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이름없는 자(5)
조각난 얼음 파편이 채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람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는 제리온처럼 캐스팅자세를 취하지도, 시동어를 읊지도 않았다. 그저 손짓 하나면 끝이었다.
소년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빛기둥이 그의 정수리를 노리고 꽂혀 들어왔다. 큐우웅...! 소년이 있던 자리에 타원 모양의 구덩이가 패였다. 직경 2미터는 될 법했던 기둥은 차차 그 기세가 사그라지더니, 점점 폭이 좁아지며 사라져갔다. 빛이 사라지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재빨리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곳에 없었다.
“역시 대단하구나, 신의 아이야! 신의 아이야!!”
그람이 어느새 20미터가량 떨어진 곳까지 움직인 소년을 향해 외쳤다. 그의 목소리 또한 좀 전과 달리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그의 퀭한 눈동자가 소년의 보랏빛 그것에 꽂혔다.
“이...당신...!”
소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마리네는 그의 옷소매가 찢어진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속도로도 이번 공격은 완전히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안구를 덮어버릴 정도로 빛을 발산하던 소년의 눈이 조금 기세가 약해진 것도 발견했다.
데루루피아가 둘 사이에 끼어들려 했지만, 알룬도가 그녀를 저지했다.
“이거 놔요! 당장 저들을 말려야 해요!”
“죽고 싶어 환장했소? 그람의 마법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그녀는 이미 다리가 풀려 있었지만, 기어서라도 싸움을 말릴 기세였다. 하지만 알룬도 역시 지지 않았다. 지금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개죽음을 의미했다.
그 사이 그람과 소년의 대결은 계속됐다. 불덩어리, 번개 화살,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체 등이 쉴 새 없이 소년을 강타했다. 하지만 소년 또한 그 엄청난 맹격을 요리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막 불덩어리를 피해낼 때였다. 소년의 눈이 일순 번뜩이더니, 보라색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만 하라고!!”
투웅! 마리네는 군사훈련 시절 사수가 발리스타(Ballista)를 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맹렬한 소리를 내며 쏘아진 투창은, 한 점의 오차도 없이 직선으로 날아가 표적을 관통했었다. 그 순간 소년의 모습이 그랬다.
그는 땅을 있는 힘을 다해 박차고는, 그 반동으로 그람에게 돌진했다. 수십 미터의 간격이 일순간에 좁혀졌다. 그람은 소년의 공격을 피하지도, 팔을 들어 막지도 않았다. 아니, 마리네가 보기에 그는 소년의 쇄도에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날아온 힘을 실어 그람의 얼굴을 후려쳤다.
터엉!
“끄아아악!”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평야에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비명. 하지만 그건 그람의 것이 아닌, 소년의 것이었다.
“마...마법!”
마리네는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걸까! 루도와 마리네는 5년 전 안개송곳니의 마법사와 겨룬 적이 있었다. 물론 겨뤘다는 표현보다는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게 맞지만, 그때 둘은 어떻게든 틈을 비집고 들어가 목검으로 공격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목검은 그 마법사의 몸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 났고, 소년들은 그 반동으로 몇 미터나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생각해보니 그 마법사는 그람의 불덩어리 세례를 받고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마법을 이용해 신체를 보호하는 게 틀림없었다.
소년은 성벽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땅바닥에 여지없이 고꾸라졌다. 공격하던 손목은 완전히 꺾여 있었고, 땅에 처박힐 때의 충격으로 이마며 코에서 피가 나왔다.
“으윽...”
소년은 손목을 움켜쥔 채 신음했다. 잔뜩 웅크린 채 고통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람은 그에게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소년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죽어라.”
투학! 흙더미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날카로운 암벽이 땅을 뚫고 나온 것이다. 소년이 있던 자리로 순식간에 돌로 된 창 더미가 만들어졌다. 땅을 뚫고 나오는 창의 비상은 그 뒤로도 수 초간 계속되었다. 그람은 소년을 꼬치를 꿰다 못해 자근자근 조각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튀어 오른 흙모래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데루루피아와 마리네는 비명을 지르며 소년의 행방을 좇았다. 하지만 돌로 된 창 사이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룬도가 말했다.
“...믿기지가 않는군.”
소년은 아까 그람의 공격을 피할 때처럼, 피격 장소에서 수십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발로 서 있는 것도 아닌 쓰러진 상태에서, 그것도 부상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황에서 저런 움직이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기민함이었다. 알룬도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자 신의 아이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송곳니 내에서 가장 빠르다는 제스터도 지금 소년의 스피드에는 따라가지 못했다. 아니, 그건 이미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더욱 더 놀라운 광경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으...으으...”
