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님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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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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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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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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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화.

DUMMY

레이시아가 상행을 다녀오고 한 달.


“제이야, 모두 도착했어.”

“어~. 알았어.”

“음... 잠시만 기다려봐. 여기 옷 좀 정리해줄게.”


한 달이란 시간은 여기사 레이시아의 군기가 빠지고 누나로서의 반말에 익숙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남녀 사이로는 별 진전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편해진 레이시아의 밝은 모습은 이 빌어먹을 이세계가 점점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는데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 됐어. 우리 제이 잘 생겼다.”

“에이, 누나가 훨씬 예쁘지. 흐흐. 누나! 가자!”

“응.”


나와 레이시아는 나란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니, 걷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응? 왜?”

“에이, 손 줘야지.”

“아...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난 몰라. 손.”

“후우. 알았어. 제이 너 자꾸 어리광이 느는 거 같아.”

“흐. 젊게 살면 좋은 거지 뭐.”

“...이건 어린 것 같은데.”

“응애.”

“제이 너! 누나가 그러지 말랬지.”

“아. 실수. 미안.”


물론 레이시아가 이제는 제법 누나행세를 하고 있지만,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혼도 한 번 나보고 싶은데...’


예쁜 누나에게 혼이 나고 싶은 이상성욕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것만도 같다.


“응? 빨리 가야 돼.”

“어? 아. 알았어. 가자!”


쇼케이스 전 설명회의 장소는 저번과 같이 영주관의 식당이었다.


참여자 역시 처음과 같았다.


영지의 무력을 담당하는 경비대장 헤카인, 영지의 행정을 담당하는 행정관 조르딘, 영지의 상업을 담당하는 마리나 상단주와 공업 및 어업을 담당하는 다이크 어장, 농업과 치료와 그밖에도 영지의 정신적 지주인 촌장 크레신, 사냥꾼 겸 숲지기 데켈, 영지 내 유일한 마법사 하메르, 영주관을 관리하며 그 동안 감찰관들 및 기사들에게 있었던 일을 가장 잘 아는 하녀장 메이린까지 모두 착석했다.


‘다들 무슨 소리를 할지 긴장들 하셨구만.’


사실 나도 한참 어른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하려니 긴장한 상태였다. 물론 이 사람들이 얼마나 잘 해줄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보고 있으면, 100%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신 정도는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지. 레이시아짱만 예외지. 레이시아는 다 증명했으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지.’


Show and Prove.


왕국 기사로서 갈 수 있는 수많은 자리들을 내버려두고 타나티안령으로 돌아온 것도, 누가 봐도 창창한 미래를 박차고 베렌령으로 따라온 것도, 몬스터들 앞에서 제이크를 구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것을 고려하면, 레이시아를 믿지 못하는 건 그녀를 믿지 못하는 내 자신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일단 레이시아가 아닌 이상 백작 양반이라도 의심해야 해. 항상... 그 누구든. 의심하고 또 의심하자. 지금이야 믿고 일을 하더라도, 항상 배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야지. 배신할 생각을 못하게끔 해야지. 조심하자. 명심하자고.’


그중에 딱 레이시아만 예외일 뿐이다.


‘내 스스로도 계속 의심해야지. 잘 하고 있는 거 맞냐고... 정신 차리자.’


나는 다시 한 번 나 자신에게 따끔하게 주의를 주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레이시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도 준비가 다 됐다는 신호에 나도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화답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서약부터 받기로 했다.


“아! 그 전에 모두 서약 하나만 하시죠.”


모두 서약이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나의 동의 없이 오늘 회의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밖에서 함부로 하지 않을 것과 앞으로의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여기서 나가라는 말에 거부하는 이는 없었다.


“이제 진짜 얘기를 해볼까요?”

“네. 영주님. 경청하겠습니다.”


촌장 크레신 옹의 대답에 다른 이들도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해드릴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참으로 복잡한 이야기지만, 그걸 최대한 줄이고 줄이면 이렇게 될 것 같다.


