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2 - 소년과 라즈베리 파이(4)
아이손이 유르그젠의 어깨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유르그젠 역시 넋 놓고 보고 있진 않았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겁에 질린 소년의 외침이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멈춰요!!”
둘은 검을 맞댄 채 그대로 멈췄다. 다른 이들도 막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격한 숨을 몰아쉬며,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갈색 머리의 소년을.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에 니암은 안도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외쳤다.
“다들, 제발 멈춰주세요. 이건 무의미한 싸움이에요.”
『제발 그의 말을 들어줘! 이제 더 이상 누가 죽어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유르그젠도, 아이손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갑자기 나타난 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나 중요한, 그래서 이런 곳에 단신으로 나타날 리가 없는 소년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아이손이었다.
“니암님!!!”
“큭...어딜!”
아이손이 몸을 돌리자, 유르그젠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으윽!”
아이손은 니암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측면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유르그젠의 공격에 오른팔을 베이고는 바닥에 쓰러졌다. 니암이 그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안 돼, 안 돼! 모두 멈춰요. 멈추라고요!”
그의 절규에 모두가 다시 움찔, 하며 멈춰 섰다. 비록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신의 아이다. 그의 간절한 외침에 모두 본능적인 복종심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성을 깨닫는 데엔 개인차가 있었다.
정신을 차린 유르그젠은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루프리모의 아이가 직접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니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니암이로군. 니암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금부터는 저희 상트룸 수도회가 모시겠습니다.”
“아...”
니암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것은 홀로 이들을 막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생각하던 문제였다. 몰래 루도 일행의 대화를 엿듣던 때부터.
자신이 상트룸 수도회로 가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그럼 무의미한 칼부림도 사라지고, 헛된 죽음도 없을 것이다. 데루루피아를, 루도를,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모든 이들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수호기사단도, 광휘의 결사도,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 상트룸 수도회로 간다면!
“저는...”
니암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수도회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용하든 상관없었다. 다만 데루루피아를 비롯한 정들었던 교단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었다.
‘루도님이랑 했던 약속도...지키지 못하겠구나.’
『아쉽다, 라즈베리 파이 먹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막을 수 있다면...그걸로 된 거야.』
그러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말했다.
“그 말대로 할게요. 수도회든 어디든 갈 테니 이제 그만...”
“네놈들 뜻대로 놔둘 수는 없다, 간악한 무리들!”
니암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이손이 땅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유르그젠이 그의 몰골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리로 오신다잖아? 그런데 당신이 웬 참견인가?”
“웃기지 마라! 니암님이 네놈들이 부귀영화를 위해 이용당하는 꼴은 볼 수 없다! 내 육신이 산산조각 나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을 모두 척살하고 말겠다!”
“추하군. 교단이 있기에 이 나라가 발전이 없는 거야. 너희 같은, 보수주의자들 때문에.”
“그 더러운 주둥이를 지금 박살 내주마.”
아이손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힘도, 속도도 평소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유르그젠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검을 쳐냈다. 아이손의 팔이 크게 튕겨나갔다.
“잘 가라, 수호기사여.”
그의 검이 아이손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찰나, 다시 니암의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안 돼, 안 돼앳! 그만두라고요!!!”
유르그젠의 검이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아이손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유르그젠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커...억!”
“으아아악!”
선혈이 낭자하게 튀었다. 니암은 비명을 지르며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다. 막아야 하는데, 막을 거라고 믿었는데, 어째서 저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지?
『어...어째서야? 왜 다들 멈추지 않는 거야?』
니암은 유르그젠과 아이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두 사람 모두 상처에서 피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무릎을 꿇고 사정하면 될까?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지? 니암은 유르그젠도, 아이손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시리게 푸른 하늘을 보며 길게 울부짖었다.
“싸우지, 싸우지 마세요. 제발, 왜들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선택했잖아요. 제가 부탁했잖아요! 그런데 왜!”
