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4 09:05
연재수 :
962 회
조회수 :
4,127,814
추천수 :
127,041
글자수 :
10,687,409

작성
22.05.14 10:00
조회
6,379
추천
176
글자
21쪽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농가를 둘러싼 목가적인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이 같은 목가적인 분위기 연출은 뒤에 올 반전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예를 들어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가족은 드넓은 옥수수 밭을 배경으로 시골 농가에서 살고 있다.

평온하고 목가적인 주인공의 농가와 옥수수 밭에 모래폭풍이란 재난이 닥친다.

그 순간 관객들의 낭만적인 환상은 산산이 부서지며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비슷한 맥락이다.

류지호는 <내 삶의 물고기>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강조함으로써 반전의 노림수를 가져갔다.

그와 함께 화면에는 어딘지 공허함과 슬픔이 묻어있는 것도 같았다.

류지호의 역량이 아니다.

전적으로 16mm의 거칠고 투박한 화질의 특성이 컸다.

오전 촬영은 밀레의 ‘만종’ 그림을 모티브로 했다.

그림에는 담기지 않은 낮의 감자밭 풍경.

교회에서 종을 치기 전.

그러니까 그림에서 드러나지 않는 아침을 먹고 들녘으로 나가 고된 농사일을 하는 부부의 노동을 묘사하려고 한 것이다.

이 장면은 타임랩스(time-lapse)로 촬영하기로 했다.

타임랩스는 저속촬영을 하게 된다.

촬영속도를 대폭 낮춰서 찍는 것이다.

이렇게 찍은 것을 정상속도로 재생하면 화면이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원리다.

사람이 많은 도시 풍경을 촬영 했을 경우에는 짧은 시간 촬영에도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그런데 단순한 자연 풍경을 촬영할 경우에는 다소 긴 촬영시간이 필요하다.

지난밤의 별 빛 가득한 하늘을 촬영했다면 고감도 필름과 밝은 렌즈 혹은 특수한 필터를 사용해야했다.

지금은 대낮에 맑고 쾌청한 날씨다.

시원한 풍경을 저속촬영 할 생각이었기에 광각렌즈를 달았다.

물론 16mm 렌즈는 35mm 시네마 렌즈보다 화각이 훨씬 좁다.


“Good job! Boy!”


들녘과 농가 앞에서 촬영을 마쳤다.

야외 촬영을 모두 마쳤기에 일단 학교로 돌아갔다.

일주일이 흐른 후 다시 돌아온 주말에 캘리포니아 중부 산 호아킨 밸리(San Joaquin Valley)에서 다시 촬영을 이어갔다.

세계의 음식 바구니.

산 호아킨 밸리의 별명이다.

캘리포니아 최대 와인 생산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의 파커 필드 소유 농장에서 농가 장면을 찍었다.

류지호는 화려한 형식미를 최대한 절제했다.

건조한 자세로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농부의 아낙으로 출연한 여배우는 체구가 펑퍼짐하고 얼굴은 네모나며 눈동자는 탁하고 진한 회색이다.

시골생활에 찌든 아낙으로 분장을 해서인지 더욱 우울하고 감정이 마모된 중년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낸시가 센스가 있네.’


시나리오를 해석해 나름 배우를 캐스팅해 온 것이나 분장을 한 것이나.

연기까지 썩 나쁘지 않았다.

여배우를 통해 낸시의 안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촬영을 진행하는 농가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농가다.

식탁보는 얼룩진데다가 올이 다 드러나 있다.

모서리에 담배로 지진 자국과 뭔가에 부딪쳐 깨진 자국들이 있는 싸구려 서랍장이 거실의 유일한 가구다.

근처 농가에서 가구들이나 집기를 조금 빌려 빈 공간을 채웠다.

집안 전체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는 조명으로 연출했다.

UCLA 학생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조명기자재를 쓰는 건 아니다.

1kw 텅스텐 라이트 두 대.

대도(상표이름)와 주피터 라이트 세트를 빌렸다.

주피터 라이트는 사각형 케이스에 전구 두 개가 끼워져 있는데, 램프를 교환해 텅스텐(전구색), 데이 라이트(백색광) 두 가지로 사용할 수 있다.

