 없었다.


“크흐흐.”


다만 체이스 브라이언은 이리저리 벌려놓은 이들이 제법 있었기에 바로 출발할 수는 없었고, 타나티안 백작가에 보낸 혼담제의가 거절당하고도 두 달이란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야 베렌령으로 갈수가 있었다.


“젠장, 얼마나 촌구석에 있는 거야?”


베렌령은 체이스 브라이언이 있는 성에서는 꼬박 일주일 넘게 말을 달려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 * *



영지민들에게 그렇게 공포했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네.”


미모에 비해 눈치는 현저히 부족한 레이시아만 몰랐을 뿐, 다른 영지민들은 대부분 내 연심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숲지기 데켈마저도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정도였기에 별다른 소요 없이 나와 누나는 위장 부부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봐봐. 다른 사람들은 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잖아.”

“그, 그럴 리가...”

“누나, 좋은 게 좋은 거야. 응? 흐흐.”


여기 살면서 알게 된 건데, 여기 베렌령의 사람들은 익스퍼트 상급의 여기사 레이시아를 참 좋아했다. 레이시아가 상행을 떠났을 때 선임병에게 물어본 결과 실력있는 기사가 영지에 함께 한다는 것이 영지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고, 영지민들은 실력자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내 편을 들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역시나 레이시아만 빼고 모두들 자연스럽게 나와 레이시아의 결혼을 환영했고, 레이시아가 좀 더 확고하게 영지에 머무를 거라는 확신에 모두 기뻐했던 것이었다.


나와 영지민 모두 Win-Win인 셈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협조 아래 위장 중인 부부 행세를 결국 써먹을 데가 왔다.


“영주님!”


병영에서 활쏘기 연습 중에 선임병 드웨인이 나를 불렀다.


“응? 뭔데?”

“관문에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체이스 브라이언 자작이 당도했습니다!”


타나티안 백작가로부터 서신을 받고, 한 달도 훌쩍 넘은 시점에서 사랑의 큐피트 체이스 공자가 베렌령에 도달한 것이었다.


“오. 그래? 관문에서는 어땠어?”

“관문병들이 자연스레 영주님과 기사님의 혼인 사실을 알렸습니다.”

“오. 잘 했네. 굿. 그래서 뭐래?”

“일단 영주님을 만나 뵙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에휴. 그래. 그러면 드웨인 선임병은 사람을 시켜서 모두들 준비 잘 하라고 전하게.”

“네! 영주님!”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훈련에 불성실한 레이시아를 찾아갔다. 레이시아는 언제나처럼 헤카인 경에게 지도를 받고 있었다. 비록 같은 경지라도 아직 쌓아온 경험의 차이가 있고, 레이시아는 시스템의 도움으로 급격하게 성장했기에 여러모로 지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하하. 수업 중에 불쑥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허허.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임병이 제게 가장 먼저 알린 것 같군요. 저번에 말했던 체이스 브라이언 자작이 관문에 왔다고 합니다.”

“아.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겠군요.”

“네. 그럼 우리 남작 부인 좀 데려가겠습니다.”

“허허허. 그러시지요.”


제법 친해진 헤카인 경과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레이시아는 부르르 떨리는 검을 잡고 흠칫 굳어 있었다.


“부인?”


귀엽다 귀여워.


“...오, 오셨어요?”


진짜 너무너무 귀엽다.


“풉.”

“......”

“아 미안하오. 부인, 준비는 되었소?”


나를 원망하는 것 같은 눈빛은 뭔가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어쩐지 그 눈빛이 기분이 좋은 건 나는 사실 변태라는 것일까?


“빨리 영주관으로 돌아갑시다.”

“알겠어요.”

“다정한 모습 보여줘야 속아서 넘어가겠지? 그렇지?”

“...알겠다고요.”


목욕을 앞두고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처럼 앙칼진 모습도 너무너무 귀여운 레이시아였다.



* * *



제이크의 의도대로 입구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체이스 브라이언 공작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 이미 결혼을 했다고?’


체이스 브라이언이 나름의 우여곡절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는 데만 석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뿌드득.


그런데 석 달이 넘는 시간과 수고를 들여서 겨우 이 촌동네까지 왔는데, 이미 레이시아가 결혼을 한 상태라고 한다. 혹시 몰라서 평소에 꼭 대동하고 다녔던 밤시중을 드는 하녀도 끼지 않는 성의까지 보였던 체이스 브라이언은 몹시 짜증이 났다. 서신을 보낸다고 사람을 부리고, 정보를 사고, 여기까지 재물을 마련해서 달려온 그 동안의 시간과 노고는 누가 보상해준단 말인가. 참고로 다른 곳들은 관도마다 마을이 있는 반면에 베렌령을 목전에 둔 마지막 사흘 동안은 노숙을 해야만 했다.