안타깝게도 그의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다. 광휘의 결사와 수호기사단은 니암을 가운데에 둔 채 대치했다. 누구라도 그에게 다가가려 한다면, 상대방의 쏟아지는 맹격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이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니암님은 지금 공포로 판단이 흐려져 계십니다. 저희가 안전하게 교단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유르그젠 역시 지지 않았다. 그는 헝겊으로 상처를 억지로 틀어막았다.
“훅...후우...웃기는 소리지. 니암님은 수도회를 택했다. 네놈들이 감히 그 선택에 토를 달 생각인가?”
“네놈의 협박에 못 이겨 내리신 결정을 납득할 것 같은가? 수도회의 더러운 마수에서 니암님을 구해내겠다!”
“하여간, 끝까지 깨끗한 척이지. 니암님, 저자의 말씀은 무시하십시오. 어서 이리로...”
“전투 준비!!!”
수호기사단은 일제히 검을 겨누었다. 철그럭거리는 쇳소리가 그들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광휘의 결사도 그에 지지 않았다. 그들 역시 금방이라도 돌격할 태세였다.
니암은 그 사이에 낀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모아 쥐며 기도했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누군가 이 광기를 멈추어주길.
『멈춰줘. 멈춰줘. 다들 멈춰줘. 아아, 부디!』
눈물이 한 방울. -그래도 믿어보자.
눈물이 또 한 방울. -간절히 기원하면 신께서 보답해주신다고 했잖아.
눈물이 또 한 방울. -다 잘 될 거야. 모두가 무사히, 행복하게.
알 수 없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띠이이이이이이잉...불협화음이 점점 늘어난다. 소리는 점점 커지지만, 그건 연주라기보다 차라리 비명에 가깝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붉게 물든 나무들, 솔방울 냄새가 나는 바람, 싱그러운 가을 하늘. 아아, 아름다운 세상. 생명이 넘치는 대지. 부족한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럼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두 자신을 두고 뭐라 고함을 쳐댔다. 아이손의 핏대 선 목과, 유르그젠의 치켜든 검신이 보였다. 칼을 맞대고 있는 광휘의 결사와 수호기사단도 시야에 들어왔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루드, 에르네코! 니암님을 철저히 보호해라!”
“걱정하지 마라. 니암님에겐 생채기 하나도 용납하지 않을 테니.”
“류이너스의 이름으로!”
“상트룸에 승리를!”
카카캉!
양쪽 진영이 동시에 격돌했다. 검과 검의 교합이자 흑과 백의 격돌. 여기저기서 불꽃이 튀었다. 니암을 중심으로 검의 폭풍이 일었다.
“우와아아!”
“죽어라! 수도회의 개!”
누군가가 쓰러지고, 그를 쓰러뜨린 누군가가 다시 쓰러진다.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니암은 폭풍 한가운데 선 채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우려했던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아....안 돼....다들.....”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비틀렸음에도, 아직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믿으려 했다.
그가 싸움을 중지시키려고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니암의 신변을 보호하려고 수호기사단 중 한 명이 뛰어들었다.
“니암님! 여긴 위험합니다! 당장 안전한...커?!!”
푸우욱.
“아....아?”
새빨간 피가 얼굴을 덮쳤다. 니암은 멍하니 선 채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갑옷 이음새 사이를 뚫고 나온 시뻘건 검신이 흡사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렸다. 검은 임무를 완수하고는 다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다. 다시 살점 뜯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핏, 카각.
“크....하!”
기사는 배를 정통으로 꿰뚫린 채 그대로 땅에 무릎 꿇었다. 그의 부릅뜬 눈이 니암의 초점 없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굳게 다문 입술을 비집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쓰러지기 직전, 니암을 향해 뭔가 말하려 했다.
“니...아.....부디...”
털썩. 쓰러진 기사는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그의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넘칠 듯 쏟아지고 있었다.
“아...”
