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님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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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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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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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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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화.

DUMMY

지구에서 나는 여동생이라는 저주받을 악마로 불행했던 1남1녀 중의 장남이었다.


“누나~.”


그랬기에 나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살짝 전율했다.

그냥 참 좋은 울림이었으니까.

누나는 일단 언어학적으로도 뛰어난 단어이다. ‘ㄴ’이라는 울림소리가 2개가 들어있지 않는가. 심지어 여기에 ‘ㄴ’을 하나 더 붙이면 두 글자에 울림소리가 무려 3개인 ‘눈나’가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만큼이나 울림이 큰 단어다.


“눈나아~. 나 귀 좀. 아니, 눈나 귀.”


...여워. 하악하악.


내가 일부러 목소리를 줄이며 귓속말을 요구하자, 머뭇거리던 레이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귀를 가까이 가져왔다.


“...네. 말씀하세요.”


어우야. 흰 목덜미... 츄릅.


“영주님?”


레이시아의 투명한 눈동자에 나의 음흉한 눈동자가 맑게 비치는 듯 했다.


“아! 크흠... 흠. 있잖아.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상의? 레이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우리 앞으로의 미래.”


앗! 미래도 좋은 울림...


“영, 영주님?”

“아! 미안... 다시 얘기할게. 정식으로 진지하게 누나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거든.”

“...특별한 능력이요?”

“응. 헤헤. 일단은 누나한테만 알려줄 거니까. 누나가 듣고 같이 고민해보자.”

“...아, 알겠습니다.”


레이시아는 갑자기 진지해진 나의 목소리에 살짝 놀랐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자세를 고쳤다.


‘와... 이걸 또 이렇게 얘기를 들어주려고. 크... 감동. 역시 최고라니까. 눈나 나 죽어~. 큭. 나중에 지구 같이 가자고 하면... 아니, 같이 갈 수는 있겠지? 하아,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니야. 갈 수 있을 거야. 가야지. 눈나. 우리 함께 가즈아!’


나는 어떻게 레이시아를 설득해야 할지를 지금까지 썸녀들에게 고백할 때보다 더 신중히 고민 또 고민했다.



* * *



레이시아는 내심 흐뭇했다.


‘...제이도 그대로였어.’


일단 레이시아는 제이크가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고 있단 사실에 기뻤고, 자신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상의하고 싶다는 말에 조금 감격까지 했다. 독단적인 결정이나 무책임하게 미루는 것도 아니고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 일단 감동이었고, 사실 그녀도 무작정 베렌령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앞으로는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우리 제이가 어릴 때 얼마나 착하고 똑똑했었는데... 그런데 무슨 이야기일까? 특별한 능력? 음... 어릴 때 진짜 장난꾸러기였는데, 설마 장난을 치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그녀는 충실히 어린 주군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말 놀라지 않을 테니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몇 번이고 놀라지 말 것과 보안을 강조하며 궁금하게 만들었던 제이크는 슬쩍 문을 열어 복도에도 아무도 없음까지 재차 확인한 후에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시스템을 각색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못 믿겠지?”


솔직히 레이시아가 한 번에 믿을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여신의 사도가 되어서 놀이동산을 만드는 능력이라니. 사실 천 년 넘게 마물들과 싸우고 있는 세상의 주민으로서 놀이동산이라는 개념부터가 생소하고 낯선 레이시아가 좀처럼 받아들이기는 힘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아,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군이자 마음속의 가족을 의심할 수는 없었던 레이시아는 황급히 자신의 마음 속의 의혹을 지우면서 답을 했다.


“후후. 못 믿을 수도 있지. 나도 아직 어색한 걸. 뭐. 흐. 그러면 일단 마나석을 흡수하는 것부터 보여줄게. 누나 하급 마나석 하나만 줘봐.”

“하, 하급 마나석 말씀입니까?”

“응. 나는 어제 다 충전해서. 나중에 중급으로 갚아줄게. 중급이 효율이 안 나와서 아까워서 그래.”

“아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제이크는 하급 마나석 하나를 받아들고 레이시아에게 확인을 맡겼다.


“꼼꼼히 확인해봐.”

“...이상 없습니다.”

