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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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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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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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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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DUMMY

“으음.”


리아는 멋을 중시한 딱딱한 의자에 앉아, 마찬가지로 멋을 중시한 고풍스러운 테이블을 노려놨다. 아니, 정확히는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노려보았다.



“제국까지 왔는데 열심이로구나.”


혼자 끙끙거리는 모습이 신경에 쓰였는지 델리안이 곁으로 다가왔다.



“모처럼이니까요. 여긴 별로 감시도 없어서 맘도 놓이고요. 그리고······ 어차피 루비아 씨도 주무시잖아요?”


그랬다. 황제와의 대화를 마친 루비아는 여행길의 피로가 몰려왔는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라프리트와 아이리스, 이 둘과 함께 돌아다니고 싶긴 했다. 그러나 혼자 남겨두고 간 사실을 알게 된 루비아의 뒷감당이 무섭다.


덕분에 할 일이 없었고, 이렇게 방에서 얌전히 도면 같은 걸 그리고 있던 것이었다.



“흐음. 그렇군. 한데, 이번엔 무얼 만들려는 겐가? 또 기획안인가 하는 걸 쓰는 것 같은데.”

“아. 이번 건 기획안이 아니에요.”

“응? 그럼?”

“제가 갖고 싶은 걸 만들려고요.”

“호오.”


꽤 흥미가 생겼는지 델리안은 정밀하게 그려진 도면을 자세히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리 본다 한들 그녀가 알 턱이 없다.


왜냐하면 이 도면은 지구에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부터―― 아니, 전생하기 전부터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던 터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도면을 그렸었고, 평상시에도 이를 완성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을 끊임없이 실행하고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제법 그럴싸한 수준으로 도안이 작성됐는데, 역시나 알아보기는 힘들었는지, 고개를 꼬고 끙끙대던 델리안은 직접 알아내기를 포기하고 물었다.



“모르겠구나. 뭔가 타는 게 아닐까도 싶다만.”

“오! 맞아요! 오토바이라는 건데······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두 바퀴의 말이 없는 마차라고 보면 돼요.”

“말이 없는 마차라······ 잘 상상이 안 되는구먼.”

“후후. 실물을 보게 된다면 델리안도 설렐 거라고요.”

“호······ 자네가 그리 말하니 완성될 때가 기대되는군.”


흥미를 보이는 델리안을 보며 리아는 음침하게 웃었다.


남자의 로망이라 할 수 있는 오토바이다. 필시 델리안도 실물을 본다면 눈을 빛낼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외모와는 다르게 상당히 호탕하니 말이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리아 스스로도 꽤 기대되는 물건이었다.


‘지구에 있었을 땐 위험해 보여서 타는 걸 포기했지만, 여기라면 넘어지더라도―― 혹여 사고가 나더라도 다치진 않을 거야. 여차하면 [치유]로 고치면 되고. 물론······ 아프기야 하겠지만.’


심장을 울리는 엔진소리를 떠올린 리아는 헤벌쭉, 표정이 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리아는 곧장 굳어지게 되었다.



“왜 그런가?”

“그게······ 사실 진척도가 50% 정도에서 멈춰서요.”

“음?”


고개를 갸웃했던 델리안은 양해를 구하고는 도면을 짚어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외형은 꽤 완성된 듯하다만······ 아하. 내부가 아직이로군.”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구동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영 모르겠거든요.”

“그래도 얼추 정리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말한 델리안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발상이 흥미롭군. 이 엔진이라는 것은. 폭발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다른 힘으로 전환한다는 점이 말일세.”

“아, 아뇨. 치, 칭찬은 감사하지만 그건 제가 구상한 게 아니에요. 저도······ 어디선가 본 거예요.”

“그런가? 뭐, 꽤 진보적인 자였겠구먼. 그런데······ 석유라는 건 뭔가? 동력원이라고 쓰여있긴 하다만.”

“엥?! 서, 석유를 모르세요?”

“그렇네만······ 유명한 것인 게냐?”


모른다는 사실이 창피스러운지 드물게도 델리안은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리 봐도 진짜인 듯싶다.


‘여, 역시 마법이 주류인 동네! 석유 자체가 알려지지도 않은 모양이네.’


오래 살고 유식해 보이는 델리안이 모른다면 여간해서는 석유를 아는 자는 없으리라. 아니, 어쩌면 석유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으음. 어쩌지?”


