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님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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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괴
작품등록일 :
2021.12.1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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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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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화.

DUMMY

어차피 오랫동안 영주가 없었던 베렌령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꼭 지키겠습니다.”


베렌령의 미래인 천재 여기사 레이시아를 가르치면서 많이 살가워진 헤카인 경이 나에게 다가와 립서비스를 날렸다.


‘이 양반도 많이 유해지셨네.’


처음에는 단단한 바위만 같았던 헤카인 경이 요즘은 농담도 부쩍 하고 그랬다.


“그럼요. 힐트렌 값은 하셔야죠.”


그 동안의 수고와 앞으로의 수고를 위해서 요직의 영지민들에게 뿌린 뇌물 겸 하사품. 당연히 그 대상자에 우리 레이시아짱의 과외 선생님이 빠질 수는 없었다.


“허허허. 네. 영주님. 값은 꼭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역시 헤카인 경도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다. 돈이나 권력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이더니 건강에는 많이 약한 것 같다. 레이시아라는 특별한 제자와 힐트렌 약초 덕분에 쉽게 공략이 되어버렸다.


“그럼 출발할까?”


레이시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출발!”


레이시아와 단 둘이 오붓하게 다니고 싶지만, 여기 세상은 교통도 불편하고 안전하지도 않는 세상. 병사들을 대동할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을 대동하는 김에 상단도 동행하여 판로를 알아보기로 했다. 때문에 비정기 상행처럼 대규모 단체 여정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덜컹덜컹.


나는 동굴에서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기절한 채로 베렌령에서 눈을 떴었기에, 제이크의 기억 속으로만 존재했던 여정의 첫 시작이었다.



* * *



판타지의 기본은 모험과 여정에 있다.


‘...라고 얘기했던 새끼 다 죽일 거야. 씨발.’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마차의 승차감은 현대식 이동수단의 승차감에 익숙한 내게는 놀이기구를 넘어 고문기구에 가까웠고,


“...하루 종일 달려야 한다고?”


유리 없이 나무로 꽉 막힌 마차라 달리는 동안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관광 및 맛집 투어를 하는 것도 더더욱 아닌 여행이 즐거울 리가 있겠는가.


‘이거 무슨 밀항하는 것도 아니고 뭐 이래?’


그렇다고 밀항의 끝에 자유와 미래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니만큼 여기 세상에서의 여행이란 썩 달갑지 않은 것일 수밖에 없다.


“제이야? 어디 불편해?”


물론 그건 레이시아가 없을 때의 일반론적인 이야기였고,


“응? 아니, 헤헤. 그냥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기분이 그렇네.”

“응. 그랬구나.”

“누나는 어때?”

“나?”

“응.”

“음... 난 잘 모르겠어. 오랜만에 백작님을 뵌다고 하니 기쁘긴 한데... 나는 이제 베렌령이 더 고향 같아. 네가 영주님으로 있는 곳이잖아. 나는 너의 기사니까. 내 고향은 이제 베렌령이야. 아니, 네가 있는 곳이야.”


와. 멘트 실화냐? 눈나 나 죽어. 레이시아의 달콤한 말에 나는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앗! 제이야?”

“허억. 나 심쿵사할 뻔.”

“...어?”


이게 아부가 아니라 본심이라는 점이 더 심멎 포인트였다. 그러니까 멀미유발 고문기구에 시달려도 레이시아와 함께 하는 여행은 신혼여행에 비교될 만큼 행복하다.


“영주님. 해가 떨어지려고 합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밤을 보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내게는 여행의 불편함을 감소해줄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있다.


“오늘은 여기서 자나 보네.”

“응. 주변에 몬스터는 없을 거야. 나는 나가서 순찰 한 번 돌고 올게.”

“잠깐! 멈춰! 누나! 내가 있잖아. 나 정령사라고.”


어깨를 한 번 으쓱.

오랜만에 내 여자에게 능력있는 멋진 모습을 뽐낼 찬스가 왔다.