하드 조명으로 조도가 강해서 보통 디퓨저 등으로 빛을 조절하여 사용한다.

가격이 저렴한 편이지만 발열이 심해서 전력을 많이 먹는 편이다.

류지호는 화려한 조명으로 뭔가 인위적인 그림을 만들지는 않았다.

거실은 전체적으로 어둑하고, 살짝 차갑게 느껴지도록 세팅했다.

창밖에 조명을 배치해 실내로 빛이 들어오도록 배치했는데, 창가와 실내 깊은 곳과의 콘트라스트 정도만 신경 써 세팅했다.


“너무 노멀하지 않아?”


기본 조명만 친 다소 심심한 실내 분위기를 보며 로이가 물었다.


“로케이션에서 찍은 영상이 예뻐서 실내는 조금 담백하게 가려고.”


연출적인 것만 놓고 보면 영화가 주는 전달력이 사실적인 연출에 있다고 믿는 감독이 있고, 관객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세계를 구현하는 연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전자를 선택했다.

특별히 멋을 부리지 않았다.

색감도 무채색으로 담백한 영상을 의도했다.

지금까지 류지호가 작업한 두 편의 단편은 화려했다.

상당히 화려했다.

<영정사진>은 치밀하게 미장센을 계산해 완성도에 꽤 공을 들였다.

<Help Me, Please>는 핸드헬드와 데이 포 나이트 같은 기법을 동원해 현란한 영상이 압권이다.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치 영화를 처음 배울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영화를 배우는 학도(學徒)의 습작.

장편으로 가기 전 단계.

이 같은 표현은 단편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말일 수 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영상예술분야이니까.

사실 단편영화는 그것만의 호흡이나 이야기 구성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한없이 자유롭다.

그것이 단편영화의 매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찍는 것이 작품이 될 순 없다.

그저 낙서일 뿐이다.


❉ ❉ ❉


세편의 일상 시리즈 중에 가장 먼저 완성한 <내 삶의 물고기>를 UCLA에서 사귄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거창하게 시사회를 연 것은 아니다.


촤르르륵.


언제 들어도 정겨운 필름 돌아가는 소리.

오프닝 로고도 크레디트도 없다.

10. 9. 8. 7....

카운트다운 필름 리더가 끝나고 곧바로 영화가 시작됐다.

중년 부부가 너른 들판에서 잡초를 낫으로 베고, 땅을 고른다.

아침부터 석양까지 타임랩스로 보인다.

화면이 정상속도로 바뀌며 밀레의 ‘만종’ 그림을 연상시키는 부부의 기도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서 은은하게 ‘댕댕댕‘ 종소리가 들린다.

화면이 암전되었다가 밝아진다.

아직 영화 타이틀이 들어가 있진 않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남부 농장이 보인다.

그런 목가적인 풍경 속에 평범하고 소박한 집 한 채.


치이익.


농부의 아내가 달궈진 프라이팬에 팬케이크를 굽는다.

요리가 완성되자, 그녀는 지체 없이 주방을 나와 거실로 향한다.

거실 식탁에는 남편이 창밖에 멍한 시선을 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실내는 어둡다.

창가 쪽만 밝다.

식탁에는 지저분한 접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내가 다소 무성의한 태도로 식탁에 놓여있는 접시 위에 팬케이크를 덜어준다.

팬케이크를 접시에 더는데 사용했던 포크까지 놔두고 다시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농부 남편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포크로 팬케이크를 하나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맛?

없다!

그저 살기 위해 먹는 것 뿐.

음식을 먹는 행위에 어떤 즐거움도 의미도 없다.

아침식사 자리에서 아내와의 정겨운 대화도 없다.

한 화면에 잡힌 두 사람의 거리만큼 이 중년 부부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


농부 남편이 집을 빠져나와 한편에 걸려있는 자신의 키만 한 거대한 낫을 챙긴다.

시종일관 무표정하고 기운 없다.

그 정도가 아니다.

