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님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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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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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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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화.

DUMMY

남녀 간에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니면 신혼여행이 있는 이유라던가.

굳이 밤의 거사가 아니더라도 좁은 마차에서 하루 종일 함께 숙식하다보니 무언가 정의할 수 없는 특별한 친밀감과 호감도가 빠르게 쌓이는 것 같다. 왜 여자들이 해외여행에 끔뻑 죽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

“......”


비록 그 대가로 대화가 줄어들고 어색함도 같이 쌓이긴 했지만, 이건 우리 사이가 조금 더 가까이 전진하기 위한 1보 후진 같은 느낌이 분명하다.


“누, 누나?”

“...으응?”

“물, 물 마실래?”

“어...? 아, 아니야. 괜찮아.”

“그, 그래. 필요하면 말해. 난 항상 준비 되어 있으니까.”

“......”


나의 착각만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한다.


“타나티안 성입니다!”


나와 레이시아의 기묘한 신혼여행은 꼬박 4주 가량을 달려 타나티안령의 본성에 도착했다.



* * *



타나티안 백작가가 있는 성의 정문은 하루 종일 사람과 마차의 행렬로 꽉 차 있었다.


북부의 패자 타나티안 백작의 생일을 앞두고 북부의 전역에서 모이기 시작한 귀족들과 그들을 수행 및 호위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상인들, 비교적 안전하고 저렴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기회라 업무 또는 관광차 본성을 방문한 이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북부의 아이돌(?) 레이시아 경을 사교의 밤에 만날 수 있을 거란 이야기에 정보가 느린 결혼적령기의 젊은이들이 유달리 많이 모이기도 했다.


‘...젠장, 그만 좀 와 이 미친놈들아!’


타나티안성의 동문을 지키는 말단 병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문을 지키고 있었다. 특별히 통행세를 받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대대로 마족과 결탁하거나 그들을 숭배하는 미친놈들이 있기에 검문은 필수. 그밖에도 수배된 범죄자들이나 살아있는 몬스터 반입 및 불법으로 인신매매 등의 범죄행위도 감시 대상이었다.


‘오. 마차가 고급스러운데? 어디서 온 거지?’


상단인 듯 보이는 짐마차들 사이에 유독 고급스러운 마차 하나.


‘음. 귀족 가문인가? 어? 대귀족인데?’


마차에는 귀족, 그것도 왕국법상 영지를 소유한 영지 귀족임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달려 있었다.


‘음... 그런데 저 문양은 처음 보는 건데?’


성문의 경비병으로 일하기 위해서 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통행인들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 각 가문의 이름과 문양에 대해서 외우는 것. 그런데 말단 병사 로이는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자연스레 로이는 선임병을 찾았다.


“딘 상급병님.”

“어? 왜?”

“저기 귀족 분이 오신 거 같은데요. 처음 보는 깃발입니다요.”

“이 짜식이. 너 내가 제대로 외우라고 했어 안 했어? 어차피 여기 북부에서 깃발을 사용하는 가문은... 어라?”


물론 성문지기 7년차의 딘 상급병도 처음 보는 깃발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다행히 행렬에서 병사 하나가 먼저 왔기에 딘 상급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희는 베렌 남작령에서 왔습니다. 제이크 베렌 남작님 부부를 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행도 겸하고 있습니다.”

“...제이크 베렌 남작님이시면...? 어? 첫째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저희 남작님께서 여기 타나티안 백작님의 장남이십니다.”


그제야 딘 상급병은 며칠 전에 성의 치안대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헛!”


물론 타나티안 가문의 첫째 도련님이 돌아왔다고 검문을 패스한 건 아니었지만, 딘 상급병은 하급자 하나를 시켜서 최대한 빠르게 저택으로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마차로 향했다. 행렬의 주인이 누군지 안 이상에 당연히 가장 먼저 향할 곳은 제이크가 있는 마차였다.


덜컹.


마차의 문이 열리고 제이크와 레이시아가 차례대로 내렸다.


