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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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조회수 :
53,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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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28,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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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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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니아 아가씨

DUMMY

***


동훈은 과거 있었던 가문 이벤트를 떠올렸다.


전설 스킬의 기원이 되는 위대한 여섯 가문의 흔적을 찾는 퀘스트! 몰락한 가문의 역사를 더듬는 퀘스트!


가문 이벤트는 시작 전부터 전설 스킬을 하나씩 뿌릴 것이라 기대되던 몇 해 전 연말의 빅 이벤트였다.


커다란 메인 에피소드 업데이트는 아니었지만 쉬어가는 챕터의 업데이트였다지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전설 스킬을 하나씩 뿌린다는 떡밥이 돌자마자 더 벨룸 커뮤니티는 떡밥의 진위 여부를 막론하고 불타오를 지경이었다.


동훈 역시 당시 게임을 하고 있는 시즌이었기 때문에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들을 읽고 게임에 적용되기를 기대했었다.


‘당시 인간 종족 장검 캐릭터를 키우고 있었으니 내가 배정받을 가문 퀘스트는 제이드 가문의 것이었지. 차라리 인간 스타팅에서 제이드 가문 퀘스트를 받았으면 더 편했을 것을.’


물론 동훈은 블랙 가문 이벤트를 진행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들은 바도 있었고 이것저것 본 것도 있었다.

가문 이벤트는 티에이징 사가 회사를 먹여살리는 흑우들에게 주는 사료라는 비난이 많았지만 그것이 진행되던 때에는 축제였으니까.


그 세부적인 디테일을 모두 파악하고 있진 않아도 대략적인 진행은 머릿속에 들어있다는 뜻.


게다가 여차하면 검색 찬스로 가문 이벤트의 진행 내역을 쭉 살필 수도 있고 말이다.


‘고양이를 찾으라는 퀘스트가 있었던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어둡고 음침한 아가씨 NPC 하나가 그늘에서 꺼림칙하게 손을 내밀고 있는 스크린샷을 본 것 같단 말이지.’


그런 아가씨는 없고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나 살랑거리며 동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차피 음침한 아가씨가 무슨 이름을 가지고 블랙 가문에서 어떤 위치의 NPC인지도 몰랐으니 고양이든 사람이든 동훈은 퀘스트만 주면 그만이었다.


아무튼 높은 등급의 은신을 꿰뚫어 볼 방법을 강구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퀘스트가 갱신되자 고양이는 신비한 눈동자를 동훈에게로 고정했다.

윤기 나는 털과 교태로운 동작, 날카로운 송곳니는 검고 광택 있는 이 고양이의 모든 것이었다.


“쯔쯔, 이리온. 넌 블랙 가문이 기르던 고양이니. 너도 블랙 가문의 일원이라고 쳐주는 걸 보면 이 시대는 참으로 친절하단 말이지.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는 말이야.”


동훈의 손이 고양이의 미간에 닿으려는 순간 고양이는 고개를 홱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해버렸다.

차갑게 돌린 고개에는 거절에 익숙한 이 특유의 까칠함이 보였다.


“무례하구나.”


고양이의 입에서 시리도록 선명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만하고 사람을 낮잡아 보는 기질을 가진 여성의 목소리였다.


동훈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 세상이 마법과 신비가 가득한 세상이란 사실에 동훈은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양이가 사람 말을 한다니. 이건 현실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거든.


검은 고양이는 세로로 찢어진 노란빛의 눈을 치켜세우며 사납게 말을 이었다.


“감히 위대한 블랙 가문의 적장녀에게 무슨 망발이냐. 가문이 기르는 고양이라니. 이 자태를 보고도 한낱 애완묘로 착각하느냐?”


어딜 봐도요.


길거리 고양이 같지 않은 매끄러운 털과 고고한 태도, 보기 좋게 오른 살은 척 봐도 길거리에서 먹이를 두고 아귀다툼하는 길냥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람 손을 탄 애완묘라는 뜻 아니겠나.


눈망울에 불만이 가득한 검은 고양이는 도도하게 꼬리를 꼬며 자박자박 동훈의 주위를 돌았다.


그러면서 노란 눈으로 동훈을 관찰하듯 이리저리 쓸어봤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귀부인이 사람을 품평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위압감이 풍겨져 나왔는데 그건 태생적으로 사람 위에 선 이들이 가지는 아우라 같은 것이었다.


