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조회수 :
53,874
추천수 :
1,137
글자수 :
928,341

작성
23.01.14 09:10
조회
215
추천
4
글자
20쪽

북문으로

DUMMY

인벤토리에 있는 모든 아이템을 강화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동훈은 그중 인벤토리가 아닌 품 안에 있는 아이템을 꺼냈다.


바로 ‘저주의 정수’라고 불렸던 ‘아델라의 보석’이었다.


바로 동훈에게 직접적인 ‘행운’을 가져다주는 보물. 뽑기에서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나오는 것을 보장해주는 신비한 아이템.


===

[증표]마녀 아델라의 불운한 보석


연적이 된 자매에 대한 원한이 담긴 저주의 핵.


저주의 불운은 갖지 못한 행운을 응집합니다.


행운 0(소모됨)/150

===


일전에 ‘디렌의 탑’ 앞에서 악령을 만나 행운을 보충했는데 보스 스킬을 뽑느라 소모한 게 못내 아쉬웠다.

보스 스킬로 가장 좋은 ‘추방’을 얻었지만 원래 이미 얻은 것보다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더 아쉬워하는 게 인간의 생리였다.


“증표가 아이템 취급이라도 받았으면 강화를 시도해 보는 건데. 아쉽네.”


‘증표’는 퀘스트 아이템으로 따지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아이템이 아니었고 물론 강화도 할 수 없었다.


동훈은 자신에게 다음으로 귀중한 아이템을 강화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전설급 아이템!


‘디렌의 탑’에서 얻었던 목걸이였다.


동훈이 자주 쓰는 것은 영웅 등급의 ‘지룡의 신블레이드’도 있지만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고른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그 이하 등급의 아이템들이 가지는 3회 강화까지는 손실이 없다는 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T사의 악랄한 BM이기도 했는데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1회 강화시에도 실패하면 아이템이 증발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강화의 효과가 다른 등급의 아이템들보다 월등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전설 등급의 아이템은 정말이지 한두푼 하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이 증발한다는 건 게임을 접을 수도 있을 만한 스트레스였다.


그런 리스키한 전설 아이템 강화를 이곳에서는 딱 한 번에 한하여 확정적으로 해준다니.


튜토리얼을 뽑아먹을 만큼 뽑아먹을 준비가 된 고인물 동훈에게는 전설급 아이템 강화를 놓칠 수 없었다.


‘사실 전설템을 먹는 게 더 문제였지. 이런 강화 이벤트 전에 전설템을 먹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결과적으로 동훈은 전설템 획득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었다.


‘응집된 태양왕의 빛무리’(L) +1

STR+2, WIS+1, 명중+15, 근거리 공격 이뮨 무시+20, 치명타+5

추가 효과 : 공격 시 낮은 확률로 빛 속성 범위 마법 데미지

강화 효과 +1 : 태양수호자 15체 소환, WIS+1


동훈은 일단 아이템을 목에 걸고 자세한 효과는 이따 확인하기로 했다.


애스톨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까닭이었다.


“디오르 씨, 폴트란 검문이 강화됐다고 합니다. 수비대에 연이 있는 이의 말로는 폴트란에 주둔하는 반왕의 기사들이 나섰다고 하는데 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누군가가 누구겠나. 우리지.


알망을 요새로 보내버리고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추적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기사들을 패배시켜서 요새로 돌려보냈으면 아무리 속 좋은 집단이라도 추적이나 썰자가 들어올 것이다.


폴트란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는데 동훈은 그래도 이만하면 많이 버텼다고 생각했다.

왕의 영토 내에서 아무리 의사결정이 느리다고 해도 그들 나름의 인프라가 있을 터. 그렇다면 영토 내의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게임에서도 혈에 반항하는 이들이 나올 경우 1시간도 안 돼서 그들의 닉네임이 단톡방에 퍼지고 디코로 공유되어 모든 혈원, 동맹 혈의 썰자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단톡과 디코가 없는 현실 서버의 더 벨룸에서야 1시간은 무리라도 반나절쯤은 예상했는데.


어쩌면 반왕의 지휘체계에 영향을 주는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바쁠 시기라거나....


“검문이 강화되어도 반다르 씨에게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게 사실, 루젠이 폴트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루젠은 함께할 적에도 퇴로 확보를 우선시하는 예비대원이었거든요. 분명 그가 확보한 다른 루트가 있을 거라고 여겼죠.”


루젠이라면 못난이 루젠이라고 불린, 반다르가 찾으러 간 그들의 옛 동료 아니던가.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그가 없군요.”


애스톨이 바로 그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요. 그게 문제죠.”