어떤 의욕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농부 남편이 거대한 낫을 어깨에 턱 걸치고 집을 나선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거대한 낫은 남자의 등을 찌를 것처럼 어딘지 불안해 보인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문화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신(死神)을 커다란 낫(Scythe)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낫으로 인간의 생명을 마치 농작물을 베듯이 베어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졸졸졸.


농부 남편이 집을 벗어나 개울가로 다가간다.

널빤지가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


문득 개울물에 시선을 던진다.

농부 남편은 개울을 건널 때마다 개울 속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매일 똑 같은 풍경, 똑 같은 생활, 똑 같은 음식, 똑같은 노동, 똑 같은 버릇.

농부 남편에게 그 모든 환경은 지루하고 따분하며 재미없다.

그런데 류지호가 촬영한 캘리포니아 북부 농업지대 들판 풍경은 꽤나 아름답다.

세 번.

매일매일 반복되는 농부 남편의 이런 일상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앵글도, 구도도, 화면 사이즈도 모두 동일하게.

지금까지 몇 분 흐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관객마저 지루해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일상을 보여주다가 길게 암전된다.

밝아진 화면의 풍경은 이전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

단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그렇게 인식했다.

류지호는 반복 된 세 번의 일상과 이번 영상의 화면 구도와 사이즈를 미묘하게 다르게 촬영했다.

로이 역시 포커스풀러를 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아주 미묘한 변화다.

때문에 관객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우우우.


관객들의 야유가 흘러나왔다.

예의가 없는 행동일까.

대부분 친구들이라 상관없다.

게다가 국제영화제는 현장에서의 관객 리액션이 이 보다 더 했다.

사실 류지호 본인도 인정하고 있다.


‘반전이 있기 전까지는 재미가 없긴 하지.’


여전히 아내가 팬케이크를 가져오고, 남편은 맛없는 팬케이크를 압 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오늘을 이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농부 남편은 집을 빠져나와 여느 날처럼 거대한 낫을 어깨에 걸치고 집에서부터 멀어진다.

이전에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커트다.

뭔가 달라질 앞으로는 암시하는 거다.

거대한 낫을 어깨에 걸치고 개울에 놓인 널빤지 다리를 건너는 남편 농부.

그는 항상 개울을 건널 때 마다 습관처럼 물속을 들여다본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이 개울은 그가 태어나서 오늘 날까지 매일 밭으로 향하며 지나치는 곳이다.

버릇처럼 개울을 건너던 남편의 시야에 물고기 한 마리가 노니는 모습이 보인다.


[......!]


의욕 없고 열정 없던 농부 남편의 얼굴에 처음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화면을 보게 된다.

바로 농부 남편을 가슴부터 잡은 바스트 쇼트(B.S)다.

녀석을 잡아 구우면 매일 아내가 해주는 맛없는 팬케이크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오로지 온 정신을 나무막대기와 물고기에 집중한다.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의 유일한 농부 남편의 얼굴 클로즈업(C.U)이 등장한다.


[.....!]


무언가를 갈구하는 열정 넘치고 표정.

농부 남편이 힘차게 막대기를 위로 들어올린다.

나무막대기의 끝으로 팔뚝만한 물고기를 사정없이 찍어버릴 태세다.

거대한 낫의 크고 날카로운 날이 자신의 뒤통수에 위치한 것도 모르고 나무막대기의 끝을 물고기를 향해 내려찍는다.


싹둑!


나무막대기 끝에 달려있는 거대한 낫이 농부 남편의 목을 잘라버린다.


퉁!


남편의 목이 분리되어 날아가는가 싶더니 동시에 남편이 털썩 무릎을 꿇는다.


푸아아악!


이어서 잘린 목에서 붉은 피가 품어져 나온다.


풍덩.


잘린 목이 물고기가 노릴 던 개울물에 빠진다.


풀썩.


그리고 목이 잘린 남편의 시체가 잡풀 사이로 쓰러져 자취를 감춘다.


“......?”


영화는 한동안 수풀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여준다.

슬픔을 느끼기 보다는 뭔가 씁쓸하다.

아니 허무한 것인가?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았다.