애당초 지구의 엔진과 비슷하게 만들려 했던 이유는 휘발유를 구하기 쉬울 거란 예상에서였다. [잉크]처럼 식수마법을 조금만 변형하면 되니 말이다.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실험해두었었다. 생성마법으로 우선 만든 다음 평범하게 식수마법으로 만드는 등의 돌아가는 과정이 있긴 했지만, 무사히 휘발유를 만들어냈었다.


물론 완전히 지구의 것과 똑같지는 않다. 얼추 휘발성의 액체라는 특징만이 비슷할 뿐이다.


여하튼 동력원은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엔진도 지구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엘문리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이 술식이 어찌 영향을 끼칠지, 그 파급력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무지하게 똑똑한 루비아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자신에겐 이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섣부른 짓을 하기엔······ 많이 꺼려진다.



“이러면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당최 뭐가 그리 고민인 겐가?”

“그게요······”


반사적으로 말하며 고개를 올린 리아. 그러다 예쁜 델리안의 눈망울을 보고는 번뜩, 머리에서 번개가 쳤다.



“그래! 의견을 들으면 되잖아! 델리안은 엄청나게 오래 살았던데다 똑똑하고!”

“흠. 리아야, 여성의 나이를 크게 떠들거나 하면 안 된단다.”


델리안이 슬쩍 핀잔을 주지만 흥분한 리아에겐 들리지 않았다. 반쯤 무시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또 다른 연장자――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고 현명할 에르에게로 뛰어갔다.


에르는 부엌에서 마실 걸 준비해주고 있었는데, 빠쁘게 손을 놀리는 와중에도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 보다. 딱히 사정을 설명하지도 않았건만 곧장 알겠다며 준비한 사과주스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오고, 에르가 준 컵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리아는 둘에게 고민을 이야기하였다.


모든 설명을 들은 에르는 살짝 턱을 쓰다듬었다.



“별로 상관없을 거 같은데?”

“에? 진짜요?”

“응. 그리 어려운 마법도 아니잖아? 거기에 비슷한 마법이라면 무수히 많아. 오히려 문제가 될만한 건 기술 쪽이지 싶어.”

“기술······?”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그리 말한 에르는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은 델리안에게로 향했는데, 그녀는 진짜 사용인인 것처럼 살며시 묵례하더니 즉시 마법을 썼다.


어느새 친해졌다고 생각하며 델리안이 뻗은 손을 봤다. 거기엔 동그랗게 뭉친 주먹 정도 크기의 물방울이 있었다.



“물은 아니죠?”

“자네가 말한 휘발성 액체란다.”

“엑?! 휘, 휘발유를 바로 만든다고요?! 석유도 모르시는데?”

“듣자 하니 휘발유는 석유라는 것의 정제품인 듯싶네만, 마법은 이미지와 그에 따르는 마력조작만 있으면 되지 않나. 그렇다면 어려운 것도 없지.”

“그, 그런가요?”


마도사라 불리는 델리안이 기준이라 정말 쉬운지를 몰라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델리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법은 현재도 제법 사용되고 있단다. 야외에서 불을 피우는 용도 등으로 말이다. 그 외에도······ 전장 같은 데에서 간간이 사용되곤 했지. 여러모로 불이 잘 붙으니까. 뭐어······ 우리 엘프들의 마을에선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중형에 처하는 범죄지만.”

“하, 하지만 베르다드에선 볼 수 없었는데요?”

“위험하니 그렇지 않겠나. 손쉽게 방화라도 저지르면 골치 아프니 권력자들이 통제하는 것이겠지.”

“하긴 다들 심상마법은 쓰지 못하니 술식만 유출하지 않는다면 의외로 쉽게 관리할 수 있겠네요. ――아! 그럼 휘발유를 쓰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되겠군.”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차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리아는 좌절했다.


본인만 타기 위해 제작하려 했다면 이보단 덜 했을 거다. 하지만 오토바이는 멜리다 상회를 통해 보급도 꾀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기마로 분류되는 생물들은 뛰어났다. 마력 때문인지 분명하게 지구와는 그 능력의 차이가 결을 달리하였다. 더군다나 대부분 지성을 갖추고 있어 세세한 지시마저도 내릴 수 있기까지 하다.


편리하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절로 그런 소리가 나올 만큼 유능했다.


――그렇지만 좋다는 건, 다른 말로는 ‘비싸다’라는 소리였다.


