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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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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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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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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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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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2: 010501 레냐의 고백

DUMMY

그렇게 보리스와 이별을 하고, 약간 침울한 상태로 낮에 등대 주변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오늘은 편지 돌릴 게 많은지 제미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요즘 모습이 뜸했던 알리치가 동네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저편에서 경찰봉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며 짜증을 내는 걸 보니, 순찰하는 것마저도 정말 귀찮은 것 같았다. 휴.. 과연 저 오빠, 경찰로서의 사명감같은 건 가지고 있는 걸까?


[N 오빠! 동네 순찰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인사를 하면 평소엔 웃는 낯으로 인사를 잘 해주던 알리치가, 오늘은 고개만 끄덕이며 투덜대며 걸어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이렇게 작은 도시에 무슨 큰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N 오빠, 오늘따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A 아.. 어떤 미치광이들이 며칠 전 블라도프 가의 마법보안이 걸린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바람에, 이미 퇴근했는데 밤중에 또 출근해야 했거든! 도대체 어떤 또라이 같은 새끼들이야? 누가 자물쇠까지 달아놓은 폐가에 들어간 거냐고?]


···우리들 때문이었구나. 나는 처음 듣는 듯한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이상하다.. 자물쇠는 에르제가 다시 잠구고 나왔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N 어? 그 집에 누가 들어갔다는 건 어떻게 하다 알게 된 거야? ]


[A 그 집 주변 농가에서 엄청 시끄러운 비명 소리를 몇몇이 들었대! 한 아저씨가 아침에 경찰서에 들르면서 그 말을 하고 가서 경감님이 혹시나 해서 알렙 경사님과 날 보냈거든? 근데.. 진짜 사람이 침입한 흔적이 있는 거야! 손잡이 부근에 먼지가 싹 사라져 있고, 창고에 발자국까지 말이야! 어떤 미친놈들이 거길 들어가려 한 거지? 도대체 의도가 뭘까? 그 새끼들 덕분에 일주일간 밤 12시까지 그 집에서 경계근무 서게 생겼어!]


아.. 우리들 때문에 경계근무를 서게 되서 표정이 저렇게 안 좋은 거구나.. 제미크만큼은 아니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저 오빠를 일주일간 여자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일하게 만든 게 못내 미안했다. 아.. 옆에 보리스가 비명만 안 질렀어도 나도 비명 지를 일 없고 아무일 없었을 텐데! 다 보리스 때문이야! 그렇지만.. 거기 들어가서 훔친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한번 들어가봤다고 저렇게 난리를 치는 걸까? 어차피 해결될 사건도 아닌데?


[N 훔쳐간 거라도 있어?]


[A 다행히 없더라구.. 그래서 그냥 누가 장난으로 들어와 본 게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지.. 또 와서 뭔 병신같은 짓을 할지.. 그래서 지금 달아놓은 그냥 자물쇠보다 더 강력한, 마법보안이 걸린 자물쇠를 모스토크 경찰청에 요청해 지금 도착했어. 전보를 보낸 후 3일 후인 오늘 도착해서 달아놓을 거야. 그걸 달아놓으면 아무리 재주좋은 도둑놈이라도 들어가긴 어려워질 거다.]


강력한 마법보안 자물쇠? 그게 달리면 에르제도 열 수가 없는데.. 아마도 블라도프 가로 입장하기가 매우 어려워 지겠지? 아.. 제미크 말대로 이 오빠한테만 솔직히 말할까? 그래.. 말해야겠다.. 포탈은 농가 바깥 숲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간 알리치한테 들킬 수도 있으니까.. 미리 말해놓고 협조를 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또 마른세수를 연거푸 한 후, 사실을 말했다.. 아! 고향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알리치로 끝나기를! 제발 엘비라 선까진 가지 말기를!


[A 야, 너 왜 그렇게 마른세수를 해? 정작 마른세수를 해야 할 사람은 난데! 그 개같은 도둑놈들 때문에 일주일간 꼬박 경계근무 서게 생겼는데!]


[N 오빠.. 진짜 미안해. 어제 거기 들어간 사람.. 바로 나야.]


[A 뭐어?]


***


난 결국.. 에르제와 함께 실종된 사람들을 구해주고 있다는 정도의 말을 알리치에게 했다. 그래.. 알리치 오빠는 내 목숨을 한번 구해준 적이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니까.. 제미크보다 더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말해줘도 되겠지.


[A 너 정신나갔냐? 그 여자애 일을 니가 왜 도와주고 있어?]


오빠.. 정반대야. 나의 일을 그 여자애가 도와주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결국 대충 말할 수밖에 없었다.


[N 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나도 연초부터 내 인생이 이상하게 꼬인 것 같다니까?]


[A 젠장.. 3월달에 그 이상한 여자애가 온 이후로 뭔가 기분이 석연찮더라니! 아니, 그 여자애는 왜 굳이 너희들을 써먹고 있냐? 옆도시 모스토크에 실력좋은 마법사든 군인이든 차고 넘칠텐데?]


그러게.. 왜 이런 소도시의 여관 주인인 내가 선택된 건지 나도 너무 이상해! 하지만, 뭐.. 어쩌겠어.. 이미 일은 시작되어버렸고, 이젠 물릴 수도 없게 되버렸다. 두번이나 임무를 성공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으실 텐데 여기까지 와서 그만두면 디렐로스님이 엄청 실망하실거야.


