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일어서다(4)
일행의 짐은 간소했다. 시간이 촉박해 짐을 챙길 여유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쓸 만한 장비들이 이미 불타버렸다는 점이 더 컸다. 그저 각자 무장을 챙기고 마을에 들러 간단히 식료품을 구입한 게 전부였다.
제리온은 떠난다는 결정을 했을 때부터 줄곧 구시렁거리고 있었지만 의외로 그가 전면에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법관들조차 들어본 적 없는 조항을 읊어가며 경비대 사무관을 협박했고, 한 시간여가량을 입씨름한 끝에 기어코 노잣돈과 말 다섯 필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야 이 자식아! 그거 엄청 비싼 군마다! 상처 하나 내지 말고 안전하게 가져와야 해!”
“걱정 마셔. 아예 새끼를 쳐서 돌아올 테니까.”
사무관은 길길이 뛰었지만, 또 한편으로 떠나는 일행을 독려해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성곽 경비병들도 일행이 떠난다고 하자 선선히 레더아머며 부츠를 마련해주었다. 깊이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들 역시 로샤단의 궤멸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여행용품을 준비하는 동안 이칼롯은 도망자의 행적을 추적하고 다녔다. 경비대의 전폭적인 협력 덕에, 그의 행로 역시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팔 하나 없는 여행자? 못 봤는데. 여긴 시야가 트여서 그런 수상한 자는 바로 눈에 뜨이거든.”
“서쪽도 아니고...남쪽도 아니고...북쪽으로 갔을 리는 없겠지. 그랬다간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에게 곧바로 습격당할 테니까. 역시 외곽 숲을 타고 나잔즈 교각으로 향한 건가.”
목표가 정해진 만큼 일행의 행동은 몰라보게 민첩해져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흐리멍덩한 눈으로 무덤가에 퍼질러 있던 청년들은 어느새 그럴듯한 무장을 빼입고 돌아와 있었다.
루도와 마리네는 람카디스의 묘비 앞에 선 채 말이 없었다. 제리온과 이칼롯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고, 디리터는 무덤가에 오는 걸 싫어했으므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어느새 듬성듬성 돋아난 잔풀들이 그의 무덤을 덮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무덤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람. 유언...못 지킬 것 같아요.”
그를 가볍게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그때 같이 죽자고 했더라도 루도는 그에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라는 말은, 그를 잊어버리라는 말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루도는 허리춤에 메인 검을 말없이 응시했다. 나뭇가지도, 목검도 아닌 잘 손질된 진짜 검. 람카디스를 지키기 위해 택했던 그 검. 비록 본래의 목적을 잃었지만, 검은 아직 부러지지 않았다. 이제 그는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로샤단의 복수와, 람카디스의 계승을.
“벌은 달게 받을게요.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죽은 자에게서 산 자에게로 이어진다. 람카디스는 죽었지만, 그의 유지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루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과업을 이뤄내리라 다짐했다.
람카디스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가 하려던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 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닌, 람카디스다. 루도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증명해내는 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세상 모두가 그를 비난하더라도, 자신만은 그를 믿는다.
“반드시, 그래, 반드시! 내가 이어받겠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햇살 깃든 무덤가엔 풀벌레들만이 곰실거리며 지나다닐 뿐이었다. 먹구름은 없었지만 공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도로는 나무에 가려 한낮인데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10년이나 지났음에도 동쪽 교역 루트는 여전히 찬밥신세였다. 도로의 폭마저 비참하게 좁아 오솔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루도는 시야를 가득 채우는 침엽수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길에 들어서는 것도 이걸로 두 번째였다.
이칼롯은 말을 몰면서도 계속 지도를 보고 있었다.
“내가 추리한 게 맞다면 범인은 나잔즈 교각으로 향하고 있어. 교각만 지나면 갈림길이 생기니까, 그 후에 어디로든 숨을 생각이겠지. 요는 지금쯤 어디까지 갔느냐는 건데.”
이칼롯이 지도를 짚어가며 위치를 추정했다. 어깨너머로 구경하고 있던 마리네가 의견을 내놓았다.
“벌써 닷새나 지났잖아? 그 정도면 이미 교각을 건넜을지도 모르겠는데.”