소년의 보랏빛 안광이 한층 짙어지는가 싶더니, 자색의 오오라가 그의 몸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벌어진 상처가 아물고, 피가 멎더니, 마침내는 꺾인 손목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맙소사!”
일행은 물론이고 공격하던 그람조차 그 광경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능력이라니, 즉사시키지 않는 이상 불사신이란 말이 아닌가! 알룬도는 저런 힘이라면 소년이 그람을 쓰러뜨리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소년의 이마를 타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상처가 아물자마자 황급히 오오라를 물러냈다. 그는 그를 둘러싼 자색의 기운이 짙어질 때마다 더욱 날렵하게 움직였지만, 어째서인지 그 힘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완치된 손목을 보며 무언가 중얼거렸는데, 마리네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대로는 루도가 버티질 못해.”
그는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마리네가 그 말의 의미를 물어보려 하는데, 그람이 먼저 소년을 향해 말했다.
“역시 엄청나구나...펠아람의 아이야. 그 밑도 끝도 없는 힘을, 너는 대체 어디에 쓰려 하느냐!”
“또 내가 미쳤다고 말하려는 건가?! 미친 건 당신이야!”
소년은 이를 갈며 대꾸했다. 들판 너머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누가 보낸 것인지,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를 그 바람은 그람의 로브와 소년의 머리칼을 휘저어놓고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이 둘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게 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람 역시 연이은 마법남발로 지친 상태였다. 이대로 대치상황이 이어졌다간 자신이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것은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람은 슬슬 ‘최후의 마법’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짐승의 송곳니는 다른 개체를 물어 죽이기 위해 있는 것. 네 송곳니는 언젠가 인간을 향하고 말 것이다!”
“...은인이라고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각오하라고.”
“악마가 없는 세상엔, 신이 악마다.”
그람의 팔이 올라갔다. 그런데 그는 손짓만으로 마법을 날리던 조금 전과 달리, 수인을 맺으며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소년은 다음 공격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는 아까 공격했을 때처럼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날 원망하지 마!”
그는 그람의 어깨를 노리고 검을 뽑았다.
하지만 그람 역시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노련한 그가 소년의 속도를 감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는 캐스팅에 들어가기 전부터 다른 주문을 준비한 상태였고, 이에 소년은 완벽히 넘어갔다.
‘이로써 펠아람의 아이는 봉인되리라.’
그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쇄도해오는 소년을 향해 시동어를 외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년이 뽑은 롱소드에 새겨진 문양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람이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죽고 싶지 않아요...
“아...니?!”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시동어가 아닌, 짧은 탄성이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의 순간 루도의 검이 그의 어깨를 여지없이 절단했다.
“크악!”
해골의 비명이 귓전을 메운다. 성대가 없어 쉬어버린 목이 내는 그 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왔다. 그의 잘린 팔은 마른 나뭇가지가 그러듯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출혈도 없고 무게감이 없는 그 팔은 원래부터 땅에 떨어져 썩어 있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소년은 요란한 흙먼지를 내며 땅에 착지했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자마자 의혹 실린 눈으로 그람을 바라보았다. 검에 오오라를 실어 보호마법을 상쇄한 것까진 좋았지만, 그람이 그렇게 순순히 당했다는 게 수긍이 가지 않았다. 소년 또한 그가 순간적으로 팔을 멈칫거리는 걸 목격했다.
그 자리에 굳은 듯 말이 없는 그람과, 그의 동태를 살피는 소년. 수 초간의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그람 쪽이었다.
“그...검...어째서 네가 가지고 있는 거냐?”
“뭐?”
소년은 어안이 벙벙하여 되물었다. 뜬금없이 검이라니, 루도의 검을 말하는 건가?
“그 검이! 어째서 네게 있냔 말이다!”
그람은 흥분한 듯 거칠게 팔을 휘저었다. 그가 너무도 절절히 말했기에, 소년도 경계를 잊고 루도의 검을 바라보았다. 이 검이 대체 뭐라기에 저토록 언성을 높인단 말인가? 그저 평범한 롱소드일 뿐, 람카디스가 루도에게 선물한.
“이건...람이 루도에게 선물한 거야. 당신과는 관계없어.”
“웃기지 마라!”
그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함을 쳤다. 그는 잘린 팔 따위 안중에도 없이 루도의 검에 집착했다.
“왕가의 보검이 어찌 너의 손에 들어갔단 말이냐! 어째서 그게 신의 아이에게...”