지구에서도 그렇겠지만 기마 한 필은 정말 억 소리 나오는 대금을 치러야만 얻는 게 가능했다.


오죽했으면 멜리다 상회가 사업을 넓히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기마의 구매였다. 일시적으로 운송업자를 고용하는 방편도 있긴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별로라 하여 현재는 군침만 흘리는 중이라나?


그만큼 기마는 비싸며, 일종의 큰 재산으로 취급된다.


나라 차원에서도 기마 관련으로는 제법 까다롭게 대처했기에 도적들도 다 털어가도 기마만큼은 여간해선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애당초 지성이 있기에 훔치기도 번거롭고.


이에 대한 일화도 상당수 됐다. 대표적으로는 군마를 훔친 산적들이 군대의 출동으로 하루아침 만에 몰살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러하다 보니 자신과 같은 소시민은 기마는 엄두도 못 낸다.――정확한 가격은 아직 모르지만――


그렇기에 대용으로 오토바이를 배포하려고 한 것이었다. 에너지원인 휘발유도 기초마법 수준으로, 술식만 있으면 거의 아무나가 할 수 있었으니 유지비 걱정도 없고.


남은 과제는 제작 단가인데, 이것만 낮출 수 있다면 기마의 하위 호환 같은 느낌으로 범국민적인 이동 수단이 될 터였다. 조작법에 익숙해지거나, 기마보다 떨어지는 출력 등은 가격이 모두 용서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원대한 꿈은 초장부터 무너졌다.



“기술이 어쩌고 하는 건 들을 필요도 없었구나······”

“너, 너무 기죽지 말거라. 그, 그렇지 않나? 찬크에르.”

“그래, 리아. 그 휘발유라는 것의 성질을 조금 다르게 하여 엔진에서만 작용하게끔 조절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듬직한 에르의 말에 리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 그럼 보급도 가능하겠어요! 역시 에르!”

“······아니. 보급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리아의 고개는 곧장 내려갔다.


왜 반대하는지는 모르겠다. 델리안도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듯했다.


하지만 군말없이 에르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가 자신에게 해가 될 이야기를 할 리가 없으니.


리아는 우물거리면서도 말을 이어받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네요. 일단 제가 탈 것만 만들기로 할게요.”


이유는 딱히 묻지 않도록 했다. 어쩐지 에르가 당장 말하기 껄끄러운 기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낌새를 보니 대충 델리안이 없는 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게다가 어차피 막히던 차였다. 누구나가 만들고 쓸 수 있게 설계하는 건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니 우선 대충 자신이 탈 오토바이를 만든 다음에 보급을 꾀하도록 하자.


안타깝긴 하지만, 일단 빨리 시승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좀 반가웠다.


기분을 달리한 리아는 남은 사과주스를 쭉쭉 들이켰다. 델리안도 달리 묻진 않고 익숙하게 함께 먹을 다과를 준비해주었다.


그렇게 일단락되고 숨을 돌릴 때였다.


똑똑.



“응?”


노크 소리에 리아는 곧장 마력을 탐지해봤다.



“어라? 로즈린느 씨?”


라프리트인가 싶었던 리아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재빨리 테이블에 있던 도면들을 정리해 귀걸이에 넣었다. 그러고는 여유 있는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던 양 모습을 꾸몄다.


델리안도 빠르게 방에서 쉬고 있던 아이리스에게 방문 소식을 알렸고, 잠시 후 페리도 함께 거실로 나왔다.


모든 준비를 마친 걸 확인한 에르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시지요.”

“정중한 마중, 감사해요.”


예의 바르게도 집사인 에르에게 인사를 하는 로즈린느. 과연 착하다.


짤막한 대화를 마친 그녀는 서두르는 게 느껴지는 발걸음으로 실내로 들어왔다. 뒤를 따르는 수행원이 동성인 유즈라가 아닌 가베인이라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하지만 티를 내진 않고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익숙해진 벨루디스 식의 예를 보였다.



“어서 오세요, 로즈린느 님. 몸소 찾아와주셔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뇨?! 자, 작은 아버님―― 아, 아니, 베르그 황자께 전해 들었어요. 제국도 이스피리아 님을 최고 국빈으로 맞이하겠다고요. 그러니 제가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어음. 그러하시군요.”


손을 마구 내저으며 사양하는 로즈린느에게 도리어 놀란 리아는 얼떨떨하면서 답했다.



