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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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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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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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당신의 가격은

DUMMY

동훈을 알아보고 말 건 것은 청바지에 편한 반팔을 입고 있는 미녀, 이나은이었다.


주호 아저씨의 딸이자 동훈의 친구, 얼마 전까지 유럽에서 공부하다 돌아온 탕아 이나은. 숨겨진 초능력자이자 초능력 협회의 면접관.


그녀는 차려입지 않고 편하게 입고 온 차림 그대로도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었다. 미모뿐 아니라 그녀 특유의 밝은 에너지는 저절로 주변을 화사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나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피자집에서 나은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건 나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자 귀신인 자신의 친구와 예전에 몇 번 왔던 단골집에서 동훈을 마주치다니. 마침 가게가 만석이라 자리도 없겠다 둘이서 4인석을 차지하고 앉은 친구 덕을 좀 봐야지.


나은은 앞에 앉은 정태에게도 아는 척을 했다.


“뭐야, 이런 데서 다 만나네. 정태! 너 정태지?”


“뭐야! 이나은?”


한참 피자를 입에 욱여넣던 정태가 갑자기 등장한 나은의 모습에 입안에 있는 피자까지 튀겨가며 반가워했다.

정태가 동훈의 중학교 때 친구니 둘은 동훈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었다. 서로 안면이 있고 인사까지는 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야, 나은아. 오랜만이다, 야. 이게 얼마 만이야? 유럽 가버리고 처음 보는 거니까 몇 년째지?”


한참 반가워하던 나은이 옆에 있는 여성을 둘에게 소개했다.


긴 생머리의 차분한 분위기의 여성은 쌍꺼풀 없는 눈을 다소곳하게 뜨고 있었다. 척 봐도 내성적으로 보이는 여성은 부끄러운지 나은의 뒤로 살짝 숨어있었다.


“반갑다, 진짜. 아, 여기는 내 친구 희연이. 인사해. 여기는 내 동네 친구들 동훈이하고 정태.”


“안녕하세요.”


인사를 시키고 나은은 너스레를 떨며 동훈 옆으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워낙 털털한 성격의 나은은 동훈이 남자라는 걸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차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라 이것저것 재고 가릴 사이는 아니기도 했다.


물론 엉덩이를 밀고 들어온 나은은 동훈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야야, 저기 정태 옆으로 가봐. 여기 우리가 앉게. 자리 없으니까 합석 좀 하자.”


“아잇, 진짜. 말로 하면 될 것이지 엉덩이로 밀고 있어.”


동훈이 투덜거리며 정태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친구에게 자리를 내주는 건 귀찮을 뿐 불쾌한 일은 아니었다.


나은은 옆자리를 두들기며 희연을 재촉했다.


“희연아, 이리 와. 앉아. 얘들 나쁜 애들 아니야. 어릴 때부터 알던 애들.”


“실례할게요.”


수줍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는 희연의 모습은 가녀린 사슴 같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은에 밀리지 않는 희연의 미모 역시 그런 부분을 더했다.


아까부터 피자를 흡입하던 정태는 희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멍청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 꼴이 우스워서 동훈은 그의 옆구리를 쳐 정신 차리게 했다.


‘이런 숙맥 같으니라고. 그렇게 쳐다보고만 있으면 될 것도 안 되겠네.’


정태는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모태솔로였다.

남중남고군대에 공대까지 나온 정태는 남자를 대하듯 여자 대하는 걸 어려워했고 그나마 어릴 때부터 알았던 나은만은 그럭저럭 대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정태가 여자라면 아무나 좋아하고 금방 사랑에 빠지는 편은 또 아니었다.


나름대로 기준이 확고해서 여자를 대하는데 곤란을 겪을 뿐 경험이 적은 애송이가 으레 그러하듯 갑작스럽게 좋아한다며 고백하고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고백 공격으로 상대를 당황시키지 않는 만큼 표현도 없음에 가까워서 이렇게 멀거니 쳐다만 보곤 하는 것이다.


