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기름이 섞이기 위해서는 유화제가 필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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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김한성 어디갔어! 이거 점도가 왜이래?”
백훈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첫 출근 날, 백훈은 박인호 주임의 안내로 수용성 수지 연구팀의 실험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건너편 실험 후드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깡- 깡-!
3L의 유리 플라스크 안에는 한 눈에 봐도 맛이 간 것 같은 붉은 물질이 떡이 되어 돌고 있었다. 생긴 모습은 꼭 누런 반죽을 빚어 놓은 것 같았다. 그 덕에 반응기 안에 꽂혀 있던 교반용 블레이드와 온도계가 부딪쳐 깡, 깡- 소리를 냈다.
블레이드가 빠른 속도로 돌고 있었다. 아마 저대로 그냥 놔뒀다간 저 둘은 곧 맞물려 반응기를 아작 내고 말 것이다.
“아니 얘는 온도 보고 있어야 할 애가 대체 어딜 간거야! 염병!”
씩씩 거리며 화를 내고 있던 남자는 급하게 교반기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후드 안에 걸려 있던 유리 반응기를 서둘러 제거 했다.
그가 반죽 속에 꽂혀 있는 블레이드를 들어 올리자 끈끈한 반죽이 블레이드를 따라 쭉 늘어났다. 그는 독한 냄새에 괴로운 듯 코를 움켜 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저 분은 안기동 선임. 저 분 부사수가 김한성 주임인데 어... 어디갔지... 또 혼나게 생겼네.”
박인호 주임이 백훈에게 조용히 화를 내고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렸다. 박인호 주임은 김한성 주임을 찾아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렸다. 하지만 찾지 못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저게 그... 폴리 우레탄을 만드는 과정에서 프리 폴리머를 수분산 하는 건데 프리 폴리머 점도가 높아서 분산이 제대로 안되면 저렇게 지랄 맞은게 만들어져요. 그래서 잘 봐야 하는데... 어딜 간거야, 또 혼나려고...”
박인호 주임은 김한성 주임의 흔적을 찾아 미어캣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백훈은 그런 박인호 주임을 뒤로하고 안기동 선임 쪽으로 걸어 갔다.
안기동 선임은 실험 테이블 위에 놓인 코르크 재질의 받침대 위에 플라스크를 올려 놓고 있었다. 그가 플라스크를 올려 놓자 강한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플라스크 속에 들어 있는 물질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백훈을 보았다. 안기동 선임은 백훈을 쓱 쳐다 보았다. 안기동 선임의 얼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거긴 뭐지?”
“...... 어? 차백훈씨!”
백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인호 주임이 당황하며 다가왔다. 박인호 주임은 백훈을 대신해 안기동 선임에게 대답했다.
“아, 여긴 차백훈씨라고 저희 팀 신입이예요. 백훈씨, 인사드려요. 아까 말씀 드린 안기동 선임님"
“안녕하십니까, 차백훈이라고 합니다.”
“그래, 도대체 이 새끼는 뭐 하는 새끼길래 이따위 쓰레기를 만들었나, 하고 보고 있던 거겠지?”
“아유, 아니에요 주임님. 백훈씨랑 저는 지나가던 길에 그냥..."
백훈은 박인호 주임의 말을 끊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말을 읊었다.
“폴리에틸렌 옥사이드 프리 폴리머랑 물이랑 아예 섞이지를 못했네요. 프리 폴리머의 움직임이 꽤 활발한 걸로 보아 온도가 높은 상태에서 유지되었던 것 같은데, 그 덕분에 친수성이 증가해서 유화 능력이 떨어졌나 보네요.”
백훈은 자신도 모르게 분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쏟아 냈다.
박인호 주임과 안기동 선임 모두 벙찐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백훈은 그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이러지 않기로 했었는데, 실수했다.
“아... 그게... 학부 때 배운게 갑자기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죄송합니다.”
“화학과?”
“네, 화학과랑 화학공학과 복수 전공 했습니다.”
“그럼 이 망한 수분산 공정 다음 공정은 뭐지?”
안기동 선임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백훈에게 물었다.
“사슬 연장제를 첨가해야 합니다.”
“사슬 연장제는 어떤 걸 사용하면 되지?”