“네! 그러니까 앞으로는 편히 로즈라고 불러주세요!”


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살짝 가베인과 에르들의 눈치를 봤다. 황손이라는 사람에게 과연 그래도 되는지 의견을 들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큰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전원 뜻대로 하라며 살며시 눈짓해주었다.


이를 본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로즈 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님도 괜찮아요! 부디 친근히 대해주세요.”


로즈린느―― 로즈는 제법 간절히 부탁해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


곤란하다는 듯이 이쪽의 시선이 방황하자, 뒤늦게 로즈도 무리한 말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마, 마음이 아프네······’


안절부절못한 기분이 든 리아는 슬쩍 흘리듯 말했다.



“님을 빼는 건 무리지만, 씨는 괜찮을 거 같은데······ 어떤가요? 로즈 씨.”


처음은 알아듣지 못했던 로즈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번쩍 고개를 들고는 반짝거리는 큰 눈망울을 똑바로 향해왔다.



“씨······ 씨. 응! 어른스럽고 오히려 좋아요! 이스피리아 님.”

“저도 님은 빼주셔도――”

“――아이리스 님도 부디 로즈 씨라 불러주세요!”

“예. 잘 부탁드려요, 로즈 씨.”


그렇게 좋았던 것인가. 웃는 얼굴로 선뜻 받아들인 아이리스의 말에 로즈는 얼굴을 붉히고는 베시시 아이답게 웃었다.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다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갔던 리아는 미소 지었다. 님은 빼달라는 요구가 끊겨 조금은 침울했지만.


‘이젠 그러려니 해야겠지. 솔직히 대단한 사람 취급당하는 것도 살짝 익숙해지기도 했고.’


즐기는 건 절대 아니지만 마을을 비롯해 주변에서 자꾸만 치켜주니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순순히 받아들여야겠지.


이 탓일까, 지금에 이르러서는 님이라 불려도 무덤덤했다.


아련한 눈으로 리아는 왜 이렇게 된 것인지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동안 잔뜩 흥분한 로즈는 페리에게도 다가가 잘 부탁한다며 인사했다.



“잘 부탁해요, 페리!”

《건방 떨지 마라, 어린 계집. 정중히 마음을 담아 페일테스 님이라 부르도록.》

“음. 페리도 잘 부탁한다고 하네요.”

“와!”


아무 의심 없이 순수하게 아이리스의 말을 믿는 로즈다.


‘실은 정신이 번쩍 들 대답인데 말이지.’


황당하기 그지없는 페리의 당당함 덕분에 자기만의 시간에서 빠져나온 리아는 슬쩍 몸을 풀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은 가베인이었다.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급하게 눈을 돌렸는데, 그전까지는 애틋하면서도 상냥한 기분이 드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마 저분도 델리안이랑 같은 거겠지. 갑자기 날 저리 볼 이유는 없으니. 하지만 저 눈빛은······ 흠. 모르겠네.’


다른 미래에서 그와 어떤 관계인지 짐작이 안 된다. 다만 같은 호의라도 질척한 느낌의 칼윈 황제와는 전혀 다른, 순수함만이 존재한다는 건 알겠다.


모르는 걸 알아낼 방도는 없다. 어차피 다른 미래의 일이기도 하고.


궁금하긴 하지만 딱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해는 없겠지. 그보다는 모든 인사를 마친 로즈가 돌아본다. 거기에 신경을 쓰도록 하자.



“근데, 로즈 씨. 어쩐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 그렇죠, 참. 깜빡했어요.”


귀엽게 손뼉을 친 로즈는 흑발에 가까운 긴 갈색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그리고는 덥석 손을 잡았다.



“저희 놀러 가요!”

“녜?”


뜬금없는 소리에 말까지 꼬여버렸다.



“놀러 가자고요! 아아.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저 이래 봬도 황성 곳곳을 잘 알거든요. 몰래 빠져나가는 게 특기예요!”


‘아뇨. 황손이 몰래 빠져나가면 안 되죠.’


내심 황성 안을 탐험하자는 줄 알았건만 참으로 놀라운 제안을 한다.


당혹스러움에 속으로 딴지를 걸며 로즈의 호위인 가베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었지만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로즈를 막기엔 무리인 모양이다. 황가의 방침은 보기와 달리 꽤 자유분방한 듯하다.