“무력으로 뚫을 수 있는 곳이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대장은 무력돌파를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야 한다고 하셨어요. 디오르 씨, 주군의 전투력 보존은 중앙지대 진출 전까지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요.”


충성 맹세 이후 애스톨과 반다르는 동훈을 주군으로 불렀다. 그것이 부담스러운 동훈은 전처럼 불러달라고 말했고 애스톨과 반다르는 주군과 닉네임 디오르를 혼용하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동훈도 휘하의 혈원들에게 주군 소리를 익숙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혈원이 둘밖에 없는 마당에 주군 소리 듣는 건 너무 유난 떠는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기에 아직은 혼용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동훈은 자신있는 목소리로 답변했다.


“무력돌파에 큰 전투력 손실은 없을 겁니다.”


애당초 무력돌파는 동훈이 생각해놓은 최선의 방식이었다. 이 근방에 있는 이들의 레벨은 고만고만할 테니까.

폴트란 수비대장을 맡은 이만 해도 20레벨 안팎이었다.


애스톨은 동훈의 자신감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곤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을 했다.

반다르와 애스톨은 최대한 무력 충돌을 피하는 식으로 움직이려 했다. 순찰, 수색, 정찰에 익숙한 레인저 부대 출신답게 소극적인 교전 수칙을 수행하는 듯했다.


“오늘 폴트란에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축제날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축제날마다 북문으로 가는 경비가 허술해지죠.”


폴트란에는 동문과 서문, 북문으로 뚫린 출입구가 있었다. 폴트란 수비대가 장악하고 있는 관문이기도 했다.

동문은 남쪽 변방으로 뚫려있어 남문이라고도 불렸으며 동훈 일행이 들어온 문이었고, 서문과 북문이 바로 중앙지대를 향해 뚫린 문이었다.


“북문 경비가요?”


무슨 축제길래 북문 경비가 소홀해진다는 거지? 북문은, 동훈이 알기로는 보스 몬스터가 있는 방향이었다. 동훈의 메인퀘스트와 결부된 통로라는 거지. 북문으로 가자는 거면 동훈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애초에 그쪽으로 유도할 생각이었으니까.


“폴트란의 풍습이죠. 마을에서는 ‘위로 의식’이라고 부르는 축제인데 대개 지옥체 근처에 위치한 마을들에서 종종 발견되는 축제에요.”


애스톨은 대륙 이곳저곳을 다닌 바 있어 견식이 넓었다. 여러 마을의 풍습과 축제에 익숙한 듯 그 이름까지 언급하며 아는 것을 풀어놓았다.


지옥체? 동훈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지옥체라는 건 뭡니까?”


“지옥체는 말 그대로 지옥에서 올라오는 놈들이죠, 보통의 몬스터들보다 크고 강력한 존재이면서 물리쳐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옥에서 올라와 활동하는 악마 같은 몬스터들. 중앙지대에 가면 득시글하답니다. 변방에는 좀 적은 편이죠.”


아하, 보스 몬스터를 말하는 거로구만.


보통의 몬스터보다 크고 강력한 존재, 죽여도 일정 시간 이후 다시 돌아오는 존재.


어느 통찰력 있는 유튜버는 보스 몬스터를 플레이어와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게임에 접속하는 것으로 비유했었다.

보스 몬스터가 죽고 일정 시간 이후에 부활하는 것도, 게임이 패치되면 이 부활 시간이 초기화되는 것도 다 매크로처럼 규칙을 가진 접속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튼 그런 식의 부활 매커니즘을 가진 보스 몬스터를 이곳에서는 ‘지옥체’라고 부르는 듯했다.


그들의 부활 능력을 지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설명하는 걸 보면 이 세계 사람들도 나름의 시선과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있었다.


동훈이 보는 것과는 다르게.


“지옥체를 위로한다는 게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던 옛날에는 산제물을 바치고 뭐, 그랬답니다. 이제는 칼이 있고 그들에게 대항할 기사들이 있으니 그냥 풍습으로 남은 거죠. 보통은 아예 없어지기도 하는데 폴트란은 축제로 진행하더군요.”


“그러면 이곳에 주둔한 반왕의 기사들은 지옥체를 토벌하러 가겠군요.”


“그렇죠. 바로 그거예요. 지옥체 토벌에 쓰일 병력을 끌고 갈 테니 자연스럽게 북문 경비가 소홀해지는 거죠. 북문으로 나가면 지옥체가 있는 곳으로 뚫린 길 옆으로 중앙지대로 향하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을 따라 중앙지대로 가는 겁니다. 완벽한 계획이죠.”


