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한 도련님(3)
"이럇!"
"워워워."
한동안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은 금성 성곽 외곽의 공터였다. 인구밀도가 낮은 시대답게 조금만 민가를 벗어나면 말을 달릴 장소는 널려있었다.
"드디어 오셨구만."
시종 예견이 먼저 말에서 내려 짐을 푸는 동안 누군가가 반가운 톤으로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박경휘도 그런 반응이 익숙한듯 천천히 다가서며 남자를 바라봤다.
"늦었나."
"전혀. 우리도 금방 왔으니 걱정말라고."
공터엔 20명 남짓한 소년들이 말을 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독 어른티가 나는 자들이 그들의 반 정도로, 소년들을 따라 나온 시종이었다. 시종들은 저마다 한두 발자국 뒤에 물러서 있었다.
"처음 인사올립니다, 박공."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박승헌이라 합니다, 박공.”
“올해 들어온 학생인가."
“그렇습니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쪼르르 달려나온 소년 하나의 인사에 박경휘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박경휘에 비해 머리 하나 이상 작은 탓에 소년은 거의 하늘을 보는 자세였다. 앳된 소년의 얼굴엔 약간의 긴장과 기대감이 반반 섞여있었다.
"아아, 초면이지. 이쪽은 승헌. 사촌동생이야. 저번에 말했던 잡찬 어른네 셋째 아들."
“...사촌형을 따라나온 것이냐.”
“예, 제가 가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박공을 뵙고 싶었거든요.”
당찬 대답에 박경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보탠 쪽을 쳐다봤다. 그쪽엔 여유로운 표정인 박계강이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이걸로 구면이 된건가, 흐하하핫."
"구면은 무슨. 말도없이 데려오면 어떡해! 아직 승헌이는 말도 제대로 못 타는 애잖아!"
“그거야 지금부터 배우면 되지~ 잘 타는 사람만 부르면 못 타는 애들은 언제 배워~”
“아오~! 왜 항상 멋대로냐고!”
옆에 선 다른 소년의 딴지에도 녀석은 뻔뻔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경휘가 수락하면 되는 거지 뭘~”
언제부터인가 박경휘를 중심으로 모이게 된 집단이었다. 대부분은 한두살 정도 차이가 나는 동년배 무리. 유일하다싶은 6두품 가문 소년 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진골 박씨족 구성원들이었다.
“승마가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알어! 아무튼! 위험하니까 승헌이는 그냥 돌아가든가 하자. 만나서 인사도 했으니 할만큼 했잖아?”
“에이~ 그럼 너무 아쉽지. 기왕 온 거 다같이....”
“아니, 너 벌써 잊은 거야? 우리 오늘 하루종일 말을 탈거라고! 그럼 승헌이는 혼자 앉아서 구경이나 시킬 작정이야?!”
“뭐 그거야....”
계강과 소년의 옥신각신이 이어지는 동안 박경휘는 다시 승헌을 내려다봤다. 척보기에도 함께 하고 싶은 눈치. 큰 방해만 안된다면 굳이 쫓아낼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냥 같이 있자.”
“허... 진짜?”
“거봐~ 경휘는 반대 안 할 거라니깐! 흐하하핫.”
계강이 허탈한 표정인 소년을 보고 의기양양한 웃음을 토해내는 동안 박경휘는 예견이 건넨 장비들을 손에 쥐었다.
“어째 우리 무리가 점점 커지는 거 같냐.”
버럭 화를 내던 소년인 박우진이 무리들을 쭈욱 둘러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박경휘도 문득 그의 말에 넌지시 늘어나는 중인 무리를 훑었다. 과연 날이 갈수록 인원이 늘어나는게 눈에 띄었다.
‘나로선 나쁠 게 없겠지.’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소년들은 박경휘의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함께 해온 친우부터, 학관에서 연이 닿은 교우까지 경로가 다양했다. 으레 그렇듯 비슷한 사람끼린 뭉치기 마련. 지금의 이 무리도 박경휘가 별다른 노력을 한 게 아님에도 자연스레 생겨난 모임이었다.
***
슈욱 슉
말의 걸음에 맞춰 박경휘가 손을 놓자 화살들이 표적에 꽂혔다. 눈 깜짝할새 치고나가면서 뒤로 돌아 쏜 덕에 지켜보는 입장에선 거의 찰나에 가까웠다.
"미쳤군."
"하나도 놓친게 없군요."
“어째 저번달보다 훨씬 더 잘 하는 것 같은데?”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중에서도 크게 놀라는 건 계강, 그리고 그 옆에 선 다른 6두품 소년 이지승이었다.