동훈은 귀부인 같은 고양이를 향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그, 저, 미안합니다. 겉모습이 고양이 같아서 고양이라고 한 건데 이걸 내가 미안해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한데, 기분 나빠하니 일단은 미안합니다.”


동훈의 태연한 답변에 고양이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동훈의 저런 태연한 답변은 날 때부터 지배받는 것에 익숙한 평민이나 하층민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동훈이 평범치 않은 사람이라는 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고양이는 눈에 이채를 띠면서도 뾰족하게 혀를 굴렸다. 그녀는 만인을 호되게 대하는 이였고 듣기 좋은 말도 나쁘게 바꿔서 말하는 이였다.


“흥, 말은 미끄럽게도 잘하는구나. 우리 가문이 세상을 호령할 적에 너 같은 작자는 혀를 꿰어 성문 위에 걸어뒀다. 블랙 가문 앞에서 함부로 교언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그녀는 전형적인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과거에 사는 사람이었다.

오만한 말씨와 뾰족한 어투는 귀한 신분의 자신을 의미했고 당연히 주어져야 할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인 결과였다.


물론 그녀가 어떤 신분이건 동훈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시겠군요. 가문의 위세가 아주 대단하셨나 봅니다.”


동훈도 괜히 뾰족하게 대꾸하며 비아냥거렸다.


고양이는 동훈의 대답을 정말이지 순수한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턱까지 치켜들며 자랑을 시작했다.


“대단만 했겠느냐. 블랙의 깃발이 선 곳에서는 누구도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만인 위에서 그들을 다스리는 신성한 여섯 가문 중 하나인 블랙 가문은 그들을 지키는 막중한 의무만큼의 합당한 권리를 누렸지.”


근데 가문의 적장녀가 이렇게 고양이 모습을 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수행인이 아무도 안 따라나온 거야?


라는 비아냥을 동훈은 삼켜냈다.


그건 당연했다.


옛 영광의 여섯 가문은 전부 패망해서 이름만이 남지 않았든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훈은 퀘스트를 기억했다.


블랙 가문의 염원을 알아내야 한다. 그 염원이란 것은 곧 적장녀인 이 NPC가 바라고 있는 것을 뜻했다.


물론 퀘스트의 진행 양상을 알고 있는 동훈은 이 NPC가 가진 염원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걸 저 고양이의 입에서 들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퀘스트 진행이 될 테니까. 퀘스트 클리어의 조건은 내가 그걸 아느냐가 아니라 퀘스트 대상인 NPC가 합당한 대사를 했을 때 발현되니까.’


숙련된 비즈니스맨인 동훈에게 상대로 하여금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낼 방법은 과장 섞어 수백 가지가 넘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정보의 비대칭이 이루어진 상태라면 동훈이 방법만 잘 선택한다면 한나절도 안 되어 고양이가 ‘멍멍!’하고 짖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였다.


“가문의 수행인들은 어딨답니까? 적장녀가 나들이를 나오는데 아무도 안 따라나왔어요?”


“...우리 가문의 비밀스러운 업도 모르는 녀석이. 그리고 본녀에게는 수행인이 필요 없다.”


거짓말로라도 자신의 허세를 지키려 하는 고양이.


동훈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 어떤 고양이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을 다루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하긴 위대한 가문의 적장녀가 무슨 수행인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동훈은 능숙하게 말을 돌리며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세와 자랑을 북돋웠다.


이런 허세 있는 사람은 그 허세를 들어주고 대단하다 해주면 된다.


일명 오구오구 전법.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는 대응이 아니지만 그를 쥐고 흔들기에는 이만한 대응이 없었다.


“그렇지. 네가 귀한 몸 모실 줄을 아는구나. 부모가 집사더냐? 사탕 발린 말솜씨가 제법이구나.”


갑자기 패드립은 좀 아니지 않나요.


어금니를 깨문 동훈은 퀘스트를 되뇌며 대답했다. 퀘스트 깨야지.


“제 말이 듣기 좋다니 다행이네요. 근데 그거 아십니까? 요즘 중앙지대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신분이 낮은 이들과 반말로 대화하는 게 유행이라더군요. 귀족의 의무라고 아십니까? 자신들이 돌봐야 하는 이들에게 베푸는 거죠.”