“...충!”

“음? 이제 나는 베렌 남작인데 충성의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아, 아닙니다!”


비록 베렌 남작이 되면서 성을 달리하게 되었어도 타나티안 가문의 혈족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파문당하지 않는 이상 타나티안령의 병사들에게 제이크는 영원히 모셔야 할 분이었다. 물론 우선순위는 각기 다르겠지만, 어쨌든 딘 상급병은 빠르고 친절하게 검문을 하기로 결심했다.


‘엇. 이, 이 분이 그 분이시구나.’


그러니까 아찔할 정도의 초미녀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크흠. 부인?”

“...네. 여보.”

“여기 병사가 검문을 하게 도와주시겠소?”


두 사람이 있던 마차에서는 어쩐지 따스한 향기가 난다고 딘 상급병은 생각했다.


‘킁킁. 하아... 부럽다 부러워.’


사실 그 향기는 분위기보다는 최상품의 데트린 나무와 여러 정령들의 힘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평범한 경비병인 딘이 바로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음? 무슨 일인가?”

“아, 아닙니다. 확인 끝났습니다! 그럼 뒤에 마차들로 가보겠습니다.”


딘 상급병은 도망치듯 다른 마차들로 향했다.


“크흠. 이건 뭡니까?”


도련님을 따라온 상단원에게 물었다.


“저희 상품입니다. 하레드 나무입니다.”

“하레드 나무요? 강, 강철목? 이게 전부 다 말입니까?”

“네. 확인하십시오.”


끌고 온 수레들 가득가득 목재들이 실려 있었다.


‘와. 이게 뭐야?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도련님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오셨지?’


타나티안 성의 성문지기로 7년 넘게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보는 엄청난 양의 하레드 나무에 딘 상급병은 매우 놀랐지만, 여기 세상에서 평범한 이들에게 필요 이상의 호기심을 참는 건 미덕을 넘어 생존의 필수. 확실히 금지되는 물품이나 사람이 없는 이상에 통행에 문제될 건 없었다.


“도련님, 검문검색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음. 신경 써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그럼 고생들 하게. 돌아갈 때도 근무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또 보세.”

“넵! 충!”


제이크가 탄 마차와 행렬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야 딘 상급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아.”

“딘 상병님! 어디 가십니까?!”

“잠깐! 잠깐 일들 좀 보고 있어! 화장실! 화장실이 급해서 그래!”


그리고 딘 상급병은 누군가를 만나서 제이크가 하레드 목재를 잔뜩 싣고 왔다는 말을 전했다.



* * *



마차는 내성을 지나 내성에서도 가장 깊숙한 영주성의 앞에 도착했다.


“영주님, 도착했습니다.”


병사 겸 마부의 말에 내리고 나니 제이크의 기억 속에서 수천수만 번 보았던 익숙한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음.’


그리고 그 앞에는 마찬가지로 익숙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아. 오랜만이구나.”


바로 이 몸의 부친인 데이안 타나티안 백작과 계모인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이었다.


‘...역시.’


묘한 감흥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가장 먼저 든 감정이 죄책감과 부담감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확실히 지구인 한수호인 것 같다.


“어서 오렴.”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의 가식적인 인사에도 딱히 화보다는 저 아줌마는 왜 저러나 싶으니까 말이다.


“녀석아 인사도 안 할 거냐?”


데이안 백작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리기로 했다.


“아,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그래. 너야말로 건강해진 것 같구나. 다행이다. 흠흠. 레이샤는 언제까지 뒤에 세워둘 것이냐.”

“아... 아 맞다. 두 분께 늦게 알려드려 죄송합니다. 어차피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시고 계실 테니 따로 소개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부인 인사하시오.”


그나마 꾸준히 연습했던 대로, 아니, 나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럽게 레이시아가 인사를 올렸다.


“북부의 방패, 한 자루의 검, 타나티안령의 주인을 뵙사옵니다.”


백작 부인을 경계해서 준비한 극존칭 인사 먼저.