“놈은 중상을 입었어. 응급처치를 했다손 치더라도 멀리 가진 못했을 거야. 강을 건넌다면 방법은 세 가지지. 도로를 따라 정직하게 가는 방법, 숲을 가로질러 가는 방법, 그리고...”
이칼롯은 지도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그가 가리킨 부분은 나잔즈 강의 상류 지점이었다. 디리터가 지도를 자세히 보기 위해 말을 가까이 몰았다.
“아아, 상류를 빙 돌아 건너는 방법? 그럼 벌써 길이 세 갈래네. 놈을 무슨 수로 찾지? 찍어야 하나?”
가볍게 지껄인 거지만, 다른 사람 역시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작부터 골치가 아파지려는 참에, 이칼롯이 다시 지도 한 가운데를 톡톡 두드렸다.
“언젠가 대장이 말한 적이 있지. 동쪽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보는 하르만의 귀로 간다고.”
“엑, 하르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제리온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이맛살을 찌푸렸다. 벌목대장 하르만. 벌써 10년이 넘도록 벌목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웬만한 산적 뺨쳤다. 종종 길 잃은 여행자들을 습격해 금품을 털어간다는 소문은 레인저들 사이에선 익히 유명했다. 거기다 부녀자 강간에 강도치사까지, 최근에는 비합법적인 루트를 통해 밀수업을 한다는 얘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소문만 해도 이 정도니, 동쪽 숲에선 하르만의 ‘하’자도 꺼내지 않는다는 말이 그저 허풍은 아닐 터였다.
루도 역시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르만에게 가서 정보를 캐낼 생각이야?”
이칼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녀석들의 정보력이 진짜라면 이미 범인을 찾아 습격했을 지도 모르지. 중상을 입은 외톨이 여행자라니, 그보다 더 쉬운 사냥감이 있나?”
앞서가던 제리온이 말을 늦췄다. 어느덧 일행은 이칼롯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움직이는 형태가 됐다.
“그건 그렇고, 니들 표정이 묘하게 구리다? 하르만이라는 작자, 뭔가 있는 거지?”
“어. 그냥 산적이라고 봐도 되는데.”
“아아...산적.”
태연하게 말한 루도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점차 험상궂게 변하기 시작했다.
“산적 좋지, 빌어먹을. 그러니까 그 작자에게 직접 목을 들이민다 그거로구만? 그럼 우선 뭐부터 해야 해? 옷까지 탈탈 털어서 말이랑 같이 고스란히 바쳐야 하나? 우리 노잣돈도 턱없이 모자란 마당에.”
“그럴 필요 없다. 알룬도의 말대로라면 우리 역시 아케니온에게 쫓기는 판국이야. 대화는 최대한 빨리 끝낼 거야.”
이칼롯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범인의 행적을 파악했을 때부터 이미 하르만에게 갈 거라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루도가 그에게 물었다.
“싸울 거야?”
“부득이한 경우엔. 우린 맘 편하게 여행하는 게 아니야. 루도와 마리네도 알아둬라. 이건 실전이야.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해놔.”
루도는 씨익 웃었다. 그에 관한 고민은 이미 오래전에 털어버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리고 이참에 몇 가지 규칙을 정해두고 싶은데.”
“규칙?”
마리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우린 쫓기고 있고, 언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야. 이렇게 맘 편히 의견을 주고받을 수 없는 때가 닥칠 수도 있어. 딱히 지휘관이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지금 몇 가지 규칙을 정해놓는 게 나을 거라고 보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디리터가 손을 들었다.
“어, 구구절절 맞는 말이긴 한데, 지휘관은 이칼롯 아니었어?”
그가 이칼롯을 추대하자, 마리네와 루도가 연달아 이에 찬성하고 나섰다.
“맞아, 이칼롯이라면 믿을 수 있어. 이칼롯이 이제 우리 대장이야.”
“나도 찬성.”
“제일 노땅이니까 당연히 짊어져야지. 뒤치다꺼리 잘 해봐.”