“아...”

“기다려봐.”


[바람의 정령]은 가장 작은 마나로 가장 멀리까지 정찰이 가능한 정령이다.


“뭐 특별한 건 없는 것 같네.”


나스 대륙에서 노숙을 하기 전에 가장 번거롭지만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인 숙영지 주변 지역 정찰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이 났다.


“누나 나 믿지? 그러니까 정찰 갈 필요 없어. 자! 우리 누나 쉬어.”

“응. 후후. 편하긴 하다.”

“그렇지? 그러니까 진작에 나랑 같이 다니자니까. 거 봐. 아! 그리고 노숙 준비도 내가 할게.”

“응?”

“누나는 그냥 마차에 기다리고 있어.”


레이시아는 보물답게 마차에 딱 묶어두고, 나는 드웨인 선임병과 마리나 상단주와 함께 노숙 준비를 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네. 영주님.”


굳이 카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대지 정령으로 흙벽을 세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1차적으로는 북부의 찬바람을 막아줄 것이며, 2차적으로는 혹시 모를 외적의 공격 상황 때에 방벽이 되어줄 것이다.


“헉!”

“역시 정령사!”

“앞으로 영주님도 같이 상행 다니셨으면 좋겠다.”


거기에 임시로 화덕을 여러 개 세웠다. 조리용으로도 쓰고 난방용으로도 쓸 예정이다. 어차피 판매용 목재를 제외한 하레드 나무와 데트린 나무의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넘쳐났기에 땔감으로 쓸 건 충분했다.


“식수용 마차는 어디 있나?”

“네! 영주님! 여기 입니다!”


2성 편의시설 [식수대]에서 떼어온 금속 물탱크를 마차에 하나 연결해두었다. 중금속이 약간 걱정되긴 하지만, 시스템에서 식수대로 쓰는 건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나스 대륙에서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전과 더불어 물을 확보하는 것. 물론 환경오염은 없는 세상이라서 강이나 호수, 시내 어디든 물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강줄기를 따라 이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보통 물주머니로 사용하는 가죽이나 금속의 통은 무게도 그렇지만 장기간 보관 시에 변질의 이유로 물의 확보는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물의 정령아.”


2성 물의 정령의 오너인 나는 언제든지 깨끗한 물을 확보할 수가 있다.


“오오오.”

“엇?! 뜨거운 물이야!”

“뭐? 언제 뜨거운 물을?!”


나는 불의 정령의 오너였고, 식수통은 금속으로 이루어진데다가, 식수통이 연결된 마차는 불에 강한 하레드 나무이기에 물을 데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이! 말들 목부터 축여.”

“녀석들이 좋아 하겠는 걸?”


병사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다니며 말들을 돌보고, 천막을 치고, 저녁을 준비한다.


화르륵.


불의 정령으로 화덕들에 불을 붙여주고, 식사를 하고, 물의 정령과 청소의 정령으로 설거지를 도맡아 해주고, 바람의 정령으로 환기까지 모두 마친 이후에 비로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영주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영주님! 좋은 밤 되십시오!”

“영주님! 밤새 경계 잘 서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편히 주무십시오.”


경비병들의 열렬한 취침 인사와 함께 나는 다시 마차에 올랐다.


달칵.


의자의 등받이를 빼고 푹신한 가죽을 깔아놓은 마차는 비록 좁지만 따스하고 푹신한 침실로 변모한 상태. 나와 레이시아는 비록 위장이라도 공식적으로는 부부이기에 여행 중에 침실을 함께 쓰기로 했다. 물론 침낭은 따로 사용하겠지만, 그래도 손 뻗으면 닿을 공간에서 함께 잠을 잔다는 것이 어디인가.


“나 왔어.”

“...으응.”


아까 빛의 정령을 소환해두고 간 터라 밝은 마차 안에서 레이시아는 부끄러워하며 답을 했다.


‘억.’


레이시아가 그러니까 나도 막 부끄러워진다.