“지승이 너도 아버지에게 배워 활을 좀 쏜다지?”
“그렇긴 합니다만... 이정도 실력을 가진 기마궁사는 단 한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병부에 속한 무관 이재의 장남인 이지승은 어린 시절부터 익힌 무예 덕에 나름의 눈이 있는 터였다. 그런 그에게도 지금 같은 광경은 영 생소한 모습인지 입을 다물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놀란 건 비단 지켜보던 소년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육체능력이 좋은 건 알았지만 계산보다도 훨씬 나아졌어.’
얼떨결에 허수아비 다섯개를 연이어 쏘아맞힌 박경휘도 내색없이 놀라는 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힘써온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 실력이 분명 이정도는 아니었다. 방금 전 파르티안샷들은 나조차도 확신하지 못했는데.’
감각이 돌아와 긴가민가한 게 몇 주째. 도성에서는 직접 말을 타고 시험할 기회가 없어 지금을 노린 참이었다. 그런만큼 무리해서 활을 쏘아본 것이었는데 이정도로 기량이 올라와있을 줄은 그 자신도 전혀 몰랐다.
“역시 네가 봐도 그렇구나... 하긴. 북방 말갈족 놈들도 이정도로 활을 잘 쏘진 못할 거야."
“동감입니다.”
"우와... 박공! 대단하십니다!"
"흐하하하핫! 내가 뭐랬냐. 오면 좋을 거라 그랬지?"
잠자코 앉아서 구경하던 박승헌은 손뼉까지 쳐가며 놀라고 있었다. 덕분에 덩달아 어깨가 으쓱한 계강이 한결 더 신이 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경휘는 무관을 해야겠는데. 이런 실력을 집사성 같은 곳에서 썩히면 아까울 거 같애."
“맞아 맞아.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이야. 이대로만 가면 정말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겠어.”
"당장 키만 봐도 그렇잖아. 그냥 무관이 뭐냐. 대장군은 해야한다고!"
약간은 노골적인 치켜세우기 내지는 놀림에 가까운 소리. 하지만 애써 반박하는 소년은 없었다.
“이참에 화랑을 해보는 건 어때? 나이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전혀 손색이 없다구.”
하지만 화랑이란 말에 박우진이 슬쩍 계강을 쏘아보며 어깃장을 놓았다.
“야이...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 박씨가 무슨 화랑이야. 화랑은 김씨만 가능한 거 아직도 모르냐? 그리고 화랑이 되려면 낭도가 몇 명이나 필요한 줄 알어?”
"흐하하하. 그럼 우리가 낭도하면 되지. 화랑이 별 거냐? 실력있겠다 낭도있겠다. 그럼 된 거지."
“뭐어?”
"거기다 봐. 경휘는 경서까지 전부 다 떼버렸다구. 오죽하면 국학에서도 더 가르칠 게 없대겠냐. 대장군이 아니라 태대각간을 해도 될 거라니깐!"
“...허참.”
계강이 과장하는 측면도 없잖아 있지만 박우진은 그 말에 쉽사리 반박하진 못했다. 계강이 하는 소리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탓이었다.
“흐흐... 난 그때 산학 박사가 경휘 실력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우물쭈물하던 게 아직도 생각나더라니깐!”
“그게 사실입니까, 형님?”
“그럼! 그때가 측량문제였던가...? 아니 글쎄 경휘가 책에도 없는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가지고... 산학 박사들이 죄다 달려나와 떼를 썼더래니까. 어디서 배운 건지 알려달라고.”
"우와아아....."
“구장산술이랑 철경... 또 뭐시냐. 아무튼 당나라 산학책까지 다 뒤져봐도 그런 건 없다던데... 참 신기한 일이지.”
꼭 자기 무용담을 풀듯 말을 잇는 계강 덕에 승헌은 점점 흥분하는 모양새. 거기에 덩달아 무리에 낀 소년들도 가세하면서 부담스러운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
박경휘는 그런 시선들을 뒤로 한채 별말없이 말을 몰아 허수아비들에 박힌 화살들을 회수했다. 낯 간지러운 소리에 몇마디할 법했지만 애써 말을 아꼈다. 이유는 있었다.
‘어쨌거나 내겐 우군이 필요하다.’
훗날 활약할 무관인 이재의 아들부터 진골 박씨문중. 심지어는 비주류 김씨족의 자제까지 낀 모임이었다. 잘난 체하는데엔 흥미가 없지만, 명문가의 자제이자 미래의 주역들이 알아서 고평가해준다면 박경휘로선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믿고 일을 맡길 동료들이 필요할터.’