“이 녀석아, 갑자기 왜 그렇게 남처럼 인사를 하느냐.”

“호호. 그러게요.”

“이미 얘기는 끝이 났다. 우리는 너희의 혼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그냥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러다오.”


역시나 백작이 교통정리를 해주었다. 어쩔 땐 한 없이 무뚝뚝한 기억도 많았지만,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면 백작은 제이크와 레이시아를 위해서 백작 부인과의 사이에서 꽤나 노력을 했었다. 오러홀이 망가지고 좌절감과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제이크만 가문을 되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전전긍긍하던 데이안의 눈물 겨운 부정과 노력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었다.


“...네.”

“그럼 한 번 이 자리에서 불러 보거라.”


레이시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내 마누라(아직 위장이긴 하지만)를 괴롭히는 백작의 만행이지만, 나는 속으로 열렬히 박수를 쳤다.


‘아저씨 나이스! 조금 더 밀어붙여 주세요. 손주 얘기도 해주시고. 흐흐흐.’


당황했지만 이것도 예상 범위 안에 있기에 레이시아는 주저하면서도 백작 부부 내외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아~ 손주 얘기를 아직 안 하네. 쩝.’


원래 시아버지면 애는 언제 낳을 거냐고 그런 말도 물어보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역시 ‘K-드라마’와 여기 현실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 할 말이 많겠구나. 너희들을 따라온 이들은 따로 숙소를 마련해줄 터이니, 걱정 말고 자리를 옮기자꾸나.”

“네. 아버지.”

“네... 아버님.”

“하하. 레이샤 네가 어릴 적에 그렇게 원하고도 못 들었던 아버지 소리를 이제야 듣는구나.”


이동하는 도중에도 화기애애한 가족의 모습이 펼쳐졌다.


‘그나저나 제이크의 기억과는 다르긴 하네.’


여기 세상의 제이크의 눈으로는 한참이나 어른이고 진중한 데이안 백작이었지만, 어른의 권위는 꼰대 취급 받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온 내게는 백작의 장난스러운 면모가 곧잘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동생들은요?”

“음? 음...”

“호호호. 제이크도 이제 일가의 가주가 되고 나니 동생들을 신경 써주는 구나? 데얀, 데미안, 데이지 모두 각자 가문의 일원으로서 손님들을 맡기 위해 바쁘단다. 이번에 두 사람뿐만 아니라 유독 많은 손님들이 모여서 그러니까 이해 좀 해주겠니?”


무언가 뼈가 있는 거 같은 말이지만, 나는 더 이상 오러홀이 파괴되어 무능력한 제이크 타나티안이 아니므로 별로 타격감이 없다.


“아 그런가요? 두 분도 바쁘신데 저희 때문에 괜히 시간을 뺏기지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호호호. 안 그래도 다른 귀부인들과의 만남을 모두 미뤄놓고 왔는데 알아주니 고맙구나. 그래도 이제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사이잖니. 기꺼이 이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지. 안 그래요 여보?”

“흐음. 그렇소. 부인의 말이 맞소.”


졸지에 나 때문에 억지로나마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금이 간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하지만,


“어머니, 바쁘시면 볼 일 보세요. 저희도 아버지와 간단히 얘기하고 데이트나 하려고요. 자식된 도리로서 어찌 부모님께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저희 같은 가짜 손님보다야 진짜 손님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내가 제이크 타나티안이 아니라 한수호라도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과는 친한 사이가 될 수는 없을 거란 건 확실하다.


“......”

“......”

“......”


약간의 침묵 후에 백작 부인이 싱긋 웃으며 말을 했다.


“여보...?”

“흠. 말씀 하시오.”

“호호호. 우리 첫째 아드님이 저렇게 어미를 생각해주시니까, 그 말씀대로 저는 손님들을 만나러 가도 될까요?”

“......”

“어차피 저녁에는 가족 식사 시간이 있으니까요.”

“...알겠소. 그럼 그렇게 하시오.”