동훈의 옆구리 찌르기에 겨우 정신을 차린 정태는 아직도 희연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희연은 나은을 힐끔거렸다.


프랑스 유학 당시 만난 게 인연이 된 둘은 그곳에서 가족처럼 붙어 다녔고 외동이었던 희연은 나은을 자매처럼 여겼다.


둘은 정말 못 할 이야기 없이 많은 대하를 나눴고 그녀의 행동을 그녀 자신보다도 아는 부분 많다고 할 수 있었다.


남자라면 정말이지 동성 친구처럼 대하는 나은이 동훈에게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대했지만 은근히 동훈 방향으로 시선이 가지 않는 것부터 하며


물론 이는 커다란 오해였다.


나은은 자신의 초능력을 자제하기 위해, 특히 가장 가까운 친구인 동훈에게 실수로라도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이었지만 그녀가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희연으로서는 연심이라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희연이 로맨스 소설의 열렬한 팬이기 때문도 있었다.


“동훈아, 이거 먹어라. 맛있다, 야.”


나은은 추가로 시킨 닭날개와 피자를 앞에 두고 동훈의 입을 향해 닭날개를 들이밀었다. 어릴 때부터 나은은 동훈이 밥 먹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이 많았다.


동훈은 어릴 때도 어딘지 소외되어 있고 몰려있어서 나은은 저 외로운 입에 뭐라도 물려야 직성이 풀렸다.

그때의 기억은 버릇처럼 남아서 술만 마시고 있는 동훈의 입에 뭐라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 싫어. 난 날개 안 먹어.”


“맛있다니깐, 먹으라면 그냥 먹어! 가리는 게 많아.”


나은이 내미는 닭날개를 극구 거부하던 동훈은 고집스러운 나은의 권유에 결국 닭날개 하나를 입에 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희연에게는 어린 남자애가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것처럼만 보였다.


원래 오해를 시작하면 그쪽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희연은 괜히 뚝딱거리고 요령 없이 친구처럼만 대하는 나은의 모습에 아연해졌다.

어쩔 수 없지. 낯가리는 희연이었지만 친구를 위해 사교성을 발휘해보기로 결심했다. 친구의 답답하게 꼬인 연애사를 풀어줄 수만 있다면 약간의 희생도 감수하리.


동훈의 물음에 희연은 불쑥 심리적 거리를 좁혀갔다.

조금 과한 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희연 나름대로 그녀의 인싸친구들에게 벤치마킹한, 사람과 친해지는 법이었다.


‘우선 반말로, 동갑이니까. 괜찮겠지?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말을 트고 나서 일상적인 대화로 넘어가는 거야. 그러고나서 천천히 둘을 엮는 거지. 완벽한 계획이야. 그렇고말고. 처음 반말하는 게 너무 어려울 뿐이지....’


서양인들이 흔히 보이는 친화력은 낯가림이 심한 희연에게 부담스러운 친한 척이었지만 그 또한 공부가 된 셈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불쑥 날씨가 어떻냐 묻고 좋은 하루를 보내라 말하는 그들의 스스럼 없음은 희연에게 이해할 수 없는 수학 공식 같은 거라 그냥 외우고 만 것이다.


그러니 그런 친한 척이 약간 어색한 건 당연했다.


“무, 무슨 희연 씨야. 나은이 친구면 내 친구지. 나은이랑 동갑 아니었어?”


“어, 그렇지. 동갑 맞아.”


조금 더듬거렸지만 ‘일단 들이대기’는 꽤 효과적이었다.


희연이 생긴 것과 다르게 꽤 사교적이라고 생각한 동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통은 희연의 억지 사교성이 약간 어색하다는 것을 눈치챘겠지만 동훈 역시 한때 집에서 게임만 하는 히키코모리 시절을 보낸 바 있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희연이라고 불러. 나도 반말할게.”


