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는 그 궤도에 가질 수 있는 최대 전자의 수가 있다 - 모든 것은 안정성을 위해 움직인다.
*****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문 사이로 보이는 허연 머리, 허연 눈썹.
그리고 그 밑으로 보이는 푹 들어간 두 눈.
“하, 할... 소, 소장님...?”
연구소장 주동규다.
그의 뒤로는 이번에도 우상태 전무가 따라 왔다.
오늘도 역시 피곤해 보이는 얼굴.
그는 백훈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소, 소장님이 여까지 어쩐 일로 오셨습니꺼?”
“주치호 선임과... 지아름 선임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나예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목소리.
주동규는 쇤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내가 여기에 참여해서... 모두와 이야기를 하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아... 아, 예예! 맞심니더. 즈이 아직 회의 시작 안했심니더"
“그런데... 내가 문을 열기 전에 조금...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선임, 지선임이 얘기해 봐요...”
주동규의 시선이 지아름에게 향했다.
“후... 아니에요, 소장님. 얼른 앉으시죠"
“거... 회사에서들... 소란 피우지 맙시다... 알겠습니까, 다들?”
“예, 소장님"
모두가 조용히 대답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지아름이 회의실 한 쪽 벽에 걸린 커다란 모니터의 화면을 켰다.
‘코팅용 에멀젼 원가절감 실험 내역 공유'라고 적힌 PPT 자료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실험실 내에서 진행한 실험은 총 221 회입니다. 저희는 각 실험을 넘버링 하여 해당하는 번호로 명칭을 정했습니다. 모든 실험들 중 기존에 사용하던 에멀젼과 물성이 가장 유사한 것은 172번입니다.”
그녀는 화면을 넘겼다.
172번 실험의 배합이 화면에 등장했다.
“실험에 사용한 원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DIW(탈이온수), 음이온성 계면활성제(유화제)로 사용된 알킬아릴에테르 설페이트, 비이온성 계면활성제로 사용된 폴리에틸렌옥사이드 알킬에테르...”
“지아름 선임, 반응 기록좀 봅시다"
주치호 선임이 지아름의 말을 끊고 물었다.
변진희의 어깨가 꿈틀 거린다.
그녀는 죄인이 된 듯 고개를 떨구었다.
“......”
“반응 기록좀 보자니까, 뭐하는 거지?”
“반응 기록은 없습니다”
지아름이 답했다.
“하, 반응 기록이 없다? 장난하는 거지?”
“장난 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잃어버렸어요. 죄송합니다"
“팀장님, 그리고 소장님. 선임이라는 사람이 반응기록이 없다고 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선임... 반응 기록이... 없습니까?”
소장 주동규의 시선이 지아름에게서 멈췄다.
“네, 없습니다"
“연구원의 기본은... 기록을 잘 하는 것이죠...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 반응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 어떤 원료를 사입 했는지... 온도는 얼마나 올랐는지... 이 모든 기록이 없으면... 연구원은 아무런 신빙성도... 얻지를 못해요...”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아뇨! 아뇨, 소장님. 제 잘못입니다. 지선임님은 잘못 없어요!”
변진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 물분자가 흥건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
“제, 제가... 배합지 보관을 담당하고 있는데... 저의 실수로 어딘가에 빠진 것 같아요. 전부 제 잘못입니다, 소장님! 지선임님 나무라지 마세요...! 크흑... 흑...”
물분자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 내린다.
그녀의 볼에 놓여 있던 옥시벤존, 옥틸메톡시신나메이트이 물 분자의 힘에 이끌려 함께 끌려 내려간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볼에 있던 선크림이 눈물과 함께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그녀는 지아름을 따라 화장도 포기했다.
지아름은 화장할 시간도 아깝다고 했다.
“변진희, 너 뭐 하는 애야? 뭔데 회의 시간에 울고 자빠졌어? 여기가 대학교야? 울음 안 그쳐?”
“주선임, 목소리 낮춰라. 소장님 계신데 와 아를 다그치고 그라노?”
“소장님 계시니까 그러는 겁니다, 팀장님. 쟤가 회의 시간에 저러고...”
“크흠... 그만, 그만들 해요... 정신 없어요...”
소장 주동규는 정신 사납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흰 속눈썹이 미세하게 부르르 떨렸다.
“변주임, 진정해요. 나가서 찬 물좀 마시고 와요"
“아뇨, 지선임님... 저는...”
“변주임, 내 말 들어요"
변진희의 옆에 앉아 있던 지아름이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려 놓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수의 따뜻한 말투.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하다.
“네, 지선임님... 흑... 죄송합니다 소장님, 팀장님...”
변진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회의실을 빠져 나갔다.
“소장님, 괜찮으십니까?”
“으응... 괜찮아요...”
“지아름 선임, 회의 마저 진행 합시다. 우리 회사의 주요 재산 중 하나인 반응 기록표가 없어진 건에 대해선 추후 잘잘못을 따져 보도록 하죠. 알겠죠, 육팀장?”
“예, 전무님. 면목 없심니더”
그 때, 지아름이 입을 열었다.
“잘잘못이요? 이번 건은 잘잘못을 따질 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무님, 소장님. 진작에 디지털 전환을 했으면 이런 일도...”
“거...! 실험은 손으로 적어야... 제대로 된 기록이 남는 거예요, 지아름 선임”
“아뇨, 소장님. 패드에다가 적으면...”
“그럼 누가 중간에... 무얼 지우고 무얼 추가 했는지... 육안으로 확인이 안된다고 말 했지요... 이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그런건 패드에도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지선임, 소장님이 나중에 얘기 하자고 하지 않습니까? 회의 재개 하세요"
지아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훈의 눈에는 그녀의 피부를 구성하는 콜라겐, 엘라스틴의 분자 운동이 빨라지는 것이 보였다.
