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4 - 에메랄드 섬(3)
에메랄드 섬은 애초에 수심 문제로 배를 대기 어려운 구조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백사장이 넓게 퍼져 있어 물이 얕았고, 부득불 배를 띄우려면 섬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절벽을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랄프의 배는 이미 가라앉은 상태였으므로, 일행은 고민없이 곧장 섬 어귀로 이동했다. 백사장에선 주민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무기를 들고 갑옷을 걸친 이도 있었는데, 그들은 불청객의 방문이 썩 달갑지 않은 듯했다.
“여전히 변변찮은 대접이로구먼, 윈프레드.”
주민들 사이에서 한 중년 남성이 틈을 비집고 나왔다. 그의 머리칼은 데루루피아와 같은 하늘빛이었다. 굉장히 안정감 있고 여유 있는 보폭이 그가 범상치 않은 실력자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해해주게. 우리 섬은 워낙 불상사가 많아서...그런데 랄프 자네, 몇 년 만이지?”
윈프레드는 랄프에 비해 한참 어려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 그리고 랄프 역시 이에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배의 잔해와, 로샤단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몇 년은 얼어 죽을, 살아있는 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어. 가라앉은 내 배에, 생명수당까지. 사례는 톡톡히 해줄 거라 믿네.”
윈프레드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하핫. 여전히 퉁명스럽군그래. 보자, 그런데 이 신사 숙녀 분들은 누구신가? 난 우리 딸이 돌아온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야.”
그의 눈이 기민하게 일행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일일이 일행과 눈을 마주쳤는데, 랄프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로샤단은 낯선 환경이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윈프레드의 시선을 당당히 받아냈다.
‘흐음...쓸 만한 청년들이로고.’
일행 중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제리온이었다. 그는 섬에 상륙한 직후부터 무기를 꼬나쥔 남자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촌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불쾌하게 - 적어도 제리온에게는 그렇게 비쳤다 - 바라보자 그는 품고 있던 불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거, 무기는 우리 보라고 장식한 거요? 노략질하러 온 거 아니니까 좀 치우지? 무슨 날강도 쳐다보는 거 같네.”
즉시 주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또한 로샤단 내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주민 쪽은 불청객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논쟁이 일어난 것이었고, 로샤단 쪽은 제리온을 둘러싸고 집단 린치를 가한 것이었다. 기타 일행이 제리온을 쥐어박는 동안, 이칼롯이 사태수습을 위해 전면에 나섰다. 마침 주민 쪽도 윈프레드가 중재에 나서고 있어, 불가피한 마찰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칼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발하려 한 건 아니고, 저 녀석 말투가 원래 좀...”
“신경 쓰지 말게.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네들이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나? 랄프를 협박해 끌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데루루피아가 보내서 왔습니다. 여기에 오면 힘을 빌려줄 거라고...”
“엥? 루루가?”
아무래도 그녀는 이곳에서도 ‘루루’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이름이 지니는 파급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뭐? 루루가 보내서 왔어?”
“진짜야? 옛날에 왔던 그놈들인가?”
“아니, 훨씬 어린데. 아가씨도 한 명 보이네.”
쏟아지는 관심을 받으며 이칼롯은 그녀에게 받은 소개장을 보여주었다. 윈프레드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그는 소개장에 적힌 그녀의 필체를 몇 번이고 확인하다가, 일행의 생김새를 다시금 찬찬히 살폈다.
“랄프, 정말로 루루가 보낸 건가?”
랄프는 섬까지 일행을 데려온 이상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는 완전히 제 3자가 되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녀석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소개장이 있는데 뭘 더 의심하겠나. 이중의 하나일세.”
“허....!”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섬 주민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야기되기 시작했고, 소동을 듣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윈프레드는 백사장에 모인 사람이 어느새 두 배로 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조치를 취했다.
“...일단 새로 오신 분들은 나를 따라오시게. 바닷물에 흠뻑 젖은 모양인데, 목욕부터 좀 해야겠군.”