[A 뭐.. 빅토르 정도면 충분히 얻을만하지만, 너는 일반인인데.. 빅토르만 얻고 모스토크에서 동료 구해라고 말해! 넌 여관 운영해야지!]


[N 아.. 아직 오빠한텐 말 안했구나? 오빠.. 나 아마 이주일 내로 에르제를 따라 고향을 떠나게 될 것 같애.]


[A 뭐어? 너 진짜 미쳤구나? 그 여자가 무슨 사기를 치고 있는 거야? 너 그 외국인의 무슨 말에 홀린 거냐? 나한테 말해봐, 나 나름 경찰이다? 사기치는 년놈들 판별은 기가 막히게 잘 해낼 수 있다고!]


[N 아.. 그런 거 아니야! 오빠! 내가 누구 사기치는 것에 당할 사람처럼 보여?]


[A 아니.. 절대 그럴 인간이 아니지. 아.. 그럼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왜 요즘들어 중학교때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던 그때의 너로 돌아간 거냐고! 고등학생 되고 나선 철들고 잠잠해진 것 같더니만!]


[N 오빠.. 나도 중학교때처럼 사고만 치고 다니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근데 세상이 날 사고를 치게 만드는 데,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나도 이렇게 살기 싫어.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살게 됐는지 신께 정말 물어보고 싶을 정도라구!]


[A 야, 그러게 그 이상한 마법사랑 친해지지 말랬잖아! 내가!]


[N 내가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졌냐구! 어휴..]


마지막은 진짜 멀리 있는 주변 사람들이 볼 정도로 비명을 질러서, 난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마른세수를 또 연거푸 한 다음 알리치에게 말했다.


[N ..오빠, 블라도프 가 세사람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구할 거거든? 그러니까 우리 셋이 가면 협조좀 부탁해?]


[A ..아, 진짜진짜진짜 짜증나! 너희들때문에 밤까지 경계근무 서고, 또 연관되기 싫은 괴상한 뭐? 사도? 이공간? 이런 데에까지 끼어들라고? 싫어, 난 절대 끼어들지 않을 거야! 난 절대 협조 안할 거야!]


[N 오빠, 억울하게 다른 공간에 갇힌 세 사람 구해내지 않고 싶다는 거야? 경찰이란 사람이,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이 그 세사람 구해주는 걸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오빠 진짜 너무 실망이다! 나 이제 오빠한테 점심 안줄거야!]


[A 유치하게 밥주는 걸로 협박이냐?.. 에이씨, 야! 그럼 나 이공간이란 데만 들어가지 않게 해줘. 그러면 바깥에서는 협조해줄게.]


[N 그래! 오빠! 내가 언제 그 이공간에 들어가달라고 했어? 오빠는 우리가 들어가면 모른척하고, 나올때까지 계속 뻔뻔하게 경계근무만 서주면 돼.]


[A 알겠어, 임마! 아.. 이 사고뭉치! 그래.. 사람 성격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예전의 그 나틸리 안보렌으로 돌아왔구만.. 젠장! 야, 나 아침 안먹었는데 너희 여관에서 간식 좀 먹고 간다?]


[N 맘대로 해.]


역시 제미크처럼 처음에만 질색을 하지 결국은 도와주게 된다니까? 저 둘끼리 먹은 공짜로 먹은 음식값이 얼만데! 빅토르와는 달리 술까지 먹은 걸 치면 빅토르와 비슷한 수준으로 공짜로 먹어서 나의 제안을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가 없었다.


***


그리고 오늘 밤.


우리 셋은 블라도프 가로 돌아왔다. 아침에 말했던 대로 역시나 알리치가 혼자서 외롭게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N 오빠, 나 왔어!]


[A 그래.. 왔냐? 아, 사건을 만들고 다니시는 그 마법사님까지 오셨구만? 반가워요?]


[E 네, 반가워요. 순경님]


[A 귀간지럽게 순경은 무슨.. 알리치 오빠.. 라고 불러봐요! 내가 마법사님보다 3살은 더 많으니까!]


[E 네, 알리치.. 오빠.]


[A 아.. 이쁜 미녀한테서 오빠 소릴 들으니 기분이 참 상큼한걸?

]

말투와 표정을 보니 진짜 기분이 좋은 게 아니라 미묘하게 비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상대해줄 필요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걸까? 어쩌면 그런지도 모른다.


[V 형, 근데 혼자서 경계근무 서요?]


[A 원래는 알렙 경사님이랑 같이 서야 되는데! 경사님이 여기 있으면 너희들이 임무를 할 수 없어서 오늘부터 내가 혼자 경계설 수 있다고 말하며 돌려보냈어! 너희들 덕분에 며칠간 혼자서 경계근무 서게 되서 참 외롭고 우울해서 좋다! 이 자식들아!]


[N 미안.. 오빠.. 근데, 아마 이 경계근무 내일이면 그만하게 될걸? 내일이면 아마 우리들이 세 사람 다 구해서 나올 거거든.]


[A 제발 그래줘. 혼자서 이 어두운, 유령 나올 것 같은 폐가에서 경계근무 서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며칠간 외로워 죽을 맛이었다고! 이녀석들아!]


[V 에이, 형! 우리들이 같이 있잖아.]


[A 너희들 이공간으로 곧바로 사라질 거잖아! 그럼 나올때까지 계속 혼자 맞잖아! 임마!]