도저히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중앙지대의 귀족이고 뭐고 알게 뭐냐. 어차피 이 고양이도 쇠락한 귀족가 사람으로 변방에 처박혀 살며 중앙 귀족들 사이의 유행이니 그런 것은 까마득하게 모를 텐데 말이다.


고양이는 과연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뭐? 낮은 신분의 평민들과 말을 놔? 어떻게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녀가 알기론 신분의 차이는 지엄한 것으로 그들의 구분은 왕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 아니겠나.


말을 놓는다니!


그런 무례를 그녀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블랙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괴담 중 하나인 인간 종말의 날에 나오는 신분 철폐 때나 가능한 말이잖아.


하지만 동훈의 그럴싸하고 도발적인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귀족들 사이의 유행인데 말이 되고 안 되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뭐, 블랙 가문이 위대한 여섯 가문이라고 하더니 이런 유행에 뒤처지는 걸 보면 위세가 많이 상했나 봅니다.”


현란한 말솜씨에 면역이 없는 고양이는 무시당하는 게 싫어 크게 부정했다.


“아니, 아니다! 우리 블랙 가문은 뭇 귀족 가문의 존경을 받는 귀족 중의 귀족. 귀족들의 유행이라면 우리가 선도하는 게 맞지. 미천한 자여, 내게 반말을 허락한다. 이제부터 존대하지 말도록.”


동훈은 옳다구나 기회를 잡고 그녀가 말을 바꾸기 전에 얼른 말을 놓았다.


“하하, 그것 참 시원하네. 역시 귀족 중의 귀족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치?”


낙장불입. 이미 한 말이 있으니 이걸 물릴 수도 없고.

몰락했지만 귀족가의 교육을 받은 고양이는 귀족이 말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지를 떠올리며 억지웃음을 짓곤 대답했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는 썩소는 보기 다소 거북했다.


“그, 그렇지.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도록.”


“앞으로 계속?”


동훈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 깨고 갈 생각인데 왜 앞으로야? 퀘스트만 깨면 다신 볼일 없고 영원히 바이바이인 것을. 자신은 튜토리얼이나 하는 곳인 남쪽 변방으로 돌아올 일이 없을 테니까.


고양이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도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처음에는 네가 어떻게 우리 블랙 가문을 알고 날 찾아왔는지 캐낸 뒤 죽이려 했다. 하지만 넌, 그런대로 쓸만하구나.”


고양이는 그가 자신을 찾아다닌 때부터 그를 쭉 관찰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와서 블랙 가문 어쩌고 이야기하기에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만큼 깜짝 놀랐었다.


가문이 몰락하고 블랙의 이름을 가진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문의 업을 생각하면 그들의 적이 가지는 원한은 하늘에 닿을 것이 분명했기에 직계든 방계든 그 명맥을 보존하기란 극히 어려웠다.


그렇게 모두가 흩어져 대륙 곳곳 그림자에 숨어들었는데 그중 가문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철저한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적을 피하고 사람을 피하는 삶에서 동물로 변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


그렇게 만인의 눈을 피해 산 지 얼마나 되었을까.


블랙 가문은 역사 속에서 잊히는 듯했고 블랙의 이름을 부르며 가문의 일원을 찾으려는 이들은 없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등장한 블랙을 찾는 이라니.


처음에는 적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 의견은 기각했다. 적이라고 하기에는 은밀하지도 않았으며 위대한 블랙 가문의 직계를 찾는데 너무나 약한 이였다. 4단계를 밟은 전사라면 모를까 동훈의 움직임은 4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모자랐다.


다음으로는 조력자를 의심했다.

블랙 가문은 강력하고 오래된 가문으로서 그와 협력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기각했다. 조력자의 대부분은 가문에 등을 돌렸으며 이제라도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왔다고 하기에 역시 너무나 약했다.


그래도 둘 중 하나라면 조력자일 것이다, 하는 일말의 미련을 가졌으므로 고양이는 동훈의 뒤를 밟았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의 뒤를 쫓았는데,


‘내가 네 악몽을 끝내주마.’


고양이는 그의 목소리에서 분명한 온기를 읽었고 부모 없이 살아온 자신의 과거마저 따뜻하게 보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 폴트란에 처음 왔을 건데 미친 아이라고 도시에서조차 손가락질받는 아이를 향해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은 드물었다. 지금처럼 불행과 폭력이 천지에 도사리는 시대에는.