“제게 힘이 있습니다. 특별한 힘이요. 저와 제 누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친누나는 아니지만, 제게는 친누나나 다름없습니다. 아니, 친누나보다도 훨씬 소중한 사람입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제 목숨보다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평생 가족으로 함께 하며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로 그분께 맹세한, 우리 누나와 함께,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좌중을 한 번 둘러본다.

연설의 반은 ‘레이시아 소중해~.’.

부끄러워하는 레이시아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는 표정의 이들도 보이고 살짝 당황한 이들도 보인다. 특히 숲지기 데켈이 제일 찐당황한 표정이었다.


‘쓰읍. 저거 진짜 우리 레이짱에게 엄한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냐? 팍 씨!’


아직은 저들과 나 사이에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밀도? 같은 것이 없는 상황.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연이어 말을 하기로 했다.


“자유롭게 질문을 해도 괜찮습니다만, 아직은 서로 불편한 사이겠지요? 그래서 그냥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그분께서 선택하신 신성한 놀이동산의 관리인입니다.”


정령사로 할까 사도로 할까 고민을 하다가 아예 색다른 이름으로 가보자고 한 것이 놀이동산의 매니저, 여기 말로는 관리인이었다.


‘...신성한?’

‘...놀이동산?’

‘...관리인?’


사실 내가 저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독심술은 없으므로 저들의 생각이 저랬다는 건 아니지만, 조금 전까지 특별한 힘이 있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당황하지 않았던 이들까지도 지금의 얼굴을 보면 보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저 영주님.”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신성한... 놀이동산의 관리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준비했던 대로 적당히 둘러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이들은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하메르 마법사 같은 경우에는 얼굴에 불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양반도 마법사라 그런지 사회성은 조금 바닥인 것 같다.


“뭐 믿지 못하겠지요. 그건 조금 있다가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보다 오늘 하려는 말은 그겁니다. 그 힘으로 저는 여기 있는 누나와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누나와 제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기 영지도 발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러분들의 협조가 필요하고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오늘 여러분들을 부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그렇다.

너희들도 잘 살게 해줄 테니 따라와라.

혹여 이 힘과 부를 노리고 욕심내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영지 밖으로 정보가 안 새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저희 병사들은 믿으셔도 됩니다. 제 목을 걸겠습니다.”


일단 병영은 오케이.


“...음. 저희 상단원들도 모두 괜찮을 거예요. 영,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충분한 대가만 주신다면요. 아 여보는 가만 있어봐. 어머, 죄송해요. 흠흠. 솔직히 저는 경비대장님처럼 제 목을 걸고 자신 있다고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저희 상단원 모두 베렌령의 식구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만약 영주님 말씀대로 저희 영지민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신다면... 음... 그렇다면 그때는 저도 제 목을 걸겠습니다.”


베렌 상단주도 조건부긴 하지만 단언했다. 역시나 레이시아와는 다른 의미로 여장부이긴 했다.


“세금은 기존과 같다니 저희가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대가도 주시겠다고 하셨고, 영주님의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서 버는 돈은 당연히 영주님의 것이지요. 그 점에 관해서는 특별 세율을 적용하셔도 저희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행정관과 촌장도 동의를 했다.


뭐 숲지기나 마법사의 경우에는 딱히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고, 어장의 경우에는 부부인 마리나 상단주가 꽉 쥐고 있는 듯 보여서 문제는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영주님.”


그때 질문이 있었다.


“네. 말씀하시죠?”

“송구스럽지만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마리나 상단주의 질문은 간단했다.


“어... 음... 그분께서 주신 능력이라면 어째서 교국으로 가시지 않는 건가요?”


이곳 대륙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신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여신에게 받은 능력이라고 했을 때 미리 예상한 질문이기도 했다.


“교국으로 가지 않는 이유요? 간단합니다. 교국과 나누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욕심이지요. 네. 제 힘은 그분께서 내려주신 것이지만, 그분께서는 제 사리사욕을 위해서 쓸 수 있게끔 해주신 것입니다. 이 힘을 받은 대가로 어떠한 의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정말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힘을 모두를 위해서 베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일부러 좌중과 눈을 마주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 욕심 많은 사람입니다. 그 욕심의 첫 번째는 여기 있는 우리 누나랑 평생 행복하게 같이 사는 것이고요.”


