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3 - 루도의 비밀(1)
“예전에 말이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늑대 떼를 만난 적이 있었거든. 근데 그 자식들 몸집이 거짓말 좀 보태서 말만 하더란 말이야. 딱 네 마리였는데, 거기 사는 놈들이 또 워낙 영악해야지. 쉽사리 접근을 안 하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라고. 그렇다고 절대 곱게 보내줄 눈빛은 아니었어. 그 어금니 하며...”
“하하하, 정말 위기였던 모양이네요. 그런데 그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신 겁니까?”
“솔직히 그 커다란 녀석들을 어떻게 네 마리나 상대하겠어? 그렇다고 순순히 점심밥이 되어줄 수는 없고...그러다가 계곡이 보이는 거야. 물살이 진짜 엄청나게 빠른 곳인데, 별수 있어? 냅다 뛰어들었지. 그렇게 떠내려가다가, 천운으로 바위에 걸린 통나무를 붙잡아 빠져나왔지. 정말 산은 살 곳이 못 된다니까.”
디리터는 자신의 무용담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다. 물론 듣는 베리어스는 어째서 그것이 무용담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인저들에게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이 평생 간직되는 자랑거리였다.
시간은 이제 막 정오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뭇잎 틈새로 쏟아지는 햇빛이 기분 좋게 살갗을 그을려주었다. 바람은 햇살을 머금어서인지 시원하다기보단 포근했다. 산길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어 말을 몰기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간혹 여행자나 이동 중인 상단과 마주쳐 길을 비켜 줘야 할 때를 제외하면 어떤 애로사항도 없는 평온한 여로였다.
지루한 산길의 연속인 데다 날씨는 적당히 따뜻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날을 세우고 출발했다 한들 정신이 해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방진(方陣)대형으로 각까지 맞춰가며 이동하던 일행이었지만 어느새 각자 편한 데로 흩어져 있었다. 맨 앞 열에는 디리터와 호위대가 섰고, 중간에는 루도와 마리네, 제리온이 섰다. 대열의 마지막에 이칼롯이 있었는데, 그는 경계를 자처하며 일체 잡담을 나누길 거부했다.
베리어스를 필두로 한 가칭 「로샤단 호위대」는 예상한 대로 아직 수호기사의 작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실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고, 다만 교단 내에 연고가 없거나 혹은 너무 젊어서 그간 임관이 미뤄지던 사람들이었다.
호위대의 우두머리인 베리어스는 후자에 속했다. 그는 막 사춘기에 접어들 때부터 검을 잡기 시작해, 20대에 들어섰을 땐 이미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평의회에 번번이 거절당했고, 지금까지 하급기사로 지내온 것이었다.
호위대는 모두 최근에 정식기사로 승격된 사람들이라, 들떠있는 한편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갓 승격된 기사들만으로 소대를 편성한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수호기사단의 전멸은 그들에게 임관의 기회를 앞당겨 주었지만 동시에 위기이기도 했다.
“좋은 날씨군요. 이대로만 가면 글피쯤에 가린워드 마을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베리어스가 뒤에 사람들도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뒷열은 잠잠했다. 아무도 대꾸가 없자 그가 무안해 할까봐 걱정한 마리네가 서둘러 화답했다.
“예에~. 정말로 좋은 날씨네요. 오늘처럼만 같으면 바랄 게 없겠어요.”
썰렁한 반응뿐인데도 베리어스는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자잘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호방한 스타일이었다. 그 같은 인물은 실력을 떠나 분위기 메이커로서 꼭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디리터는 그가 호위대를 맡은 것에 수긍하면서도, 어째서 지금껏 하급기사에 머물러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뜨내기들을 호위라고 붙여주다니, 차라리 노잣돈을 한 푼 더 주지.”
뒤쪽에서 말을 몰던 제리온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로샤단 호위대」에 대해 제일 불만이 많았다. 그가 들릴 듯 말 듯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탓에, 마리네는 호위대를 옹호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래도 우리 지켜주겠다고 오신 분들인데...고맙게 생각해야지. 그리구 언제 우리가 경호원을 달아보겠어?”
“그게 문제라는 거다. 우리가 뭐, 사지 절단된 장애인이냐? 아님 쥐뿔도 모르는 온실 속 화초냐? 엄연한 레인저에게 무슨 호위를 붙여줘?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그렇다고 붙여준다는 게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이니....누가 누굴 호위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으...불평하는 건 좋은데 제발 목소리 좀 낮춰. 다 들리겠어. 말이 호위대지, 그냥 우리랑 같이 움직인다는 거잖아. 우리도 좀 쪽수가 있어야 아케니온을 만나도 할 만하지 않겠어?”
마리네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하지만 어째 마리네의 목소리가 작아질수록 제리온 쪽은 커져만 갔다.
“아케니온은 문제가 아니야. 안개송곳니가 문제지. 그 지붕에서 활 쏴대던 자식은 정말, 아오! 설마 그런 놈이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로샤단 호위대에 대한 일행의 견해는 제각각이었다. 마리네와 디리터, 에레이시아는 호위대에 매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말마따나 자신들을 지켜주는 사람들인데 어찌 싫어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반면 제리온은 그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일행이 늘어봤자 귀찮기만 하고, 신경 쓸 게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아케니온과 안개송곳니가 로샤단을 쫓는 것은 사실이지만, 레오스 마을 이후로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리온은 그들이 날아다니지 않는 이상 추격을 포기한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이 자식 진짜 잘 자네. 한번 말에서 굴러 떨어져야 정신 차리지.”
제리온이 루도를 향해 구시렁거렸다. 루도는 류이덴사를 떠난 이후로 줄곧 조는 중이었다. 그는 말고삐까지 마리네에게 맡긴 채 팔짱을 끼고 끄덕끄덕 졸았다.