처음에는 전혀 나설 생각이 없던 고양이가 그의 앞에 나타나겠다고 결심한 건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자신의 악몽도 그가 끝내주지 않을까 하는 미련한 생각 때문에.


그저 미련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지라도 고양이는 동훈에게서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래서? 쓸만해서 뭐.”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고양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본 한 면만 믿고 사람을 믿기에는 그녀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가 블랙 가문 사람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야 했다.


그의 목적이 순수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지 몰라도 차라리 그가 바라는 것이 있길 바랐다.


“지금 실토하거라. 그러면 내 너그러이 용서해주지. 블랙 가문의 적장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누가 시킨 거지?”


동훈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짐짓 탐욕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블랙 가문이라면, 기사 작위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나? 위대한 여섯 가문인데. 내가 다 좋은데 신분이 미천한 게 한이 돼서 말이야. 옛 왕국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힘을 지녔다는 전설을 들었어.”


그녀의 속내를 동훈도 알기에 그럴싸한 명분 하나를 골라잡았다. 비즈니스맨 짬바가 있지 귀족가 아가씨가 바라는 거 하나 못 알아낼까.


사람이 뭔가 목적을 가지고 온 게 분명한데 목적이 없다고 말하면 도리어 의심을 살 터였다.


신분제 사회에서 미천한 신분을 한스러워하는 이들은 드물지 않았다.


신분 역전은 언제 어디서나 먹히는 소재 아니던가. 동훈 역시 그런 구실로 블랙에 접근한 운 좋은 도굴꾼을 연기하려 마음먹었다.


과거의 가문인 블랙 가문을 잘 아는 사람이면서 탐욕을 숨기지 못하는 읽기 좋은 사람을 그려내서 보여주는 것이다.


저 고양이처럼 사람을 잘 못 믿는 성격이라면 이편이 더 안심될 테니까.


“너, 우리 가문에 대해 잘 아는구나.”


블랙 가문이 잊히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가.


대륙의 고루한 역사학자들이나 블랙의 이름을 알았다. 평민들과 작금의 귀족들, 왕을 자처하는 참칭자들도 블랙을 잊어버렸다.


이런 촌구석 무지렁이가 블랙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고양이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앎을 공유하는 건 큰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동훈은 자신만만한 어조를 꾸며내며 알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털어놨다.


“나만큼 잘 아는 이도 없을 거야. 나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골동품을 세상 사람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거든. 슈프라우드 폰 하베스트 블랙. 그를 알아? 내가 알기로 그는 너의 선조인데.”


슈프라우드 폰 하베스트 블랙.


이 이름은 동훈이 준비한 비장의 이름이었다.

가문 이벤트는 뒤로 갈수록 여섯 가문에 존재한 거물의 이름과 역사가 드러나며 그들의 비밀에 얽힌 퀘스트 내용이 신비롭게 펼쳐지는 이벤트였다.


예를 들면 제이드 가문의 비전 검술 창시자가 제이드 가문 퀘스트의 후반부 등장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슈프라우드 폰 하베스트 블랙은 블랙 가문 퀘스트 후반부에 등장하는 거물의 이름이었다.


어떤 사람이 김해 김가의 한국 사람 하나를 붙잡고 당신의 선조이신 김유신 장군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무슨 미친놈이야, 하는 눈빛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웬 파란 눈에 하얀 피부를 지닌 외국인이 와서는 김해 김씨 선조인 김유신 장군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볼 것이다.


하물며 블랙 가문의 선조는 그 이름도 모르는 이가 허다한데 가문의 족보를 외우면 들어보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지.


동훈은 이곳에서 누가 봐도 이방인처럼 생겼지 않은가.


동훈은 사람의 흥미를 끄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고양이는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맞아. 그는 내 선조야. 200년도 전에 활동하셨던 블랙 가문의 선조시지. 그분의 행적은 가문 내에서도 아는 자가 거의 없어. 기록이 없어졌거든. 그를 어떻게 알았지?”


“나는 그 이름을 어느 유적에서 발견했지. 고된 탐사 끝에 아주 귀해 보이는 석판을 구했는데 거기에 그의 이름이 적혀있었다고. 석판은 오래된 거라 많이 뭉개져 있었지만 그 이름 하나만큼은 내가 기억해뒀지. 나는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었어. 척 보자마자 알았다고. 이건 대귀족의 이름이구나.”