[V 아.. 그렇구나! 아! 맞다! 형, 유령 나올 것 같은 곳이라고 했지? 여기, 진짜 유령이 나와!]


[A 이 새끼가 진짜! 안그래도 혼자 경계 근무 서서 ○같아 죽겠는데 그딴 개똥같은 농담이 나오냐?]


[V 아.. 진짜야, 형! 신께 맹세할 수 있어!]


[A 진짜는 무슨! 나 놀려먹으려고 거짓말치는 거 모를 줄 알아? 이 자식아? 며칠간 경계근무 섰을때 개미새끼 한마리 나타난 적 없었어! 이 자식아!]


알리치가 진짜 짜증이 났는지 빅토르의 뺨을 꼬집으며 말했다. 휴.. 알리치한테 굳이 유령 나온다는 말을 해서 겁을 먹게 만들고 싶니? 혼자서 경계근무 할 사람한테?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라 순수히 그냥 눈치가 없는 행동이라서 더더욱 한숨이 나왔다.


[N 그래, 오빠. 요즘 세상에 유령같은 게 있을리가 있어? 빅토르, 이 오빠 겁많은 거 알잖아. 괜히 이런 농담 해서 벌벌 떨게 만들지 마.]


[V 아니, 나틸리! 너도 봤.. 읍!읍! 에르제, 에르제까지 왜 그래요!]


[N 수고해, 오빠. 근데, 계속 밖에만 있을 거야?]


[A 아니. 새벽에 추워 죽으라고? 조금 있다 창고 뒤에 있는 부엌에서 장작떼면서 쉬어야지]


아, 맞다. 창고 뒤에 공부방도 공부방이지만 작은 부엌도 하나 딸려 있었지? 아.. 왜 하필이면 창고 뒤 부엌에서 쉬려는 거야? 하긴.. 양계장 안은 쉴 데가 없고, 창고와 집은 사건장소니 함부로 훼손하면 안될테니 거기밖에 쉴 데가 없겠지.. 그나저나, 어떻게 우리들은 한번만에 본 유령을, 이 오빠는 며칠동안 한번도 못볼 수가 있지?


일단은 포탈에 들어가기 전, 창고 안에 있는 막내딸, 레냐 블라도프를 만나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알리치가 유령이야기를 하자 질색을 하는 걸 보니 알리치는 레냐를 보지 않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입구에 남겨두고 우리들만 들어가 보기로 했다.


[N 오빠, 오빠가 좋아하는 고기 샌드위치 잔뜩 싸왔으니까, 밤중에 배고프면 먹어. 알았지?]


[A 야, 지금 먹을래. 부엌으로 가서 같이 먹자.]


[N 아니. 우리는 싸울 거라서 이미 든든하게 먹고 왔어. 오빠나 먹어.]


[A 그럼 같이 순찰하자. 혼자 있기 싫어.. 응? 이공간 뭐시기에 들어가기 전까진 같이 있자.]


[N 오빠, 어린애야? 경찰인 사람이 왜이렇게 겁이 많아? ]


[A 겁나는 게 아니라 외로워서 그래! 이 어둠속에 혼자 있는 거, 얼마나 불쾌한 기분인줄 알아?]


[N 싫어! 오빠, 내가 이유를 말할 순 없는데.. 지금은 안 들어오는 게 좋아! 그냥 밖에서 내가 싸온 샌드위치랑 주스 먹고 경계나 서고 있어.]


[A 도대체 왜 내가 들어가면 안되는데! 응? 이틀동안 안쪽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내가 들어가면 안된다는 거야?]


아.. 유령 보지 않게 해주려고 일부러 이러는 건데, 내 진심은 모르고! 참! 아무래도 팔찌의 영향때문에 우리들이 유령을 보는 것 같으니, 같이 가게 되면 분명히 저 오빠도 유령을 보게 될 텐데.. 어떡하지?


여튼, 알리치가 저렇게 왜 들어가면 안되냐고 고집을 피우길래, 난 그냥 포기하고 같이 들어가자고 말했다. 자기가 그렇게 유령을 보고 싶다는 데 뭐 어떡하겠어? 또, 유령이긴 하지만 레냐 블라도프는 되게 착한 유령일 것 같았다. 알리치가 처음엔 놀라 까무러치겠지만 적응되면 며칠간 경계근무 서면서 말동무 삼기에도 아주 적절할 것 같았다. 저 오빠, 이쁘고 젊은 여자애들을 아주아주 좋아하거든. 유령이라고 다를 게 있겠어?


[N 휴.. 알겠어, 같이 들어가보자. 후회해도 나한테 뭐라하기 없기다?]


[A 야, 안에 아무 것도 없어! 너나 걱정좀 그만하고 들어가. 이것들이 괜히 겁나서 괴상한 환상이라도 봤나보지?]


[V 형.. 진짜 우리랑 같이 들어가서 탓하기 없기야?]


[A 당연하지! 며칠동안 알렙 경사님과 함께 있는 동안 쥐새끼 한마리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너희들이 왔다고 뭐가 달라질··· 으악! 마이더리스시여! 저건 뭐야! 도대체!]