에필로그다.

홀로 남겨진 아내.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낫과 바구니를 챙겨 밭으로 향한다.

남편이 했던 똑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바뀐 것은 바구니가 하나 추가 된 것 뿐.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는 화면에서 남편은 사라지고 기도하는 아내만 있다.

바구니를 덮고 있는 보자기를 치우면 드러나는.... 구운 생선!


짝짝짝.

휘이익.


재미가 있어서 친구들이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드디어 영화가 끝이 난 것에 대한 환호일지도 몰랐다.

암튼 러닝타임 10분 안팎의 단편영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일상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함, 지겨움, 평범함을 담고 있다.

그런 일상에서 과연 삶은 의미가 있을까.

주인공이 우연히 발견한 물고기.

무의미한 반복의 굴레에서 찾아온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지긋지긋한 일상을 끝내기 위해 찾아온 불행이었을까?


“.....”


시사를 본 친구들은 박수는 치지만 뭔가 알쏭달쏭한 기분이 드는 모양이다.

그도 아니면 허무한 감정이 들고 있을지도 모르고.

작품에 참여한 친구들이 키득거렸다.

자신들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피식.


류지호도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영화다.


❉ ❉ ❉


<내 삶의 물고기> 후반작업을 하는 사이 중간고사가 치러졌다.

류지호는 단편영화 작업을 한다고 해서 수업을 빼먹거나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름 수업 준비도 열심히 했고, 수업을 들으며 딴 짓을 하지도 않았다.

두각을 나타낼 만한 성적 같은 것은 기대 안 한다.

졸업에 지장이 없을 수준만 유지하면 만족이다.


‘솔직히 벅찼지.....’


당연한 거다.

류지호는 한 번 보고 들은 걸 단번에 이해하는 천재가 아니다.

영화에 관한 지식을 제외하고, 류지호가 또래보다 특출 난 것도 없다.


“조금 쉬어. 무리하는 거 아냐?”


곁에서 지켜보는 낸시는 류지호가 걱정됐다.

단편영화 작업을 잠시 내려놓긴 했지만, 류지호가 시험기간 너무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꾸준한 운동으로 류지호의 체력이 좋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간혹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가 있었다.


‘후우. 관장님께 배운 호흡법이 무협지에 나오는 내공심법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류지호가 이번 학기에도 듣고 있는 스페인어 수업은 매일 간단한 퀴즈 시험을 봤다.

나름 수업 전에 미리 준비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경호원 티노와 자주 스페인어 대화를 나누고 있기도 했고.


‘미국 대학은 뭐 이렇게 시험이 많아.’


자신이 수강신청을 잘 못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밀려왔다.

류지호가 듣는 세 과목 모두 시험이 많았다.

일주일 동안 배운 것들을 월요일 퀴즈로 시험을 치르고, 매달 한 번씩 시험을 봤다.

중간고사는 과제 제출로 대신하지만 기말고사는 시험을 봤다.

매 주 시험, 매달 시험, 학기말 시험 그리고 과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모든 시험성적을 다 종합해 학기 말 성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한다.

그 때를 누가 정하는 것일까.

기원전 6세기 공자가?

아니면 그의 제자들이?

물론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공부할 ‘때’를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그 ‘때’에 노력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진정한 공부는 꼭 학교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평생교육이란 말도 있지 않나.

공부는 앎에 대한 진지한 욕망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므로.

류지호는 한창 단편영화에 물이 올랐다.

단편영화에 대한 목마름.

욕망도 끊어 오르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다.

따라서 류지호는 학교 공부를 조금 줄이고 단편영화 작업에 가속 페달을 밟았다.


❉ ❉ ❉


LMI(Light & Magic Industry).

블루스카이 스튜디오(Blue Sky Studios).

보스필름 스튜디오(Boss Film Studios).

현재 할리우드의 VFX 업계를 대표하는 회사들이다.

그 외 리듬 앤 휴즈(Rhythm & Hues Studios) 정도가 기술력이나 실적에서 3강들과 견줄 만 했다.