우리 레이시아짱 예쁘지? 몇 몇은 나를 따라 고개를 돌려 레이시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어쩐지 붉은 얼굴의 레이시아는 누가 봐도 행복해줘야 할 의무가 있을 것 같다.


“흠흠. 그리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 눈치 안 보고 제 마음대로 안락하고 편하게 사는 겁니다. 그런데 교국에 가면 제가 제 욕심대로 살 수 있을까요?”


사실 지구에서의 나는 명예도 긍지도 개뿔 없는 놈이지만, 여기 세상에서의 제이크는 달랐다.


타나티안 가문의 장남이자 베렌령의 영주.


영지 내에서는 누구보다 높은 사람으로서, 명예를 추구하는 귀족으로서, 그것도 한때는 기사를 꿈꿨던 사람으로서는 쉽게 입에 담기 힘든 말에 대부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겉으로 명예로움을 외치면서 수탈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솔직하게 욕심을 말하는 건 여기 사람들에게도 믿음직해 보이지 않을까?


국회의원이 유세를 나와 국민을 위하기보다는 자기가 잘 먹고 잘 살고 싶다고 하면, 선거에는 낙선할지 몰라도 모두들 그의 말을 믿어주긴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출직이 아닌 독재자니까 표를 살 필요 없이 신뢰만 사면 그만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레이시아가 이렇게 대답할 거라고 하자 기겁을 하고 극구 반대 했었지만, 그녀 역시 결코 내 말이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자 그럼 설명이 됐습니까?”

“...네. 영주님.”

“좋네요. 혹시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아까 서약을 한 번 더 해도 되겠습니까?”


사실 서약이라는 것에 특별한 강제성은 없다. 마법으로 계약을 강제하는 주문서 같은 것도 없고, 마나를 걸고 맹세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나는 다시 한 번 이 일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나는 당신들을 믿고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서 서약을 들먹였다.


‘호구 같은 이미지보다는 배드캅인게 낫지.’


이른바 배드캅 굿캅 전략이다.


지구에서 오래 인정받은 전략은 이세계에서도 통할 가능성이 높다. 비록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모든 면에서 달라도 기본적인 인간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니까. 내가 여기 세상에서 70일 정도를 살아본 결과 여기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어디서든 군기 잡는 사람은 있어야지. 그렇다고 우리 천사 레이짱이 배드캇을 할 수는 없잖아. 능력 가진 내가 나쁜 놈을 하고, 착하고 예쁜 레이시아가 굿캅을 하는 것이 좋지. 음.’


무엇보다도 욕을 먹어도 내가 먹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물론 욕을 먹는 건 기분이 나쁘지만, 그래야 막 살 때도 부담이 없지 않을까?


“자. 모두 동의하십니까?”


이런 건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다.


비밀이 새어나가면 아웃.


여기 대륙식으로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그냥 비밀 못 지키면 죽이겠다는 살벌한 서약을 한 후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영주관 뒷산의 수련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묘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 * *



신임 영주 제이크가 앞장을 섰다.


영주관의 뒷산의 수련장으로 향하는 길.


비록 영주관에 딸린 산이라서 영지민들에게는 접근이 불가한 산이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베렌령의 땅이기에 모두들 모르지는 않는 곳이었다. 병사들의 경우에는 근처까지 순찰을 가야하기도 하고, 숲지기 같은 경우나 촌장의 경우에는 산림과 약초를 위해서 오르기도 했다. 타나티안 가문에서 보내온 감찰관이 모두 성실하고 충실하여 항상 베렌령에 꼬박 붙어있었던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수련장은 완전히 비밀의 장소는 아니었다.


터벅터벅.


물론 두 달 조금 전에 영주가 새로 오고난 후로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긴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산 속의 수련장이 바뀌어봤자 얼마나 바뀌었겠는가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헙?!”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영지민들 중에서는 가장 앞장을 서게 된 숲지기 데켈이 가장 먼저 수련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저, 저거는?!”