“에이~ 이렇게 이렇게 손으로 만지면서 확인하라고.”


제이크는 확인을 핑계로 손을 만지작거리는 개수작을 부렸고, 순수한 레이시아는 자신이 제이크에게 계속 불신을 보이는 거 같아서 최선을 다해서 확인 절차를 거쳤다.


“하아... 좋다.”


지구에서 언제 한수호가 이런 초미녀의 손을 잡아봤겠는가.


“...네?”

“아, 아니야. 자 그럼 간다?”


제이크의 깡마르고 거친 손바닥 위에서 검붉은 사면체의 마나석이 스르르 사라졌다.


“헛?!”


레이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까지 낼 정도로 놀랐다. 방금의 행동은 그녀의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단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비록 공간마법이 불가능한 세상이지만, 해당 물건이 차원의 틈에서 소멸될 것을 각오하면 억지로라도 어느 정도는 공간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긴 하니까. 다만 그 정도를 하려면 최소한 6써클 이상이어야 하므로 그것 역시 말은 안 된다.


‘...마나석이 사라졌어? 정말?’


제이크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했다.


“자. 누나. 봤지? 확인해봐.”


진작에 소매까지 걷은 손을 네일아트 서비스를 받으러 온 고객처럼 내민 제이크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믿습니다.”

“아니, 확인해보래도.”

“괜찮습니다. 영주님. 믿고 있습니다.”


어쩐지 시무룩해진 제이크는 다시 한 번 놀이동산 시스템을 적당히 각색하여 레이시아에게 설명해주었다.


“어... 그러니까...”


제이크는 사실 자신이 지구인 한수호라는 것을 제외하고 많은 부분을 레이시아에게 오픈했다. 물론 놀이동산 시스템 같은 것을 곧이곧대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정령 능력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까지는 알렸다. 자세한 건 본인도 모르지만, 모친의 유품인 목걸이의 신비한 힘으로 여신에게 선택받았다고 말했다.


“아... 그 푸른빛이... 그러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이크가 차고 있던 목걸이에서 터졌던 푸른 빛. 이번에 베렌령으로 가게 되면서 백작에게 받은 일레인의 유품이었다. 어릴 적 레이시아가 들었던 건 백작 부부가 모험가였던 시절 한 유적지에서 구했던 것이라고 했었다.


“어... 그리고 엄마가...”

“일, 일레인 님이요?”

“응. 초상화에서 보던 엄마. 누나가 어릴 적 설명해줬던 얼굴이랑 똑같더라고. 헤헤. 그런데 내게 부탁하시더라고. 누나를 꼭 지켜달라고... 누나랑 평생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어. 누나한테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시더라고. 흠흠.”


죽은 사람을 팔아넘기면서 양심에 살짝 찔린 제이크의 얼굴이 레이시아에게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보냈던 생모를 그리워하는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


‘제이야...’


그리고 제이크는 자신의 능력이 레이시아와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일레인 때문에 얻은 능력인 것 같다고 밑밥을 깔았고, 여신님께서도 이 능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워도 괜찮다고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 능력을 바탕으로 돈을 벌어 자신과 함께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그때 목걸이의 빛이 왠지 따스하긴 했었어. 신성력이었구나. 후우. 일레인 님의 목걸이가 뭔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었지만, 여신님의 안배였다니. 잘 됐다. 잘 됐어. 제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었는데... 정말 잘 됐다. 여신님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에 들었던 대로 정령까지 소환할 수 있다면? 미래의 소드마스터 유망주에서 한 순간에 몰락해버린 타나티안가의 불쌍한 망나니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다시금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희귀한 능력의 소유자가 된 셈이었다. 제이크가 얻은 행운에 레이시아는 정말이지 순수하게 기뻐하고 감사했다.


“누나, 누나. 그러니까 우리 같이 평생 사는 거다. 알았지? 약속!”

“...네?”

“약속한 거다. 평생 같이 사는 거야. 무르기 없기~!”

“네? 네. 예.”


그리고 불쌍한 여기사 레이시아는 얼떨결에 충성 맹세에 더해서 부당한 종신동거 계약을 맺고 말았다.