아무래도 팔찌가 유령을 보게 만드는 물건인게 확실한가보다. 며칠동안 이 빈집에서 생쥐 한마리도 보지 못한 알리치도 우리가 오자마자 뭘 보는 걸 보면 말이다. 창고에 가까이 가자마자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허여멀건 여자의 실루엣을 본 알리치는 기겁을 하며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A 유, 유, 유령이야? 으악! 제기랄! 너희들 때문이야! 너희들 때문에 참 재밌는 경험 한다! 이 거지같은 동생들아!]


[N ..오빠, 그러게 오지 말랬잖아. 그나마 다행인건, 젊고 이쁜 여자 유령이란 거야. 오빠, 이쁜 연하의 여자애 좋아하지?]


[A 아무리 이뻐도 유령은 싫어! 임마! 무슨 해코지를 할지 알수가 없잖아!]


[V 참.. 형, 경찰이 왜 그렇게 겁이 많아?]


[A 경찰은 현실적 존재를 제압하기 위한 능력만 가지고 있지, 저런 유령을 제압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구!]


[V 그럼 여기에 혼자 있을래?]


[A 혼자 있다가 저 유령이 나한테 뭔 짓을 할려고? 너희들이랑 같이 있으면 그래도 좀 낫겠지. 같이 들어가자.]


[N 오빠, 들어가서 또 유령 보고 비명 지르거나 하지 마? 그러다가 저 유령이 삐져서 사라지면 책임져?]


[A 알겠어, 인마! 쥐죽은 듯 가만히 있으면 될 거 아냐!]


저번에 보리스와 함께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두번째 경험이 되니 두려움은 마법처럼 사라져 있었다. 저번에도 옆에서 보리스가 비명만 지르지 않았으면 나도 깜짝 놀랐긴 했겠지만 도망은 치지 않았을텐데.. 뭐, 또 보리스 탓한다고 뭐라하신다면 나도 할말은 없다. 어쨌든, 오늘은 차분한 느낌으로 창고로 걸어갔다. 다들 차분한 가운데 오직 알리치만이 으으.. 라는 신음소리를 내며 맨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명색이 경찰이고 우리보다 6살이나 많은데 체면 좀 챙겨! 오빠!


창고 문을 조심스레 연 나는, 분명히 유령이 있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이 그저 깜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설마, 알리치의 반응때문에 삐진 걸까? 저번처럼? 잘 달래줘야겠다.


[N 레냐 양! 저희들, 레냐양을 돕기 위해 온 거니까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저번처럼 비명같은 거 지르지 않을게요.]


[R 누구세요?]


딱 한번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맑은 느낌의 미성년자의 목소리였다. 흠칫 놀라던 알리치도, 목소리부터 이쁘다는 걸 알게 되자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듯 표정이 풀렸다.


[A 뭐야? 괜히 겁냈잖아?]


[N 거봐, 오빠. 레냐 양, 우리들은 순전히 레냐양을 돕기 위해 왔어요. 그러니까 전혀 경계하지 않으셔도 되요.]


[R 어떻게 절 돕겠단 거죠?]


[E 간단히 핵심만 말할게요. 사라진 레냐양의 가족 세사람을 저희들의 힘으로 구해낼 거에요.]


그 말을 하자마자, 반대편 벽에서 레냐 양의 유령이 우리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신문에 실린 사진과 다른 게 전혀 없었다. 작지만 동그랗고 선한 눈빛.. 아, 도대체 이렇게 이쁘고 연약한 소녀에게 누가 그런 짓을..


[R 진짜에요? 정말.. 저의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요?]


[V 네! 음.. 아마 못해도 일주일 안으론 만날 수 있을 걸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만나게 해드릴게요.]


레냐 입장에서는 자기랑 나이차도 별로 안나는 젊은 언니, 오빠들이 갑자기 와서는 가족들을 구해낼 거라고 확신하듯이 말하는 게 황당하고 쉽게 믿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 근육질의 덩치로 싱글벙글 웃으며 확신하듯이 말하는 빅토르때문인지, 아니면 고급스러움을 풀풀 풍기는 이지적이고 키큰 에르제의 카리스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기꾼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말을 생각보다는 쉽게 믿어버렸다.


[R 정말요? 언니랑 부모님을 곧 만날 수 있다구요?]


[N 그럼요! 저희들은 빈말같은 거 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저희들 벌써 실종됐던 사람 두명이나 이미 구해냈거든요.]


[V 그래요, 레냐. 저희들을 믿고 기다려 주세요. 꼭 부모님과 언니를 다시 보게 해줄게요.]


[R 고마워요.. 그래주신다면 너무 고마워요.]


[E 블라도프 양, 그 비극이 있었던 일을 자신의 입으로 털어놓는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을 거란 건 잘 알아요.. 하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희들에게 그 사건의 내막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면 말해주실 수 있겠어요?]


참.. 돌려 말하는 것도 없이 곧바로 그런 말을 하다니! 자신이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한 그 마지막 날을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게 쉽겠어요? 에르제? 하지만.. 여기엔 우리뿐만 아니라 경찰인 알리치도 있었다. 레냐가 그날에 대해 말해주면, 가족들이 돌아온 후에 있을 사건의 재수사에 큰 도움이 되긴 할 것 같았다.


[N 레냐, 아직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어요. 가족들이 되돌아오면 다시 본격적으로 재수사가 진행되겠죠. 그 전에, 레냐 양이 그날에 대해 말을 해주면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여기에, 경찰도 있거든요. 이 모델같이 잘생긴 남자 보이죠?]