사냥꾼이라 눈이 밝은데다가 숲지기라는 이유로 나무들에게 조예가 깊은 데켈이 발견한 건 바로 여기 세상에서는 엘프들의 나무로 알려진 엘피스였다.


“엘, 엘, 엘피스?!”


우리 영지에 엘피스가 자란다고? 숲지기 데켈의 입장에서는 지금껏 살아온 삶을 부정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오! 한 눈에 알아보는군?”


사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왠지 미운 데켈이라서 제이크는 퉁명하게 ‘하게’체를 사용하였다.


“헙! 영, 영주님! 저, 저게 진짜 엘피스가 맞다는 말씀이십니까?!”


제이크가 썩소를 날리며 말했다.


“자네가 가서 직접 확인해보게.”

“제, 제가요?”

“그럼 누가 확인해보나? 데켈, 자네가 여기서 나무는 제일 전문가이지 않는가?”

“네, 넵! 제, 제가 전문가 맞지요. 넵. 그, 그러면 제가 진짜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씁.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만들지 말게. 편하게 가서 보시게. 음. 말 나온 김에 구경 후에는 과일도 하나 따오게.”

“엘, 엘피스를요?!”

“뭘 그렇게 놀라는가. 과실까지 확인해봐야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을 끝마치지 않겠는가. 자네 혼자 먹을 건 아니니 기대하지 말고. 충분히 확인하고, 확인이 끝나면 하나 따오게나. 뭐하나. 어서 가보지 않고.”


쭈뼛거리던 숲지기 데켈이 슬쩍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다가 제이크의 재촉에 화들짝 놀라 엘피스 나무로 달려갔다.


“영, 영주님?”

“음? 마리나 상단주? 왜 불렀나?”

“혹, 혹시 저도 같이 가서 확인해보면 안 되나요?”

“왜 안 되겠나. 가서 보게. 아 다른 분들도 보고 싶으면 가서 보십시오.”


엘피스 나무가 엘프의 나무로 특별하다는 것도 있지만, 척박한 베렌령에서는 절대로 키울 수 없었던 과일 나무라는 점에서 영지민 모두가 엘피스 나무로 향했다.


“어머 어머. 이거 진짜 맞지? 얘 데켈. 이거 진짜 엘피스 맞지?”


어디까지나 베렌령에서는 식물 중 나무에 한정해서는 데켈이 전문가였다.


“맞아요. 맞다고요. 와. 이게 어떻게 여기에 이렇게 자랐지?”

“허허허. 정말 신기한 일이로구나.”

“촌장님, 엘피스 잎으로 약재도 만들 수 있지 않아요?”

“그래. 엘피스 잎은 배탈이 났을 때 좋지. 껍질은 변비에 좋고. 과일부터 껍질, 줄기까지 하나 버릴 것 없는 보물 나무라고 하지. 엘프들의 숲이 아니면 절대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이 여기에 이렇게 떡하고 있다니... 허어.”

“촌장님도 그러면 진짜 엘피스 맞다는 거죠?”


그리고 식물 중 약재에 관하여 전문가인 촌장도 보증을 했다.


“허허. 한 눈에 봐도 딱 알 수 있겠구나. 마리나 너도 상인이라면 알아 볼 거 아니냐.”

“저야 뭐 말린 잎차랑 말린 과일이나 몇 번 봤죠. 이렇게 살아있는 건 본 적이 없어서... 아! 맞다. 데켈아.”

“네?”

“이 멍청아. 정신 좀 차려. 쯧. 영주님께서 너한테 이거 과일 하나 따오라고 하셨잖아.”

“아! 그, 그러셨죠?”

“얘, 어서 빨리 하나 따봐.”


마리나 상단주의 재촉에 숲지기 데켈이 조심조심 엘피스 한 알을 딴다. 허둥지둥. 마치 어린 아기를 안 듯이 두 손으로 힘겹게 잡아들었다.


“이, 이제 어쩌죠?”

“어쩌기는... 영주님한테 가서 시킨 대로 했다고 말씀 드려야지.”