“에틸렌 디아민이나 부타디올, 헥산디올, 에틸렌글리콜, 디에틸렌 글리콜, 하이드라진 또는 피페라진이 있습니다. 여기서 단독으로 사용 해도 되지만 2가지 이상을 병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안기동 선임의 갑작스러운 테스트에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그들의 대화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매일이 같은 날인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오늘이 첫 부임 날인 신입과 선임의 대화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사용 용량은?”
“음... 사용량이 0.05 몰 미만일 경우, 사슬연장 효과가 미비해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0.3 몰을 초과할 경우, 저장 안정성이 저하될 우려가 있어서 그 사이에서 적절히 실험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백훈의 대답에 안기동 선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이름이 뭐라고 했지?”
“차백훈입니다.”
“차백훈... 인호 선임, 이 친구 어느 파트 배정 받았어?”
안기동 선임이 박인호 주임을 향해 물었다.
“어... 팀장님이 지선임 파트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던데...”
“그래? 팀장님이랑 얘기좀 해봐야겠네. 간만에 부탁좀 드려야겠고만.”
안기동 선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을 지나 실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박인호 주임은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는 듯 숨을 휴- 내쉬었다.
“하... 백훈씨. 갑자기 그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백훈씨 이제 큰일 났어요.”
“...... 왜요?”
“왜긴 왜예요. 백훈씨가 안선임님 눈에 들었으니까 그렇죠!”
“그게 큰일날 일인가요?”
“네, 엄청 큰 일. 대박. 백훈씨 이제 살았네요.”
“살았다뇨?”
“안선임님 파트로 넘어갈 거 같아요, 백훈씨. 우리끼리 얘기지만, 지선임님은...”
박인호 주임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성격이 지랄 맞거든요. 아, 물론 일할 때만요! 평소 성격은 안선임님이 더 지랄 맞아요.”
“어... 주임님 그런데 ‘지랄'이란 표현 회사에서 써도 괜찮은 건가요?”
“안돼죠. 하하하. 그렇지만 더 맞는 표현이 없네요."
박인호 주임은 마저 실험실 안내를 돕기 위해 더 안쪽 실험 후드로 이동했다.
“그런데, 김한성? 그 분은 왜 자리에 안계신 건가요? 저거 온도가 중요한 공정인데.”
“아, 한성이요? 걔는... 일 잘 안해요.”
“일을 안한다면...?”
“개는 항상 어딘가에 짱박혀 있다 와요. 이것도 온도 계속 봐야 하는데, 미친놈이 일 참 안해요. 어? 저기 오네요.”
그들 가까이로 놀란 눈의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실험 테이블 위에 놓인 정체 불명의 떡을 보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로 저 떡이 자신이 오전부터 공들여 합성하고 있던 수지라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하... 씨... 안선임님은?”
“잠깐 팀장님이랑 대화하러. 야, 김한성. 너 또 어디 갔다 왔냐?”
“팀장님? 팀장님은 왜? 또 괜히 갔다가 일 잔뜩 짊어지고 오는건 아니겠지? 하, 우리 선임님 진짜 일 쳐내는 거 못하는데. 생긴건 성깔 더럽게 생겨가지고 마음은 또 더럽게 약해.”
“아닌데, 아마 백훈씨 지선임님한테 보내지 말고 너네쪽으로 보내달라고 하는 걸껄?”
“백훈씨? 아, 이 분이 백훈씨야?”
김한성은 박인호 주임 옆에 서 있는 백훈을 보며 말했다.
“아, 인사해라. 여기는 오늘 새로 온 차백훈씨. 백훈씨, 여기는 김한성 주임.”
“안녕하십니까, 차백훈입니다.”
“아아, 백훈씨! 이 분이었구나, 발령 공지 뜬건 봤는데 오늘 오는건지는 몰랐네.”
김한성은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암모니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오줌통에 손을 담그고 오기라도 한 듯 손 끝, 마디 할 것 없이 말이다. 차백훈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응? 뭐지 이 반응은?”
김한성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백훈을 바라 보았다.
“아... 그게...”
백훈은 새 삶을 살기로 마음 먹었었다. 지금 이곳은 벼랑 끝에 서있던 그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또 다시 예전처럼 망쳐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의 눈 밖에 나는 행동으로 미움을 사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머리도 자르고 수염도 밀고 보통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 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저 더러운 암모니아를 내 손에 옮기기는 죽어도 싫은데...
그는 잠시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김한성의 손을 살짝 잡은 뒤 빠르게 흔들었다.
