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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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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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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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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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DUMMY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26 개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고 있는 사이, 방 한가운데의 탁자에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연안 바다 같은 초록색 눈과 햇빛처럼 빛나는 금발을 지닌 남자가 여유롭게 웃는 반면, 건너편의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펜을 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왕 태사님, 눈물을 그치지시요. 서류가 더럽혀집니다.”


“썩을 놈······”


태사라 불린 노인의 검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눈가에 맺힌 방울이 이를 부각시켜 주었다. 하지만 파이 왕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끝이었다. 그의 나라, 친나즈는 이데아와 더이상 싸울 수 없다. 하지만 수십 년간 전장에 선 노장의 자존심으로 억지로 버틸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치욕적인 교섭안에 서명해야 한다. 이를 알고 있기에 눈앞의 남자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결국 노인은 서명을 마치고, 그 옆에다 옥새를 찍었다. 동방의 최강국 친나즈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려 주는 순간이었다. 선조들이 일군 오백여 년의 역사를 망쳤다는 좌절감에 파이는 고개를 숙였다. 교섭안을 뺏다시피 손에 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데아의 참사관, 콘트라 도크트리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 드리겠습니다. 아국의 군대는 친나즈의 내전이 끝날 때까지 국경을 넘지 않을 겁니다.”


“이 치욕은 절대 잊지 않겠네, 도크트리나.”


“부디 그래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전에 민권당의 손에 죽지 않길 기도하겠습니다.”


노인의 절규와 같은 고성을 뒤로한 채 콘트라는 방을 나섰다. 외교관 임명장을 받은 날부터 그렇게 꿈꿨던 순간이다. 조국 이데아의 승리를 자신의 손으로 확정 지은 쾌감에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미소를 멈추지 못하는 콘트라에게 정장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도크트리나 참사관님.”


“감사드립니다, 아디우토르 보좌관님. 이 영광을 이데아의 깃발에 바치겠습니다.”


“참사관님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십니다.”


“그나저나 바쁘실 텐데 어쩐 일로 친나즈의 황궁까지 오셨습니까?”


콘트라의 물음에 아디우토르는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는 수상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수상 각하의 친서라니··· 필시 중요한 일이겠군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바로 읽어 보시죠.”


고개를 끄덕인 콘트라는 건네받은 편지에 묶인 리본을 풀었다. 그러자 정교하고 깔끔한 서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내용을 읽어 가던 콘트라의 눈이 촉촉해졌다.


“저 따위가 감히 각하의 관저에 발을 들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이건 수상 각하의 명령입니다.”


“알겠습니다, 보좌관님. 반드시 수상 각하와의 만찬에 참석하겠습니다.”




조국 이데아의 수도 라티나로 돌아온 콘트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장을 뒤적였다. 그런 남편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아마레 도크트리나였다.


“그렇게 신나요?”


“물론이지, 내 사랑. 한평생 수상 각하를 독대할 순간이 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전 믿고 있었어요. 당신처럼 헌신적인 사람은 인정받아 마땅하죠.”


“그렇게 이야기해 주면 내가 자만할까 두려워.”


아내의 허리를 잡으며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콘트라였다. 아마레의 눈도 애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 사람의 입이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따따!”


“이런, 필리우스. 이 못난 아빠가 널 잊고 있었구나.”


늦둥이 아들을 품에 안은 콘트라는 춤을 추듯 둥실거렸다. 둘을 지켜보는 아마레는 기쁘면서도 아쉬웠다. 간만에 남편과의 뜨거운 시간을 방해한 귀여운 아들이 살짝 미웠다. 하지만 이제 시간은 많다. 조국에 유리한 종전 협상을 완수한 콘트라는 외교부의 요직을 맡을 게 분명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콘트라를 유혹할 방법을 찾으며 넥타이를 정리해 주는 아마레였다.


준비를 마친 콘트라는 집을 나섰다. 수상의 보좌실에서 나온 고급 리무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나즈의 황궁에서 만났던 수상 보좌관 아디우토르가 차문을 열어 주었다. 고개를 숙이며 뒷좌석에 앉은 콘트라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었다.