희연의 용감한 반말 제의에 동훈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 그래. 희연아.”


희연의 적극적인 대화 참여로 다시금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서로의 이야기를 떠들고 하다 보니 희연에 대해서도 점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희연의 떨어지는 사교성에 대해 아는 나은으로서는 희연의 사뭇 적극적인 모습에 의아했지만 원체 눈치가 없기도 한 그녀로서는 그냥 오늘 피자 먹어서 신이 났나보다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희연은 동훈의 말 트기 동의에 힘입어, 그리고 아직도 넋 놓고 있는 정태에 힘입어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모르겠어. 이나은, 넌 나한테 꼭 보답해야 해. 너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겠니?’


그런 희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은은 피자와 맥주를 먹을 뿐 완전히 자동 응답 모드에 들어가서는 ‘응’, ‘맞아’, ‘그렇지’ 하며 적당히 대답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대화하는 데에 온 에너지를 쏟고 있는 희연이 눈치챌 수 있을 리 없었다.


희연은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다가 자신의 이야기까지 해야 했다.


자신은 무슨 일을 하고, 나은하고 어떤 인연이었는지, 오늘은 어떤 일로 피자집을 찾았는지까지.

조금 과한 TMI가 있었지만 희연은 그저 말을 하느라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없었다.


동훈은 희연의 경력과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술가였구나. 하긴 나은이도 예술 하니 친구도 그쪽인 게 당연한 건가.’


소희연.

한국 미술계의 젊은 작가 중 가장 주목받는 신예로서 키네틱 아트를 기반으로 하는 금속 공예를 하다가 회화로 화려하게 전환해 회화로 성공한 천재 예술가였다.


한국에서 미술로 유명한 홍대 출신에 아름다운 외모, 독보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희연은 단숨에 한국 미술계뿐만 아니라 대중까지 사로잡았다.


한국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몇 번 열었다고 하며 옥션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없어서 못 산다고 하는데....


‘그렇다는데 내가 미술을 알아야 말이지. 그래도 대단한 건 알겠네. 젊은 나이에 이렇게나 성공한 예술가라니.’


동훈은 미술을 잘 몰랐다. 그림이 어떻고 무슨 뜻을 품고 있고 대단하네 어쩌네 하지만 동훈은 그림이 그림이지 뭐 대단한 게 있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나은이 학부생 시절 그림을 그릴 때에도 동훈은 예쁘다, 잘 그렸다 정도의 칭찬 말고는 할 말이 궁했었다.


그러니 동훈으로서는 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감탄뿐이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두각을 보이는 사람은 대단한 능력자이기 마련이었으니.


단지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기질이나 신념이 있었다.

동훈은 그런 것들이 부러웠고 자신 또한 가지고 싶었다.


더 벨룸 현실 서버에서의 성장은 동훈의 그런 욕구와 갈망을 조금씩 채워줬다.


스텟으로 상승하는 육체 능력과 ‘통찰’로 얻은 수입 역시 동훈의 갈증을 해소했다.


반다르와 애스톨, 그리고 반다르의 사냥개라는 일행을 책임지기 시작한 동훈의 리더십도 동훈 내면의 근본적인 결핍을 채우는 커다란 톱니바퀴였다.


동훈은 날이 갈수록 자신이 살아간다는 것을 느꼈고, 전에 같았으면 한 분야에서 인정받는 희연의 모습을 질투했을 텐데 오히려 그녀를 인정하는 마음에 스스로가 놀랄 지경이었다.


한편 정태는 아마 희연이 하는 일이 놀고먹는 백수였대도 그저 좋다고 할 표정으로 희연에게 빠져있었다.


피자를 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드는 나은은 희연을 추켜세우며 칭찬했다.


“얘가 요즘 얼마나 잘 나가는데. 너네 얘한테 잘 보여. 혹시 몰라, 사인이라도 해줄지. 이번 전시도 모르긴 몰라도 사람 엄청 몰릴 거야. 그러니 갤러리에서 희연이를 참석시키는 조건으로 초대전을 여는 거지.”


