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님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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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최근연재일 :
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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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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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화.

DUMMY

기사騎士.

검이나 창과 같은 냉병기를 들고 마물들과 싸우는 사람. 기사는 거대하고 강력한 마물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마나로 신체와 병기를 강화하여 물리력으로 적을 상대한다.


기사에게 필요한 건 많지만, 보통 강화 전의 뛰어난 신체 베이스, 무시무시한 마물과 맞붙어 싸울 용기, 그리고 상대적으로 조그만 힘으로 커다란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기예와 신체를 강화하고 병기를 강화할 수 있는 힘, 즉, 오러를 꼽는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건 오러.


일단 용기야 기사의 전제조건이니 배제. 아래 단계에서는 신체 능력의 차이와 기예의 숙련도와 절묘함으로 약간의 유불리는 극복이 가능하지만, 상급 마물부터는 그 무슨 수를 써도 마물의 강력한 신체 능력에 보통의 인간은 항거할 수 없게 된다. 도검불침의 마물들이 등장하는데 무슨 기예가 통할 것이며, 검술의 절묘함이든 의외성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래서 보통 나스 대륙의 기사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검술보다는 오러의 활용가능 정도가 된 것이다.


러너.

익스퍼트.

마스터.


기사 수련을 시작하여 오러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를 러너라고 부르며,


익스퍼트는 오러를 활용하는 정도에 따라서 구분한다. 하급은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느냐, 중급은 외부로 오러를 분출할 수 있느냐, 상급은 분출한 오러를 응집하고 유지하여 검기를 만들어내느냐로 따지고, 최상급은 그 검기를 다시 검에서 떼어내어 제어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스터는 앞선 경지들을 모두 숙달한 것을 넘어 오러를 압축하여 극도로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존재. 압축된 오러로 만들어낸 검기는 익스퍼트의 검기보다 수십 배로 단단하여 보통 검강으로 불리고, 압축된 오러로 강화된 신체는 순간 폭발력으로 익스퍼트 십 수 명에 달하는 힘을 낼 수도 있다.


“오오!”

“데얀 공자가 올해로 17살이라고 했었나?”

“내년에 성년인데 벌써 능숙해보이는데? 저 정도면 금방 중급도 될 것 같구만.”


현재 데얀의 성취는 익스퍼트 하급. 그리고 하급 중에서도 굳이 따지자면 중급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었다.


재능을 판가름하는 중급의 경우에는 10대에 이르는지, 20대에 이르는지로 크게 구분하고 10대에서도 몇 세에 올랐는지로 구분하고 있다. 예컨대 왕국기사학교 차석 졸업자인 레이시아는 19살에 중급에 올랐으며, 베렌령의 자랑 헤카인 경은 20살에 중급에 올랐으며, 데이안 타나티안 백작은 18살, 아델린 왕국에서 근래에 가장 빠르게 경지에 오른 이가 현재 소드마스터인 램브란트 공작이 기록한 15살 하고도 3개월 13일이었다. 참고로 제이크는 12살에 중급으로 오르다가 오러홀이 망가졌으니 당시에 제이크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물론 제이크는 결국 중급에 오른 적이 없고, 다음 경지를 오르지 못하고 수십 년 간 정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떠냐. 이 잡종아.’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은 득의만면한 미소를 지은 채로 흘끔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하레드 나무? 힐트렌? 네 주제에 무슨 복이 있어서 그런 귀한 것들을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네 복은 거기가 끝이다.’


대륙인의 상식에서는 하레드 나무나 힐트렌의 인공재배는 수백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가가 아니면 불가능 한 일. 그러므로 제이크가 가진 것은 일시적인 행운에 재물일 뿐이고, 자신의 아들 데얀이 가진 기사의 재능은 앞으로 타나티안 가문을 넘어 덴프 후작가의 지원을 받아 아델린 왕국에서 쭉쭉 뻗어나갈 영원한 보물인 것이다.


“□□□□□.”

“□□□□□□□.”