골품제로 인해 가뜩이나 부족한 인재풀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면 방법은 한 가지뿐.
‘친위세력을 가르쳐서 써먹는 수밖에.’
그나마 신생국가라면 다양한 인재풀에서 고르고 골라 오롯이 자신의 사람을 채울 수 있을테지만. 지금의 상황은 엄연히 닫힌 사회 안에서의 개혁을 도모하는 입장.
박경휘는 다시금 눈을 굴려 소년들을 바라봤다.
***
그렇게 한바탕 말을 달리고나니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쌀쌀한 계절답게 해가 짧았다.
꼬르륵
"킥킥. 배고프냐, 승헌아?"
"들렸습니까?"
"난 무슨 지진이 난줄 알았다. 킥킥킥."
“아....”
승헌이 계강의 놀림에 부끄러운 표정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박우진을 비롯한 다른 소년들도 비슷한 기색. 슬슬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금성 한바퀴만 돌고 들어가지."
"에에에에?! 너무 길어!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
사실상 대변인격인 계강의 말에 소년들 모두가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박경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북문까지만 찍고 돌아가자.”
“후우... 딱 북문까지다?”
해를 보자니 그쯤하면 적당히 시간이 맞을듯했다. 계강까지 동의하면서 타협이 성사되자 모두는 다시 말들에 올라앉았다. 시종의 도움으로 승헌까지 말에 오르고나자 무리는 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가 소년들의 뺨을 스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럇!"
"엇?"
기마대의 무리가 속도를 줄인 건 북문 인근 검문소에 다다라서였다. 성곽에 이르기 전 금성으로 향하는 길을 검문하는 곳에선 난데없는 실랑이가 일고 있었다.
“무슨 일이려나.”
지나치려면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계강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언덕 아래 검문소를 관찰하고 있었다.
왁자지껄
"아, 글쎄! 증표를 잃어버렸다니까요!"
"야이, 걸뱅이놈들아. 지금 그걸 우리보고 믿으라는 거냐?"
“도적들을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습니다. 금성 일대에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건 당신들도 알지 않습니까!”
“헛소리말고 물러나거라. 증표가 없이는 금성에 발을 들일 수 없어. 물러서지 않으면 혼꾸녕을 내주마.”
“지금와서 돌아갔다간 저희 다 죽습니다! 제발 금성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병부에 저희 신분을 증명해줄 관리가 계십니다.”
“안돼! 어서 돌아가!”
다소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잠시 보고 있자니 상황은 대략 이해가 갔다.
금성은 대대로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 일단 들어서기만 하면 안전이 보장되니 부쩍 늘어난 유민들이 밀려와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곤 했었다. 물론 대부분은 경계를 서는 병사들의 손에 우악스레 끌려나갔다.
"유민일까?"
"글쎄."
계강의 물음에 박경휘가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머문 곳은 열심히 본인의 무리를 위해 변명 중인 소년이었다.
"내려가 볼까?"
"미쳤냐?"
박우진이 계강의 말에 질색하듯 손사레를 쳤다. 비록 진골 가문의 도련님들이라곤 하나 엄연히 지금 상황은 공무. 자칫하면 안좋게 엮일 수 있는데다, 정말 도적일지도 모르는 무리와 대적하는 형세였다. 한줌의 병사들이 있지만 까딱해서 무리 전체가 달려들었다간 이쪽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박경휘 역시 그런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딘가 묘한 느낌이 자꾸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있었다.
“아, 글쎄! 저희는 사벌주에서 왔다니까요! 병부의 부름에 온 건데 이렇게 돌아가면 저희나 당신들이나 다 죽는다구요!”
마침 맞게 들려온 소년의 외침이 그런 느낌에 쐐기를 박았다.
만신창이지만 나름 비단옷을 입고 있는 소년. 그런 소년을 따라 나온듯한 촌스러운 복장의 지방 장정들 무리.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인 사벌주.
박경휘가 기억하는대로라면 어딘가 익숙한 퍼즐이었다.
‘저건... 설마.’
“그럼 그냥 돌아가?”
“그래야지. 이제 곧 해가 질 거야. 밤이 되면 정말 위험해질거라고.”
공기도 점점 차가워지는 시점. 박우진의 말에 계강이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박경휘는 그런 소년들을 한번 훑더니 고삐를 꽉 잡아들었다.
"내려가보자."
"그럼 그렇지. 경휘 말대로 우리도 어서 돌아가... 에에에에엑! 박경휘! 너마저?! 진짜 오늘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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