마리네는 점점 기울어지다 오뚝이마냥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젯밤에 잠을 설쳤다나봐.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 졸릴 만도 하지. 뭐 호위대 분들도 계시는데 어때? 지금 잤다가 이따 밤에 불침번 서면 되지.”
“어, 그거 좋은 생각이다.”
둘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루도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반응이 없었다. 물론 그도 완전히 잠들어 있는 게 아니어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비몽사몽이라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열심히 조는 루도와, 맨 뒤에 있는 이칼롯은 호위대에 대해 ‘별생각 없는’ 사람들이었다. 둘은 그들을 딱히 좋게 평가하지도, 나쁘게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냥 따라오면 따라오는가 보다 - 하는 무심함이었다. 특히 이칼롯은 호위대의 전력을 ‘없다’고 가정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그들이 전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어쨌든 그들의 솜씨를 무시했다는 면으로 보면 그는 반대파에도 속해 있었다.
마리네는 루도를 챙기랴, 제리온을 말리랴 분주했기에 호위대와의 친목다짐은 디리터가 맡았다. 그는 타고난 넉살과 낙천성으로 한나절 만에 그들 모두와 말을 텄다. 여정이 무료해지자 앞 열의 사람들은 디리터를 필두로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디리터는 대개 로샤단에 들어오기 전 카잘산에서 살던 시절을, 기사들은 작위를 받기까지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호위대가 경계를 놓고 있던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분위기는 어느새 야유회라도 가는 듯한 상태가 되었다.
“아쟉스님도 여간 아니군요. 저도 나름 거칠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하하, 뭐 좀 그렇지. 아버지가 워낙 좀 괴짜여서, 별 경험을 다 해봤거든.”
“레인저라고 하셨지요? 북부 레인저는 솜씨가 좋기로 유명하던데, 언제 한번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앞 열의 이야기는 화기애애하게 전개되었다. 호위대는 기사의 신분이기는 해도 젊은 데다 다들 승격 과정에서 고충을 겪어서인지 개방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고위 귀족이 아닌 자들을 경호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전혀 불만을 갖지 않았다. 이는 일행이 안개송곳니와 교전하여 살아남은 자들이고, 무언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레이디 그웬드린은 수도로 간다고 하셨습니까? 기회가 된다면 저희가 모셔 드릴 텐데, 유감입니다.”
베리어스의 친구인 발가르가 에레이시아를 보며 말했다. 그웬드린은 에레이시아의 성이었다. 평민인 그녀에게도 꼬박꼬박 ‘레이디’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발가르는 기사도 정신이 매우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리어스보다는 작은 체구였지만 다부진 외모와 행동 덕에 일행 사이에서 기사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에레이시아는 여전히 디리터와 말을 함께 탔다. 그녀가 말을 탈 줄 모르고 디리터의 말이 가장 크다는 이유에서였지만, 루도는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 확신했다.
발가르가 말을 건네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디리터에게 달라붙었다. 그녀의 ‘공권력 공포증’은 여전했다.
“네...네? 앗, 호호호! 괜찮아요. 수도야 워낙 사람이 붐비는 곳이니까, 아무 상단에 합류해서 가면 될 거에요.”
“그래도 그렇지 숙녀가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니요. 강도도 강도지만 상인들도 믿을 수 없습니다. 요즘 워낙 민심이 흉흉해서...”
발가르는 계속해서 그녀의 안위를 염려했다. 에레이시아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자 디리터가 그녀 대신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조금 전보다 퉁명스러웠다.
“위험도로 따지면 우리랑 같이 움직이는 게 훨씬 위험하지. 언제 불화살이 목덜미에 꽂힐지 모르는 마당에.”
그의 빈정거림에 발가르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일까? 기사들은 베리어스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각자 위치로 돌아갔다.
디리터가 난처하게 웃는 베리어스를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베리어스,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주교님이 말씀해주셨을 텐데.”
베리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글쎄요...그렇게 질문하시니 대답하기가 약간 난감한데요...일단 루도 클로람군이 가린워드 사건의 생존자라는 건 압니다.”
“우리 호위하다가 목 날아갈 수도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개송곳니가 대단히 위험한 집단이라는 것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레밀리오 사제는 호위대를 선발할 때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임무라네. 그래도 가겠는가?’ 라며 그들의 각오를 물어봤었다.
베리어스가 애써 미소 지었다.
“전투 중에 죽고 사는 건 무인의 숙명. 그런 데에 일희일비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저희는 그저 부여받은 임무를 확실히 수행할 뿐입니다.”
“하긴 그래. 나도 알면서 레인저가 된 거니까.”
둘은 금세 기분이 풀어져 낄낄대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경직된 자세는 한동안 계속됐다.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위태위태하게 졸던 루도는 결국 마리네의 권유에 따라 말 뒷목에 기대어 본격적으로 잠을 청했다. 잠을 설쳤다곤 하지만 너무 지나칠 정도로 몸이 노곤했다.
바람이 그친 길가엔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로부터 사흘, 일행은 안개송곳니는 고사하고 얼뜨기 도적떼조차 만나지 않았다. 간간이 인적이 뜸해지는 구간이 있긴 해도, 보통은 행인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곳이어서 마음만 먹었다면 에레이시아 혼자서도 무리가 없었을 정도로 평탄한 여정이었다.
경계근무를 자처했던 이칼롯은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던 까닭에 사흘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기염을 토했다. 말을 걸지 말라고 엄포를 내린 그나, 그렇다고 사흘 동안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 일행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지루한 산길이 끝나자 띄엄띄엄 민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리 밭 멀리 소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표지판을 둘러보던 이칼롯이 사흘 만에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 가린워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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