“□□□□□□.”


그런데 제이크와 레이시아는 서로 귓속말을 나누면서 웃고 있다.


‘웃음이 나와?’


사실 카니안이 보기에도 여기 대륙에서는 충격적인 커플룩을 입고 다정하게 귓속말을 나누는 선남선녀의 모습은 썩 부러운 장면이었다. 야심 많은 후작가의 영애로 자라나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자신은 해보지 못했던 모습이었고, 연회 내내 레이시아 곁을 떠나지 않고 일거수일투족 배려를 하는 제이크의 모습은 남자 망신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여자가 보기에는 부러운 다정함이었다. 물론 타나티안 백작은 다른 귀족 남성들에 비하면 한 눈도 팔지 않고 가족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좋은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은 어떻게든 넘볼 수 없는 사별한 전처의 기억에 사로잡힌 남자였고 다정보다는 무뚝뚝함이 더 큰 사람이었다.


‘......’


남몰래 제이크를 노려보다보니 또 하나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제이크가 레이시아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 다른 이들은 테이블에 가려서 보이지 않겠지만, 가족이라 옆에 앉은 카니안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저, 저 잡종이! 내 아들이 우스워? 저 모습을 보고도 연애질이나 하고 있단 말이지.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지 보자.’


그래서 데얀에 비해서는 성취가 느린 편인 둘째 아들 데이안의 시연은 카니안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데이지 공녀님의 검술 시연이 있겠습니다.”


카니안은 눈빛을 보냈고,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연회가 너무 길다.


“후우.”


몰래 한숨을 쉬었더니 레이시아가 걱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귓속말을 하듯 물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여기에는 레이시아를 제외하고도 익스퍼트 상급의 능력자들이 여럿 있기에 귓속말이라도 위장한 부부간의 존칭을 사용했다.


“아니오. 걱정해주어 고맙소. 당신은 괜찮소?”


나도 잊지 않고 그윽하게 눈빛을 보내며 레이시아를 걱정했다.


“...네.”

“다행이오. 손이라도 잡아주시겠소?”

“...좀 참으세요.”

“흐흐흐. 싫소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 나는 덥석 레이시아의 손을 잡았다.


“......!”


레이시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지만,


“흐흐흐.”


내 웃음에 자기도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오우. 이제 좀 살만하네. 진작에 손잡고 볼 걸. 흐흐.’


우리 어릴 때는 뽁뽁이를 터트렸고, 요즘 아이들은 슬라임을 가지고 놀았듯, 레이시아의 손은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주물주물.


그 동안 옷을 갈아입은 동생들이 나와서 재롱잔치를 벌였다.


“어떻소?”

“무슨 말씀이신가요?”

“내 동생들의 성취 말이오.”

“...또래에 비하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당신과 비교하면 어떻소?”


일부러 곤란한 질문을 했기에 레이시아가 살짝 나를 노려보았다.


“흐흐. 그렇게 노려봐도 예쁘니까 소용없소.”


이번에는 내 손을 살짜쿵 꽉 하고 잡았다.


“아!”

“아, 아팠어?”

“아니오. 흐흐. 장난이오.”


여기가 연회장이 아니라면 장난 좀 그만치라며 수련을 하러 가겠다고 했을 레이시아지만, 애석하게도 여기는 연회장.


“...제발 집중이나 하세요.”

“당신에게 말이오?”

“......”

“농담~. 앞에 잘 보겠소. 하하.”


팝콘 대신 레이시아와의 담소를 즐기는 동안에 막내 동생 데이지가 사뿐사뿐 걸어 나와서 이야기 했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구나.”

“저는 두 분의 오라버니들에 비하면 아직 부족함이 많기에 대련으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대련?”

“네! 허락해주신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후계자 때문에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제외하면, 충분히 귀여운 여동생의 당당한 요구에 백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허락을 했다.


“그래. 그럼 누구와 대련을 하고 싶으냐?”

“제이크 오라버니가 오랜만에 연회에 참가하셨으니까 같이 하고 싶어요.”


