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남작 영애와 그 수행원들(5)
폭풍 같았던 4월이 가고, 계절은 이제 5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나무에 맺힌 꽃봉오리들은 전부 떨어지고 초록 잎사귀로 갈아타는 시점이었다. 기온은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이에 따라 들판의 곡물들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왕국은 곳곳마다 생기가 넘쳤다. 비단 농사꾼만이 아니라, 양이나 염소를 방목하는 양치기들도 신이 났다. 하루가 멀다고 솟아나는 잡초들은 가축들에게 풍족한 먹이를 제공했다.
거기다 알맞게 내려주는 빗방울은 달아오른 대지를 식혀줌과 동시에 강이며 호수로 흘러들어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했다. 수많은 철새들이 먹잇감을 찾아 남쪽에서부터 올라왔다. 그것들은 높다란 나무가 있으면 어디든 둥지를 틀었으며, 얼마 가지 않아 빼약거리는 소리가 온 숲을 울렸다. 그야말로 풍요의 계절이었다.
“우와, 로젤리나 아가씨! 저걸 보세요. 물이 진짜진짜 많아요! 와, 진짜! 저게 바다구나!!”
“보...보고 있단다. 정말 끝이 안 보이는구나. 세상에, 나잔즈 강...아니지. 텔아단에 있던 뭐시기 강은 택도 안 되겠구나.”
루도와 마리네는 마차 밖의 풍경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처음 보는 바다는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 물, 그리고 물. 메르실 항구는 어업과 상업이 발전한 도시로, 도시 면적으로만 보면 델키아보다도 큰 규모였다. 하지만 그조차 바다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일행은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저 정도 되면 고기만 잡아먹고 살아도 문제가 안 되겠다. 널린 게 생선일 거 아냐.”
“그러게...나는 어릴 때 개울가에서 천렵해본 게 전부인데...여긴 규모부터가 다르네.”
디리터는 마차를 모느라 바다에 시선이 가 있진 않았지만, 에레이시아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그 푸른색의 향연을 질리도록 구경하고 있었다. 제리온이 놀라워하는 그들을 보고 혀를 찼다.
“촌놈들 같으니라고. 니들이 그러니까 도시 놈들에게 무시당하는 거야.”
그러자 마차 안에서 바로 태클이 들어왔다.
“앗, 제리온 집사, 말이 험하시군요. 아무리 편한 사이라고 해도 지킬 건 지키셔야죠.”
“맞는 말입니다. 우리 휴드랜드 가문에 그런 저속한 발언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 시꺼. 할 때만 하면 되지, 뭘 벌써부터 법석이야!”
휴드랜드 가문의 집사인 제리온은 멋들어진 정장을 빼입고 얼굴에는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일행 중 유일하게 가명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수배서에 적힌 본명과 평소에 쓰는 별명이 달라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멀리 메르실의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말이 성문이지, 그것은 수성을 하기 민망할 정도로 높이가 낮았다. 성곽 역시 성인 남자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준이라, 그냥 벽돌로 만든 울타리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메르실 시민들은 성벽을 증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서쪽 끝에 위치한 이곳이 수성을 해야 할 상황이 온다는 것은, 리크나이츠 전 영토가 점령당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때문에 메르실의 지도자들은 최소한의 예산만 방위에 쓰고 나머지는 상업이나 농업에 투자했다. 덕분에 시민들의 생활은 꽤 풍족한 편이었다.
경비병 둘이 성문 앞에서 출입 인원을 통제하고 있었다. 한창 날이 더워질 무렵이라 그런지 그들은 아예 투구를 벗은 채 근무하는 모양이었다. 경비병 중 하나가 일행의 마차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디리터는 성문에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웠다. 말을 타고 있던 이칼롯과 제리온은 그 뒤에 섰다. 경비병이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메르실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야, 수고 많으십니다. 저는 텔아단에서 온 베르조라고 합니다. 이곳에 좋은 진주가 난다 하기에, 고향에 갔다 팔려고 왔습니다. 우리 아가씨에게 바다 구경도 시켜 드릴 겸 해서 말이죠.”