“씻, 씻을래?”

“어? 어... 아, 아까 물로 적신 수건으로 닦았어.”

“어... 맞, 맞네. 그거 내가 주고 나갔구나. 어. 그, 배는 안 고파?”

“...괜, 괜찮아.”


갑자기 빨간 레이시아의 입술이 맛있게 보이지만, 그건 지금 먹기에는 너무나 빨간 맛이다.


“...빨간 맛.”

“...어?”

“아?! 아, 아니. 아하하. 갑자기 엘피스가 먹고 싶어서... 하하.”


레이시아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마차의 구석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스럭.


살짝 등을 돌린 레이시아의 옆태와 뒤태가 너무 빨갛다.


“여, 여기 있어.”


그렇지만 오늘은 엘피스 열매로 만족해야 할 모양이다.


“하... 하하.”


달콤새콤한 엘피스의 향이 마차 안을 가득 메웠다.


“......”

“......”


잠시 후 빛의 정령마저 집으로 돌아가고 어둠이 찾아왔다.


“...자, 자자.”

“으응. 제이야, 잘 자.”

“어... 누, 누나도 잘 자.”

“으응.”

“어...”

“......”

“......”


으으으. 내가 생각했던 첫날밤은 절대로 이런 건 아니었는데...


부스럭.


레이시아의 침낭이 움직이는 소리에 나는 황급히 몸이 굳었다.


“어... 미, 미안.”

“아, 아니야. 왜? 불편해?”

“아니, 괜, 괜찮아.”

“어... 불편하면 말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알았지?”


물론 따로 자자는 말만 빼고 다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으응.”


레이시아는 곤란할 때나 부끄러울 때 조금씩 늘어지게 대답을 한다.


“...잘 자.”


잠깐의 침묵 뒤로 레이시아가 다시금 잘 자라는 인사를 했다.


“응. 누나도 잘 자.”


내가 그렇게 답을 하고 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꼼지락 꼼지락.


두꺼운 가죽 침낭 안에서 나도 애꿎은 온몸을 배배 꼬았다.


“......”

“......”


이건 뭐지? 사단장이 기습 방문해서 정훈교육을 받을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또 한 시간 남짓이 지났을까?


“...흐음.”


이러다가 밤을 새겠다 싶어서 나온 한숨에 레이시아가 들어가 있는 침낭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 누나 안 자?”

“...어? 어. 아, 아직.”


숨이 턱 막힌다.

레이시아는 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을까?

설마 레이시아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꿀꺽.


나도 모르게 삼킨 침 소리가 전장의 북소리만큼이나 큰 것 같다.


‘어이, 깜짝이야.’


심장도 미친 듯이 뛴다. 아까도 이미 속도위반 상태였는데 지금은 풀 악셀을 밟고 있는 것 같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레이시아에게 들리지 않을까?


“누, 누나.”

“...으응?”

“우, 우리 손만 잡고 잘까?”

“...손?”

“어. 어. 나 오랜만에 누나랑 자니까... 부끄러워서 그런지 잠이 잘 안 오네. 누, 누나 손잡고 자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안, 안 될까?”


사실 손만 잡고 자자는 말은 여기 옆에 누워서가 아니라 숙소를 잡을 때 하는 말이지만,


“...그, 그래.”


어쨌든 통했다.


“고, 고마워!”

“아, 아니야.”


언제부터 말을 더듬는 전염병이 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다.


“그, 그럼 나 손 내밀었다.”

“...으응.”


어둠 속에서 따스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내 손을 잡았다.


헉.


손에서 시작한 짜릿함이 온몸을 한 바퀴 돌더니 심장을 거칠게 폭행하기 시작한다.


‘우와 미치겠다.’


나대지 말라고 이 심장 녀석아.


쿵 쿵 쿵 쿵.