몸을 씻을 수 있다는 말에 에레이시아가 반색했다. 사실 조금 전부터 옷이 말라붙어 영 불쾌했던 것이다. 소금기를 머금은 옷감에, 내리쬐는 뙤약볕까지. 마치 자신이 절인 생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일행이 윈프레드를 따르자 주민들이 양쪽으로 좌악 갈라졌다. 제리온이 지적한 ‘무기 든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치운 뒤였다. 네 명의 레인저와 한 명의 마법사, 한 명의 약사로 이루어진 무리는 윈프레드의 집으로 가는 동안 끊임없이 주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일행은 몰랐지만, 섬에 있어서는 근 10년 만에 찾아온 이방인의 방문이었다.
****
섬 자체의 규모는 꽤 큰 편이었지만, 사람이 사는 면적은 굉장히 한정되어 있었다. 에메랄드 섬의 인구는 기껏해야 300정도로, 조금 큰 마을 수준에 불과했다. 일행이 상륙한 백사장을 기준으로 3~4km 정도가 사람이 사는 영역이었고, 그 외에는 전부 숲이나 늪지라고 윈프레드는 설명했다. 왜 개간을 하지 않느냐며 루도가 묻자 그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며 웃을 뿐이었다.
육지와 격리된 사회답게 건축양식 또한 독특했다. 섬에 자라는 느티나무는 그 크기가 엄청나게 거대했는데, 사람들은 2~3미터 높이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 집을 짓거나 옹이구멍을 넓혀 그 안에 터를 잡았다. 물론 땅 위에 직접 건축한 건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나무와 최대한 거리를 밀착했고, 마치 보호색처럼 기다란 나무 모양으로 설계한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윈프레드가 말하길 에메랄드 섬사람들은 나무를 신성시하여 필요량 외엔 결코 벌목을 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경작지 역시 먹고 살 수준 이상으로 넓히지 않았고, 특히 마을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는 일은 금기처럼 여겨졌다.
“난 윈프레드 아망초라네. 이 섬의 촌장직을 맡고 있지. 잘 부탁하네.”
마을 구조를 설명해주던 그가 대뜸 자신을 소개했다. 일행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문득 익숙한 성명이 나와 물었다.
“아망초? 루루 아줌마랑 성이 똑같네요.”
“내 딸일세. 결혼도 안 하고 출가한 몹쓸 녀석이지.”
“에에엑?”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데루루피아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둘째 치더라도, 그가 너무 젊어 보였기 때문이다. 윈프레드는 기껏해야 마흔 중반쯤 되었을까? 좀 과장하면 람카디스나 카토르와 동년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런데 데루루피아의 부친이라니 안 돼도 예순은 되었다는 소린데, 그의 머리칼에선 흰 머리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제리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동안도 유전이라는 거구만. 참 세상 불공평해.”
“아, 그래 보이나? 젊게 평가해주니 고맙네. 일단 나는 쿼터기도 하고...”
녹음이 만발한 오솔길을 지나자 윈프레드의 자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드리나무를 기둥 삼아 빙 둘러 만든, 독특한 통나무집이었다.
루도는 쭈뼛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왁! 깜짝이야!”
놀라 넘어지려는 그를 디리터가 붙잡았다. 집안 거실에 그리폰이 눈을 부라리며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날고 있는 모습도 그랬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새였다.
“퀘엑, 퀘에엑.”
마치 개가 짖는 것처럼 그리폰이 일행을 보며 울었다. 루도가 그 기세에 눌려 입구에서 우물거리고 있자 윈프레드가 먼저 집안에 들어갔다.
“아르유, 가루루는 집안에 들이지 말라고 했잖느냐.”
일행을 구해준 푸른 머리 소녀가 방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났을까? 루도보다 서너 살은 어려보이는 소녀였다.
“헤헤, 뭘 새삼스럽게. 안녕하세요~. 아까 뵀었죠? 아르유 아망초랍니다.”
생긋 짓는 눈웃음이 깜찍한 소녀였다. 아망초라는 성과, 판에 박은 하늘색 머리를 보자 단박에 그녀의 견적이 나왔다. 마리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에...그럼 루루 아줌마랑은...?”
“옛, 동생입니다.”
‘조카인 줄 알았는데...’
데루루피아와 윈프레드가 보여준 말도 안 되는 동안을 보며 그는 혹시 아르유도 보기보다 나이가 많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15살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했고, 데루루피아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근황이 궁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 만난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선천적으로 쾌활한 성격인 듯했다.