디리터는 넉살 좋게 말했다. 그는 이제 중년 남성의 연기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메르실까지 오는 동안 일행은 몇 번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우려한 대로 곳곳에 사냥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엔 한심한 잡배 취급하던 자들인데, 표적이 되고 보니 그렇게 섬뜩할 수가 없었다. 현상금이 모두 합쳐 6천 골드가 넘다 보니, 전국의 사냥꾼이란 사냥꾼은 모두 일행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기발한 변장 덕인지 웬만한 이들은 일행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겉모양새로는 귀족의 차림을 하고 있으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규군 소속의 순찰대나 직영 소대의 경우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귀족이건 뭐건 다짜고짜 다가와 신분을 확인했다.
처음 일행에게 접근한 건 가린워드 마을 서쪽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비포르 남작 휘하의 병사들이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갑자기 다가오니 디리터와 에레이시아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횡설수설해버리고 말았다. 그때가 최고의 고비였다.
“우리는 텔아단 연맹의 맹주, 휴드랜드 가문의 사람들이오. 이 안에는 남작님의 따님도 타고 있소이다. 그러니 무례한 발언은 삼가주기 바라오.”
위기의 순간에 이칼롯이 나섰다. 그는 검집에 손을 얹은 채 엄숙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위협했다. 그 범상치 않은 기운 탓에 병사들은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모르긴 몰라도 투구 너머로 보이는 싸늘한 눈매도 그들을 기죽이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아, 휴드랜드 가문의 사람들이시군요.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남작님의 명성은 이 리크나이츠에도 널리 퍼져 있답니다.”
물론 휴드랜드 남작이 실제 존재하는지는 일행은 물론 그들을 응대하는 병사들도 알지 못했다.
“알면 됐소. 그럼 이제 비켜 주시겠소이까?”
“아아, 물론 그리 해드려야지요. 그런데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 최근에 국왕 폐하의 명으로 흉악살인범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져서 말이죠. 이렇게 일일이 신분을 확인해야 하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놈들은 총 7명인데, 20대를 전후로 한...”
“아니, 지금 우리 휴드랜드 가문의 사람들을 살인범으로 몰려는 것이오? 이런 모욕이라니, 리크나이츠 병사들은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가 없군!”
“아...아니...그게 아니라...”
그때 병사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마차 안에 있던 루도와 마리네는 바깥 상황이 이해가 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붙어본 사람만 아는 거지만 제대로 자세를 잡은 이칼롯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다. 특히 그의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로샤단 사람들도 꺼리는 것이었다. 제르칸트는 그런 그를 보고 이렇게 평했다. 「독수리의 눈이란 거, 저걸 말하는 건가?」
같이 사는 동료도 이런데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어쩌겠는가. 거기다 텔아단 군인들은 호전적이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 비포르 남작의 병사들은 그때 눈앞이 아찔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구원을 내린 것은 - 그것이 로샤단 쪽이든, 비포르의 병사들이든 - 제리온이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위협을 줘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고 중재에 나섰다.
“이보게, 개스. 이 무슨 실례인가! 아무리 지체 높은 가문이라도, 타국에 왔으면 타국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아, 이거 크나큰 결례를 범했소. 저 친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에 있던 친구라 성격이 좀...”
그는 머뭇거리던 디리터와 달리 굉장히 깔끔하고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실제 그의 언행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 아닙니다. 호위 무사라면 저 정도는 해야지요. 저희도 이해합니다.”
병사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가로젓는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게 분명했다. 제리온은 그걸 보고 피식 웃는 한편, 다시 정중히 말했다.
“그럼 우리가 귀공들에게 뭘 도와드리면 되겠소? 휴드랜드 가문의 인장이라면 우리 아가씨가 소지하고 계신데...”
“아아,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냥 육안으로 확인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렇소? 그럼 잠시...”
제리온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차 문을 두드렸다. 그가 의도한 대로, 당근과 채찍 작전이 정통으로 먹힌 것이었다.