니암은 떨리는 손으로 그를 흔들었다.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는 피 웅덩이. 죽었다. 또다시 죽었다. 칼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또 죽는다. 앞으로도 죽을 것이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커졌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다.
띠이이이...끼이이이...키이이이익!
“아....!”
『흑...흐흐흑...으흐흐흑....』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너무해...너무해...그렇게나 애타게 외쳤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째서 진심을 몰라주는 거지? 니암이 그렇게나 간절히 부탁하는데...』
왜 내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덧없이 죽어버리는 걸까? 그렇게 죽어버릴 거면서, 왜 다들 그렇게 상냥한 걸까?
『어째서...』
행복을 파괴하는 저주는,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난 결국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믿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올 거라고.』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지. 모두들 너무도 고귀해. 하늘도, 나무도, 교단 사람들도, 데루루피아님도, 루도님도.
『그들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줬어. 이미 많은 이들이 죽어버렸지만...』
늘 생각했었어. 왜 나를 둘러싼 것들만 이렇게 불행해지는지에 대해. 왜 나만 비참하게 살아남는지에 대해.
『아니야, 니암. 아니야.』
루도님은 날 감싸줬지만, 역시 진실은 어쩔 수가 없나 봐. 모든 불행의 씨앗은 나인걸. 그래, 그게 정답인 것 같아.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 그럴 리가 없어. 니암이 얼마나 상냥한데, 니암이 얼마나 순수한데...』
결국 내가 문제였어. 그래, 맞아. 나만 사라진다면 모두들 행복해질 거야. 누구도 괴로워하는 일 없이, 누구도 슬퍼하는 일 없이. 나만 사라진다면.
귓속에서 소리가 격렬하게 요동친다. 머릿속이 깨져버릴 것만 같다. 쾅, 쾅, 쾅, 쾅! 그 이명은 채찍이 되어 니암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그 역시 아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웃기지 말라고 해. 니암이 없어져야 행복해지는 세상이라고? 그딴 세상은 필요 없어. 누군가 사라져야 알맞게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그건, 세상이 잘못된 거야!』
이제 지쳤어. 사라지자.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이런 세상은 필요 없어! 이런 추악한 세상 따위 필요 없어!』
***
싸움을 벌이던 사람 모두 경악한 채 말이 없었다. 살을 저미는 듯한 격렬한 살기에 모두 겁에 질려 뒷걸음질쳤다.
“이...이게 대체?”
“니...니암님?”
녹색의 빛줄기가 니암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기처럼, 혹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점점 니암을 뒤덮었다.
쉬이익, 쉬이익, 쉬이이이!
그것은 이내 거대한 회오리가 되어 격렬하게 요동쳤다. 엄청난 풍압에 근처에 있던 풀뿌리가 모조리 뽑혀나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빛줄기는 하늘이라도 뚫을 것 마냥 높게 솟아올랐다. 이제 빛에 휩싸여 니암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건, 설마? 아아...!”
“루프리모여!”
유르그젠이 바람을 뚫고 걸어갔다. 그는 그 거대한 빛줄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빛에 닿는 순간, 그는 엄청난 충격에 의해 튕겨나갔다.
“으어어억?!”
그는 수십 미터를 날아가 나무기둥에 여지없이 처박혔다. 공터에 모여 있던 모두가 질린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빛줄기는 점점 선명해졌다.
“이게...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이손이 무릎을 꿇으며 깊이 탄식했다. 굳이 사례를 보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다. 이 온몸을 옥죄는 듯한 엄청난 살기. 한 치의 자비도 없을 것처럼 휘몰아치는 광풍.
그것은, 각성이 분명했다.
“오오, 류이너스여!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의 기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록의 기둥은 점점 더 그 빛을 더해갔다. 이젠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쉬익, 쉬익, 쉬익, 쉬익!
『그래, 차라리 파괴해 버리자. 이런 더러운 세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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