사실 처음에는 아래부터 반응할 줄 알았는데, 아랫도리보다 심장이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 이로서 확신할 수 있다. 이건 성욕이 아니라 찐사랑이다. 머리가 하얘지는 것을 보니 이성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진짜 사랑이다.


“...괘, 괜찮아?”


진짜 심장이 펑하고 터질 것 같지만, 막상 터지지는 않고 있으니 괜찮다고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으, 으응. 괜, 괜찮아.”


남자니까 힘을 내서 괜찮다고 답을 했다.


‘거 참 이상하네.’


낮에는 심심하면 잡는 레이시아의 손이건만, 지금은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이것이 원효대사의 해골물인가?’


그렇게 깨달음을 얻는 대가로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잠들 수가 없었다.


‘...손만 잡고 잔다고 했는데, 잠을 안 잤네.’


그래도 그와 같이 눈 감은 채로 별을 헤는 밤을 사나흘 정도 하고 나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잠을 잘 수 있기는 했다.



* * *



북부의 패자 타나티안.


비록 아델린 왕국을 세운 영웅 아델린보다야 못하지만, 한 자루 검과 함께 왕국의 북부를 지켜낸 타나티안 역시 충분히 영웅의 반열에 오를 인물이었다. 그의 후손들인 타나티안 가문은 영지가 척박하고 자원이 부족하기도 하여 백작가에 머물러 있지만, 영지 전체의 힘이 아닌 가문의 전력만으로는 공후작가가 부럽지 않은 강력한 기사 가문이었다. 비록 얼마 전에 가문의 참사와 사고가 여러번 겹치는 비극으로 인해서 그 전력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아델린 왕국의 북부에서 가장 첫째가는 가문은 역시나 타나티안 백작가문이었다.


“뭐?! 제이크가 온다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현 타나티안 백작가문의 안주인.


“예, 예. 마님. 이번에 백작님의 생신에 맞추어서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합니다. 도, 도련님과 레이시아 기사님의 결혼 소식을 듣고 백작님이 먼저 보고 싶다고 서, 서신을 보내신 것으로...”


저택의 침소를 정리하는 하녀가 움찔거리며 답을 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나가봐.”

“네. 마, 마님.”

“잠깐!”

“네?”

“앞으로도 잘 보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냉큼 달려와서 보고하여라. 알았어?”

“네. 네. 마님.”

“그래. 빨리 가봐.”


하녀가 후다닥 나간 후에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은 테이블을 꽝 하고 내려쳤다.


“지긋지긋한 잡종 버러지! 기껏 내보내놨더니 또 뭘 주워 먹으려고 오는 거야!”


십 수 년에 걸쳐서 힘겹게 기껏 쫓아냈더니 1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집으로 온다고 한다. 물론 부친의 생일 축하 및 결혼 축하라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걸 빌미로 남편의 마음이 다시 바뀔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나스 대륙에서 가문의 후계자 결정은 누가 뭐래도 전적으로 가주의 결정에 달린 것이라 카니안 타나티안은 불안감에 짜증을 내었다.


‘...설마 진짜 아니겠지?’


비록 정략적인 선택과 부친의 강압에 의한 결혼이었지만, 한때는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던 남편 데이안 타나티안을 떠올렸다.


“...그래도 양보 할 수 없어.”


데이안 타나티안에게는 미안하지만, 덴프 후작가에게는 평생의 숙원이 달린 문제였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은 후작가에서 데리고 온 심복 기사를 불렀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오래 전 결혼해서 아들 둘에 딸 하나를 가진 카니안이지만, 어릴 적부터 그녀를 돌봐온 기사에게는 여전히 아가씨였다.


“에르멜.”

“네. 아가씨.”

“혹시 들었어? 그 잡종이 집에 온다나봐.”

“잡종이라면...?”

“제이크 그놈 있잖아.”


제이크의 친모 일레인은 하프 엘프. 게다가 그녀는 귀족 출신도 아닌 떠돌이 모험가 출신이었기에 카니안은 곧잘 제이크의 친모이자 남편의 전 부인을 낮잡아 보고 있었다.