‘이 망할 연놈들이 나를 가지고 놀아?’


누구도 체이스 브라이언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적은 없건만, 자기중심적인 체이스 브라이언은 조심하려고 일부러 위장결혼 행세를 하는 제이크와 레이시아가 무색하게 원한을 품었다.


“영주관으로 가자.”


그리고 원수는 얼굴을 확인해야 하므로 체이스 브라이언은 굳이 영주관으로 향했다.


‘뭐야. 완전히 촌동네잖아. 역시 강철목은 우연히 구한 거였나?’


강철목으로 만든 마차와 수레는 모두 숨기고 시스템으로 정비된 곳은 아직 병영과 순찰로에 한했으므로, 체이스 브라이언의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완전히 쇠락하고 낡은 어촌 마을의 전경일 뿐이었다.


‘멍청한 년. 이런 곳이 뭐가 좋다고.’


나스 대륙에서는 보통 영지를 가진 진짜 영주를 최우선적으로 쳐주기는 하지만, 이렇게 남루한 어촌만이 영지라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실제로 현재 타나티안 백작 부인인 카니안 덴프 역시도 별다른 고민 없이 베렌 남작령을 제이크에게 주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도 증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체이스 브라이언은 더 화가 났다.


‘내가 고작 이딴 촌동네의 주인에게 밀린 거란 말이지?’


제이크는 억울하겠지만 영주관에 가까워질수록 원한은 더욱 쌓이고 커지는 중이었다.


“여기가 영주관이옵니다.”


아무리 분노에 찼지만 귀족으로서 손님된 예로 체이스는 얌전히 정문 앞에서 대기했다.


‘영주관이 고작 이 정도라고?’


물론 깔끔한 석조 저택은 퍽 인상적인 모습이지만 분노한 체이스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고, 그저 화려하지 않고 작은 2층짜리 저택이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대문도 나무문이네. 참 나. 허접하다 허접해.’


만약 가까이서보면 그 나무가 웬만한 금속은 비비지도 못하는 하레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도 있겠지만, 정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못마땅하게 서 있는 체이스는 모든 것이 수준 낮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한 하녀장이 총총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베렌 남작가의 하녀장을 맡고 있습니다. 본 저택에는 집사가 있지 않아서 제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심지어 집사도 없어? 체이스 브라이언은 혀를 차며 하녀장 메이린의 뒤를 따랐다.


‘음?’


영주관 내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추운 북부에는 어울리지 않는 푸른 잔디밭.


‘흠. 정원사는 제법 실력 있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조금 특별한 테이블과 의자.


‘...여기서 차를 마시며 논다는 건가?’


아직은 질투심보다는 한심함이 먼저였다. 멀리서봐도 잘 가꿔진 잔디밭은 퍽 인상적이긴 했지만, 응당 귀족가의 정원에 비교하면 제이크의 영주관은 텅 빈 황무지나 마찬가지. 당장에 브라이언 후작가의 저택은 둘째치고 체이스가 머물고 있는 성의 저택의 정원만 해도 이곳 영주관 전체보다 넓었다. 파라솔과 가로등이 조금 특이해보이긴 하지만 그뿐이었다. 보통 귀족들의 정원에 있는 물품들은 훨씬 더 화려하기에 선입견을 가진 체이스의 눈으로는 그 범상함을 알아볼 수 없었다.


‘쯧쯧. 진짜 촌동네긴 하구나.’


그때 일남일녀가 현관문을 통해 걸어 나왔다. 훤칠한 젊은 사내와 얼굴에 얇은 천을 뒤집어 쓴 여성이었다.


‘...헙.’


얇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레이시아의 찬란한 미모는 가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보다 더 예뻐진 거 같은데?’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의 차이는 실력의 차이뿐만 아니라 좀 더 신체를 조화롭고 튼튼하게 만들어줬으므로 피부와 균형미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했다. 게다가 전혀 꾸미지 않고 수련에만 몰두했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천연온천이 부럽지 않은 목욕을 즐기고, 영양만점 엘피스 열매를 매일 먹고, 귀부인 행세를 위해 약간의 꾸밈까지 받았기에 체이스 브라이언의 눈이 정확했다.