응? 누구? 나?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제이크랑?”


백작 역시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그래. 아저씨가 거절하면 그만이구나.’


순간 안심했지만, 그 사이에 데이지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다른 오라버니들은 이미 검무를 선보였으니 다시 부르기는 그렇고, 제이크 오라버니는 이번에 보면 또 언제 볼지 모르잖아요. 오라버니, 도와주시면 안 되세요?”


순진한 듯 말하지만, 어쩐지 악의가 느껴지는 것 같다.


‘...이거 백작 부인이 시킨 건가 본데?’


조금 전까지 백작 부인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품고 있었는데, 취소다. 에라, 아줌마는 복을 떠먹여줘도 못 받아먹겠네. 이쯤 되면 제 팔자다.


“데이지, 그렇지만...”


곤란해 하는 백작 대신에 내가 나서기로 했다. 젠장, 주목받는 건 싫은데 어쩔 수 없지.


“아버지.”

“...음?”

“제가 데이지와 이야기를 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나도 얌전히 맞고만 있는 스타일은 아니다. 감히 선빵을 날려?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니 백작 부인도 나서기는 애매할 거고, 데이지도 나와의 대화를 피하기는 힘들 거다.


‘내가 한수정만 20년 찬데, 너 같은 거 하나 상대 못할까.’


일단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데이지.”

“...네. 오라버니.”

“나와 대련을 하고 싶다고?”

“...네.”


데이지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한다.


“이런.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진작에 말을 해줬으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

“괜, 괜찮아요.”

“안 돼. 데이지는 알지 모르겠지만, 내가 데이지의 나이 때쯤에 오러홀이 망가졌었거든.”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했다. 오러홀이 망가진 건 제이크에게는 엄청난 상처였지만, 나에게는 조금 뼈아픈 스펙 손실에 불과하다. 데이지도 흠칫 놀랐지만, 다른 이들도 조금 놀랐나보다.


“그 후로 이 오라버니가 아주 오랫동안 검을 잡지 않았어요. 알고 있지?”

“...네.”

“그래서 데이지와 대련은 해주기 힘들 거 같아. 데이지가 바라는 건 지도 대련일 텐데, 오라버니가 그 정도 실력이 안 될 것 같거든. 혹여나 누가 다치면 어떻게 하겠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속상하실 거고. 나는 저기 있는 내 부인을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거든. 어때? 데이지도 이해해 줄 수 있지?”


내 말 반박 시 패륜에 불효녀 인정? 공감능력 떨어지는 사이코패스 인정?


“...아. 아.”


여기 세상의 남성들은 대개 자존심 빼면 시체다. 아마도 마물과의 오랜 투쟁에서 용맹함이 필수 덕목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세상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부모님을 걸고넘어지는 것을 12살 소녀가 감당할 수 있을까?


“동생아, 그 대신에 있잖아.”

“......?”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내 부인이 상대를 해주는 건 어떨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12살 소녀의 상대로는 괜찮다. 매일 익스퍼트 상급의 헤카인 경하고도 대련을 하는데, 이게 위험하다고 보면 진작에 검부터 뺏었을 터였다.


“...네?”


갑작스런 레이시아 소환에 당황한 데이지에게 빠르게 밀어붙였다. 한수정을 상대하면서 체득한 결론은 토론은 속도전이라는 것이다.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진짜 중요하다.


“데이지 너도 알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인이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실력도 대단하거든. 너에게는 새언니겠지? 음. 잘 봐둬. 나야 어릴 적에 겨우 반짝 했던 정도에 불과하지만, 내 부인은 진짜 정말 대단하거든. 혹시 데이지 너도 검을 목표로 한다면 내 부인을 목표로 삼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를 살펴도 우리 부인만큼 실력에 미모까지 겸비한 기사는 드물 걸? 아니, 없을 거야. 절대로.”


불쌍한 데이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흐흐흐.’