[R 네, 턱수염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경찰 아저씨.]


잘생겼다는 말에 분위기에 맞지 않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알리치는 급히 정신을 차리며 헛기침을 한 후 평소 모습에 걸맞지 않게 엄청 멋진 척을 했다. 어휴.. 평소에도 우리한테 이런 모습 좀 보여줘봐!


[A 크, 크흠! 레냐 블라도프 양, 전 바르크바 북부 파출소의 알리치 순경이라고 합니다. 아직 이 사건, 용의자도 잡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죄를 저지른 자를 모스토크의 법원에 세워 죄의 댓가를 받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를 저지른 자를 사법적 정의에 의해 심판하기 위해, 그날에 대해 회상하는 게 고통스럽더라도 가급적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희들에게 솔직히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V 오오.. 형, 말 멋지게 한다..]


[A 야, 경찰일 진지하게 할땐 이렇게 말하고 다녀! 나! 맨날 너희들이랑 말할때처럼 뺀질대며 다니는 줄 아냐?]


[N 미안해요, 레냐. 야! 너희들 태도 때문에 말 안해주겠다! 이럴 땐 좀 진지하게 있어봐! 철없는 녀석들아!]


[R 아니에요.. 여러분들 다 밝고 믿을만한 사람들인 걸, 그리고 맑고 선한 영혼을 가졌다는 게 제 눈에 보여요. 그날에 대해 회상하는 게 고통스럽긴 하지만.. 여러분들을 위해 말할 수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다 말해드릴게요.. 서서 듣기엔 긴 내용이 될 테니 앉아서 들으셔도 되요.]


다행이야.. 계속 걸어와서 다리가 아팠는데 레냐가 앉아서 들으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예의상 계속 서서 들어야 했을 것이다. 레냐가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용 돗자리를 깔고 앉은 우리들은, 레냐를 바라보며 사건에 대한 내막들을 듣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장장 1시간 넘게 이어졌기 때문에 앉아서 들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적진 못할 것 같고, 어느정도 요약을 해서 적어야 할 것 같다.



***


[R 그날의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중학교시절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전 98년에 바르크바 중학교를 졸업했어요.]


[V 아.. 맞다! 그러고보니 우리랑 동갑이었지?]


[N 맞아, 그렇네? 외모가 너무 어리고 이뻐서 동생인 줄 착각했어. 레냐, 나랑 얘는 너랑 동갑이야. 그러니 말 편하게 해.]


[V 응, 친구처럼 대해줘.]


[R 저.. 정말요?]


[N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편하게 말해줘.]


[R 응, 고마워. 나틸리, 빅토르.]


[A 어이, 동생, 나한테도 편하게 말해. 내가 경찰인 데다가 키도 크고 미남이라 좀 어려워 보이겠지만, 난 그렇게 까다로운 남자가 아니야. 얼마나 편한 사람인데! 그렇지? 애들아?]


[N 그래, 저 오빠 겉모습과는 달리 완전 빈틈투성이니까 편하게 대해줘.]


[A 뭐? 빈틈? 이 자식이.. 경찰에다가 이렇게 미남이고 철두철미한 내가 어딜 봐서 빈틈이 있다는 거야?]


[R 하하하! 알겠어요.]


[E ..여러분들, 말을 조금 한다 싶으면 맥을 끊어버리고 있군요?]


[N 아, 미안해! 레냐, 계속 말해줘.]


[R 응.. 난 중학교때까지는 집과 가까운 바르크바 중학교를 졸업했어.. 근데 너희들은 어느 중학교에 있었어? 3년동안 지내면서 한번도 너희들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N 아.. 우리? 우리들은 블롬스크 중학교를 졸업했어.]


바르크바는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다보니, 고등학교든 중학교든 각자 3곳밖에 없었다. 그 중 우리들은 북쪽에 있는 블롬스크 중학교를 졸업했고, 레냐는 남쪽에 있는 바르크바 중학교를 졸업했다.


[A 언니는 원래부터 공부에 뜻이 없었고, 부모님 두분 역시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분이셔서 그런지.. 내가 조금 똑똑하다는 걸 아니까 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셨어. 어릴적 내 꿈은 피아체어 선생님이 되는 거였고, 부모님뿐만 아니라 언니까지 날 열심히 지원해주셨어. 가족들이 그렇게 날 사랑해주니까, 나도 그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 중학교 내내 많지는 않지만 좋은 친구들도 있었고, 모든 게 나쁘지 않았어.


그래서였나봐.. 중학교 2학년때, 우연히 같은 반이 된 그 친구가 따돌림 당하는 보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반에서 그 아이를 괴롭히는 애들은, 그 아이를 제외하면 누굴 괴롭히는 애들이 아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가 조금 더 부드럽고 상냥하게 친구들을 대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그 아이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렇게 괴롭히는 걸 보는 게 마음에 편하지가 않았어. 그래서 1년 내내 내가 친하게 말도 걸고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 같아..