흥분한 그녀의 볼이 붉어지고 있다.
그는 잠자코 앉아 그녀를 지켜 보았다.
지금 그에게는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회의 마저 진행 하겠습니다. 배합에 사용한 원료들을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사용한 원료들의 이름과 그 비율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흠... 지선임, ... 계면활성제를 음이온성과 비이온성... 두 종류를 사용했군요... 비이온성 계면활성제는... 가격이 조금 나가는 걸로 아는데... 어느 회사껄 사용하고 있나요...?”
“네, 소장님. JH 사의 계면활성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려하시는 바는 알고 있습니다만, 음이온성 계면활성제 대비 비이온성 계면활성제 비율은 8:2 수준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이온성 계면활성제의 비율은 훨씬 적습니다”
“적다고 해도... 원가 절감을 진행하면서... 단가가 높은 계면활성제를 사용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네요...”
“그 대신, 모노머 쪽에서 단가를 확 낮췄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분산 안정성에 문제가 생겨 음이온성 계면활성제를 사용하게 된 것이구요"
그 때, 주치호 선임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저도 소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가 보기엔, 값 비싼 비이온성 계면활성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안정성이 높은 에멀젼을 합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분산제 역할을 하는 첨가제로 비이온성 계면활성제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훨씬 소량에 더 낮은 단가로 맞추는 것이 가능합니다"
“흠... 첨가제라면... 어느 것을 말하는 겁니까...?”
“아스코르브산입니다. 제가 찾아 본 논문에 의하면, 첨가 비중 1프로 정도로 맞추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선임 니, 뭔 말을 하는 기고? 아스코르브산은 단가가 맞는 회사가 없다. 지선임도 그기 해볼라 캤는데 단가가 안맞아가 못했다"
“아뇨, 팀장님. 제 매형이 유민화학 영업 부장입니다. 제가 사정을 얘기하니 단가 맞춰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단, 대량 주문을 넣는다는 조건입니다"
회의실에 앉은 이들 모두의 시선이 주치호에게 향했다.
지아름 조차 놀란 얼굴이었다.
“일단, 유민화학에 1kg 정도 주문을 넣어 아스코르브산을 이용해 에멀젼 합성 실험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물성을 맞춰 결과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흠...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가족이라면 믿고 맡기는 것도... 가능할 테니...”
“네, 소장님"
“그럼... 이번 달 안에 끝내는 것도... 가능하겠습니까, 주선임?”
“물론입니다, 소장님"
“그래요... 든든하네요. 그럼 지선임은... 비이온 계면활성제를 제거하고... 음이온 계면활성제만으로... 단가를 맞출 방법이 없는지... 확인해 보세요... 단가를 더 낮추면 좋고...”
“......네, 알겠습니다"
“선의의 경쟁은... 좋은 영향을 줍니다... 특히 주선임, 지선임 같이 연차가... 웬만큼 찬 경우에는... 좋은 자극이 필요하기도 하지요... 두 사람 모두...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두 사람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요...”
“맞습니다, 소장님”
우상태 전무가 주동규 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이달 말에... 다시 회의를 잡도록 하죠... 아무쪼록 좋은 결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주선임, 지선임...”
주동규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고개를 돌려 백훈을 보았다.
“자네는... 지난번에... 실험실에서 본 것 같군...”
“네, 맞습니다. 차백훈 사원입니다"
“그래요... 손은 다... 나은 겐가...?”
“네,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네요... 항상 안전에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난 회식에서 자네가... 우리 우상태 전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들었어요... 블라인드... 나도 챙겨 봅니다... 우상태 전무는 좋겠어요...”
“하하, 소장님 곁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로는 부족하신 겁니까?”
“너무... 오래봐서... 지겨워...”
“하하하, 짓궂으십니다 소장님"
주동규 소장과 우상태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상태 전무는 주동규 소장 뒤를 바짝 붙어 갔다.
한바탕 폭풍우가 휘몰고 지나간 자리.
회의실에 남아 있는 이들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육원탁 팀장이 버럭 화를 냈다.
“배합지...! 지선임 니, 배합지는 언제 잃어버린 기고?”
“몰라요. 오늘 오전에 알았어요"
“그란 일이 있으면 내한테 말을 해야 할 거 아이가?”
“회의 준비 하느라 시간이 없었어요"
“니는 메일 돌릴 시간은 있고, 내한테 공유할 시간은 없는 거가?”
“......”
“에휴, 팀장님. 그러니까 제가 팀원들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지선임 저거 봐요 선배들한테 박박 기어오르는게 아주 지 세상이라니까요? 아까도 보셨죠, 소장님한테도 디지털 전환을 해야 한다고! 뭐 개나 소나 다 디지털이야? 손으로 적어야 하는 영역도 있는 거야, 이 새끼야"
백훈은 출근 직후 보았던 배합 보관함을 떠올렸다.
누군가 일부러 흔적을 지운 듯 깨끗한 도어락.
이른 아침에 출근한 이는 변진희 주임과 주치호 선임, 단 둘.
주치호 선임의 손에는 카페인, 니코틴, 타르, 각종 용제의 흔적이 묻어 있다.
만약 그가 도어락을 열었다면 이런 물질들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는 건...
“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얼른 가서 실험이나 시작 할랍니다. 시간이 없으니까요”
주치호 선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훈도 그를 따라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 작가의말
옥텟 규칙(Octet’s rule)은 원자의 전자 배치와 결합을 설명하는 규칙이다. 옥텟 규칙에 따르면, 많은 원자는 외전자 궤도에 최대 8개의 전자를 가질 수 있으며, 이를 채우기 위해 다른 원자와 전자를 공유하거나 양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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