‘젠장, 저런 보물이 저딴 촌놈에게...’


레이시아가 예쁜 만큼 제이크에 대한 적개심도 커졌다.


“반갑습니다. 저는 제이크 베렌이고, 여기는 제 부인 레이시아 베렌입니다.”

“반갑습니다. 레이시아 베렌이라고 합니다.”


아델린 왕국의 귀족 체계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정해져있지만, 실제 귀족 간에 정해진 서열관계는 없다. 보통은 작위에 걸맞은 실력과 위세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몰락하는 쪽도 부흥하는 쪽도 많기에 항상 영원한 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개 귀족 간에는 나이가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상호존대가 일반적인 예였다.


“...반갑군. 본인은 브라이언 후작가의 둘째, 체이스 브라이언이오.”


그런 의미에서 체이스 브라이언의 인사는 무례하고 도발적이었다.


움찔.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린 레이시아가 순간 화를 내려다가 제이크가 의연하게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참았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체이스의 입장에서는 도발을 받아주었다면 좋겠지만, 제이크는 가볍게 무시하며 물었다.


‘젠장.’


아무리 제멋대로 사는 체이스라지만, 그렇다고 이미 다른 귀족의 부인에게 재차 혼담을 꺼낼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레이시아의 후견자였던 타나티안 백작은 혼담을 거절했고, 체이스 브라이언에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궁색해진 체이스 브라이언은 가만히 제이크를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며 말을 했다.


“...내가 얼마 전에 듀오랄 시에 갔다가 강철목을 샀소이다. 그 강철목을 판 이가 여기 베렌령에 소속된 상단이라 하더군. 그래서 혹여 강철목을 좀 더 구할 수 있지 않을까하여 행차했소.”


이미 듀오랄 시에 풀렸던 물량은 상당한 양이었다. 1년에 1cm 남짓 자라는 하레드 나무는 지력 역시 다른 평범한 나무에 비해서 수십 배로 필요했고, 그 말은 대규모 서식지도 없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더 이상 하레드 나무가 없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변명거리로 하레드 나무를 언급한 체이스였다.


“아~ 그렇습니까? 얼마나 구매하시려고요?”

“...강철목이 있다는 건가?”

“네.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듀오랄 시에 판매했던 것보다는 저렴하게 드리지요. 어떻습니까?”


예상치 못한 답변에 체이스 브라이언은 당황했다.


“부인, 우리가 재고가 어느 정도 있지?”

“네? 네... 세, 세 수레 분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보.”

“역시 부인은 참으로 총명하오. 하하.”


제이크가 레이시아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레이시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다정한 신혼부부의 모습이었다.


“어떻습니까, 브라이언 자작님. 두 수레분 정도는 판매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하시는 양을 말씀하시면 기꺼이 판매해드리지요.”


물론 공산품이 드문 세상에서 수레의 크기는 제각기 다르지만, 대개 말들이 끌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기에 대충 수레의 크기는 거기서 거기.


“......”


예상외의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체이스 브라이언은 결국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강철목 한 수레를 사서 힘들게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연놈들... 두고 보자.”


제이크의 영지 취임 후 첫 베렌령의 방문 손님은 그렇게 원한을 품고 돌아갔다.



* * *



이런 걸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부인.”


체이스인가 뭐시기 덕분에 누나를 부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흐흐.


“......”


레이시아는 묵비권을 행사해보지만,


“아니, 대답은 해야지.”

“......”

“부인, 내 말이 아니 들리시오?”


움찔거리는 몸짓에서 이미 패자임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큭큭. 귀여워.”

“누, 누가!”

“누나가 귀엽지 누가 귀여워? 부인이란 말이 그렇게 어색해?”

“......”

“알았어. 체이스인가 뭔가도 갔으니까 다시 누나라고 부를게. 대신에 다른 사람하고 있을 때는 알지?”

“...알았어.”


한국에는 낙장불입落張不入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는 말도 있고. 레이시아는 얼떨결에 위장결혼 행세를 했을지 몰라도, 귀족들 간에는 명예가 매우 중요하기에 레이시아는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나의 부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나중에 프로포즈도 정식으로 해야 하고, 레이시아도 나를 남자로 보게끔 만들어야겠지만... 흐흐.’


더 이상 남들에게 뺏길 걱정으로 전전긍긍 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부인.”

“......”

“응? 대답이 없어?”

“방금도 둘만 있을 때는 그렇게 안 부른다며...”