내 도움이 통해서였을까. 그 아이가 갑자기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는 게 느껴졌고, 친구는 여전히 없었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게 보였어. 중학교 2학년 마지막 날, 난 모리슨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멋진 신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그리고, 다음 년도에 반이 갈라졌고, 그 이후론 모리슨을 별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1학기 중간쯤부터 그 아이가 갑자기 나한테 사랑 고백을 하는거야. 난 단 한번도 그 아이를 남자로 본 적이 없었어. 그저 반 친구로서 가벼운 연민과 동정심을 가졌던 것 뿐이었지.. 그래서 난 정중하게 거절했어. 난 최대한 좋은 말을 해주면 그 아이가 충분히 이해하고 물러설 줄 알았어.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구. 나에게 일주일마다 계속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점심때마다 내 반에 와서 나와 같이 밥을 먹으려고 하고, 방과후마다 같이 가려고 했어. 중3때도 여전히 그 아인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그 반뿐만 아니라 3학년 전체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아이였어. 그런 상황에서 그 아이가 계속 나한테 집착하고 다가서는 모습이.. 솔직히 말해서, 너무 수치스러웠어. 결국 참지 못하고, 2학기 초에 이젠 너가 너무 싫다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 제발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쳤어. 그리고.. 그날이 중학교에서 모리슨을 본 마지막 날이 되었어.


하지만.. 그 마지막 날, 늘 나를 보며 웃던 그 얼굴이 순식간에 증오로 물든 걸 보는 나는.. 그때부터 너무 안 좋은 예감을 느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아이와 같은 반이었고 그땐 모리슨과 같은 반이었던 2학년 남자 동창 친구가, 그 아이가 너와 같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하루종일 공부만 한다고 말했을 때, 숨이 턱 막히던 내 심정을.. 너희들은 모를 거야. 뭔가 집착의 형태가 무서운 형태를 띠고 있었어. 이 아이에게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래서, 결국 게닌고등학교를 갈 수밖에 없었어. 바르크바 고등학교로 가게 된다면, 분명히 그 아이의 얼굴을 또 보게 될 테니까.


너희들도 잘 알겠지만 게닌고등학교와 바르크바 고등학교는 거리가 꽤 되는 편이야. 그리고, 게닌 고등학교도 그렇게까지 나쁜 고등학교는 아니야. 아니, 바르크바 고등학교 대신 게닌 고등학교에 간 게 어쩌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너무 편하고 좋았어. 학교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라서 선생님들이 날 너무 아꼈고, 친구들도 공부를 그렇게 잘하진 못해도 다들 착하고 날 도와주는 친구 뿐이었거든. 그리고 한동안 모리슨도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난 모리슨이 날 완전히 잊고 열심히 공부해서 멋진 성인으로 성장하길 바랬어.


하지만.. 그때가 아마 지금쯤이었을 거야.. 5월 초였으니까.. 그 아이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어. 방과후에,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한테 다가오지만, 눈빛에 느껴지는 묘한 집착과 광기는 숨겨지지 않았어. 그저 친구로라도 같이 지내고 싶다고 말하길래, 몇번정도는 만나줬지만, 한달이 지나자 다시 날 좋아한다고 말하며 잘 해줄 테니 사귀자고 말했어. 난 다시 한번 거절했고, 지금 니가 나한테 하는 행동은 사랑으로 하는 게 아니라 집착과 욕망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말했어. 니가 진심으로 날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고통을 줄 수 없다고, 너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내내 고통받고, 고등학교도 다른 데로 가야 했는데, 도대체 날 언제까지 고통줄 거냐며 소리쳤어.. 그런데.. 그렇게 말할때 그 아이가 나한테 뭐라고 말했는 줄 아니? 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큼은 반드시 가질 거라고.. 니가 나한테는 이 세상의 전부니 널 가질 수 없다면 나와 함께 죽어버리겠다고 말했어. 그렇게 말하며 그앤 날.. 날.. 구석진 빈 집으로 끌고 가려고 했어.. 그리고..]


여기에서 레냐는 말을 멈추었다. 그 이후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맙소사.. 이런 천사같은 아이에게 어쩌다가 그런 미치광이가 붙어버린 거지?


[N 덮치려 했어. 난 곧바로 비명을 지르고 벗어나와야 했어.]


[A 아주 제대로 미친 놈이네! 그정도로 미친 놈이면 바로 경찰을 불렀어야지, 레냐.]


N 경찰을 부른다고 해도.. 경찰이 이 아이를 막아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경찰을 부르면 그 아이가 저에게 큰 분노를 가지고 나쁜 해를 끼칠까 겁이 나기도 했구요.


그 이후, 당분간 그 아이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대신 나의 집으로 두번정도 편지가 왔어. 그 편지의 내용은.. 자긴 절대 포기 안할 거라고..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언젠간 너도 죽고 나도 죽게 될 거라는 편지였어. 난 곧바로 찢어서 그걸 휴지통에 버렸고, 너무 무서워서 집에서 울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걸 언니가 보고 만 거야. 언니가 왜 우냐고 날 추궁했지만, 난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어.. 우리 언니의 성격은 우리 집안에서 가장 특이한 성격이라, 이 사실을 알면 언니가 무슨 행동을 할 지 알 수 없었거든.


그렇지만 결국 언니가 알게 되었어. 내가 찢어둔 편지를 불태워 버렸어야 했는데, 잊고 놔뒀다가 내가 학교에 있는 동안 언니가 내 방에 들어와 끼워맞춰서 보고 만 거야. 그리고 그 다음날, 모리슨이 누구냐며, 내가 죽여버릴테니 어디에 사는지 곧바로 말하라고 나에게 협박하듯이 말했어. 난 모리슨보다.. 언니가 너무 무서워서 차마 말할 수 없었어. 언니는 화가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복하는 성격이었거든.]