* * *



내가 가진 놀이동산 시스템의 능력은 일단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이여만 했다.


“감찰관이랑 병사들부터 먼저 돌려보내자.”


비밀은 사람이 적을수록 지키기 쉬운 법.


부친 데이안 백작은 제이크에게 기사들이나 병사들이라도 딸려 보내고 싶었지만, 자원하는 기사는 레이시아 하나뿐이었다. 쓸모없어 보이는 베렌령의 영주 자리를 주는 건 흔쾌히 동의했지만, 그 이상은 백작 부인이 가만있지 않았던 것일까? 사실 기사 하나 또는 병사 여럿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아까울 법도 했다.


‘그 아줌마 존나 야박하네... 자기 친자식이면 그랬을까마는...’


아무튼 윌튼 백인장 휘하 호위병들은 나와 레이시아를 호위한 후에 내가 오기 전에 부임해있던 감찰관과 함께 타나티안령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돌려 보...”


내가 대뜸 레이시아의 말을 끊었다.


“아니. 감찰관은 지금껏 누나가 인수인계 했으니까 누나가 맡고, 대신에 병사들은 내가 직접 인사할래. 일단 그 동안 고생들 했을 테니까, 작별인사라도 제대로 해야지. 응?”


레이시아는 순간 멈칫했다가 알겠다고 답을 하고 병사들을 관할하는 윌튼 백부장을 불렀다.


“충!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레이시아는 나의 기사라서 영주님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윌튼 백부장은 타나티안령의 병사라서 도련님이라고 나를 부른다. 이들의 인식에는 베렌령의 영주자리보다 타나티안령의 도련님 자리가 더 높다는 말이었다. 아무튼 기합이 잔뜩 들어간 인사말에 아직 전역한지 1년도 안 됐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충성이라고 답례를 할 뻔했다.


“흠흠. 아 윌튼 백부장. 그리고 다른 병사들. 다름이 아니라 그 동안 여기까지 호위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부르게 되었네. 중간에 불의의 사고에도 그대들이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네.”


사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아, 아닙니다.”

“아니긴. 그 동안 고생 많았어. 내가 무언가 가진 것이라도 많으면 그 노고에 치하하고 싶지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내가 좀 아쉬운 처지라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네. 이거 받고 돌아가는 길에는 맛있는 거라도 사 먹게.”


나는 돈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부들부들.


사실 지금 자본금 한 푼이 아쉬운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아랫사람에게 소홀할 수는 없었다. 군대의 경험과 아르바이트 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대가 없는 노동의 짜증스러움과 단 한 푼을 받더라도 이왕이면 좋은 말로 주는 것의 장점을 몸소 체험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이 정도 생색은 내도되겠지? 아니, 내야겠지?’


나스 대륙은 오래 전 연합을 이룬 후부터 왕국들 간의 합의에 의해 공용어와 화폐 체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1 골드 = 100 실버 = 10,000 코퍼


과거에는 100 골드의 가치인 플래티넘 골드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소재인 미스릴이 너무 귀하여 최근에는 사용치 않고 상단이나 귀족 가문의 경우 신용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오로지 교국이 발행하는 주화만을 화폐로 사용하기에 대륙 어디에 가든 상거래의 어려움은 없다. 당연히 다른 세상끼리의 화폐 가치를 비교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얼핏 지구와 비교했을 때 대충 1코퍼가 100원쯤이고, 1실버는 1만원, 1골드는 1백만 원 쯤에 해당했다.


참고로 물류이동이 극도로 제한적인 세상이라 영지마다 다르지만 대충 타나티안령 기준으로 평민들의 주된 식사인 빵 하나가 10코퍼, 맥주 한 잔에 30~50코퍼 남짓이고, 용병들이 의례 묵는 여관은 하룻밤에 1실버, 평민들이 입는 천 옷 한 벌에는 2실버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타나티안령 기준으로는 평민 한 가구의 한 달 생활비가 30실버 정도였던가? 음. 술집에서 대충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들었던 거 같긴 한데...’


아무튼 물론 지구로 따지자면 극빈자보다도 더 열악한 생활수준이겠지만, 여기에서는 그게 평민의 평균이었다.