“아~ 참 까다롭네. 알았어. 누나.”

“......”

“누나라고 불렀잖아.”


어쩐지 원망 반 화남 반의 복잡한 얼굴인데 예쁘다.


“......”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은 더더욱.


“흐흐흐. 왜 그래~ 알았다니까. 누나 누나.”

“......”

“대답 안 할 거야? 누나 누나? 누나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아, 알았어! 그만해!”

“흐흐. 진작에 그럴 것이지. 보자. 골칫거리 하나는 해결했고, 지금쯤이면 본가에서도 연락을 받았겠지?”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타나티안 백작가에도 레이시아와 혼인을 했다는 서신을 보내두었다.


“......”


레이시아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아마도 친부처럼 여겼던 백작에게 나와 결혼한다는 서신을 보낸 것이 못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푸흐흐.”


그렇게 일주일 넘게 레이시아를 놀리고 있을 무렵에 타나티안령에 보냈던 병사들이 돌아왔다.


“부인! 시아버지께서 보내신 편지요!”

“제이 너!”

“흐흐. 미안. 이건 누나에게 온 서신인가봐. 나한테랑 누나한테 각기 있네.”


백작의 편지는 그 전의 편지보다 더 길었다.


『...너와 레이샤가 부부의 연을 맺었다니, 나는 매우 놀랍고도 감사했다.』


그렇게 시작한 백작의 편지는 축하와 감사, 미안함, 그리고 레이시아에게 잘 해줄 것을 당부하는 것과 자신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도 담겨 있었다.


‘...내가 정령사라는 건 아직 모르겠지?’


그래서인가 레이시아가 나와 결혼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히 여기며 항상 처신을 잘 하라는 당부가 서신 곳곳에 반복되고 있었다.


‘참 나... 본인이나 잘 할 것이지.’


백작이 뭐라 하지 않아도 이미 나는 레이시아를 세상에서 제일 아껴줄 예정이었다.


‘음. 레이시아에게는 뭐라고 했을까? 나한테 잘해주라고 적었을라나?’


서신을 읽는 레이시아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하긴... 뭐... 레이시아에게는 백작 양반이 일종의 은인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을 거니까...’


몰락귀족인 친구의 딸을 맡아서 기사학교까지 졸업시켜준 것만으로도 이 몸의 부친인 데이안 타나티안 백작은 충분히 선인善人이며, 레이시아에게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이였다. 현 백작부인과의 만남도 본인은 원치 않았던 것으로 사별 후 백작가가 계속 기우는 과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결혼이었단 걸 제이크의 기억에 존재했었다.


“...누나?”


서신은 다 읽고서 눈물을 글썽거리던 레이시아가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 왜, 왜?”

“아버지가 뭐라셔?”

“어... 음... 너 잘 부탁한다고... 고맙다고... 뭐... 그런 말씀이셨어.”

“헤헤. 반대는 않으셨나보다?”

“어...? 어. 그, 그러게.”

“누나, 그런데 시아버지가 뭐 예물 같은 거 챙겨주신 거 없어?”

“시, 시아버지?”

“맞잖아. 시아버지. 흐흐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놀리면 당황에 질색을 하던 레이시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 뭐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내가 여심을 속속들이 다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지구에서도 솔로였을 리가 없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래도 제일 가까운 가족은 나야. 알지?”

“...가족?”

“어. 가족. 누나가 내 부인이니까 아버지도 누나의 원래 부부가 제일 가까운 가족인 거야.”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뭐지? 뭘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족’이라는 단어에 약한 것 같은 레이시아의 무언가를 또 자극한 모양이었다.


“...가족이잖아 우리.”


약점을 또 쿡 찔러본다.

조금 내 양심도 쿡쿡 찔리긴 하지만, 나는 레이시아와 가족계획을 세운지 오래였기에 진심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언제 한 번 본가로 오라고?”

“...으응. 얼굴 보고 축복해주고 싶으시대.”

“하긴 내 편지에도 누나 데리고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언제 가지? 음. 나중에 생일에 맞춰서 한 번 갈까?”


마침 이 몸의 부친 데이안 타나티안 백작의 생일은 오늘로부터 석 달쯤 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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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010화. +1 21.12.30 84 1 20쪽
9 009화. +1 21.12.29 92 1 16쪽
8 008화. +1 21.12.28 99 1 16쪽
7 007화. 21.12.27 98 2 15쪽
6 006화. +1 21.12.25 112 1 20쪽
5 005화. 21.12.24 133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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