“으음. 베렌 남작 말씀이시군요.”

“그래. 기껏 그리로 보내놨더니 집에 온다잖아. 그리고 걔 있잖아. 잡종 옆에 거지.”

“...레이시아 경 말씀이신가요?”

“걔가 경은 뭔 경이야.”

“네. 아가씨.”


왕국 기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레이시아는 몰락이라도 엄연히 귀족이기도 하니 거지가 아니라 경이라는 칭호를 들어야 마땅하지만, 모시는 아가씨의 성미를 잘 아는 기사 에르멜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답을 했다.


“그 거지년이랑 잡종이랑 결혼을 했다지 뭐야.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딱 그 모양이지 뭐야. 아무튼 그 핑계로 이번에 온다나 봐. 에르멜, 잡종은 물론이고 그 거지년도 남편이 친구의 딸이라고 애지중지 아꼈었잖아. 이번에 결혼까지 했다니까 혹시라도 미련이 생겨서 번복하지는 않겠지?”


세 아이의 어머니라고 해도 여전히 어릴 때와 같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에르멜은 침착하게 달래듯 답을 했다.


“아가씨,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이크 공자는 이미 베렌 남작이지 않습니까. 만약 여기서 다시 후계 문제를 돌린다면 왕국법상으로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왕국법상 두 개의 영지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누가 그걸 몰라?! 베렌령을 포기하면 되잖아! 그 쓸모없는 땅이 뭐가 아깝겠어!”

“네. 아가씨,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왕국법상의 영지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국왕의 재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짜증과 불안감에 인상을 쓰고 있던 카니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그래! 지금 국왕이 위독하지?!”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몸이 안 좋아도 국무를 곧잘 보던 국왕 트레센이 쓰러진 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일. 사실 카니안도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오랫동안 속을 썩이던 제이크의 재등장에 잠시 정신을 놓아서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만약에 베렌령을 반납한다고 하더라도 아버님이 막아주시겠지?”

“네. 아가씨.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호호. 그렇구나. 어차피 그 잡종 놈이 돌아와도 별 수가 없겠구나? 호호. 괜히 걱정했잖아.”


걱정을 덜어낸 카니안은 생글생글 미소를 되찾았다.


“에르멜.”

“네. 아가씨.”

“그래도 그것들 때문에 잠깐이라도 걱정했던 것이 너무 기분 나빠.”

“......”

“망신이라도 줘야겠어.”

“망신이라시면...?”

“남편이 몇 푼 쥐어줬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래 봤자지 뭐. 거지 걔도 얼굴만 반반했지 돈 한 푼 없잖아. 그래도 자기 부친 생일이라고 어쭙잖은 선물을 가져올 텐데,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망신 주기에는 그게 딱이지 않겠어? 그날 참여할 이들에게 따로 연락 돌려. 그날의 성의를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겠다고 해. 알았지?”


사교의 장이 드문 북부에서 1년에 딱 하루, 타나티안 백작의 생일은 북부의 모든 귀족이 모이는 날이다. 북부에 영지를 가진 다른 대귀족들과, 타나티안 가문에 종속된 가신들의 숫자만 60여 명. 보통 후계자나 가족들을 동반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백 명이 넘는 이들이 모이는 거대한 사교 무대가 조만간 펼쳐질 예정이었다.


“아!”

“......”

“그리고 그 얼굴 반반한 년 있지. 그년 그래도 꼴에 인기가 좋았었잖아. 그년이랑 잡종이랑 결혼했다는 거 비밀로 하자고. 그러면 재미난 일도 있지 않을까? 혈기 넘치는 젊은 것들이란 조금만 부추겨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그렇지?”


에르멜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내색하지 않았다.


“호호호!”


주제도 모르고 지금까지 자신의 속을 썩였던 잡종과 얼굴만 반반한 거지년에게 망신을 줄 생각에 카니안 타나티안 백작 부인은 광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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