‘성 내에서도 마물이 나오는 세상이니까 그 정도 불평등은 어찌할 수 없다는 건가?’


여기 세상의 귀족은 단순히 신분만이 아니라 마물들에게서 맞서 싸우는 전투계급의 의미도 가지고 있으므로 신분에 대한 불만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참고로 여기 세상의 계급은 ‘왕-귀족-평민-노예’보다는 ‘전투계급-지원계급-생산계급’의 의미가 좀 더 크다.


‘물론 제이크도 귀족 집안이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 음? 내가 뭐하다가 이쪽으로 생각이 빠졌지? 아.’


아무튼 마지막으로 내가 영주가 된 베렌령에서 타나티안령으로 보내던 1년 세금이 2~30골드쯤이었다.


스윽.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내민 것은 누런빛이 번쩍번쩍 빛나는 금화 2개.


“도, 도련님?”


지구로 따지자면 짜기로 유명한 중소기업(변방백이긴 하지만 최근 사정이 어려운 타나티안령)에서 8명인 팀에게 고생했다고 회식비와 용돈조로 2백만 원이 나온 격이니, 윌튼을 비롯해 병사들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니, 지구로 따지면 2천만 원 정도의 성과금일지도 모르겠다.


‘놀래라. 감격해. 고맙다고 생각해!’


사실 나로서도 큰 마음을 먹고 투자한 것이었다.


“네엣?! 도, 도련님! 이건 너무 과하십니다.”

“하하하. 아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그 동안 도박장이랑 술집에 다 퍼줘서 돈이 이것밖에 없네. 못난 자식이라서 그런지 정착금이라고 받은 것도 적어서 이것밖에 못 챙겼으니 이해 바란다.”

“도, 도련님...”

“설마... 이게 너무 적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보통 최하급 마나석이 7~8실버 안팎에서 거래되고 최하급 마나석 하나에 스타 1이 올랐으니 대충 2골드면 20스타 쯤. 1스타가 아까운 지금 입장에서야 아깝긴 하지만 원래 투자는 돈에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레이시아를 향해 웃을 때보다는 한결 인위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없는 담백한 미소를 싱긋 지어보였다.


“아...”

“윌튼 백부장, 어서 받으시지요.”


미리 이야기한대로 레이시아까지 거들어서야 윌튼 백부장은 황송하다는 듯이 골드 2닢을 받아들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 그리고 윌튼 백부장?”

“넵! 도련님!”

“그 요번에 있었던 사고 있잖아.”


몬스터의 습격과 호위 대상인 나의 기절.


당사자가 직접 그 사고를 언급함에 윌튼 백부장은 잠시 얼굴이 하얘졌다. 됐다. 일단 채찍을 때려놨으니 이제 다시 당근을 줄 차례.


“흠흠. 절대로 강요나 명령은 아니니까, 편하게 들어도 좋네. 물론 윌튼 백부장이 타나티안령의 영지병으로서 꼭 보고를 해야 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그런데 있잖아...”

“......”

“어차피 이제 상황도 종료되었고, 앞으로는 자주 만나 뵙지도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 내 아버지랑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실까 염려스럽단 말이지. 영지에 있을 때도 매일 속만 썩였었는데... 흠흠. 그 못난 자식이 또 한 번 사고를 당했는데, 찾아보지도 못하시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자네도 부모님이 있으면 내 말이 뭔 말인지 알겠지?”


나는 지구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먼 산을 한 번 바라본 후에 감정을 잡고 말을 이었다.


“후우... 그러니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두 분께서 모르셨으면 하는데, 윌튼 백부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아무리 강요나 협박이 아니라고 해도 이것 역시 일개 백부장에게는 곤란한 질문이리라. 자연스레 윌튼의 시선이 레이시아에게로 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흠흠. 저는 도련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레이시아가 어색하긴 하지만 미리 약조한 대로 대사를 쳐주었다.


“그, 그렇습니까?”

“물론 저 역시 윌튼 백부장이 무슨 선택을 해도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시종일관 웃으며 말을 하는 나와 달리 레이시아의 말을 냉랭하기 그지없었기에 일견 협박으로도 들릴 수가 있는 상황까지도 모두 의도한 바였다.