“바, 반갑습니다!”
“어어, 우리 신입이 패기가 넘치네.”
백훈의 행동에 김한성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역시 신입은 패기가 넘쳐야지.
“이야, 우리 쪽으로 올 수도 있다 이거지? 잘됐다. 우리 일 개 많아서 똥 쌀 시간도 없었는데.”
“똥 쌀 시간? 야, 너 똥 싸러 가는 척 하면서 짱박혀 있다 오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동기들 중에서 일 제일 안하는 애가 무슨. 너 아마 팔려갈 지도 모른다.”
“와 씨, 이거 한 번 망쳤다고 지선임한테 나를 팔아버린다고?”
“이정돈데 안파는게 더 이상하겠다.”
“하 씨...”
“또 어디 짱박혀 있다가 온거냐?”
“짱박히긴 뭐 내가 맨날 짱박히냐. 배가 졸라 아파갖고 죽는줄 알았구만. 으윽...”
김한성 주임은 아직도 배가 아픈 듯, 아니면 아픈 흉내를 내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야, 근데 너 이거 어떡하냐 또 언제 치우냐?”
“하... 용제 갖다 부어야지 뭐 그냥. 그리고서 한 시간 정도 놔두면 좀 떨어지더라고.”
“몇 번 째냐. 우리팀 용제는 네가 다 쓰냐? 떨어지면 네가 구해와라. 나 가기 개 귀찮거든?”
“야, 신입도 왔으니까 네가 모범을 보여야지, 어? 용제 떠 오는 것도 좀 보여주고 해야지, 이 기회에”
“꺼져라. 그럼 너도 끌고 간다.”
박인호는 김한성과 대화를 마치고 다시 백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 끝나지 않는 실험실 탐방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그를 다른 실험 후드로 안내했다.
그곳에서는 심각하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는 여자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백훈은 뒷모습만으로도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남들과는 달리 그 어떤 화학 구조도 보이지 않는 여자. 아, 물론 눈에 띄는 금발 머리인 탓도 있긴 했지만 아무튼.
그 날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얼마만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걸까. 그는 덕분에 새 인생을 살아 보고 있다고, 고맙다고 꼭 전하고 싶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 지금도 사람이 두렵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운 그였다. 그래도, 꼭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 날, 그는 죽고 싶었지만 죽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그 여자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죽지 말고 한 번 더 살아 보라는 그녀의 말은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사실 그는 누군가 그를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있던 거였던 지도 모르겠다.
난생 처음, 가족도 아닌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에게 마지막 기회를 줘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녀를 봤던 날로부터 인적성, 면접, 연수 과정 다 합치면 아마 5개월은 걸린 것 같다. 그 사이 계절은 바뀌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었다.
박인호 주임과 백훈은 지아름과 낯선 남자 뒷편에 놓인 약장 옆에 서있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고 서서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지아름과 낯선 남자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지선임 니 함 본나, 우리도 일부러 그라는기 아이다. 테스트 하다가 다 써뿌랐는데 우야노? 민용이 그기 올해 진급 연차라 성과 낼라꼬 그라는기 아이가. 니가 좀 봐주면 안되겠나? 우리도 테스트 마이 하모 서로 윈윈 아이가.”
“아니 책임님, 이게 벌써 몇 번째예요? 지난번에 만들었던게 자그마치 300L였어요. 그걸 또 하라구요? 그 정도 양이면 파일럿을 돌려야 돼요. 여기서 20L 짜리 반응기 여러 번 돌려서 커버할 수 있는 양이 아니잖아요!”
“내도 안다. 아는데, 우리도 물성 맞춰 볼라꼬 이래 야근을 해 가면서 하는기 아이겠나.”
“야근이요? 누가 야근 하면서까지 물성 맞추래요? 그건 제 알 바가 아니구요. 저는 못할 것 같네요. 매번 수지 만들어 놓으면 물 처럼 써대시는 통에 원료마저 아까워요.”
“야, 지아름! 니 와이리 고집 불통이고? 쫌 해달라꼬! 막 안쓴다꼬! 그라모 딴 사람한테 만들어 달라 카나, 담당자도 아닌 사람한테!”
남자는 허리춤에 손을 올려 놓으며 지아름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아름도 지지 않고 받아 쳤다.
- 작가의말
유화제는 물과 기름이 섞이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유화제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친수성기와 소수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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