샤노브에 대해선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실이 없었지만, 교도소에서 6개월 살다 나왔을 정도로 성격이 유별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신문기사에선 공장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폭행사건이 있었고, 그 때문에 6개월을 살다 나왔다는 말 정도만 있어서 자세한 내막을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직장에서 누군가를 폭행할 정도로 성격이 유별난 데다가, 이번 사건의 상급사도인 샤노브가 만만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R 하지만.. 자기한테 말하지 않으면 당장 우리 부모님은 물론이고 모리슨의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한테 다 말한다길래,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어. 게다가 언니는 이미 지은 죄가 있고 집행유예기간이라 누구를 함부로 팰 수 없다며, 내가 잘 타이를려고 그러는 거니까 걱정말고 말해달라고 해서, 난 속을 수밖에 없었어. 결국 모리슨의 학교와 반번호를 언니에게 말해줬어. 게다가 그렇게 말한 후에 언니가 내일 같이 그 아이한테 가자고 말해서, 설마 내 앞에서 뭔가를 할 거라곤 전혀생각하지 못했어. 그렇게 다음날이 됐어. 활기차고 상냥한 모습으로 아주 이쁘게 차려입고 나온 언니는, 나와 함께 너희들의 모교로 갔어. 와.. 바르크바 고등학교, 진짜 이쁘더라? 정문 좌우로 나 있는 꽃이 핀 나무들이 너무 멋져 보였어.]


[V 응, 레냐. 우리 학교 진짜 괜찮은 학교야.. 너랑 같은 반으로 지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래서, 널 우리 고등학교로 가지 못하게 한 그 놈을 그날 만났어?]


[R 응, 만났어. 언니는 웃으며 그 아이에게 다가가, 할말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했어. 그날따라 언니가 정말 착하고 상냥해 보였어. 그래서 나도, 모리슨도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고 언니를 따라갔어. 그런데.. 언니는 공단쪽의 외진 공터로 데리고 갔어. 할 말이 있다고.. 모리슨이나 나나 아무 의심도 없이 언니를 따라갔지.. 그리고.. 공터로 가자마자 갑자기 사람이 바뀌더니 모리슨을 가차없이 패버리기 시작했어.]


와.. 상급 사도 아니랄까봐, 역시 비범하기 짝이 없었다. 착한 척을 해서 의심을 거두게 한 후 주변 사람이 없는 곳까지 유인해 실컷 패버리기 위해, 아침부터 그렇게 연기를 한 것이었다. 얼마나 팼는지는.. 뭐, 샤노브를 쓰러트린 후 기억을 읽으면 아주 잘 알게 되겠지만.. 음.. 벌써부터 기억을 보기 두려워지는걸?


[R 그런 다음 언니가, 다음에도 내 동생 괴롭히면 진짜 말의 의미 그대로, 죽여버릴 거라고 말했어. 언니는 이미 6개월 징역을 살다 나왔고, 이미 빨간 줄 한번 그여졌는데 동생을 위해 한번 더 그여도 상관없다며 무시무시한 어조로 모리슨을 협박했어. 내가 봐도 불쌍할 정도로 얻어맞은 모리슨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그 이후 거의 6개월간을 나타나지 않았어.


난 이제 완전히 그 아이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고, 편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2학기를 보냈어. 성적도 좋았고, 학교 친구들도 너무 좋아서, 계속 그렇게 3년동안 다닐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렇게 2학기가 끝나가던 날.. 그 사건이.. 벌어지고 만 거야.]


[N 레냐, 이후 일들은 말하기 힘들테니, 말하지 않아도 돼.]


[R 아니야.. 이미 너희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한 이야기니.. 끝까지 다 털어놓고 싶어.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보니 부모님과 언니는 결혼식 문제로 싸우고 있었고, 그래서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창고에 있는 공부방에 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남자애 둘과.. 모리슨.. 모리슨이.. 날..]


무너지는 눈빛과 떨리는 말투.. 더이상 레냐의 입으로 솔직하게 그날의 참극을 설명하게 하는 건 너무도 잔인한 행동 같았다. 이미 우리들도 다 짐작이지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굳이 더이상 고통을 줄 필요가 없었다. 에르제가 차분하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어투로 레냐에게 말했다.


[E 더이상 말하지 않아도 충분해요. 레냐, 정말 미안해요. 이런 기억들을 회상하게 해서.]


[R 고마워요.. 저.. 더이상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미치광이 남자애 하나 때문에 자기도 큰 치욕을 당한 후 죽고, 가족들 셋까지 실종이 되다니.. 그리고 레냐는 그런 치욕을 당하고 죽었는데도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가족들을 애타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이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모리슨은 버젓이 살아남아, 지금 모스토크의 단기대학에 다니고 있다니! 한 여자아이의 인생은 완전히 파괴당했는데, 가해자는 버젓이 살아남아 미래를 꿈꾸고 있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정말 이래선 안되는 일이었다.


[R 모리슨.. 그 아이와 두 남자아이는 어떻게 됐나요?]


[N 그 아이들은 그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 죽었어. 너희 언니에 의해.. 하지만.. 모리슨은..]


[A 아직 살아있어. 그것도 모스토크의 공업단기대학의 학생으로 지내고 있지.]