“그야...국왕폐하를 만나러 간다고 했으니...지금쯤 라키시아가 아니려나?”
“에헤헤, 그렇게 말하면 전 어딘지 몰라요. 태어나서 한 번도 섬을 나가본 적이 없거든요.”
“그...그러니?”
마주하는 아르유는 쓰다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지만 옆에 앉아 노려보는 그리폰의 시선이 계속 이마에 꽂혔다. 루도는 녀석이 갑자기 덮쳐오면 어쩌나 싶어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그리폰 또한 그런 일행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방 콧김을 쏘아댔다.
“자, 일단 좀 씻지. 우리 집 지하에 공동 목욕탕이 있거든. 물을 데워줄 테니 마음껏 쓰게나.”
일행은 윈프레드의 안내를 받아 목욕탕으로 이동했다. 일행은 생각보다 큰 규모의 욕탕에 놀라고, 욕조바닥에서 저절로 샘솟는 온수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델키아에서 장작을 때 물을 데웠던 방식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신문화였다. 옆방에선 에레이시아의 신들린 탄성이 들려왔다.
루도는 가장 먼저 목욕을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몸을 씻거나 마무리하는 단계였고, 특히 에레이시아는 당분간 욕탕에 상주할 것처럼 보였다.
거실에는 아까 그 그리폰이 여전히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루도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퀘엑!”
“뭐...뭐야? 이놈.”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왠지 움직였다간 폭발할 것 같은 미묘한 상황이었다. 그를 구한 건 아르유였다. 그녀는 루도가 곤란해 하자 주방에서 빠꼼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긴장 안 해도 돼요. 방금 그건「여어, 왔어?」라고 말한 거거든요.”
“여...여어?”
그녀는 윈프레드를 도와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가 욕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반색하며 쪼르르 다가왔다. 움직여도 괜찮다는 말에 루도는 주춤거리며 소파에 앉았지만, 여전히 그리폰의 날카로운 눈매가 신경에 거슬렸다.
“아르유라고 했지? 저 새 뭐니? 되게 위험해 보이는데...”
“퀘에엑!”
“우왁! 저거 봐.”
아르유는 그의 반응이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사뿐히 걸터앉았다.
“얘는 가루루라고 해요. 그리폰이지만 아주 착하니 겁내지 않으셔도 돼요. 아, 방금 그건 「허튼짓 하면 목을 찢어버리겠다」고 한 거고요.”
“뭐라? 착하다면서! 아니, 그건 그렇고, 너 저 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거야?”
“네. 같이 지내다 보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그리구 가루루도 사람 말을 알아들으니 심한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헤헷.”
“아, 그렇구나...”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얌마, 거짓말 하지 마! 내가 호구로 보이냐!」라고 외쳐야 정상이지만...하루 동안 비상식적인 일을 너무 많이 경험하다 보니 이것 또한 별 위화감 없이 수긍하는 루도였다.
그즈음 마리네와 디리터, 제리온이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셋은 어찌나 오랫동안 욕조에 몸을 담갔는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계단을 오르던 디리터는 둘의 대화를 듣고는 가루루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좋아, 너 나랑 친하게 지내자!”
그리고 그의 호의에 응해, 가루루는 친히 꼬리를 들어 손바닥을 쳐냈다.
“뭐냐 이거...”
“퀘에에엣. 퀫.”
“수컷은 흥미 없다네요. 피 냄새 나니 저리 꺼지...우웅...”
아르유는 적나라하게 통역하다가 자신이 뭔가 실수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디리터의 화를 돋우기엔 충분했다.
“뭐가 어째? 이 뚱비둘기 새끼가! 방금 목욕하고 왔단 말이다!”
“퀘궷, 퀘에엑.”
“이 새끼 지금 내 욕한 거지? 통역 안 해도 그 정도는 알아!”
“....”
디리터는 괴성을 지르며 가루루에게 달려들었으나 꼬리 연타를 얻어맞고 나동그라졌다. 애초에 무기도 없이 그리폰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오류였다.
마리네는 보다 현실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다. 아르유가 주인인 것 같으니 그녀를 통해 가루루를 회유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는 아까 바다에서 목격한 이래 하늘을 나는 상상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한 마리 새처럼! 그건 10대 소년소녀들의 공통된 꿈이었다.