“자! 일단 이 몸도 다음에 부모님께 올릴 서신에 어떻게 적어야 할지 정해야 하니까 윌튼 백부장이 정하는 걸로 하지. 어떤가? 아 참고로 나중에 혹여 들키더라도 절대로 윌튼 백부장이 책망 받지 않게끔 내가 책임질게.”


내가 잽싸게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당근을 흔들어주었다. 배드캅 굿캅 또는 채찍과 당근 전술. 자고로 연애에서도 밀당은 기본이지 않는가.


“음? 타나티안가의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야.”


어차피 한씨 집안의 명예도 아니고.

거기에 포상으로 받은 2골드, 이번 여정의 최종 명령권자와 당사자의 의견, 마지막으로 책임 소재에 귀족으로서의 약조까지 걸렸다.


이래도 안 넘어 올래~?♪


“......”


윌슨 백부장은 슬쩍 부하들을 바라보았고, 나머지 병사들은 크게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자는 눈짓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큼큼. 알겠습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어~ 고마워.”

“아, 아닙니다!”

“아니긴. 하하. 그럼 모두 조심해서 복귀하고. 혹여 감찰관 눈치가 보이면 나중에 성에 돌아가서 나눠 가지게. 그 동안 고생 많았어. 온 김에 여기 해산물도 챙겨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시고. 모두 고생했으니 가족들끼리 나눠먹도록 하시게들.”


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역시 이세계는 이세계인가보다. 내가 입막음을 다해보네. 흐.’


결국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차원이 달라도 거기서 거기인 것이 아닐까?



* * *



레이시아는 제이크가 병사들을 돌려보내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우하하, 백부장님, 우리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죠?

-도련님이 소문으로 듣던 것과 많이 다른데?

-그래도 그 핏줄이 어디 가겠어? 어? 제이크 도련님도 어릴 적에는 진짜 총명하셨었잖아. 기억나? 왕국 기사단장도 직접 찾아오고 그러셨었잖아. 그 사고만 아니었어도...


사실 이런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릴 리는 없었지만, 레이시아는 어쩐지 병사들이 제이크에 대해서 호의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우리 제이가 언제 이렇게 기특하게 자랐을까? 레이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제이크에게 칭찬을 해주고파 그를 불렀다. 영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도 잊고 도련님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어? 누나 왜?”


그런데 아뿔싸. 예전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에는 제이크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상태. 어릴 적에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자신을 쫓아다니던 귀여운 소년이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제이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할 말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꼭 해. 알았지? 아~ 그리고 다시 한 번 내 말 믿고 따라줘서 고마워.”


레이시아는 남 몰래 슬쩍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내가 누나를 안 믿으면 누굴 믿어. 그리고 계속 말하지만 말 좀 편하게 해. 이제 병사들도 가고 우리뿐인데. 안 그래?”


타나티안령에서 온 호위병사들이 떠나고 난 후에 이제 영주관의 식구라고 해봐야 제이크와 레이시아를 제외하고는 늙은 남자 관리인 하나와 돌아가며 근무하는 경비병 둘과 하녀 셋뿐이었다. 물론 모두 베렌령의 토박이들이었다.


“그, 그건...”


레이시아는 곤란함에 말을 더듬거렸다.


“헤헤. 알았어. 그거는 누나가 편해질 때 하는 걸로 하자. 그래도 나는 누나라고 부를 거야. 내가 방금 하나 양보했으니까 누나도 알지?”


사실 빨리 말을 놓고 편하게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지만, 계속 몰아세우는 것보다는 가끔 여지를 주는 것이 더 좋기에 제이크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제이크가 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할 건 놀이동산 시스템.


일단 마나석으로 충전이 가능하다는 건 확인하며 시스템이 단순한 허상이 아님은 확인했지만, 아직 정령이란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니 직접 카드를 설치해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상행을 떠날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 전에 한번 상단주를 만나보겠습니다. 마나석과 마물의 부산물도 판매한다고 했으니, 분명 지금쯤 보관된 하급 마나석이 있을 겁니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유능한 레이시아는 수완을 부려 반나절 만에 하급 마나석을 대량 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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