애스톨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마치 광고 모델 같은 미소였다.

동훈이 애스톨을 오래 알지는 못했지만 이런 웃음을 짓는 건 뭔가 다른 이유도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동훈도 애스톨도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탓이었다.


“그렇군요. 완벽한 계획이군요.”


“북문의 경비가 소홀해지는 거지 없어지는 건 아니니 축제 때 상황을 봐가면서 움직이시죠. 아마 대장이 신호를 줄 겁니다. 이 계획이 더 완벽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대장이 신호를 주기 전까지 우리는 축제를 즐기면 된다는 겁니다.”


희희낙락한 애스톨은 그러면 그렇지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언제나 유쾌한 그가 놀 기회를 두고 그냥 넘어갈 수가 있나.

신호를 줄 반다르가 고달프겠지만 이렇게 역할을 나눈 이유가 있을 터였다. 동훈 역시 이곳에서 벌어질 축제가 궁금하기도 했고. 동훈으로서도 더 벨룸에서 열리는 축제는 처음 아니겠나.


NPC들이 여는 축제라.


***


축제는 화려했다.


현대인의 눈에도 화려하다고 느껴질 만큼 뭔가 토속적이면서 판타지스러운


과거 보스 몬스터들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기획된 축제는 괴물을 자극하지 않도록 불도 올리지 않아 사위가 캄캄했지만 각기 형형색색의 가면과 리본은 어둠 속에서도 무얼 발랐는지 형형하게 빛이 났다.


마치 가면과 리본만이 동동 떠서 춤을 추는 듯한 기묘한 축제는 신비로우면서도 애달픈 분위기가 있었다.


연주되는 곡이며 휘적거리는 춤사위며 하는 모든 것들이 즐겁고 흥겨웠지만 그 이면에는 잔잔하게 흐르는 단조의 애달픔이 아는 사람만 아는 슬픔을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나 축제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는 그런 애달픔은 없고 다들 하하호호 웃고 떠들었다. 위로 의식이라고 산제물을 바치던 비통한 시절은 가고 없으니 축제의 기원에 잠든 애달픔은 음악이나 춤사위 따위에나 묻어날 뿐 도시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애스톨은 음악에 몸을 맡기며 흥겹게 몸을 흔들었고 동훈은 말을 돌보는 종자 둘을 데리고 축제를 구경했다.

인질로 잡힌 종자 둘은 폴트란에서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말만 돌봤기에 동훈이 둘이 인질이라 기가 죽은 걸까 싶어 축제 음악이라도 들으라고 데리고 온 것이었다.


“축제, 신기하다. 엄청 화려해.”

“체, 엔솔, 우리 요새에서도 축제를 열잖아. 이것보다 백배는 더 신기하다고. 백배는 더 화려하고.”


반다르의 사냥개는 꼬리를 흔들며 춤추는 이들을 향해 헥헥거렸고 검은 고양이 니아 아가씨는 동훈의 발목 어림에서 도도하게 어두운 축제의 분위기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행이 축제를 즐길 때,


야음을 틈타 반다르는 북문의 경비를 감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모든 숨과 움직임을 죽이고 마치 정물처럼 높은 곳에서 북문 경비를 내려다보는 반다르의 모습은 외롭게 보였다.

그림자에 숨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반다르는 자신은 저들을 보고 저들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비대칭적인 상황을 외롭게 느꼈다.


달도 뜨지 않은 야심한 밤에는 별만이 총총히 박혀있었다. 하지만 별빛만으로는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반다르의 초인적인 시각만이 야심한 밤의 어둠을 뚫어보았다.


북문의 경비들이 들고 다니는 등잔은 작고 간소했다.


반다르가 동부에 있을 때 순찰을 위해 불을 밝힐 시에는 저것보다 더 밝고 큰 등잔을 들었는데 이곳은 변방이다 보니 중요도가 떨어져 보급이 열악한듯했다.


어찌 되었건 이곳을 돌파해야 하는 반다르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빛이 적으면 움직임이 들킬 가능성도 줄어들고 보급이 열악한 만큼 병사들의 사기도 저조할 테니까.


“그러니까, 수비대장님이 아침부터 엉덩이에 종기 난 송아지마냥 군 이유가 폴트란에 왕의 기사를 패퇴시킨 괴인들이 들어와 있어서라고?”

“나도 들은 거야. 왕의 전령이 와서 그렇다는데? 잔비어 요새에서 직접 전령을 파견했대.”


축제 음악은 북문에서 멀었기에 적막한 밤은 수군거리는 병사들의 대화를 반다르의 귀에까지 전했다.