모리스가 멀쩡히 살아있단 말을 하기 조심스러웠는데, 알리치가 대신 그 말을 해주었다. 알리치의 어투엔 왠지 모를 단단한 결의감이 느껴졌다.


[R 그렇군요..]


[A 하지만, 장담컨대 한달 내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될 거야. 그리고 6개월 안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수 판결을 받게 되겠지.]


[R 그게.. 무슨 뜻이죠?]


[A 레냐, 정의를 수호하는 경찰로서 반드시 맹세할게. 3년전 사라진 너의 가족들을 반드시 구해낼 것이며, 또한 바르크바 경찰들이 다시 증거를 끌어모아 모리슨을 반드시 사형수 판결을 받게 할게. 이 미치광이 악마놈이, 자신의 광기와 성욕과 집착욕으로 단란한 한 가정을 파멸로 이끌었어! 경찰로서 난 절대 그 자식을 용서할 생각이 없고, 어떻게든 그 죄과에 걸맞는 처벌을 받게 만들거야! 레냐,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줘, 알겠지?]


와.. 이 오빠, 평소엔 순찰하는 것도 귀찮아서 대충 돌아서 몰랐는데, 기본적인 경찰로서의 사명감은 확실히 있구나! 난 이번에 알리치를 다시 봤다. 그래.. 경찰이 아니었을 때도, 나와 내 친구들이 힘든 일이 있을때마다 늘 앞장서서 도와주던 오빠였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이 오빠가 괜히 경찰이 된 게 아니었구나..


[R 한때는 그 아이를 증오하고 싫어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3년간의 세월동안, 이 집에서 외로이 있으면서 서서히 그 아이를 용서했어요. 아마 그 아이도.. 3년동안 계속 죄책감으로 고통받았을 거에요. 친구들 제가 원하는 건, 모리슨의 처벌이 아니에요.. 제 가족들이 무사히 돌아온 모습을 보고 떠나고 싶어요.. 여러분, 제발 우리 가족들을 살려주세요. 가족들의 얼굴만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편한 마음으로 마이더리스님의 법정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발요! 흐흐흑..]


[E 알겠어요.. 레냐.. 우리들을 믿고 기다려 주세요. 자, 여러분. 이제 싸우러 가보죠. 대화는 충분히 나눈 것 같으니까.]


유령이 눈물도 흘릴 수 있구나.. 어차피 환영이겠지만 우유빛 눈물이 똑똑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보는 우리들의 마음 역시 아리고 고통스럽고 먹먹해졌다.


더 이상 가만히 있다간 우리들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기에, 에르제가 저런 말을 하자마자 우리들은 곧바로 일어나 레냐에게 꼭 가족들과 같이 오겠다는 맹세를 한 후 집을 빠져나왔다. 레냐와 대화를 나눈 건 참 잘한 행동이었다. 그 덕분에.. 이 사도와의 전투가 얼마나 어렵건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결의가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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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1-087: 010525 경찰서 24.07.17 8 0 17쪽
87 1-086: 010525 입장 시도 24.07.17 6 0 18쪽
86 1-085: 010524 허락 24.07.13 9 0 25쪽
85 1-084: 010524 뜻밖의 손님 24.07.13 8 0 23쪽
84 1-083: 010524 체노라비 역사도서관 24.06.30 12 0 27쪽
83 1-082: 010522 사도와의 전투 24.06.30 12 0 30쪽
82 1-081: 010521 게드3중학교 24.06.30 8 0 20쪽
81 1-080: 010521 블레턴 블로슈크 교장선생님 24.06.30 8 0 15쪽
80 1-079: 010520 이곳에 있게 된 이유 24.06.29 5 0 24쪽
79 1-078: 010520 원치 않던 만남 24.06.29 9 0 15쪽
78 1-077: 010520 모스토크 24.06.29 7 0 21쪽
77 1-076: 010518 출발 24.06.29 9 0 17쪽
76 1-075: 010516 정의의 마음 24.06.20 6 0 26쪽
75 1-074: 010516 취조실 24.06.20 6 0 21쪽
74 1-073: 010516 자전거 선물 24.06.20 6 0 22쪽
73 1-072: 010514 사건 종결 24.06.13 6 0 20쪽
72 1-071: 010510 경찰서안의 대소동 24.06.13 8 0 20쪽
71 1-070: 010505 레냐의 마지막 인사 24.06.13 7 0 17쪽
70 1-069: 010505 샤노브의 기억 B 24.06.12 6 0 21쪽
69 1-068: 010505 샤노브의 기억 A 24.06.12 6 0 24쪽
68 1-067: 010505 빅토르 vs 샤노브 24.06.05 8 0 30쪽
67 1-066: 010505 말릭 vs 샤노브 24.06.05 6 0 19쪽
66 1-065: 010505 아버지와 함께 24.06.05 6 0 36쪽
65 1-064: 010502 패배감 24.06.05 7 0 28쪽
64 1-063: 010501 다리에서의 교전 24.06.05 6 0 28쪽
» 1-062: 010501 레냐의 고백 24.06.04 9 0 37쪽
62 1-061: 010501 부둣가에서 작별 인사 24.06.04 5 0 31쪽
61 1-060: 010429 이공간 방문 24.05.29 8 0 29쪽
60 1-059: 010428 제미크와 대화/작전 회의 24.05.29 9 0 35쪽
59 1-058: 010427 작별 통보 24.05.27 9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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