“후후. 그럼 담소 잘 나누세요. 그럼 얘들아, 저녁에 만나자.”

“네 어머니. 저녁에도 바쁘시면 굳이 참석 안 하셔도 되요. 며칠 동안 있을 거잖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아시죠?”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네. 어머님.”


옆에 있던 레이시아가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한 후에 백작 부인은 거기서도 두 박자 늦은 대답을 했다.


“그, 그래도 그 정도로 시간이 없겠니? 생각해줘서 아주 고맙구나. 여보, 먼저 가볼게요.”

“그, 그러시오.”


백작 부인은 휙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백작은 조금 책망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녀석 아직도 변한 건 없구나. 레이샤야, 너는 도대체 이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

“......”

“하하. 그래도 남편 욕을 한다고 싫은가보구나. 녀석들, 일단 우리도 집무실로 가자꾸나.”


나와 레이시아는 백작을 따라 조그만 집무실로 향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들 많았다. 어서 앉거라. 어이쿠, 내 정신 좀 봐. 일단 차라도 한 잔씩 내와야겠구나.”


집무실로 오자마자 백작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 하녀를 부르려고 했지만,


“아버지 잠시만요.”

“응?”

“차는 이쪽에서 대접하겠습니다. 잔은 있죠?”


차를 우리는 주전자와 찻잔은 응접실에도 존재했기에, 데이안 백작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차기들을 꺼내주었다.


“아버지.”

“...음?”

“여기서 있는 일들을 모두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

“가문에 문제 될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귀찮아지는 게 싫어서요. 부부 사이에도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시죠?”


데이안 백작은 나와 레이시아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살짝 한숨을 내쉰 후에 답을 했다.


“그래. 알겠다.”

“그럼 믿을게요.”


나는 말을 하며 주머니에서 조그만 목함을 하나 꺼냈다.


“흐음.”


메이린 하녀장이 아니라 크레신 옹에게 배운 차를 내리는 법을 배웠고, 하녀장과 레이시아 모두 만류했지만 정령을 가진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엘피스와 유렌, 네디스 잎을 가미한 약차입니다.”


일단 청소의 정령이 주전자와 찻잔을 씻어내고, 허공에 생긴 일렁거림이 주전자와 찻잔을 한 번 헹군다.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랍시고 빼먹기는 찝찝하다. 주전자에 물이 차고 팔팔 끓기 시작한다.


“...너 설마?”


데이안 타나티안 백작의 눈이 놀람으로 가득차 있었다.


“네. 정령사가 되었어요. 그것도 조금 특별하게요.”


그리고 커다래진 두 눈을 끔뻑끔뻑거렸다.


“...그렇게 되었어요.”


레이시아에게와는 달리 영지민들에게 이야기한 수준으로 기나긴 이야기를 줄이고 또 줄여서 간략하게 전해주었다.


“허... 세상에...”


백작 역시 자신의 아들과 의붓딸에 준하는 레이시아의 이야기니까 의심하지 않고 바로 믿어보였지만, 그럼에도 조금의 미혹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정령쇼를 보여주었다.


“아버지, 그러니까 이제 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잠시 멍해있던 백작이 중얼거리며 말을 했다.


“...일레인이 널 보살폈구나.”


아주 작게 말을 했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타나티안 백작의 눈시울도 흘끔 쳐다본 레이시아의 눈시울도 모두 붉어져 있었다. 왠지 나도 보조를 맞추어야 할 것 같아서 억지로 눈을 계속 뜨고 있으면서 눈이 따가워질 찰나에...


“그래. 제이야. 그러면 다시 너를 데려와야겠구나.”


백작이 눈을 초롱거리면서 말을 했다.


“아니요.”

“제이야!”

“아버지, 무슨 말씀하시려는지 압니다. 저를 다시 후계자로 앉히려는 거 아닙니까? 뭐 저도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제가 알아봤는데 왕국법상 두 개의 영지를 받을 수가 없더라고요. 후계자를 포함해서요. 그렇다고 당장에 베렌령을 포기할 수도 없겠더라고요.”