“아... 이, 이모. 같, 같이 가요.”

“같이 가긴 뭘 같이 가. 너한테 시키신 일이야. 야 빨리 갔다 와.”


마리나 상단주의 재촉에 데켈은 울상으로 제이크에게 갔다가 금방 눈이 휘둥그레져서 일행에게 돌아왔다.


“촌, 촌, 촌장님!”


제이크가 잘 정비해 거의 맨땅이나 마찬가지지만, 데켈은 넘어질 뻔할 정도로 정신없이 일행에게 돌아왔다.


“허어. 이 놈아,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 영주님도 계신 자리에서!”

“촌장님! 영주님께서 저희보고 먹으라고 하셨어요!”

“응? 뭘? 이걸?”


마리나 상단주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네!”

“엑. 정말?!”

“네! 맞다니까요! 그것도! 한 사람 당 하나씩 먹으래요!”

“에이 말도 안 돼.”

“마리나 상단주는 도대체 뭐가 말이 안 되나?”

“헉!”


그리고 또 불쑥 끼어든 제이크에 놀란 마리나 상단주가 뒤로 넘어질 뻔 했다가 남편의 부축에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게 아니라...”

“에이. 농담한 걸세. 너무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하지 않겠는가. 자 모두들 하나씩 드시죠. 앞으로 잘 협조해달라는 뇌물입니다. 아. 그거 뇌물이니까 모두 이 자리에서 드셔야 합니다. 가족이 생각나도 좀 참으세요.”


제이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가족들 챙겨주려면 앞으로 협조를 잘 해주시면 됩니다.”


얼떨결에 엘피스 하나씩을 받아든 일행들은 멍하게 먹방을 찍게 되었다.


“먹을 때는 좀 편하게 먹어야 할 테니까, 저는 잠깐 누나랑 있을게요. 편히들 드세요. 구경도 편히 하시고요. 아. 하녀장도 편하게 먹어요. 이쪽 눈치 보지 말고. 하하.”


사실 [벤치]가 하나뿐인데다 감히 앉을 생각을 하지도 못했기에 대부분 서서 먹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멍하게 엘피스를 손에 든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와... 악. 이거 꿈 아니겠죠?”

“으휴. 꿈이겠냐? 이 멍청아.”

“이모! 멍청이라고 하지 마요! 진짜!”

“어? 이 자식이 어따 대고 언성을 높여?”

“쓰읍. 여보. 촌장님이랑 대장님도 계시고, 밖에 영주님도 계신데 뭐하는 거야. 촌장님, 대장님, 영주님 말씀이 전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기 긴 의자도 보십시오. 접합부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예 통째로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면, 드워프들도 이렇게는 만들지 못할 겁니다.”

“음... 그렇구나.”

“저도 봤습니다. 어르신, 지금 이 의자? 의자 같은 것도 그렇고 저기 있는 것 역시도 모두 못 같은 흔적하나 없더군요.”


이들이 흘끔 가리킨 것은 [미끄럼틀]과 [나무 그네]였다.


“음... 역시 신이 내려주신 물건이 평범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 영주님 말씀이 모두 맞는게지. 뭐. 허허. 일단 주신 거나 감사히 먹으면서 얘기 나누세. 다행히 우리끼리 이야기할 시간을 주셨으니까... 먹고 나서 이야기해보자고. 어서들 먹게. 맛이 아주 좋을 걸세.”


엘피스는 사과의 모양에 바나나의 식감을 가진 새콤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과일.


“와... 이게 이런 맛이었구나...?”


생전 처음 맛본 낯선 과일의 맛에 데켈이 멍하게 포문을 열었다.


“엘프 녀석들. 자기들끼리 이런 맛난 과일을 먹었단 말이야? 에잇. 우리 에이미도 하나 먹여주고 싶은데...”


반면 마리나 상단주는 처음 맛보는 엘피스의 맛에 여기 없는 딸을 떠올렸다.


“아 맞다. 에이미는 졸업 언제해요?”

“왜? 네가 알아서 뭐하게?”