그가 검을 향해 성큼 내디뎠다. 그러자 소년도 바짝 긴장해 뒤로 물러났다. 그람은 이미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그가 어찌나 광분하는지 소년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정도였다.
그람의 이성을 환기시킨 것은 마리네였다. 그는 현 상황에선 일단 그람이 원하는 답을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에 위험을 무릅쓰고 외쳤다.
“그...그거! 국왕 폐하가 람에게 하사한 거예요!...람은 다시 그걸 루도에게 준 거고!”
“국왕?! 왜지? 저건 왕가의 보검, 쉽게 누군가에게 증여할 만한 것이 아닐 텐데!”
“그야...위그라프 후작의 반란이 토벌되고 궁전을 조사하다 나온 게 그 검이고...마법사들이 검에서 마력이 느껴진다고 해서 이를 알아봐 달라고 람에게 준 거고...”
그람의 퀭한 눈이 자신을 향하자 마리네는 흠칫 놀라 쭈뼛거리며 답했다. 루도의 검에서 미세한 마력이 감지되고 있었고, 이를 카토르와 제리온이 수년간 연구해왔다는 사실은 로샤단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연구에는 진척이 없었고, 마법에 관심 없는 이들은 아예 검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냥 신기한 검이려니 여기며 살아왔는데 그게 그람과 관계있었단 말인가?
마리네의 설명에 그람은 한결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물론 그래도 어깨는 심하게 들썩였지만,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런가...설마 외부인에게 조사를 맡길 줄이야. 어처구니가 없군. 현 국왕은 왕족으로서의 긍지라곤 없는 모양이군.”
그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그는 마음을 다잡은 듯 다시 한쪽 팔을 들어 소년을 향했다. 또 공격인가 싶어 자세를 취하던 소년은, 흔들리는 그람의 손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람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잠깐! 잠깐만요.”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에 데루루피아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소년과 그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멈춰 선 그를 향해 말했다.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둬요. 당신은 이 아이를 이길 수 없어요.”
“이길 수 없다고?”
그람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것은 데루루피아의 발언이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기보단,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이래 봬도 마법사인 할아버지를 두고 있다고요. 당신 지금 팔이 잘렸잖아요. 그럼 수인을 맺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 거고, 다음번엔 팔이 아니라 목이 날아갈 걸요?”
그 말 그대로였다. 검에 정신이 팔려 실패했지만, 좀 전에 그람은 커다란 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별도의 수인이 없인 시전이 불가능한 마법이었기에 팔이 잘린 현재로선 소년과 대적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람은 물러서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 옹고집에 데루루피아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었다.
‘어휴, 늙은이들이란.’
“이봐요, 당신. 죽어서 머리가 돌아버린 건 잘 아는데, 겨뤄봤으니 알겠지만 이 아이는 미치지 않았어요. 얘가 마음만 먹었으면 당신뿐 아니라 우리까지 가루가 되었을 걸요?”
대꾸하진 않았지만 그람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가 보기에 펠아람의 아이는 온전히 이성을 유지하는 것 같았고, 또 오히려 싸움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소년을 공격한 것은 ‘싹’을 잘라버리기 위함이었다. 그가 펠아람의 저주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데루루피아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람.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신의 아이를 당해낼 수 없어요. 그런데도 신의 아이를 모두 죽일 생각이에요?”
“...그게 제일 간편한 방법이다. 누가 ‘저주’를 받았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그럼 묻겠는데, 당신이 신의 아이를 차례로 없애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펠아람의 저주’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그는 누가 막죠?”
“......”
그녀의 목적은 뻔했지만 그람은 이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신의 아이는 그가 감당해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필승의 마법을 준비한 것이지만, 그조차도 완벽을 보장할 수 없었다. 조금 전 소년이 전심전력으로 싸웠다면, 그는 시동어를 읊어보지도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그는 루도의 검을 지긋이 응시했다.
“요컨대 신의 아이로 펠아람의 저주를 극복하라는 건가...심각한 모순이군.”
그는 고개를 숙이고 큭큭 웃었다. 500년이나 준비했는데도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다니, 신은 정말 자신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는 한동안 조소하더니, 땅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집어 들었다. 그가 말했다.
“안개송곳니는 북쪽으로 갔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당분간 너를 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년.”
“...에?”
소년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렸다. 그런데 옆에 있던 알룬도가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질렀다.
“옳거니! 본국으로 갔다 그거지? 내 선물이 기가 막히게 먹혔구만.”
선물이란 브리토리스 평의회에 로시느의 비밀을 폭로한 것을 말했다. 레이시가 언제 돌아갈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람이 그 낭보를 전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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