제이미 캐머론의 ‘디지털 도미니언(Digital dominion)‘과 로비 잭슨의 웨타 스튜디오(Weta Studios)는 아직 설립 전이다.

<매트릭스>를 작업하게 될 ’문크레센트 스튜디오‘ 역시 설립되려면 멀었다.

내년 말 즈음 소닉-콜롬비아스에서 <터미네이터2>의 흥행을 부러워하면서, ‘이미지 웍스(Sonic Imageworks)’라는 VFX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워너타임 엔터테인먼트 역시 자체 VFX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긴 했다.

업계에서 크게 주목받는 회사는 아니다.

류지호는 현재 할리우드의 VFX 기술 수준이 궁금했다.

그래서 단편영화에 CGI를 넣어보기로 했다.

영화 자체보다는 미국의 대략적인 CG 수준을 경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CG는 아니다.

어떤 공정으로 얼마의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지 감 잡을 정도.

그를 위해 고만고만한 광고업체 한 곳과 시각효과 계약을 했다.

현재는 미국에서조차 예산규모가 큰 블록버스터에나 컴퓨터 그래픽이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CGI는 주로 광고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번에 류지호가 찍을 단편에서 CG기술이 들어갈 장면은 사람이 불에 타올라 재로 산화하는 장면이다.

쉽게 말해, 영화 <블레이드>에서 뱀파이어가 은도금 칼이나 총알에 맞아 불꽃처럼 흩어지는 장면 정도를 구현 해보고 싶었다.


타이틀 <이카루스>.


태양.

스스로 빛을 내는 별.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은 지구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에너지이다.

그러나 태양에 다가가면 어떤 것이든 타버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단편영화를 위해 류지호와 친구들이 모하비 사막에 왔다.

이번에도 류지호가 직접 촬영했다.

카메라는 모래 황무지를 잡고 있다.


휘이잉-


바람이 황무지를 훑고 지나가며 모래 먼지를 피워 올린다.

광활하게 펼쳐진 황무지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턱!


불쑥 화면 안으로 작업화가 들어온다.

작업화는 헤지고 낡고 지저분하다.

작업화를 신은 남자가 화면 안으로 들어와 저 만치 모래 황무지의 구릉으로 향해 걸어간다.

화면을 등지고 있는 남자 너머에는 거대한 태양이 떠있다.

강렬한 태양빛.

태양은 당장에라도 남자를 집어 삼킬 것처럼 거대하다.

남자는 마치 태양을 향해 걸어가는 것만 같다.

이카루스(Icarus)처럼.


터벅터벅.


남자가 모래 황무지의 구릉을 힘겹게 올라간다.

점점 태양과 가까워진다.

마침내 남자가 구릉의 정상에 우뚝 선다.

도달할 수 없는 태양에 대한 열망일까.

아니면 좌절일까.


부르르.


남자가 몸을 떤다.


번쩍.


갑자기 남자가 양팔을 들어올린다.


순간.


남자가 활활 불타오른다.

그리고 사방으로 비산하는 불꽃같은 재만 남긴다.

태양에 도전했다 불타버린 남자.


빵!

빵!빵!


뭐지?

난데없이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이 전환되면 - 황무지에 정차하고 있는 픽업트럭이 보인다.

픽업트럭은 매우 낡아서 언제 퍼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트럭의 운전석 문을 열어젖힌 멕시코 여자가 황무지 구릉을 향해 스페인어로 소리친다.

그녀의 옆으로 어린 여자아이가 삐죽 고개를 내민다.


[엔리케! 얼른 와요.]


다시 화면이 구릉으로 바뀐다.

태양빛에 산화했던 남자는 멀쩡했다.

남자가 바지의 지퍼를 추켜올리며 돌아선다.

장거리 운전 동안 방광에 가득 차있던 소변을 배출한 것이다.


[알았어. 간다고. 가!]


턱수염을 까끌까끌하게 기른 멕시코 남자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구릉을 내려간다.

픽업트럭으로 돌아온 남자를 향해 여자가 스페인어를 쏟아낸다.

잔소리다.

남자가 멕시코의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sombrero)를 다시 쓰고, 트럭을 출발시킨다.