“아 왜 자꾸 나한테만 그래요. 물어보지도 못 해요? 내가 에이미 얼마나 잘 돌봐줬는데.”

“네가 돌봐주긴 뭘 돌봐줘. 사고만 쳤지.”

“어허. 여보, 그리고 데켈. 두 사람 좀 그만하라고.”


약간의 사담 끝에 과일을 모두 먹은 이들은 촌장이자 치료사가 껍질도 약재로 쓰인다는 말에 껍질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잘 겹쳐놓았다.


“흐음... 길게 얘기할 시간은 없을 것 같구나.”

“네. 어르신.”

“일단 내 생각만 말을 하마. 나는 영주님께서 하시자는 대로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혹시 다른 생각이 있는 이가 있는가? 개의치 말고 이야기 해보게.”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뿐 영지가 발전하고 잘 살게 해준다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악마의 힘이나 흑마법만 아니라면 무슨 상관이랴.


“그래. 영주님 말씀대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해보세나. 일단 내가 가서 얘기를 드려보겠네.”


크레신이 대표로 제이크에게 다가가 더 이상은 확인치 않아도 영주님의 말씀을 모두 믿겠다고 말을 전했다.


“그래도 온 김에 구경 좀 하세요. 어떤 물건들이 있고, 어떤 용도인지 알아야 할 거잖아요. 그리고 아직 준비한 것도 못 보여드렸는데, 여기서 그만 두면 되나요?”


다만 제이크는 쉽사리 이들을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게 제 능력으로 만든 나무 울타리입니다. 어때요? 직접 손으로 만들 수는 없어 보이죠?”


[조경시설] [나무 울타리] [★★]


높이는 성인 남성의 명치까지, 폭은 한 뼘 사이즈의 나무판들이 위아래 두 군데 나무로 연결되어 길게 줄을 지어 있는 나무 울타리.


울타리의 모든 나무판들이 일정한 크기로 못 하나 없이 줄을 짓고 있는 모습은 굳이 어장이자 조선소 및 대장간의 수장인 다이크에게 묻지 않아도 모두들 답을 알고 있었다.


“한 번 보세요.”


그리고 마나 100과 나무씨앗.

제이크는 [나무] 카드 한 장을 사용하여, 작은 나무 씨앗이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헙!”

“맙, 맙소사...”

“어머나! 세상에!”

“허어... 정말 그분의 힘이로구나...”


허공에서 날아간 나무씨앗이 자연스럽게 거대한 나무로 변해가는 기적에 마법사와 행정관을 포함해 여기 영지민들은 영주가 그냥 정령사가 아니라 정말로 특별하고 신성한 놀이동산의 관리자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제 다시 영지의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비록 영지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촌장과 경비대장과 행정관 등이지만, 그들은 놀이동산 시스템에 대해서는 제이크만큼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엄연한 신분 사회에서 영지민과 영주의 관계이지 않는가. 그렇다보니 영지 발전에 대한 논의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본체는 한국의 흙수저 대학생 한수호인 덕분에 제이크의 배려 속에 대화는 나름 화기애애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건 차원의 불안정성으로 인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만 능력을 랜덤하게 발휘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시키는 것에 어려움이 조금 있긴 했지만, 신의 사도(사리사욕을 위하겠다고 했지만, 여신이 직접 능력을 내려준 이니까 사도라고 믿었다.)가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 영지민들은 곧이곧대로 신임 영주 제이크를 믿기로 했다. 사실 신이 존재하고 신성력이 큰 힘을 발휘하는 세상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것이 바로 여신과 관련된 힘. ‘창조’와 ‘자연’은 예부터 여신의 힘이라서 영지민들은 모두 제이크를 굳게 믿고, 하레드 나무와 데트린 나무의 목재를 대행하여 판매하고, 영지의 개발에 따르기로 어렵지 않게 결심을 내릴 수가 있었다.


“아 맞다. 대련은 언제 할 겁니까?”


그리고 헤카인 경을 제외한 영지민들이 놀랄 일은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베렌령에 또 하나의 오러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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