마지막 것은 제리온의 말이었다. 금세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지만, 정작 그와 이칼롯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게 제리온의 표현 방식이었고, 또 이칼롯 역시 그런 일로 화낼 사람이 아니라는 걸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이칼롯은 그저 그를 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럼 내가 맡도록 하지. 하지만 다들 명심해둬. 난 그저 전체를 대표하는 것뿐이지 너희를 거느리는 게 아니야. 언제든지 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해. 머리 하나보다는 다섯이 더 쓸 만하니까.
일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이칼롯은 그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괴한이 자신들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에도, 어느 누구도 동요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더 떨어질 구석이 없을 정도로 비참함을 맛본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일행의 결속력은 그 후에 더욱 단단해졌다. 그렇게 투덜대던 제리온조차 군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다섯이 살아남았고, 다섯이 일어났다. 모든 것은 로샤단을 위해.
이칼롯은 믿지도 않는 신을 향해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우리 모두에게 가호가 있기를.
“규칙은 별거 없어. 우리의 목적은 이번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나아가 로샤단을 계승한다는 것. 만약 판단에 혼란이 찾아오는 때가 생기면, 항상 이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도록 해. 그리고, 한 명이 검을 뽑으면, 모두가 그에 따르기.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결코 공격을 망설이지 마.”
“에...그게 다야?”
“그럼 뭐 군법이라도 만들 거라 생각했나? 다른 좋은 의견 있으면 내봐.”
제리온이 툭 내뱉듯 말했다.
“죽지 않을 것.”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평소 낯간지러운 말투를 극도로 싫어했기에,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다소 의외였다. 그는 말고삐도 쥐지 않고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허공을 보며 말했다.
“난 절대 안 죽을 자신이 있지만, 니들은 멍청해서 이렇게 말해주지 않으면 덜컥 멋대로 죽어버리잖냐.”
“오오오~”
디리터가 감탄한 얼굴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가 불쾌한 듯 몸을 빼자 말이 저절로 디리터와 거리를 벌렸다. 그는 그저 허벅지에 힘을 준 것뿐이었지만,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루도의 눈엔 그저 제리온이 신묘한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벌어지자 디리터는 허리를 굽혀 그를 찌르려 했다.
“바앙금 제법 멋있었다? 근데 레인저들한테 죽지 말라는 소릴 하다니, 좀 핀트가 어긋난 거 같은데.”
“아, 찌르지 마 이 노린재 똥 같은 자식아! 꼬우면 그냥 콱 뒈져버리던가!”
그가 성질을 내자 마리네가 둘을 말리려고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냐, 아냐! 멋진 규칙이네 그거. 그럼 나도 한 가지 말해봐도 될까?”
“해봐. 뭔데?”
“음, 그러니까, 좀 거창한 말이 될지도 모르는데. 「세상 모두가 아니라도 해도, 우린 서로를 믿는다」야. 어때?”
“어...?”
루도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건 분명 10년 전 람카디스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마리네 역시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는 루도의 낌새를 눈치 채고는 배시시 웃었다.
“있잖아, 우린 고작 다섯이잖아? 숫자가 적은 만큼, 똘똘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우리만큼은 절대로 서로를 신뢰하기. 세상 모두를 의심해야 할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만큼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야. 응, 신뢰는 마음에서 우러나야 한다고 했지만, 이건 특별히 규칙으로 정하자.”
마리네는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관념적인 문제는 말로 정한다고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음에도, 아무도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리온과 마리네가 한 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미 일행은 허허벌판에 버려진 채였고, 서로가 서로의 방패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루도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제리온 것도 찬성, 마리네 것도 찬성.”
“이하동문.”
“결정 났군. 앞으로는 이를 지표로 삼아 행동하도록 하지.”
자신의 제안이 무리 없이 채택되자 마리네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하하! 이거 쑥스럽네, 그냥 해본 말인데 이렇게 과분한 반응을 보이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걸까, 일행의 얼굴에도 차차 여유가 감돌았다.
일행은 잘 닦여진 도로를 버리고 울창한 숲 속으로 기수를 돌렸다. 하르만의 벌목지까지는 몇 시간 더 말을 몰아야 했다. 숲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습한 기운이 얼굴을 덮쳤다.
루도는 말을 몰며 가만히 그들만의 규칙을 되뇌었다. 하나같이 터무니없지만, 그래서 더욱 지킬 수밖에 없는 그 규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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