레이시아에게 집적거리던 놈 때문에 정보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델린 왕국의 정세를 공부하다보니 그런 내용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었다.


‘...그렇다고 먹을 수 있는 떡을 그냥 넘겨주는 것도 아깝단 말이지?’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욕심 없이 레이시아와 알콩달콩 잘 먹고 잘 살다가 지구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동부의 맹주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 후작가의 둘째 체이스란 놈이 왠지 찝찝해서 나도 다른 판로가 필요해졌다. 북동부의 베렌령에서 가능한 곳은 북부와 동부뿐. 그런데 만약에 현 백작 부인마저 수작을 부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최악을 가정해야지.’


그래서 나는 다시금 타나티안 백작가의 후계자 자리가 다시 욕심나기 시작했다.


‘왕국법?’


왕국법이 문제라면 베렌령을 포기하면 그만이지 않는가. 왕이 병환으로 재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음 왕이 내려주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백작이 후계자 선정만 조금 미뤄주면 그만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아버지.”


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 중인 타나티안 백작에게 말을 했다.


“후계자를 확정짓는 것을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보통 후계자를 결정짓는 건 결국 가주의 권한.


브라이언 후작가처럼 가주가 은퇴를 선언할 때쯤에 선정하는 경우도 있고, 크레도스 후작가처럼 장자 우선 승계의 원칙을 고집하는 곳도 있으며, 덴프 후작가처럼 매년 후계자 시험을 통해서 가장 높은 점수를 유지하고 있는 이가 잠정적으로 후계자인 곳도 있다.


다만 대개는 너무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은 마지막 아들이 성년이 될 때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제이크의 기억으로 타나티안 백작가는 차남이 성년일 때 후계자를 결정짓는 기이한 가풍이 있다.


“데얀이 내년에 성년식을 치르죠.”

“...음.”

“그 전에 왕궁의 문제가 해결되면 문제없지만, 만약 내년까지 해결이 안 되거나,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불미스러운 일?”

“아버지가 저보다 정보가 더 밝지 않습니까? 2왕자님을 지지하는 이들과 3왕자님을 지지하는 이들끼리 충돌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타나티안 백작의 미간에 좀 더 깊은 주름이 생겼다.


“...나도 듣기는 했다만,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느냐.”

“그거야 모르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 사실 나도 우려하고 있었다.”


어느덧 대화의 주제는 아델린 왕국의 내전 가능성과 2왕자와 3왕자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음...”

“덴프 후작가는 대표적인 2왕자파라고 들었습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으십니까?”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던 백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너희 둘 다 내 자식들이니 상관없겠구나.”

“자식이라니요. 며느리지요.”


자식끼리 그러면 지구에서는 아주 큰일 날 일이다. 물론 그런 장르를 좋아하는 이상한 인간들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레이시아짱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


레이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뻘겋게 익은 채로 이미 항거불능의 상태였다.


“허허. 참. 이 녀석이... 어릴 때는 누나, 누나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더니, 도대체 언제부터 연심을 품고 있었던 게냐?”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제이크의 기억 속에서는 항상 레이시아를 좋아하고 그리워했었지만, 그게 누나로서의 감정인지 연모의 마음인지는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나는 흘끔 레이시아의 눈치를 보았다.


공식적으로 나와 레이시아는 위장 결혼 관계.


어쩌면 레이시아는 아직도 내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말로 내가 동생으로서 함께 있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뭐라고 하지? 아 씨. 이 아저씨는 주책없이 왜 아들의 로맨스를 궁금해 하고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했던 타나티안 백작이 껄껄 웃으며 나와 레이시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됐습니다. 아까 하던 얘기나 하시지요.”

“하하하. 녀석. 부끄러워 하기는.”

“아 됐다고요. 지금 그럴 땝니까?”