데이지의 뒤로 보이는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옆을 슬쩍 보니 백작 부인의 경우에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백작은 어이가 없는지 허허 웃고 있었고, 레이시아는 얼굴부터 시작하여 귀와 목덜미까지 모두 빨개져서 폭발 직전에 있었다.


‘팔불출이면 어떠냐. 나만 좋으면 됐지.’


어쨌든 닭을 잡기 위해 소 잡는 칼인 레이시아가 출동하기로 했다.


“...나중에 두고 봐요.”


오싹오싹한 것이 기대가 되면 변태 인정 각인가? 아무튼 레이시아가 준비를 하는 동안에 백작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몰래 말을 건네 왔다.


“...쯧쯧. 팔불출 녀석. 네가 이런 놈인 줄 몰랐구나. 창피한 줄 알거라.”

“아니, 뭐 어떻습니까. 부인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까? 그리고 제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제일 예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인정?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되었다. 말을 말자꾸나. 그런데... 그것도 밝힐 셈이냐?”

“뭐 말씀입니까.”

“그... 레이샤의 경지 말이다.”

“아. 뭐 이렇게 된 김에 밝히죠. 그 정도는 되어야 제 말이 거짓이 아니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일 예쁘다는 건 기정사실인가 보구나.”


일단 백작 부인보다 레이시아가 훨씬 젊고 예쁘니까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흐흐흐.”


그런 내 모습에 백작은 피식 웃고 자신의 친딸 데이지에게로 갔다.



* * *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은 레이시아가 준비를 하는 동안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내기 위해서 애를 먹어야 했다.


‘저 잡종 놈은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뭐? 미모와 실력? 대륙 전체... 오러홀도 망가진 쓸모없는 쓰레기에 고작 얼굴만 반반한 거지 년이 감히... 정말 집안 망신이야 망신. 천한 핏줄이니까 저렇게 천한 놈이 나온 거라고!’


원래 계획은 데이지와 제이크가 대련하게 만들어 제이크가 무력함을 다른 이들에게 내비치는 것. 그건 제이크가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며 더 이상은 기사가 아님을 인정하면서 어쩌면 목적을 충족한 건 아닐까 싶지만, 카니안은 제이크가 자신의 무력함에 비참해하는 것을 원했지 저렇게 당당하게 말을 하며 웃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누굴 가르쳐?’


물론 카니안도 레이시아가 제법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실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본인이 무시하고 싫어하는 상대가 자신의 딸을 지도 대련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쩌다보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 꼴을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에 카니안의 분노는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두고 보자. 오늘 일... 꼭 잊지 않겠다.’


그리고 그녀의 각오는 애석하게도 자의적인 아니라 타의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나는 지도 대련이라고 하더라도 드레스 차림으로 임할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레이시아는 의상을 갈아입고 왔다.


‘오우야.’


역시나 레이시아는 기사복이 잘 어울린다.


“아가씨, 편하게 마음껏 공격을 해도 좋아요.”


주저주저하는 소녀를 상대로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그렇다고 거만하거나 재수 없지는 않은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걸크러시 터진다.


“하앗! 하앗!”


비록 친모가 재수 없는 짓을 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객관적으로는 인형처럼 귀여운 소녀가 열심히 휘두르는 검을 여유롭고 부드럽게 받아주는 것도 너무 멋지다.


“오오오.”

“대단하군요. 어린 공녀도 제법이지만, 남작 부인은 적어도 중급 이상 같은데요.”

“아 모르셨습니까? 베렌 남작 부인은 이미 스무 살에 중급이었습니다.”

“허어. 스무 살이요?”

“네. 그런데 진짜 더 대단한건, 남작 부인이 원래는 몰락 귀족이었습니다. 타나티안 백작님이 후견인이긴 했어도 아무래도 제대로 가르칠 수는 없었을 건데, 그렇다면 별다른 지원 없이 혼자서 해낸 거라고 봐야죠. 사실 원래 북부에서 엄청 유명했던 여기사였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크흠.”

“허... 그랬겠네요.”


