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3)
제리온이 그럴듯한 가설을 내놓긴 했으나 자리는 여전히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남은 인원은 고작 다섯뿐이었다. 사실 지금 무덤가에 모인 다섯은 죽은 이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있다 뿐, 다른 유족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삶의 터전과 가족을 모두 잃은 지금, 앞으로의 행로를 결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야 했다. 디리터가 그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신도 좋고 다 좋은데, 이젠 어떻게 할 거야? 로샤단이 와해되었으니, 우린 이제 정규군도 뭣도 아니라고.”
“아니, 로샤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칼롯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으나, 그 목소리엔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디리터는 그의 대답을 듣고 씨익 웃어 보였다. 그는 이미 그가 그렇게 말할 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칼롯 역시 디리터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모인 인원을 쓰윽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이제부터 이번 사건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할 거다. 보금자리와 동료를 잃고 훌훌 털어낼 정도로 둥글둥글하지 못해서 말이지. 안개송곳니라는 녀석들을 찾아내,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평소보다 목에 힘을 실었다. 마치 자리에 모인 넷뿐만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 안개송곳니도 들으라는 듯한 엄숙한 말투였다.
일동은 숨이 멎은 것처럼 말이 없었다.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이칼롯의 맹세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미 그는 무언으로 다른 넷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런 날벼락 같은 재앙에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납득할 수 없다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 디리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간다. 람 아저씨와 카토르의 유지를 이어받을 거야. 그리고, 람 아저씨를 죽인 녀석들을 찾아내서!”
“죽여버릴거야.”
바통을 건네받는 것처럼 루도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모아 앉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그동안의 슬픔을 떨쳐 내버린 후였다.
“나도. 람의, 로샤단의 원수를 갚고 말 거야.”
언제나 우유부단하게 끌려다니던 마리네가, 이번만큼은 자신의 의지를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이칼롯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도와 마리네만큼은 빠지지 않을 거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 둘이야말로 람카디스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제리온만 남게 되자 그는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자기암시적인 맹세를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가 다소 비관적인 사람이었다.
“기세는 좋은데, 우린 고작 다섯인데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적이 정확히 누군지, 그 수는 몇 명인지, 그들 역시 신을 쫓고 있는지도.”
“맞아. 그 말대로야. 생긴 대로 합리적인 친구로군.”
뜬금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일행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칼잡이 넷은 동시에 검을 뽑았고, 제리온은 허둥지둥 그들 곁으로 달려왔다. 목소리는 무덤 사이에서 들려왔다. 봉긋이 솟은 무덤이 시야를 방해해, 낯선 이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아직까진 무사한 것 같군. 하지만 너희 역시 시간이 얼마 없어.”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내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루도와 마리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한 번씩 보았던 얼굴이었다. 루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알룬도.”
그는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여행복 차림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옷 사이로 드문드문 붕대를 감은 것이, 그 또한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행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으나,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어린아이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알룬도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난 어딜 가나 똑같은 대접이군. 앞으로는 좀 나아지려나.”
디리터는 금방이라도 박차고 나갈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그는 로샤단이 습격당하기 직전, ‘유감을 표한다’는 말을 한 채 홀연히 자취를 감췄었다. 그것은 즉, 그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부터 예측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제리온와 디리터 역시 닷새 동안 그를 찾아다녔으나 작은 단서 하나 잡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돌연 일행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칼롯이 공격하려는 디리터를 눈빛으로 제지했다. 아직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고, 또 어떤 속셈으로 여기에 나타났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네 자루의 검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데도 알룬도는 전혀 동요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함정이 아닌지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칼롯이 말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지? 당신은 그날 습격이 있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어.”
“정체...정체라...”
알룬도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가 입은 셔츠의 가장자리며 소매에 피가 말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 뭘 숨기겠어? 난 안개송곳니였다.”
“너 이 자식!!”
이칼롯과 마리네가 말리지 않았다면 디리터는 그대로 알룬도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을 것이다.
“과거형으로 말하는군.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그래. 닷새 전에 자체적으로 탈퇴했다. 덕분에 이렇게 추격당하는 신세가 됐지만.”
“추격당한다고?”
알룬도는 말하기에 앞서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옷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을 뿐, 그의 몸에 난 상처는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그는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다. 팔자 좋게 누워 있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래. 어찌어찌 따돌리긴 했지만, 위치가 탄로 나는 것도 시간문제지. 고작 말린 생선포 하나 가지고 여기까지 돌아오다니, 나도 오래 살긴 글렀어.”
“그게 무슨...”
“후환을 없애기 위해 너희를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곧 있으면 아케니온 용병단이 이리로 들이닥칠 거야.”
“아케니온? 그게 무슨 소리야?”
디리터는 그의 말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알룬도는 말을 정정하지도, 다시 설명하지도 않았다. 뜬금없기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아케니온이라는 단어를 듣고 연상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루도가 말했다.
“아케니온... 몇 년 전 교역의 길을 관할하던 용병단을 말하는 건가요? 그 사람들이 왜?”
“로샤단이 류이너스 교단에 협력하던 것과 같은 거야. 아케니온 용병단은, 안개송곳니 암살단에 전격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거든.”
