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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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연재수 :
1,744 회
조회수 :
1,194
추천수 :
9
글자수 :
512,582

작성
23.11.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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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쪽

세계는 욕망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세상은 잠들어 있는 듯이

어느새 그러나 깨어나 있었다.

잠든 아이의 요람에 아기를 깨우러 다가간 어머니가

요람 속의 아기를 들여다보았더니

두 눈을 뜨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위를 그저 아무 의미도 없이 올려다보던

그 아기의 천진하고 해맑은 두 눈망울에

자신의 어머니가 포착이 되어서 둘 다 신기해하며

그리고 함께 둘이서 동시에 부드러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놀라듯이

아침은 모르는 사이에 밝아왔고

비는 환하게 그쳤다.

가을이었지만 왠지 여름처럼 투명하고

기온도 아침부터 따스한 날이었다.

분명히 오늘은 쾌청한 어느 멋진 가을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의 짙어만 가는 가을빛을 따라서

세계는 완만하고 서정적인 진행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속도는 더해지지도 그렇다고 늦춰지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가을은 통과하는 것처럼

겨울로 들어갈 것이다.

가을 그 자신이 다가가고 마침내 다다를 예정이

언제나 그랬듯이 거기서 겨울이라는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겠지만.



한쪽눈이 애꾸눈인 남자는

침대에서 두 눈을 뜨고 방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밤에 창문을 열어놓았기에

빗소리 대신에 이제는 맑고 넘실거리는

차갑고 깨끗한 새벽 공기가

커튼을 크고 느리게 펄럭이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평상시 입는 흰 상의처럼

놀랍도록 새하얗고 반짝거리는 흰색의 길고 큰 커튼은

군대 막사의 깃발들처럼 순결한 휘황함이 은연중에 빛났다.

천천히 그리고 정해진 약속의 법칙도 없는 곡선들을

제각각 저마다 보여주는 몇 개의 아주 멋진 커튼들은

밤 사이 그친 비로 싸늘해진 바깥의 새로운 등장을

미리 보여주겠다는 인상처럼

생기가 넘치게 싱그러웠다.

창밖의 그친 비처럼 바깥의 공기 온도처럼 바깥의 풍경처럼.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냥 누운 그 동작 그대로 얇은 이불도 걷지도 않고

천장만 뚫어지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상반신은 아무런 옷도 입고 있지 않은 듯

희고 넓고 얇은 세련된 매끌매끌해보이는

새하얀 이불은 그의 맨몸을 덮고 있었다.

그가 드디어 일어났다.

그는 윗옷을 아무것이나 방에 있는 의자 위에 걸려있었던 걸 집어서

자기의 몸에 걸치면서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커튼처럼 희고 순수한 순백색의 상의(上衣)였다.




그는 옆방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다가

돌아서서 자신의 탁자로 걸어가서는

그 위에 놓은 물주전자 도자기를 들었다.

같은 일습으로 맞춘 것 같은

주전자와 비슷한 색깔과 비슷한 무늬의 푸른색 도자기 잔을 들어서

물을 한 잔 따르고

그는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그의 목울대가 천천히 솟아올랐다가

다시 조금씩 하강하고

그런 목의 움직임이 몇 번 더 반복되면서

그는 물을 다 마셨다.











피아노가 있는 방은 채광이 좋은지

이미 눈부시게 환한 빛들로 가득 차서

비밀의 화원처럼 아름답고 은은한 각종 섬광들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색채들로 화(化)하여서 방을 비추고 있었다.

특별히 취향을 따라서 선택한 듯한 여러 가지가

정교(精巧)하며 정치(精緻)하고 세밀하게 섬세한 극치를 이룬

그러나 그렇게 크지는 않은 실내 공간이었다.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세련되었다기보다는 적확(的確)한

그래서 장식성의 새로운 구도를 구가한

탁월한 미감(美感)이었다.



피아노 소리가 물방울들이 지붕에서 떨어지듯이

가볍고 고요하게 차츰 차츰 자꾸 연하게 또 약하게 번져나갔다.

그가 치고 있는 곡(曲)은

아침을 위한 조곡(組曲)처럼

조용하고 신선한 물위에서 투명한 같은 색의 흔적이 번져가듯이

경건하고 정적(靜的)인 신비한 음조로

가만히 그리고 고요한 집중으로

계시를 기다리고 있는

두 눈을 감은 침묵 속의 명상처럼

잔잔한 음향들이었다.



그때였다.

그가 피아노를 치다 말고,

앗, 하는 짧은 고함을 질렀다.

아프다기보다는 놀라서 나온 탄식에 가까운

가벼운 비명이었다.

그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서 피가 번져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는 우유처럼 진한 백색의 불투명한 혈액이었다.

그는 멍하니 한참을 그 피의 흔적인

핏방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손을 들어올리고는

피아노를 치던 자신의 모든 동작도

그대로 그렇게만 멈추고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자꾸만 흐르고 있었다.






선생님,


등 뒤에서 바람에 실려오는 차갑고 부드러운 공기의 촉각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서

남자는 돌아보았다.



백작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 도시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경이로운 미소년이었다.

백작에게는 아들과 딸

두 남매만이 자식이었다.

다른 자식들은 어려서 모두 다

일찍 어린아이들의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별로 나이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은

오빠와 여동생만이

백작이 자신의 저택에서 같이 살고 있는 사랑하는 자식들이었다.

백작은 크고 넓은 체구와 그런 멋진 사내다운 당당한 풍채였으나

자식들은 모두 아버지를 닮은 외모와 체격이 아니었다.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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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쓸데없는 욕망의 시체들 24.05.27 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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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검은 물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 24.05.13 7 0 6쪽
41 세상의 낯선 음악 24.05.12 2 0 15쪽
40 기억이 멈춘 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기다린다 24.05.11 4 0 11쪽
39 빛을 잃은 약속과 다가올 운명들 24.05.10 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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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세상엔 참된 계절도 없도다 23.12.05 4 0 5쪽
36 세상에 참된 평화 없도다 23.12.04 3 0 8쪽
35 내일은 비록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23.12.01 7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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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토록 간절한 슬픔의 가을 23.11.22 5 0 5쪽
28 9월의 이빨 23.11.21 10 0 5쪽
27 7월의 눈동자 23.11.20 6 0 6쪽
26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는 한계, 23.11.19 7 0 7쪽
» 세계는 욕망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23.11.18 7 0 5쪽
24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로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23.11.17 7 0 6쪽
23 보여질 수 있는 사랑은 말해질 수 없다 23.11.16 7 0 7쪽
22 언어는 사랑을 위장한다 23.11.15 7 0 5쪽
21 비와 당신의 묘지(붕괴와 시작의 서막) 23.11.14 3 0 7쪽
20 20회: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들 23.11.13 3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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