그만큼 콘트라는 수상을 존경했다. 이데아의 수상, 앙겔루스 디아볼리는 평범한 중소국에 불과했던 이데아를 열강의 반열에 올린 영웅이었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력을 키우고, 나아가 국토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은 이 나라에 없을 것이다. 콘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도 앙겔루스는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이데아의 수많은 아이들과 청년들이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앙겔루스가 처음 수상에 올랐을 때부터 그의 진가를 알아봤던 콘트라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청년이 외교관이 되고, 훌륭한 업적을 세웠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우상과 식사를 하러 가고 있다. 콘트라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 후, 수상 관저에 도착한 리무진의 바퀴가 멈췄다. 콘트라가 탄 뒷좌석의 문 앞에는 이데아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물든 고급 카펫이 깔려 있었다. 그 좌우에는 근위병들이 총을 들고 대기 중이었다. 근위대장이 문을 열어 주자 콘트라는 카펫에 올랐다. 그러자 가장 앞에 있던 사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데아의 영웅, 콘트라 도크트리나 참사관께 경례!”


촤라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오른손이 하늘로 향했다. 수상이나 국빈에게만 허용되는 최고의 예우였다. 감격의 눈물을 참으며 걸음을 옮기는 콘트라였다. 끝에 이르자 먼 거리에서 지켜봤던 수상이 밝은 미소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감히 가까이 가도 될지 고민하며 쭈뼛거리는 콘트라에게 앙겔루스가 먼저 다가왔다.


“초대에 응해 주어서 정말 고맙소, 도크트리나 참사관.”


“아닙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주신 각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더운데 이러고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아우디토르가 당긴 문을 넘어 관저로 들어서자 콘트라는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한 친나즈의 황궁보다 몇 배는 화려했다. 정교하고 섬세한 솜씨로 역대 수상들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하늘하늘한 커튼은 친나즈의 궁녀보다 우아하고 매혹적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콘트라의 모습이 재밌어서 앙겔루스는 껄껄 웃었다.


“나 같은 자가 살기에는 너무나 좋은 곳이지 않소?”


“아, 아닙니다. 각하께 합당하고 어울리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둘은 연회실에 들어섰다. 의자를 빼 주는 접대원에게 고맙다고 말한 콘트라는 주변을 살피며 의자에 앉았다. 외교관으로서 절대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 발언 하나하나가 조국의 품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콘트라지만 관저는 너무나 매혹적인 장소였다.


넋을 놓고 구경하는데 주방장이 나와 음식이 든 그릇에 그의 앞에 놓았다. 딱 좋은 정도로 익은 스테이크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시각적으로 완벽히 조화를 이룬 가니쉬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허기질 텐데 식사부터 합시다.”


앙겔루스는 인자하게 말하며 수저를 들었다. 품격 있게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며 콘트라도 진미를 맛보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간단한 대화가 오갔다. 결혼은 했는지, 자녀는 있는지 등의 사소한 개인사부터 이번 종전 협상을 진행하면서 있었던 어려움과 같은 진중한 공무까지 폭넓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앙겔루스의 마지막 질문은 외교관이 된 이유였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데아는 세간의 집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수상에 오르시고 조국을 지금의 위치로 이끄시는 걸 보며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목표로 하던 사업을 포기하고 외교관 시험을 치뤘습니다.”


“빈말이라도 고맙소, 참사관.”


“정말입니다. 친나즈의 대관들이 압박을 해 올 때마다 각하의 연설을 떠올렸습니다. 어디보다 강인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우수한 국민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내가 처음 수상이 되었을 때 한 연설이구려. 이를 기억해 주다니 고맙소.”


“각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저 역시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콘트라의 마지막 말을 들은 앙겔루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볼에는 따뜻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내 수상의 눈은 날카롭게 변했다. 전쟁을 나선 군인들을 독려하던 모습처럼 카리스마가 넘쳤다. 콘트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수상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앙겔루스의 입이 열렸다.


“그대 같은 인재를 찾고 있었다오. 자네의 힘을 빌려주지 않겠소? 나의 직속 기관, 움브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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