루도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제리온이 추측한 것보다 일이 훨씬 더 커진다는 느낌이었다. 안개송곳니의 발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각자 그가 한 말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는데, 알룬도가 무덤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다. 너희들도 어서 여기를 떠나도록 해. 죽은 사람은 하루빨리 잊어버리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제야 다들 눈앞의 사내가 맘씨 좋은 조언가가 아니라 로샤단을 습격한 용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결국 루도와 디리터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뛰어나갔다. 디리터는 이칼롯이 말렸으나, 미처 측면으로 달려가는 루도를 붙잡진 못했다. 루도는 알룬도의 목덜미를 노리고 길게 검을 휘둘렀다.
“...만약 운이 없어 녀석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땐 절대 멈추지 마라.”
알룬도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루도의 검은 알룬도의 목 언저리에 멈춰 있었다. 허공에 정지한 검날이 미세하게 떨렸다. 루도는 다시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당신이 안개송곳니라면, 어째서 우리를 죽이지 않았죠? ...당신이 만약 아니었다면, 어째서 막지 않았어요?”
알룬도는 처연하게 웃었다. 쾌청한 날씨인데도 그의 머리 위로 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나섰던들 참사를 막을 순 없었어. 그저 나를 포함한 다른 몇몇이 사망자 명단에 추가됐겠지.”
“크...”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루도와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너희가 거리로 나선 건 예상 밖이었어. 그리고 난 ...따로 너희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일행은 며칠 전 그와 만났던 것을 떠올랐다. 그는 그때 식당 문을 막아선 채,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연회에 들떠 있었으므로 공격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제리온이 한 발짝 다가왔다.
“왜 우릴 살려준 거지?”
“...명령에 따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아? 그럼 어째서 그 안개송곳니인지 지랄인지를 탈퇴한 건데?”
“녀석들에게 질려버렸거든.”
그는 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군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방관자였다. 아직도 그가 왜 이 장소에 다시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때 그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여기 있는 일행 역시 지금쯤 땅속에 묻혀 있을 거란 사실이었다.
루도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호흡은 느렸지만 심장은 격하게 고동쳤다. 그는 일단 가슴 속 깊은 곳에 분노를 쟁여 놓았다. 사건을 방관한 알룬도에게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난 확실히 말했다. 하나뿐인 목숨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
알룬도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저 서 있기만 해서 몰랐는데, 그는 왼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처음 봤던 때의 유쾌함은 온데간데없고, 그는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잠깐만요! 아직 물어볼 것이 더 있어요. 안개송곳니의 본거지는 어디고, 인원은 얼마나 되죠?”
아직 질문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안개송곳니의 정보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아두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알룬도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는 일행이 그것에 대해 깊이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본부는 수시로 바뀐다. 내가 나왔으니 이미 집결장소도 바꿨을 거야. 인원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너희 다섯보다는 훨씬 강하다고 장담하지. 그 이상은 묻지 마라. 빠질 수 있을 때 빠지는 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니까...난 텔아단으로 갈 거다. 거기라면 안개송곳니도 따라오지 않을 거야.”
그는 넌지시 일행에게도 그리로 향하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루도는 침묵으로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알룬도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능선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도는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우린 람이 했던 일을 계속할 거예요. 그리고 반드시 안개송곳니를 찾아내, 길드원들의 복수를 할 겁니다.”
알룬도의 발이 멈췄다. 나이 어린 소년의 맹세가 그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가족을 잃고, 터전을 잃고, 그렇게 복수를 다짐하는 루도의 말에 그는 어깨를 떨었다.
어떤 말로 만류한다 한들 듣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그는 덧없는 충고를 건넸다.
“그들과 만나는 건 될 수 있으면 피하도록 해. 그자들은 일반인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니까. 맞아, 인간 같지 않은 인간도 있고, 인간이 아닌 자도 있지. 그게 그들이야.”
“당신 역시 그런 부류가 아닌가?”
이칼롯의 질문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못하니까 그곳을 나온 거지.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해. 안개송곳니 암살단은 절대 만나지 마.”
어느덧 하늘엔 구름이 끼고 있었다. 먹구름은 아니었지만, 바람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그것은 어느새 도시를 가득 덮은 채였다. 태양이 가려지자 일행이 자리한 무덤가에도 을씨년스러운 그늘이 졌다.
굳이 캐내자면 알룬도를 붙잡아 가진 정보를 다 실토하도록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위험을 알리러 온 그를 험하게 다루고 싶진 않았다. 루도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 역시 힘든 여정을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그의 말대로라면 언제 아케니온이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막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하려 하는데 멀리서 일행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이! 디리터! 디리터!”
디리터와 친하게 지내는 경비병이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려가던 알룬도와 마주쳤는데, 알룬도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신속하게 사라졌다.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오느라 그는 일행 앞에 도착한 후에도 한참을 씩씩거렸다. 디리터가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웬일로 여기까지 오냐? 근무는 어떻게 하고.”
“팔이...팔이 하나가 남는다.”
“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비병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찬찬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로샤단을 습격한 범인들 말야.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훼손된 시체를 맞춰보았는데, 팔이 시체 수보다 하나가 많아. 무슨 소린지 알겠어? 살아남은 녀석이 있다고! 팔 한쪽을 잃은 채로 도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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