반다르 역시 동훈처럼 반왕의 대처가 있으리라 예상했다.

남쪽 변방에서 일어난 기사들의 기사(奇事)는 어느 도시보다 폴트란에 먼저 전해질 것이고 반왕의 조처가 가장 먼저 효과를 발휘할 것도 폴트란일 터였다.


그렇기에 왕의 전령이 이곳에 당도했다는 사실에 반다르는 전혀 놀라지도, 곤란해하지도 않았다.


“괴인들을 잡으면 무게만큼의 금을 하사한다는 것도 사실이야?”

“잔비어 요새의 자넷싱 장군이 직접 공인했대. 괴인들을 잡으면 아마 저기 우뚝 서 있는 저택도 살 수 있을 거야.”


병사들이 가리킨 저택은 우연히도 반다르가 숨어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저택이었다.


반다르가 자리 잡은 곳은 폴트란 북문 근처 웬 고관대작 집 중 하나를 집어 몰래 들어온 것이었다. 동부의 숲마저도 제집처럼 은밀하게 돌아다니던 반다르에게 저택 침입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근방의 건물 중 가장 높은 이 건물은 과시욕 때문인지 가장 꼭대기 층에 시계탑을 올려놓았는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되어 반다르가 자리 잡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벽돌로 만들어진 저택은 부유함을 상징하는 듯했고 그 위에 얹어진 짤뚱한 시계탑은 금상첨화의 위치였다.


디자인적으로도 그랬지만 반다르의 목적에 부합하는 부분에서도 금상첨화라는 뜻이었다.


자박! 자박!


그러나 그 판단은 조금 경솔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계탑으로 올라오는 발 디디기 어려운 좁은 길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이쪽으로 올라오다가 반다르를 발견해 몸이 굳어버린 모양이었다.

반다르 역시 북문 경비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올라오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반다르가 올라온 길이 아닌 다른 길인 탓도 있었다.


아이는 이 집에서 쓰는 하인인 듯했다. 온갖 잡일을 다하는 건지 옷은 후줄근하고 안색이 초췌한 게 그저 막 쓰이는 애로 보였다.

이 정도 사는 저택에는 하인들의 방도 다 준비되어 있는데 그 방에서조차 끼워주지 않아 어디든 가서 자야 하는 하인 중에서도 하층민의 존재는 어디에나 있었다.


이 아이는 영리하게도 아무도 쓰지 않는 시계탑 밑 작은 다락을 자신의 아지트로 삼은 것이다. 오늘의 일은 전혀 영리하지 못했지만.


반다르가 돌아보자 굳었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는지 하인 아이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반다르의 형형한 눈빛에 놀란 건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귀신 같은 사람을 보고 놀란 건지 아이는 당황에 빠졌다.


“어, 어!”


투둑!


아이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어 아슬아슬한 난간에서 떨어졌다.

아이가 지른 소리와 딛고 있는 벽돌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소리는 가까운 북문 경비의 주의를 끌었다.


“누구야! 어? 저긴가? 저건 어린애인가?”

“빈텐 어른의 집 꼭대기야! 어른이 부리는 잡일부겠지. 저긴 왜 올라갔지?”


떨어진 아이는 겨우 한 손으로 볼록 나온 홈을 부여잡았다. 그대로 떨어졌다면 떨어진 부위부터 깨져 죽었겠지만 아이는 천운이 따라 홈을 붙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재빨리 구해주지 않는다면 아이가 홈을 붙잡고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


북문의 경비들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고 아래에서 얼쩡거리기만 했다. 이런 집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일이었으니.


반다르는 선택해야 했다.


여기 아이가 떨어져 죽게 내버려둘지, 손을 잡아 구해줄지.


떨어져 죽게 내버려둔다면 아이가 죽고 북문 경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반다르는 몰래 이곳에서 빠져나가 일행과 합류해 폴트란을 빠져나간다는 기존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으리라.


아이를 가여이 여겨 손을 잡아 구해준다면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북문 경비에 의해 소란이 일 거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일은 어려워지겠지.


선택의 순간이었다.


아이는 점점 버티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리는 손아귀가 홈에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다.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아이가 마지막으로 작게 소리를 냈다.


“사, 살려주세요.”


텁!


반다르는 아이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동정심 때문에 위험을 사는 자들. 동훈이 보았다면 자기랑 똑같다며 한바탕 웃었으리라. 물론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라 기꺼워서 웃는 것일 거고.


반다르도 생각 없이 아이를 구하려 한 건 아니었다.