그런데 한참을 낄낄거리고 웃던 타나티안 백작이 말한 타나티안 가문의 포지션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중립이었다. 소설에서는 가장 위험한 포지션 중에 하나였다.



* * *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은 당당한 제이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건방진 것. 잡종주제에...”


그리고 멍청한 거지 년이라고 매도했던 레이시아의 아름다운 모습에 여자로서의 시기심과 질투심도 생겼다.


“감히 근본도 없는 천것들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분노를 삼키고 있던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에게 심복 에르멜이 다가와 오늘 입수된 정보를 전해주었다.


“뭐?!”


제이크가 동행한 상단이 엄청난 양의 하레드 목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그것들이 어디서 그런...”


계산에 착오가 생겼다.


베렌령이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촌동네라는 건 타나티안 가문뿐만 아니라 덴프 후작가 역시 똑같은 결론이었다. 그랬기에 욕심 많은 덴프 후작가에서도 그래도 47개의 영지 중 하나를 아낌없이 버림패로 줘버린 것 아니었던가. 남편이 얼마 정도 쥐어준 것도 카니안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에 재력으로 망신을 준다는 시나리오를 세웠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제이크 공자와 레이시아 경이 이미 혼인을 했다는 소문도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뭐? 어떻게?”

“성문에서 들어오는 중에 목격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걔 중에 조금 곤란한 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곤란한 이...?”

“네. 현 기사단장의 조카 되는 로엘라라는 여식이 있습니다. 헬릭스 가문의 양녀이고요. 북부의 사교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아가씨입니다.”


카니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로엘라라면... 그...”


로엘라 헬릭스는 카니안도 아는 이였다. 아리따운 미모에 더해 뛰어난 마법 실력으로 아델린 왕국의 마탑에서도 손꼽히는 유망주였다. 레이시아가 미모와 검으로 유명했다면, 반대로 로엘라는 미모와 마법으로 유명했다. 참고로 다른 이들에게는 냉정한 레이시아가 북부의 얼음꽃이었다면, 누구에게나 상냥하여 사교성이 좋은 로엘라는 북부의 봄꽃이었다.


“...네. 아가씨. 그 로엘라 헬릭스가 성문 앞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레이시아가 미혼인척 소문을 조장하였다가 젊은 혈기를 자극하여 제이크를 망신 준다는 계획도 쉽지 않게 되었다.


쾅!


결국 성질을 못 이기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잡종 놈은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거야! 하여튼 천한 것이 또 문제야! 젠장. 에르멜!”


에르멜은 문득 불안해졌다.


“...네. 아가씨.”

“결투! 결투 시키자! 제이크 그 잡종 놈에게 결투를 하여 망신을 주는 거야!”


물론 이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러홀이 파괴된 제이크에게 그 어떤 기사가 결투를 신청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왕국법상의 정식 영주 및 가문의 수장에게는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조건도 까다로운 편이었다.


“아가씨.”

“나도 알아! 에르멜은 내가 바본지 알아?! 이 집안에 원래 자식들이 선물 대신에 자신의 성취를 뽐내는 시간이 있잖아.”

“네, 아가씨.”

“그래! 그걸 좀 더 키우자. 잡종 놈은 분가를 했으니까 선물을 내고 아무 생각도 없겠지. 그런데 데이지에게 혼자 검무보다는 잡종 놈에게 대련을 해달라고 하는 거야. 그 정도는 재롱으로 봐줄 수 있지 않겠어? 그래도 한 때 가락이 있으니까 곧잘 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데이지랑 똑같아 보일 거야. 응? 몇 년째 술집과 도박장만 다녔으니 더 못할 수도 있어. 안 그래? 오러도 사용 못하는 기사 가문의 자식이라는 거. 그 알량한 검술도 제대로 못한다면... 후후. 얼마나 꼴이 우습겠어. 후후후. 많이 웃길 거야? 호호호호!”


그러니까 카니안 백작 부인은 제이크를 망신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자식들, 특히나 아직 12살의 어린 딸까지 이용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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