“아르유, 괜찮다면 나 이거 한 번만 타보면 안 될까?”
그 순간 거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가루루의 눈치를 살폈다. 녀석의 눈초리가 가늘어지고, 부리 끝이 살짝 뒤틀리는 걸 보며 루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통역이고 뭐고 없이, 그건 틀림없는 비웃음의 표현이었다.
“큇, 퀘퀘엑.”
“에...또, 남자는 안 태운다네요오.”
“응...예상했어...”
가루루는 일행으로 치면 제리온에 비견될 만큼 자존심세고 날카로운 그리폰이었다. 때문에 일행은 독설의 선두주자인 제리온이 놈을 언변으로 굴복시키는 장면을 마음깊이 바랐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가루루가 아닌 아르유쪽이었다.
“야, 너. 아까 우리를 물에 띄운 거. 그거 어떻게 한 거냐? 마법 같아 보이진 않던데.”
제리온이 소파에 등을 척, 걸치며 물었다. 누가 봐도 거만하고 무례한 몸짓이었는데, 아르유는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밝게 웃었다.
“앨리엇이요? 앨리엇은 물의 정령이에요.”
“정령사였냐.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아니, 그것보다 물의 정령은 운디네잖아?”
“앨리엇은 이름이에요. 이 아이도 그리폰이지만, 가루루라는 멋진 이름이 있는 것처럼요.”
“정령에게 이름을 붙였다는 건가? 웃기는 꼬맹이일세.”
“그게 아르유가 정령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지. 정령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닌 친화력이니까.”
윈프레드가 구운 생선요리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거실에 놓인 탁자는 그대로 식탁으로 겸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됐지만 다들 지쳐 있었기 때문에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 치웠다. 목욕을 마친 이칼롯과 에레이시아도 뒤늦게 식사에 합류했다.
모두 자리에 모이자 윈프레드가 말했다.
“그래, 누가 신의 아이지?”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루도는 잠시 고민했지만 데루루피아의 부친을 속일 순 없기에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일단은 저인 것 같은데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루도라고 했나? 실례가 안 된다면...어느 신을 이어받은 건지 알 수 있을까?”
“펠아람입니다.”
윈프레드의 입에서 말 없는 탄성이 터졌다. 옆에서 요리를 꾸역꾸역 집어넣던 아르유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윈프레드는 턱수염을 연방 쓰다듬었다. 데루루피아에게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을 뿐 그 역시 신의 아이와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부녀의 시선이 순식간에 변하는 걸 보며 루도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군...루루 녀석,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하고 말이지...”
윈프레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르유에게 과일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녀는 자리에 남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윈프레드의 태도가 워낙 진지했다. 결국 그녀는 투덜거리며 창고로 떠났다. 윈프레드는 가루루까지 밖으로 내보내더니, 루도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가 바라는 게 무엇인가?”
루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바라는 것이라니, 소원을 묻는 건지 희망사항을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음...저희가 이 섬에 온 걸 물으시는 거라면, 루루 아줌마가 여기 사람들이 힘이 되어줄 거라고...”
“아니, 그런 수동적인 걸 묻는 게 아니네. 다시 묻지. 자넨 무엇을 얻으려고 이 섬에 왔는가?”
그가 얻고자 하는 것.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가더라도 알고 싶은 것. 루도는 그제야 윈프레드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데루루피아가 헤어지기 전 해준 말도 떠올랐다. 자신의 정체. 그것은 ‘진실’이었다.
람카디스는 불필요하다고 여겨 그의 눈을 가렸지만. 루도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선대 펠아람이 내린 저주인지가, 학살자가 될 운명인지가 궁금합니다.”
데루루피아는 이곳에 오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답을 얻는다는 건 루도의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한다고도 볼 수 있었다. 만약 그가 학살자가 아니라면 이전과 다름없이 레인저의 길을 걸을 것이고, 학살자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루도는 그럴 경우 홀로 도망쳐 자살할 생각이었다.
윈프레드는 루도의 답변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푸근한 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듣고 싶었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네. 다른 사람을 만나봐야 할 거 같은데.”
“다른 사람이라면...?”
“음...일단은 내 부친이지. 식사 마치고 함께 가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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