여기저기서 레이시아의 대단함을 알아본 이들이 칭찬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야 좀 더 소리 키워봐.’


사실 이건 2성 [소리의 정령]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얼음꽃인가?”


“크으. 저기서 어떻게 저렇게... 동작이 역시 유려하구만.”


“중급이라고 했어요? 제 눈에는 거의 상급 기사처럼 보이는데요?”


“와... 베렌 남작이 팔불출같이 자랑할 만하네... 크으. 부럽구만.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여보! 10년만 더 젊으면 뭐요?!”


아우 귀야.

레이시아가 일으킨 한 가정의 비극을 뒤로 하고,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타나티안 가문의 비련의 여주인공도 한 번 살펴보기로 했다.


“......”


꾹 다문 입술에 테이블 아래로 꼭 쥔 주먹은 백작 부인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게 왜 시비를 걸으셔서... 쯧쯧.’


물론 타나티안 백작가의 후계를 놓고 경쟁할 사이라고 하지만, 나는 정말로 페어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사실 내 능력 자체가 언 페어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치졸하게 선빵을 때릴 생각은 없었단 말이었다.


“허억 허억.”


이복동생 데이지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레이시아는 데이지가 부담스럽지 않게 공격을 잘 받아주고 있었으니, 공격자인 데이지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 쓰러진 것 같다. 지금껏 데이지를 가르친 이가 레이시아처럼 잘 받아주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없었을 이는 아닐 테니, 자기 딴에는 익스퍼트 중급이라고 생각되는 레이시아를 한 방 먹여보려고 쓸 데 없는 노력을 한 것 같다.


‘네가 무슨 죄니. 그냥 엄마를 잘못 만나서 그런 거지 뭐.’


절대로 패드립은 아니다.


“그만. 그만 되었다. 그 동안 열심히 했구나.”


백작이 대련의 끝을 알렸다.

지도 대련이니 어차피 승부로 갈릴 것이 아니고, 원래라면 지도를 받는 사람이나 지도를 하는 스승이 종료를 선언하는 것이 맞지만, 데이지의 입에서 그만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으니 백작이 부득이하게 개입한 것이었다.


“......”


백작의 말에 거친 숨을 내몰아쉬던 데이지는 입술을 옴짝달싹 하더니, 백작 부인을 흘끔 바라보았다.


“...네.”


그 후에 대답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역시 아빠보다는 엄마쪽의 영향을 많이 받는 아이였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만요. 아버지.”

“음?”

“죄송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내실 거 같아서요. 아버지 첫째 따님의 성취도 확인하셔야죠.”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제 부인 레이시아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딸처럼 아끼셨잖습니까. 아닙니까?”


갑자기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잠시 굳었던 백작은 피식 웃고는 답을 했다.


“녀석아. 깜짝 놀랐잖느냐. 나도 모르는 딸이 하나 더 있는지 알고. 농도 적당히 해야지. 네 어머니도 놀랐을 테니까 사과부터 하여라. 여기 계신 내빈분들께도.”


어차피 또 깜짝 놀랄 텐데, 굳이 놀라게 했다고 사과를 해야 하려나?


“모두들 죄송합니다. 제 아버지께서 제 부인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그리고 제 부인이 저희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를 오랫동안 옆에서 저는 지켜봐왔습니다. 그래서 조바심에 꺼낸 말에 놀라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당연히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여보, 알지?”

“...네.”

“모두에게 화끈하게 보여주시오.”


내 윙크에 레이시아는 살짝 째려보며 답을 했다.


“...나중에 진짜 두고 봐요.”

“그래요~. 우리 매일 보자고요. 평생. 오래오래~.”

“하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레이시아는 연회장의 가운데에 섰다. 조금 전의 소동들 덕분인지 모든 이들이 좀 더 레이시아를 집중하였다. 무대는 완벽히 갖춰졌다.


“백작님.”

“녀석아, 아버지라 불러야지.”

“...네. 아버님.”

“하하. 그래.”