혼자 놀러 가는 것에―― 특히 루비아가 걱정됐지만, 아이의 부탁을 거절하기란 더 어려웠다. 거기다 안 그래도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모처럼 제국에 왔는데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나 아쉽다.


리아는 재미와 뒤탈 사이에서 고민했다.


한동안 천칭은 일정하여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했지만, 이윽고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한 번뿐인 인생! 재밌게 즐기고 사는 것에 의미가 있노니!’


단호히 속으로 외친 리아는 결국 문밖에 있던 기사에게 말을 남겨두고는 로즈를 따라 밖으로 나서게 되었다.


뒤탈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황성을 잘 안다고 호언장담했던 로즈는 막힘 없이 쭉쭉 나아갔다. 그 과감함은 분명 황성의 곳곳을 빠삭하게 알지 못한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응. 그건 괜찮지만······ 앗!’


속으로 거하게 태클을 걸려고 했던 리아는 멈추고 살짝 묵례하였다.


――이쪽을 발견하고 경례를 올리는 기사에게.


그랬다. 로즈는 황성을 잘 아는 건 맞지만, 절대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제 딴엔 조심하며 다니고 있긴 했으나 훤히~ 다 보이는 것이다. 단지 기사들이 모른 척 넘어가 줄 뿐이었다.


지금도 허리까지 자란 이름 모를 화단을 살금살금 지나고는 있지만 이 인원수로, 그것도 장신인 에르까지 있는데 몰래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하다. 마법이라도 쓰지 않는 한······


‘뭐어, 마법은커녕 에르는 처음부터 그냥 걷고 있었지만. ――앗!’


이번엔 건물 2층에서 지나가던 사용인이 발견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근심도 없어 보이는 것이 로즈는 정말로 자주 빠져나가긴 하나 보다.


하지만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왠지 창피하다······


얼굴을 굳힌 리아는 그 창피함을 더욱 부채질하는 존재를 쳐다봤다.



“데, 델리안, 그리 열심히 하시지 않아도 돼요.”

“응?”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꼬는 델리안.


그녀는 현 상황이 꽤 즐겁나 보다. 쪼그리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고 치마까지 붙들며 아주 적극적으로 뒤를 따라오고 있다.


확실하게 말해서 절세미인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 역시 사람은 예뻐지고 봐야 하나······”


워낙 절세미인인 탓에 뭔들 해도 이미지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이런 안타까운 짓을 함에도 빛이 난다.


반짝반짝.


아니다. 빛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순수하고 아름답게만 보인다. 흔들리는 연보랏빛의 금발과 함께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생기마저도 흐르는 듯 밝게 반짝인다.


딱히 기분 탓은 아닌지 볼이 절로 빨개진다.


이만한 미녀가 아이의 놀이에 적극적으로 어울려주는 것이다. 따스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달까······


같은 여자로서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낀 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 전하며 묵묵히 로즈의 뒤를 쫓았다. 저리 즐기는데 말릴 수도 없고.


참고로 아이리스는 조금 떨어져서 오는 에르의 곁에서 페리와 함께 느긋이 걷고 있었다. 로즈의 호위인 가베인도······. 수그려 걷는 사람은 자신과 로즈 그리고 델리안, 셋뿐이었다.


‘조, 조금만 참는 거야. 할 수 있어, 이스피리아!’


차라리 걸어서 가자란 말을 참기를 수십 차례, 드디어 도착했다.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날 좁을 통로를 지나자 투박한 건물들이 즐비한 밖이 보인다.


아마 쪽문이 아닐까 싶은 곳이었는데, 당연히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알아차리고는 근처에 숨어 모른 척해줬다.


굉장한 친절함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친절은 리아의 가슴을 더욱 후벼파는 중이라는 걸 저들은 몰랐다.



“자! 리아 님, 도착했어요.”


로즈는 한 건 해냈다는 양 득의양양하게 돌아봤다. 애칭은 가는 도중 아이 특유의 친밀함으로 간단히 허락을 얻어냈다.



“그렇군요······”


심적으로 제법 지친 리아. 그래서 칭찬을 바란다는 듯한 로즈에게 나온 대답은 축축 처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으응?”

“아, 아뇨. 굉장한 모험이라서 조금 진이 빠졌을 뿐이에요.”

“죄, 죄송해요. 조금 잘난 척하고 싶어서 초심자에겐 어려운 코스로 왔어요.”