“로젤리나 아가씨,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삐걱, 문이 열렸다.
“많이 지체되는군요. 무슨 일인가요?”
물론 루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가성을 쓴다 해도 그가 입을 열었다간 단박에 정체가 탄로 날 수 있었다. 때문에 로젤리나의 모든 언행은 하녀 마를로네를 통해 이루어졌다.
제리온은 마차 안의 두 사람에게 눈빛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둘 역시 밖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라, 그의 뜻을 단박에 파악했다.
“리크나이츠 왕국 비포르 남작 휘하의 병사들입니다. 공적인 임무로 이 일대를 지나는 여행자를 탐문하고 있다 합니다. 아가씨,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분들에게 잠시 얼굴을 보여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육안으로 확인이 되면 바로 보내준다 합니다.”
“그러세요.”
제리온이 손짓하자 병사 중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마차를 들여다보는 와중에도 이칼롯의 눈초리가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습해둔 대로 루도는 부채를 펴 입을 살짝 가렸다. 이내 그와 병사의 눈이 마주쳤다.
“아...”
그때 병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치렁한 드레스에 챙 넓은 모자, 하얀 장갑에 부채까지. 루도의 신체 부위 중 드러난 곳은 오로지 눈뿐이었다. 루도가 닥친 관건은 눈 하나만으로 자신이 여자임을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병사와 루도의 눈싸움(?)은 수 초간 지속됐다. 그동안 멍하니 있던 마리네는 시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재빨리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수...수고가 많으시네요, 기사님.”
그제야 머물러있던 병사의 얼굴이 움직였다. 마리네는 추호도 의심할 필요가 없을 만큼 완벽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자신에게 시선을 붙들 요량이었다.
“아...네...”
병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 물론 그의 손가락은 투구 이음매 위만 겉돌았다 - 다시 루도 쪽을 향했다. 루도도 그제야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데루루피아가 알려준 눈웃음을 선보였다.
‘제발 그냥 가라, 얍!’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새색시처럼.
그러자 병사는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루도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후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허둥대며 말했다.
“화...확인했습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확인이 끝나자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병사들은 메르실로 가는 지름길까지 알려주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 일이 있은 후 일행은 변장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디리터는 그때 있었던 실수를 뼛속 깊이 되새겼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었다. 일행의 변장은 상상 이상으로 완벽해서, 코앞까지 오지 않는 한 절대 들킬 염려가 없었다.
“이야, 이게 바다군요. 듣던 대로 절경이네요.”
그는 마부석을 딛고 서서 최대한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경비병들은 빙긋 웃으며 마차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마차 문을 왈칵 열어젖혔는데,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앗...!”
그때 루도와 마리네는 한창 퍼져 있는 중이었다. 마리네는 마차 한구석에 옆으로 누워 있었고, 루도는 아예 다리를 척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경비병이 갑자기 문을 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어?”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경비병이었다. 그는 디리터의 설명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마차에 탄 것도 상인들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루도와 마리네, 그리고 경비병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둘은 황당하다 못해 벙찐 얼굴로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탁. 경비병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이칼롯도, 제리온도 반응하지 못했다.
“에...죄송합니다만, 안에 계신 분은?”
“테...텔아단 휴드랜드 남작의 영애십니다. 그러니까...”
“나...남작이요? 우와악! 이런 무례를....!”
경비병은 비명을 지르며 마차 문을 열려다가,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란 걸 깨닫고는 제리온을 붙잡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니깐, 귀족이 타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할까...정말 사과드린다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아니 뭐...그거야...”
경비병의 목소리에는 애절함이 묻어났다. 그는 귀족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는지 조금만 더 튕겼다간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제리온과 디리터는 어안이 벙벙하여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문을 연 것도 그렇지만, 그래도 군인이라는 자가 이렇게 쉽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델키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난감한 상황 속에서 에레이시아가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재빨리 마부석 문을 열어 안의 상황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루도와 마리네는 최대한 다소곳한 자세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둘은 에레이시아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들켰어요? 들킨 거?’
