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을 베는 천재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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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비우스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11.13 17:13
최근연재일 :
2023.12.08 11:35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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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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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마법을 베는 검 (2)

DUMMY

렉스뮤를 따라 한참을 걷자, 주변을 둘러싼 공간의 형태가 서서히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껏 보아왔던 것보다 조금 더 깊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폐허.

돌로 된 바닥과 벽에서 깊고 은밀한 빛이 나고, 위엄과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어느 황량한 구조물.

렉스뮤는 이것이 검의 성소로 통하는 '문'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거쳐 온 것은 그저 관문이었을 뿐이다."


렉스뮤가 말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네게 새 힘을 불어넣을 오러웨폰의 선택을 받게 될 것이다. 마스터 쉬리더의 제자 앨런."


앨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기둥과 문틀만 남아, 잔해의 한 조각이라 여겨질 만큼 불완전한 구조물.

그럼에도 이제까지 겪어 온 신비들의 연장선 같이 느껴져, 묘한 경건함과 신성함이 느껴졌다.

소년은 그곳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러의 은총이 함께 하길."


들려오는 렉스뮤의 말을 뒤로 한 채, 앨런의 두 발이 문 앞에 닿았다.

마침내 경계를 넘어서자 강물처럼 문 위를 파르르- 울리는 투명한 파문과, 몸 안 가득 퍼져 오는 기이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공기의 질마저 달라짐을 느꼈을 때,

눈 앞의 전경이 뒤바뀐 것이 보였다.


...!



하늘에 불을 지핀 듯 작열하는 금빛 서광.

그 아래에, 수 없이 많은 병장기가 꽂혀 있는 철鐵의 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워.'


무기들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오러. 그것이 금빛 서광과 함께 뒤섞여 오렌지빛과 하늘빛 조명을 흩뿌렸다.

망아에 가까운 경탄. 앨런은 잠시 넋을 잃은 채 성소의 기운에 압도되었다.

성소의 입구에는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앨런은 그곳에 적힌 서두의 일부를 소리내어 읽었다.


"이 성소의 역사는 세계가 탄생한 태곳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둘러 싼 유서 깊은 고대 설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신께서, 사악한 대마법사와 그 무리에 신음하는 대륙의 평화를 위해 깊이 슬퍼하셨다.

그러한 신의 슬픔은 하늘과 대기를 가르는 천 개의 눈물이 되어,

멸악의 기운을 담은 신성한 무기로써 이 땅 위에 자리하게 되었다.

먼 훗날, 이곳은 그러한 전설에 부름받은 선택받은 인간들에 의해 '검의 성소'라 불리게 되었고, 우리 오러기사단의 상징이 되었다.


"신이 흘린.. 천 개의 눈물."


그 눈물은 거의 말라가고 있었다.

성소를 이루는 땅 곳곳에 눈에 띄는 검은 구멍.

그것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기사들의 손에 의해 무구가 뽑혀 나간 흔적이었다.


'남은 건 아마도... 백 개 정도일까?'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얼추 그 정도 되어보였다.

곳곳에서 황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오러웨폰, 그러나 역시 꽂혀 있는 것보다 뽑힌 자국들이 눈에 더 많이 띈다.

불현듯 앨런은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눈물이 모두 마르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아직도 이 땅 위에 도사리는 마법사 족속들이, 세계를 집어삼키게 될까?

앨런은 잠시 옆구리에 채워진 보얀의 검을 바라보았다.


"보얀의 검도..."


원래는 이곳의 어딘가에 칼날을 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너의 길이, 이젠 내 길이 되었구나.'


앨런은 검의 성소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검, 도, 창, 봉, 도끼. 무기의 종류가 다양했다. 허나 그것들 중 앨런의 운명에 와 닿는 것은 없었고, 자연히 내 것인 듯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한 '감'이었다. 어떤 논리적인 기준에 입각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감각이 저절로 생겨나 앨런을 이끄는 듯했다.


'아마도 이곳의 기운 때문인 것 같아.'


소년은 스스로의 운명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영혼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움직이니 차츰 가팔라지는 경사면을 밟게 되면서, 그 상태로 계속 쉬지 않고 올라가게 되었다.


"...아."


경사는 계속 높아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보니, 어느덧 원하던 곳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문득 이곳이 다름 아닌 성소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 한가운데라는 걸 자각했다.

이윽고 그 봉우리의 중앙에 꽂혀 있는 장검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휘오오오....!


거쳐 온 수많은 무기들 중, 그 어느것도 견줄 수 없을 만한 가장 상서롭고도 신비로운 서광에 휩싸인 검.

밀려 오는 흥분감과 함께 앨런은 검을 바라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백옥처럼 빛나는 크로스가드와, 물방울 모양으로 만곡하게 떨어지는 폼멜이었다.

그 아래로 적당한 폭을 가진 매끈한 검신이 흠집하나 없이 유려하게 흘러 내린다.


'베기에도, 찌르기에도 적당한 검.'