차 안의 남자의 시선에 도로 한편에 세워진 표지판이 보인다.


MEXICO. ONLY.

NO USA RETURN.


미래에 등장할 어떤 미국대통령의 정책을 풍자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카루스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그저 개그물이다.

이곳으로 가면 미국으로 오지 못한다.

마치 멕시코로 향하는 것은 무언가 힘겨운 세상으로 가는 것이고, 미국으로 가는 것은 구원의 손길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미국인들에게는 별 것 아닌 표지판일지 모른다.

이방인 류지호는 왠지 미국의 오만함을 엿본 것 같아 저 표지판을 처음 봤을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배우가 출연하는 촬영은 모하비 사막에서 모두 마쳤다.


“수고했어요.”

“또 불러주세요. 어떤 배역도 마다하지 않아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작부 역할을 하는 낸시가 출연자들을 배웅했다.

두 무명배우의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아 낸시의 얼굴에 그늘이 잠시 드리워졌다.

배우들이 떠나고 류지호와 친구들은 CG 배경 소스를 촬영했다.

모하비 사막에서 구릉을 배경으로 한 컷.

그리고 태양 클로즈업 소스를 촬영했다.


‘Jay는 하고 싶은 걸 다 해볼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할까.....?’


불행은 남과 비교하기 시작할 때 고개를 내미는 법이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볼 수 있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실컷 해보고 싶은 것을 해봤는데 결국 허무함만 남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류지호라고 해서 모든 걸 다 해볼 순 없다.

아직까지는.


작가의말

주인공의 단편 모티브가 되었던 리투아니아의 단편영화 The Fish of My Life‘는 비메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가 궁금하시면 비메오나 구글 동영상 검색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85 Life Goes On. (2) +7 22.06.07 6,015 193 25쪽
184 Life Goes On. (1) +9 22.06.06 6,199 194 26쪽
183 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3) +7 22.06.04 6,157 200 22쪽
182 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2) +10 22.06.03 6,215 190 26쪽
181 만능이 되어볼까 합니다. (1) +8 22.06.02 6,277 169 23쪽
180 가진 것이 없어도 가치 있게 살아라. +13 22.06.01 6,294 191 27쪽
179 할리우드 파티는 비즈니스의 연장선. (2) +9 22.05.31 6,256 177 25쪽
178 할리우드 파티는 비즈니스의 연장선. (1) +6 22.05.30 6,401 177 23쪽
177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4) +7 22.05.28 6,362 181 26쪽
176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3) +9 22.05.27 6,308 181 25쪽
175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2) +4 22.05.26 6,287 179 21쪽
174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다! (1) +13 22.05.25 6,429 184 24쪽
173 우리는 항상 승자 쪽에 있어야 한다! +5 22.05.24 6,495 180 25쪽
172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5) +11 22.05.23 6,515 200 24쪽
171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4) +7 22.05.23 6,257 165 21쪽
170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3) +8 22.05.21 6,673 177 25쪽
169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2) +7 22.05.20 6,638 188 25쪽
168 넝쿨째 굴러 들어온 복. (1) +6 22.05.19 6,669 179 23쪽
167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7) +9 22.05.18 6,280 191 24쪽
166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6) +5 22.05.17 6,336 167 23쪽
165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5) +7 22.05.16 6,328 174 23쪽
»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4) +6 22.05.14 6,380 176 21쪽
163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3) +6 22.05.13 6,367 159 22쪽
162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2) +9 22.05.12 6,541 172 22쪽
161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1) +9 22.05.11 6,716 179 22쪽
160 클레르몽-페랑(Clermont-Ferrand). +8 22.05.10 6,774 182 25쪽
159 괜찮은 인디배급사 하나 인수합시다! +14 22.05.09 6,876 182 30쪽
158 부자(父子)에게 부자(富者)란..... +8 22.05.07 6,895 184 23쪽
157 나 홀로 집에서 늑대와 춤을! (3) +6 22.05.06 6,866 187 26쪽
156 나 홀로 집에서 늑대와 춤을! (2) +9 22.05.05 6,863 191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