‘다른 코스도 존재하는구나······’


한순간 멍한 눈을 했던 리아는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괜찮아요. 새로운 경험이라서 즐거웠어요. 그보다 슬슬 움직이죠. 경비 서시는 분이 돌아오실 거예요.”

“경비요······?”

“아차.”


로즈는 이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의 존재는 아예 모르는 모양이다. 빈도를 본다면 분명 적지 않을 텐데도 들키지 않은 것이니 그 노고가 실로 대단할 뿐이다. 참으로 근면한 기사들이다.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말을 이어갔다.



“하하······ 아뇨. 황성이니까 순찰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거 같아서요.”

“아하! 그렇군요! 역시 리아 님이세요!”

“뭐, 뭘요. 하하······”


대놓고 얼버무리는 게 뻔히 보였으나 착한 아이답게 로즈는 조금도 수상쩍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숨어있던 기사 두 명이 저마다 눈빛으로 감사를 전해온다.


묘한 상황에 리아는 더욱 어색하게 웃게 됐다.


그것도 모른 채 로즈는 홀로 진지하게 되어 서둘러 빠져나가자며 재촉했다.


이 창피한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건 리아도 바라던바. 이의 없이 슬쩍 기사들에게 묵례하고는 선두로 나선 로즈를 따라갔다.


그렇게 성벽을 지나 도착한 곳은 수로가 있는 다리였다. 위치로는 황성의 북서쪽쯤이다. 물론 수로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재빨리 근처 수풀로 숨어버렸다.


리아는 황망함을 담아 그들을 봤다. 그러다가······ 수로 위에 있는 존재를 발견하자 싹 잊었다.


단박에 반가움을 가득 담게 된 리아는 그대로 곧장 수로에 있는 존재―― 통상의 말보다 훨씬 거대한 군청의 말을 향해 뛰어갔다.



“비젠탈 씨, 잘 오셨어요! 헤매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대답 대신 비젠탈은 커다란 눈망울로 차분히 내려다봤다. 잔뜩 신나 보이는 리아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싫어하는 건 또 아니었다. 싫었다면 애당초 이곳에 오질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 어째서 비젠탈 씨가 여기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는 로즈의 목소리가 울린다. 동시에 멀리서 듣고 있던 기사들도 동의한다는 양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가베인 뿐으로, 그는 도중 비젠탈의 기척을 읽어냈었는지 조금의 동요가 없다.


물론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나 델리안은 마법을 쓴 순간부터 즉각 알아차렸었고, 아이리스나 페리마저도 분위기상 대충 짐작한 듯했다.


그런 주변의 상황을 파악한 리아는 비젠탈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다가온 로즈에게 사정을 설명하였다.



“제가 불렀어요.”

“네? 하지만 리아 님은 저와 계속 같이 계셨는데요?”

“마법으로 알린 거예요.”

“마법······이요?”

『네. 이런 식으로 멀리 떨어진 상대와 대화할 수 있는 마법이 있거든요.』

“우와! 머릿속에서 리아 님의 목소리가 들려요!”


리아는 신기하다며 흥분하는 로즈를 미소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올렸다.



“미안해요. 보러 간다고 했는데 도리어 불러버리기나 했네요.”

《······괜찮다.》

“지내시는 데는 괜찮으셨나요?”

《······문제없다.》

“그러시다면 다행이네요.”


[염화]로 비젠탈에게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듣긴 했다.


제국은 꽤 신경 써주어 비젠탈이 혼자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조치해놓은 데다가, 또 넓은 광장을 통째로 사용하도록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혼자 밖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건 [염화]로 나눈 대화였을 뿐이다. 실제로는 어떨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근심이 떠나지 않았건만, 직접 대면하여 본인에게 괜찮다는 소릴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한숨을 토해낸 리아는 여러 감정을 담아 비젠탈의 갈기를 정성껏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그걸 끝으로 리아는 돌아보며 밝게 외쳤다.



“그럼 가보도록 하죠! 로즈 씨,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리아 님. 맡겨만 주세요!”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로즈. 회복이 빠르다. 비젠탈도 함께 가는 건 신경도 안 쓰이나 보다.


그런 로즈를 따라 6명과 2마리라는 묘한 구성원은 제국의 중심인 수도―― 린드그라드를 향해 나아갔다.


작가의말

준비한 분량이 끝나서 이전처럼 하루에 몇 개씩 업로드는 힘들 거 같습니다.


요 정도로 참아주시면 무척이나 감사할 듯 합니다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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