‘아, 망했다! 가랑이 벌리고 있었는데.’
에레이시아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녀는 둘에게 찍소리도 내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고는, 당황스런 몸집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난 후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경비병에게 말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많이 놀라셔서요. 이만 실례해도 될까요?”
“아...아? 네, 넵! 물론 입지요. 어서 가....아니, 즐거운 여행 되시기 바랍니다!”
경비병들은 자석의 척력마냥 양옆으로 주욱 갈라졌다. 일행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성문을 돌파했다. 위병소 가장자리에 붙은 현상금 수배서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였을까, 조금 전 그거.”
“나도 몰러. 어쨌든 통과했으니까 된 거 아냐?”
“저런 병신들도 군인이라니, 참 세상 살기 편하네.”
마차는 시내 장터를 지나가고 있었다. 성문에서의 사건 이후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멍한 얼굴이었다. 분명 무사히 통과한 것은 맞는데, 너무 상황이 갑작스럽게 전개되다 보니 다들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일행은 장터를 벗어날 즈음에야 조금 전 상황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요는 디리터의 애매한 설명과 경비병의 소심함, 그리고 에레이시아의 기지가 완벽히 어우러진 에피소드였다. 만약 경비병이 조금만 더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일행은 지금쯤 철창 안에 있을 게 분명했다.
“아, 왔구나. 메르실 항구! 젠장 맞게 머네. 젠장할.”
디리터는 코에 붙인 수염이 간지러운지 연방 재채기를 해댔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것이라, 모두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루도는 그저 신기해 탄성을 연발했지만, 사실 메르실은 그다지 큰 규모의 항구는 아니었다. 항구에 정박한 선박들도 배수량 100톤 이상의 것은 눈에 꼽을 정도이고 대부분은 작은 상선 아니면 어선이었다. 하지만 항구는 물론이거니와 바다조차 처음 접하는 루도가 이를 알 리 없었다. 배라고는 나잔즈 강 하류의 나룻배를 본 게 전부인 그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숫자의 선박들은 그 자체로서 진풍경이었다.
루도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정신없이 도시를 구경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도 그렇지만, 도시 자체가 대부분 1층 건물인 데다 성곽조차 낮아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랄프 스나우그를 찾으랬지. 어디 보자...”
부둣가에 도착하자 일행은 데루루피아의 지인을 찾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섬에 도착해야 한다는 기한은 없었지만, 현상금이 붙은 이상 움직임을 빨리 하는 게 보다 이로웠다. 일행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 랄프 스나우그의 행방을 물었다. 예상 외로 그의 집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근방에서 꽤 유명한 어부로, 제법 큰 규모의 어선을 소유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집은 항구 맨 끝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마차는 부둣가를 따라 하염없이 움직였다.
일행은 랄프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집은 어부의 것 치고는 큰 편이었는데, 지붕에는 비를 막기 위한 것인지 조개껍데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집 앞에 위치한 작은 정원도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요소였다. 고작 정원 가지고 뭐 그리 대수냐고 하겠지만,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물이끼며 잡초가 흐드러지게 퍼져 있다는 게 굉장히 독특했다. 마리네는 이끼 낀 돌담 사이로 게가 지나다니는 걸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얼마나 방치해둔 건지 랄프의 집은 얼핏 봐선 그냥 폐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 맞아? 아무리 봐도 영 아닌데...”
디리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가뜩이나 거주지로부터 떨어져 있어 음침한 장소인데, 관리까지 안 되어 있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열어보면 알겠지.”
제리온이 성큼성큼 걸어가 문고리에 손을 댔다. 마침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는 노크할 생각도 않은 채 힘차게 문을 열었다.
“계십니까~윽.”
얼굴을 덮치는 술 냄새에 제리온은 코를 틀어막았다. 거실 바닥으로 주전자며 그릇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웬 노인 한 명이 식탁 의자에 널브러진 채 럼주를 홀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갑작스런 이방인의 방문에도 전혀 당황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댁이 랄프 스나우그요?”
제리온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노인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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