얼핏 보면 아름답기만 한 예식용 검 같았지만, 앨런은 그 검에 내재된 힘과 위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폴러라 불리우는, 검에 길게 파인 홈 한 가운데엔 어떤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대어나 상형문자에 가까워, 생전 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문자.

그럼에도 앨런은 이 문구에서, 어떤 벅차고도 숭고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후우..."


벅찬 들숨으로 몸을 가누며, 앨런은 검을 붙잡았다.

손바닥에 와 닿는 손잡이의 감촉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동시에 몸 속을 들어와 서서히 휘돌기 시작하는, 따스하고도 강렬한 기운.

소년은 천천히 땅에서 검을 뽑았다.

이윽고 형용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으로 퇴적 된 땅이 밀려나며, 눈부신 흰빛을 뿜어내는 검신을 세상의 품으로 내어주었다. 그렇게 고양감이 고조되는 순간, 갑자기 성소의 배경이 안개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며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렇게 육체적 정신적 방비를 갖추기도 전에, 어둠칙칙한 안개 사이로 흰 얼굴 하나가 불끈 솟아나왔다.


"내 이름을."


소름끼치도록 창백한 그 얼굴이, 벼락같은 고함을 터뜨렸다.


"내 이름과 힘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하느냐? 아이야?"


대마법사 누라기. 그가 앨런의 눈앞까지 불쑥 다가오면서, 고개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한 바퀴 '우드득' 돌아가는것이 보였다.


"그렇게 위대한 마법사의 자질을 갖고도, 이 나와 대적을 하겠단 말이로구나? 으응?"


그는 히죽이던 미소를 점점 키워갔다. 앨런은 점점 숨이 막히면서 온 몸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소리 없이 웃는 누라기의 입꼬리가 점점 길게 찢어졌다.


"아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겠다. 나는 널, '문장 하나만으로도 죽일 수 있다'고."


누라기가 말했다.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중성적인 음성은 앨런의 청각을 뚫고 정신까지 관통하는 듯했다.


"검의 길을 따르려는 아이야. 이 나는, 고작 발음 하나로 네 허락과 동의 없이 네 목숨을 앗아가버리면서, 그 미천한 몸뚱아리 속에 있는 심장마저 단숨에 뜯어다가 집어 삼켜버릴 수 있다."


누라기의 초록빛 동공 위로 눈동자가 바늘처럼 좁아지면서, 그 위로 서슬퍼런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눈빛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앨런은 혼절할 것 같았다.

태초의 뱀은 으스대지 않고 느긋하게, 먹잇감의 혼을 거두기 시작했다.


"자, 이렇게 당장에라도-"


그때, 뱀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뒤늦게 따라오는 '스걱'하는 검명과, 또 그보다 곱절은 더 빠른 듯한 빛의 궤적과 함께.


털푸덕!


웃는 표정 그대로 잘려 나간 누라기의 머리.

주인을 잃은 몸은 기우뚱거리며 힘을 잃고 쓰러졌다.


"...헉!"


탁한 신음성과 함께 굳어있던 앨런의 호흡과 맥박이 돌아왔다.

그렇게 눈을 들어 보니, 하늘에서 커다란 빛줄기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슈웅!


뱀의 목을 베어낸 빛.

그것이 파묻힌 안개 사이에 한줄기 섬광으로 내리꽂히고, 전신을 따스하게 감싸오면서. 마침내 오염된 성소를 정화시키는 황금빛 물결로 퍼져 나갔다.


- 이 검에 선택받은 자.


잠시지만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과 함께, 낯선 목소리 하나가 앨런에게 말했다.


- 마법을 베고 뱀을 물리치리라.


혼탁하게 끼어있던 안개가 훅 꺼지며 정신이 거울처럼 맑아졌다.

그 사이에서 앨런이 들고 있던 검, 정확히는 그것에 새겨진 문구가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목소리로 들려왔던 말들은 이내 한 문장이 되어 앨런의 정신에 울려 퍼졌다.


- 이 검에 선택받은 자, 마법을 베고 뱀을 물리치리라.



'이건..!'


소년의 눈 깊숙한 곳에서 기광이 일어났다.


'설마 이게, 검에 새겨졌던 문구의 뜻이었나?'


"하하하하!"


누라기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시종 부드러웠던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동시에 약간의 당혹감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래. 아이야. 그 검에서, 아마도 나보다 더 오래 되었을 세월의 흔적과 강력한 약속이 느껴지는 구나. 그래... 그 검.. 그 검이 결국 세상 밖으로 나온 거로군..."


바닥으로 나뒹굴던 누라기의 얼굴이 바람결의 모래처럼 천천히 흩어졌다.

태초의 뱀은 자신이 만든 환상 속 세계와 함께 차츰 자취를 감추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읊조렸다.


"신은 널 선택했지만, 곧 다가올 죽음 또한 널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마침내 흔적을 지운 누라기.

그렇게 검의 성소가 완연한 황금빛 색채를 되찾으며, 앨런의 세계 또한 다시 되돌아왔다.