얘가, 얘가. 자기 자랑을 해도 모자랄 판에 왜 남 자랑을 해줘? 희연은 자신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모르는 친구를 쥐어박고 싶었다.


여기서 나은이 얼마나 잘 나가는 큐레이터며 찾는 갤러리가 허다하고 일이 너무 많아 쳐내는 지경이라는 걸 대신 자랑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은의 칭찬에 못 이겨 서로를 추켜세워주는 모양새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희연이 나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전시, 있잖아. 이번 초대전. 프리뷰 때 같이 가자고 해도 돼.”


나은은 ‘얘가 왜 이래?’하는 눈빛을 보내다가 동훈이 일전에 아버지를 도와줬던 일도 있고 그에 대한 보답을 아직도 못했다는 생각에 좋다고 했다.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초대전은 정식 오픈 전에 관계자들을 위해 프리뷰를 열었다.

갤러리 관계자는 물론이고 갤러리와 작가의 후원자, 작가의 가족과 지인 등 미리 작품 전시를 볼 사람들을 모아 일종의 미리보기를 열어두는 것이다.


희연이 이렇게 지인들을 전시 프리뷰에 데려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갤러리에서 열어주는 초대전인만큼 작가들이 지인을 많이 데려오는 건 갤러리에 눈치 보이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무릅쓰고 동훈과 정태를 초대한다니. 둘 중 누군가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하는 나은의 의심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 희연이 전시하거든. 다음 주부터 시작인데 갤러리에서 이번 주말에 평론가, 컬렉터, VIP 대상으로 먼저 열어준대. 혹시 같이 갈래? 동훈이 너랑 정태 너도. 신진작가 초대전인데 작가 지인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이야.”


“전시, 화가...셨구나.”


정태가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동훈이 어떤 전시냐, 몇 시에 가면 되느냐 따위를 물어보려고 입을 떼는 순간 정태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치. 우리가 가서 응원을 해드려야지. 초대 감사드려요, 희연 씨. 꼭! 꼭 가겠습니다. 시간 내서라도!”


정태의 열정적인 참여 의사에 동훈은 목까지 넘어온 질문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오늘도 야근을 겨우 면하고 어렵게 나온 술자리면서, 주말 특근도 비일비재한 현재자동차의 김정태 책임이 아니던가.


게다가 완전 이과형 인간이라 미술이니 예술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녀석이 여자에 눈이 멀어 전시고 뭐고 당연히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해댔다.


동훈은 고개를 저으며 정태 녀석의 미술 감각을 떠올려 봤다.


‘야, 이 캐릭터 어떠냐. 예쁜 것 같냐?’


그렇게 말하며 보여준 캐릭터는 웬 노란색 돼지를 닮은 캐릭터였다. 이과형 정태는 색이 밝으면 예쁜 것이고, 무언가와 닮으면 잘생긴 것이라 여기는 예술 쪽으로는 문외한 중의 문외한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간만에 만난 친구인 나은의 초대도 있고 정태 녀석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안 갈 수가.


그러자, 그래.


동훈 역시 참석 의사를 밝히자 희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은도 자신의 지인으로 참석할 테니 희연은 곧장 나은과 동훈 데이트 계획을 수립하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야, 너희 운 좋은 줄 알아. 희연이 전시가 얼마나 인기 많은지 알아? 그걸 프리뷰로 보게 됐다니 영광입니다, 하고 인사들이나 해.”


“저는 그, 영광입니다. 희연 씨 팬이에요.”


얼씨구? 언제 봤다고 팬이래? 오늘 처음 봐놓고 팬을 자처하는 정태를 동훈은 한심하게 쳐다봤다.


동훈의 어이없는 시선을 무시하며 정태는 맥주를 홀짝였다. 피자를 걸신들린 것처럼 흡입하던 녀석이 더는 피자를 먹지 않는 사람처럼 깨작거리는 걸 보면 괜히 놀리고 싶어졌다.