그가 전장에서 살아온 시간이 얼마인가. 그도 산전수전 다 겪은 비정한 사람이었다. 명령으로 일가족을 죽인 적도 있고 정을 붙인 부하를 참한 적도 있었다.

고작해야 아이 하나를 밀쳐내지 못해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도 늙었나 보군.’


하지만 군에서 나와 세상을 떠돌며 스스로가 많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새롭게 내세운 뜻은 구할 수 있는 이는 구하자는 거였다.


그건 그가 바란 것이었으니까.


어디로 간지 알 수 없게 된 자신의 아내와 딸을 누군가 구할 수 있어 구했길 바랐기 때문에.


반다르는 애초에 동훈처럼 무력돌파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이지.

지금처럼 그래야 하는 상황이라면 반다르는 기꺼이 무력돌파라는 카드를 꺼낼 수 있었다.


반다르가 아이를 구하자 이곳을 지켜보던 북문 경비들은 기겁했다. 죽으리라 생각한 아이가 살아난 것도 놀라운데 그를 구한 인간이 있다는 게 더욱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자가 시계탑에 숨어있다가 아이를 구했다. 아침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괴인들의 이야기가 경비들의 머리에 떠오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뭐야! 위에 누가 더 있는데?”

“빈텐 어르신의 집에 누군가 있다!”


삐이이이익!


경비들은 주저 없이 호각을 불었다.

지금은 폴트란 수비대장이 히스테릭을 부릴 만큼 비상상황이었다. 잔비어 요새에서 전령이 와 지엄한 명령까지 내린 탓에 폴트란은 현재 전례 없이 강한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빈텐이라는 지역유지의 저택을 수색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왕이 개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미 요새에서 왕이 재가한 전령이 와 명령을 하달했다. 폴트란 전역은 이에 협조해야 했다.


아이를 구한 반다르는 소리소문없이 시계탑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폴트란의 수비 병력이 저택을 포위하기 시작하면 독 안에 든 물고기가 되고 말 터였다.


시계탑의 복잡한 구조와 부산스러워진 저택에도 반다르는 무인지경으로 움직였다. 마치 이 저택의 설계도를 아는 것처럼 익숙하게 출구로 향했다.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저택에 없었다.


반다르는 금방 저택에서 뒷문으로 빠져나와 골목에 들어섰다.


벌써 병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반다르는 어둠을 망토 삼아 그들의 눈을 속이고 골목을 누볐다.

도시 수비병들은 반다르가 옆을 스쳤는데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다만 숫자가 많아 반다르도 걸리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해야 했다.


“잡아라! 수상한 자다! 현상금이 걸린 자들이다!”

“잡으면 왕께서 무게만큼의 금을 하사하실 거다!”


병사들의 욕망과 집요함이 들끓었다. 반다르는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2 변질 23.02.11 180 2 19쪽
91 보스몬스터 +2 23.01.31 199 4 17쪽
90 매크로 +1 23.01.29 189 5 13쪽
89 위세프의 영성 강림 23.01.28 195 2 13쪽
88 아뜨리 카포(2) 23.01.27 212 4 16쪽
87 아뜨리 카포 +1 23.01.25 190 4 13쪽
86 붉바리(2) 23.01.22 197 3 19쪽
85 붉바리 23.01.21 215 3 21쪽
84 폴트란 북문 전투 23.01.18 193 4 13쪽
83 북문으로(2) 23.01.15 207 4 17쪽
» 북문으로 23.01.14 216 4 20쪽
81 기별 없이 온 손님 23.01.13 205 4 19쪽
80 이웃 23.01.10 244 5 12쪽
79 잔비어 요새 대회의 23.01.08 216 5 13쪽
78 충성 맹세 23.01.07 227 5 15쪽
77 복수자들 23.01.05 271 8 16쪽
76 마성의 남자 23.01.03 234 9 18쪽
75 니아 아가씨 23.01.01 255 7 21쪽
74 움직이는 세계 22.12.31 249 8 15쪽
73 안개 도시 폴트란 22.12.29 255 8 14쪽
72 당신의 가격은 22.12.27 268 9 18쪽
71 신을 위한 코드 22.12.25 276 7 16쪽
70 초능력과 친구 22.12.24 279 6 15쪽
69 디올 +1 22.12.21 277 7 13쪽
68 정치와 고립 22.12.18 307 8 16쪽
67 보스 스킬 22.12.17 291 11 16쪽
66 결투 재판(3) 22.12.14 294 7 21쪽
65 결투 재판(2) 22.12.12 283 9 16쪽
64 결투 재판 22.12.10 298 9 20쪽
63 반왕의 붉은 기수 22.12.07 309 10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