“아버님의 돌보심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있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 참... 녀석, 별 말을 다하는 구나.”


짜고 치는 무대라고 해도, 레이시아의 말에 담긴 진심이 있기에 백작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옆에 있는 백작 부인의 얼굴이 붉어진 것과는 달리 말이다.


“그럼 간단하게 검무를 선보이겠습니다.”


검을 뽑아든 레이시아는 백작에게 한 번 검례를 올린 후에 뒤돌아서 연회객들에게도 검례를 올렸다.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레이시아는 천천히 검무를 시작했다.


‘오. 아름답다. 크. 이런 건 남들 보여주면 안 되는데...’


여기 세상에서 검무는 특별한 형식을 가진 연속동작이 아니라 기사가 즉흥적으로 자신의 오러의 흐름대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말한다.


이 세계를 이루는 특별한 에너지 마나는 신성력, 마법, 정령, 오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각 방식 안에서도 개인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마치 지문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다만 지문과는 다른 점은 혈통이 같은 이들끼리는 대개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오오.”

“유려하구나. 유려해.”

“얼음꽃이 아니라 봄바람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소?”

“쥬시트 남작가라고 했었나? 저런 재능이라면 왜 이름을 알리지 못했었지?”


익스퍼트 중급이라도 당연히 다 같은 중급은 아니다. 중급 간에서도 격차는 당연히 존재하고, 같은 레벨이라도 타고난 오러의 성질에 따라서 또한 격차가 생겨난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귀족들 대부분 레이시아의 정순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안정적인 오러가 자신의 혈통에 섞인다면 어떨지 생각해보지 않을까?


‘이미 레이시아는 내꺼지롱. 흐흐.’


그리고 부드럽게 진행되던 검무의 하이라이트가 찾아올 예정이었다. 온다. 큰 거 온다. 진짜 엄청 큰 거가 온다.


반짝반짝.


레이시아의 검이 서서히 빛을 발한다.


‘...왔냐?’


순식간에 연회장에는 정적이 흐르고, 잠시 후에 경악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검, 검기?!”


단순히 외부로 오러를 투사하는 경지를 넘어 신체가 아닌 냉병기에 오러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 바로 검기. 오러홀을 한 번 가득 채워야 올라설 수 있는 단계로, 대개 이 단계에서 기사는 폭발적으로 강해진다. 오러홀이 확장되면서 훨씬 더 많은 오러를 보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신체는 더욱 강화되고, 검기로 인해 마물에 대적할 수 있는 강도와 절삭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을 하자면...


‘중급과 상급은 한 끗 차이지만,’


활과 소총 이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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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029화. 22.01.21 48 0 24쪽
28 028화. 22.01.20 49 1 18쪽
27 027화. 22.01.19 54 1 21쪽
26 026화. +1 22.01.18 53 1 21쪽
25 025화. 22.01.17 61 1 21쪽
24 024화. +2 22.01.15 58 2 20쪽
23 023화. 22.01.14 57 1 23쪽
22 022화. +1 22.01.13 63 1 23쪽
21 021화. 22.01.12 59 1 24쪽
20 020화. 22.01.11 60 1 24쪽
19 019화. 22.01.10 66 1 20쪽
18 018화. +1 22.01.08 70 1 18쪽
17 017화. +1 22.01.07 70 1 19쪽
16 016화. +1 22.01.06 72 1 20쪽
15 015화. +1 22.01.05 71 1 21쪽
14 014화. 22.01.04 76 1 18쪽
13 013화. +1 22.01.03 81 3 18쪽
12 012화. 22.01.01 79 1 18쪽
11 011화. 21.12.31 80 1 16쪽
10 010화. +1 21.12.30 84 1 20쪽
9 009화. +1 21.12.29 92 1 16쪽
8 008화. +1 21.12.28 99 1 16쪽
7 007화. 21.12.27 97 2 15쪽
6 006화. +1 21.12.25 112 1 20쪽
5 005화. 21.12.24 131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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