“그 석판은 어디 있지? 내놓아라. 그건 우리 가문의 물건이다.”


“내가 값나가는 걸 가만뒀겠어? 당연히 팔았지. 아무튼, 중요한 건 석판이 아니야. 내가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성씨인 블랙을 더 조사했어. 무언가 느낌이 왔거든. 여기에 내 신분 상승의 길이 있구나!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그걸 느꼈지. 그림자의 가문, 숨겨진 곳에서 암약하는 거대한 가문. 나는 알았지. 몰락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림자 가문은 분명 사람들 모르게 숨겨져 있을 거라고. 난 여러 유적을 찾아다니고 고서를 읽으면서 블랙 가문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았지.”


헛된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까지 짓는 동훈의 모습은 누가 봐도 명성에 제대로 홀려버린 욕심 많은 망상가의 그것이었다.


“그, 그렇지. 우리 가문이 몰락했다고 떠들어대지만 우리는 건재하다. 너에게 기사 작위 하나쯤 내리는 건 일도 아니지.”


“그렇지! 바로 그거라고! 내가 바라던 대답이야. 그래도 블랙 가문 역시 대가문의 난 때 타격을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블랙 가문에 충성할 마음이 있어. 뭐든 시켜만 달라고.”


고양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훈은 생각에 잠긴 고양이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설계를 치밀하게 쌓아놓는데도 사람 손을 타는 순간 일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내게 부탁할 게 있잖아, 퀘스트를 줘야 할 게 있잖아....


고양이는 생각 끝에 대답했다.


“흠, 그래. 넌 나를 도와 중앙지대 남부에 있는 로마니엘성으로 가서 숨겨진 우리 가족에게 가는 거야. 일단 그곳에서 널 더 시험하겠다.”


됐다!


이 고양이 NPC가 가장 바라는 것.


그건 바로 다른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연락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건 바로 가문 퀘스트의 정상적인 방향이기도 했다.


자신을 가족에게로 데려가 시험을 보겠다고 둘러댔지만 그 본질은 흩어진 가족 중 가장 가까운 데서 연락이 닿는 가족을 찾아가겠다는 말이었다.


띠링!


===

이벤트퀘스트!

[가문]블랙 가문의 비밀.

당신은 이제 블랙 가문의 연락원입니다. 임무를 수행하세요. (현재 목표 : 로마니엘성 블랙 가문의 은거지에 소식 전달)

보상 : 단계별 보상

===


퀘스트가 갱신됐다.


동훈은 생각보다 다루기 쉬운 블랙 가문의 고양이를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전까지만 해도 떼어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앞으로 가문 퀘스트를 쭉 따라가면 블랙 가문의 인사들에게서 퀘스트를 받아내야 할 상황이 많았다.

그건 동훈의 말빨과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블랙 가문의 피붙이, 그것도 적장녀를 데려가면 퀘스트를 받는 데에 오히려 쉬워지지 않겠나.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편지를 전해주라 부탁했는데 지금은 고양이가 같이 가자고 말한 상황. 기존 퀘스트와 살짝 달라졌지만 동훈은 거기까지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넣었다.


얻은 게 있다면 적재적소에 써야 훌륭한 더 벨룸 고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는 게 전쟁 아니겠나.


“내가 그쪽을 뭐라고 부르면 돼?”


분명 충성하기로 해놓고 아직도 반말하는 동훈을 향해 고양이는 잔뜩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반말을 하라고 해놓은 걸.


고양이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니아 블랙. 니아 아가씨라고 부르거라.”


***


고양이와 함께 집결지인 여관으로 가는데 길 건너편에서 큰소리가 났다.


이미 큰 구경이라도 난 듯 사람 몇이 둥글게 모여 안에 있는 세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고급스러운 복색의 남자와 그 뒤에 가녀리게 고개를 꺾고 있는 슬픈 표정의 여인.


그리고 그에 맞서고 있는 애스톨.


애스톨 씨? 왜 당신이 거기에 있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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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아 아가씨 23.01.01 257 7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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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결투 재판 22.12.10 298 9 20쪽
63 반왕의 붉은 기수 22.12.07 309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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