“피자는 왜 더 안 먹어. 오늘 피자 박살내기로 한 거 아니었어?”


“어어. 먹어. 너 많이 먹어.”


놀리는 기색을 느낀 정태가 눈을 부라리며 어필했고 동훈은 쓰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3일은 족히 삐질 것이다. 그거 달래겠다고 진을 빼는 것보단 지금 입을 다물어주는 게 동훈에게 이로웠다.


나은은 과연 희연이 마음에 두는 게 누구인지 곁눈질로 살피며 피자와 닭날개를 입으로 쓸어 담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렇게 많이 먹고도 몸매를 유지하는 걸 신기해하지만 나은은 자신이 많이 먹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살이 안 찌면 그만이지, 많이 먹든, 적게 먹든 말이야. 하여튼 소희연 얘는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손동훈? 김정태? 둘 다 인물이 빠지진 않지. 정태는 살을 좀 빼면 좋겠지만.’


나은은 아직 이성에 대한 갈증이 없었다.

그녀가 동성에 이끌리는 것도 아니고 이성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저 초능력을 가진 나은으로서는 사람 자체를 그의 내면 그대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가격으로 보는 인간이 어떻게 사람에게 이끌릴 수 있을까? 나은이 그러지 않으려 마음 먹었으며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지만 초능력은 그녀를 마음대로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은은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단 마음 맞는 몇과 담소를 나누며 맛있는 것을 먹는 게 훨씬 좋았다.


그렇게 먹고 마시던 나은은 문득 동훈을 보았다.


‘손동훈. 요즘 들어 인물이 훤해졌단 말이야. 원래는 음침하게 그늘져 있는 분위기 때문에 외모를 스스로 깎아먹는 경향이 있었지. 요새 일이 잘 풀리나?’


냄새는 맡으려고 맡은 건 아니었지만 앞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조건을 채웠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진 그녀였지만 우연히도 동훈의 값어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일부러는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돌리면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나은은 고개를 홱 돌리며 능력이 발현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런다고 능력이 발현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더 잘 알았지만 이렇게 능력이 발동되어 가격을 보고, 그 사람을 숫자로 판단할 수 있게 되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가지게 될 테니 동훈과의 오랜 우정을 그렇게 변질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속절없이 발현되어 마음속에서 차르르륵 하고 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속물적인 마음속 소음.


이미 능력은 발현되었다.


나은은 오늘따라 자신의 능력이 원망스러워졌다.


경천동지할 대단한 능력도 아니면서 조건이 맞으면 제깍 발현되고야 마는, 나은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능력은 기어코 나은을 흔들고 말았다.


나은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속에 은근히 떠오를 동훈의 가격을 기다렸다.


한순간, 두 순간이 흘러도 나은의 마음속에는,


‘뭐지? 왜 안 떠오르지?’


가격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값이 나오지 않는 대상은.


어떤 초능력자, 돈 많은 갑부도 나은의 능력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능력이 아예 먹히지 않는 사람이라니.


나은의 알 수 없는 시선이 동훈에게 닿은 것은 잠깐이었지만 희연은 그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오해는 깊어져만 가고, 술자리는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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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북문으로(2) 23.01.15 207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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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움직이는 세계 22.12.31 250 8 15쪽
73 안개 도시 폴트란 22.12.29 255 8 14쪽
» 당신의 가격은 22.12.27 269 9 18쪽
71 신을 위한 코드 22.12.25 276 7 16쪽
70 초능력과 친구 22.12.24 280 6 15쪽
69 디올 +1 22.12.21 277 7 13쪽
68 정치와 고립 22.12.18 308 8 16쪽
67 보스 스킬 22.12.17 292 11 16쪽
66 결투 재판(3) 22.12.14 294 7 21쪽
65 결투 재판(2) 22.12.12 283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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