소년은 그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찾아온 신비한 운명과 앞으로 다가올 필연들을 느꼈다.

앨런은 자신이 쥔 검 한 가운데에 적힌 문구를 바라보았다.


"마법을 베고..."


뱀을 물리치는 검.

이제 그 검은 소년의 품 안에서, 정순하게 유형화된 오러를 흩뿌리며 성소의 한 가운데 거대한 색채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




성소를 나오면서, 앨런은 그랜드 마스터의 눈빛이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렉스뮤는 앨런과,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 매어진 그의 새로운 오러웨폰을 번갈아 보았다.

그 상태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며 앨런에게 말했다.


"네가, 네가 정녕.. 이 검의 선택을 받은 것이더냐?"


앨런은 별다른 말 없이, 다만 고개를 깊게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 검을 무어라 부르는 지 아느냐?"


'첫번째 눈물!' 렉스뮤의 주름 진 얼굴 위로 격동이 일어났다.


"마도의 격멸로써 세상의 평화를 가져 올... 선택받은 자의 검이다."


그는 놀란 와중에도 불끈 주먹을 쥐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앨런의 앞으로 좀 더 천천히 다가왔다.

앨런은 자기보다 한참 밑에 있는 노인의 얼굴이 환희와, 동시에 공포감 같은 것으로 수십 번씩 바뀌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마음의 소요를 차츰 가라앉히며, 비교적 정돈된 혈색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누라기'. 이 이름을 기억하느냐?"

"..네."


앨런은 검의 성소에서 나타났던 누라기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고...!"


'역시 이 검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로구나.'


렉스뮤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깊게 감격했다.

이어서 렉스뮤는 설명했다. 누라기는, 현재 '대동면大冬眠'의 상태라고.


"놈은 제가 가진 힘의 대부분을 잃은 채, 오랜 시간 동안 회복 중이다."


더불어 그 세월이 무려 몇 백년을 넘어, 수 천년에 가까움을 강조했다. 앨런은 물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힘을 잃은 건가요?"

"우리 오러기사단의 위대한 대사조들."

"켄과... 척?"

"그래."


오러라는 위대한 힘에 최초로 형形을 불어 넣은, 오러기사의 긍지이자 정점이었던 두 사람.

그들의 합공으로 뱀은 쓰러졌다.


"두 기사의 생명마저 도외시한 절체절명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으로 켄 사조는 죽고, 척 사조는 두 다리를 잃었지."


그럼에도 뱀은 살아 남았다.

그렇게 이 대륙 어두운 곳 어딘가에서 또아리를 틀며, 세상에 풍운을 일으킬 다음 환란을 준비하고 있다.


"앨런."


렉스뮤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마. 나는 네가 이 검을 얻게 된 것이 두렵다."

"..."


앨런은 그러한 말이 기사단을 이끄는 최고수장의 입에서 나온 것에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렉스뮤의 표정은 그 어떤 때보다 진실되고 생생해보였다.


"'첫번째 눈물'. 그 검은 신께서 약속하신 예언의 검이다. 이 땅에 환란과 고통을 불러 온 뱀의 머리를 베어 낼 강력한 운명을 지닌 검이지. 그 말인 즉슨,"

"더 큰 싸움이 올 거라는 거로군요. 켄과 척 사조의 것만큼이나 더 대단하고 무서운."


렉스뮤는 참담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다."


렉스뮤는 손사래 한 번 치더니, 예의 그 위엄 있는 표정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느꼈던 두려움. 그것은 이 늙은 육신의 개인적인 안위 때문은 아니었다. 앞으로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걱정했기 때문이지. 허나 이런 우려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한다. 우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마법사들과, 또 어둠의 오러에 물든 다크 터너들의 음모에 맞서 싸웠지. 허나 힘겨룸과 맞대응의 연속이었을 뿐. 일망타진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놈들의 머릿수는 크게 줄어든 것 없이, 외려 대륙 곳곳에서 국지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풀을 베되 뿌리를 뽑지 않아 다시 무성하게 만드는 격이었지."


렉스뮤는 말했다. 대마법사 누라기에게,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최상위 등급의 마법사 집단, '12혼돈'이 있다고.


"열두 명의 최상위 마법사. 그들의 힘으로 누라기의 대동면은 철저히 비밀리에 보호받고 있다."


그들의 힘으로 모여진 마나가 누라기를 보호한다. 대륙 어디에서도 감지할 수 없는 은폐막이자, 따뜻한 양수를 뿜어내는 요람이 되어 뱀의 부활을 부추기고 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처결한 숫자는, 단지 그 끝줄에 위치한 여섯 뿐이다. 그들 사이의 서열 상으론 하위에 속하는."

"여섯이 더 남았군요. 나머지 여섯보다 더 강력한."


렉스뮤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들이 강해서도 있지만, 또 그에 못지 않게 신출귀몰하며 용의주도한 면이 있다. 기사단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음모와 계략을 꾸미더군. 고도로 발달 된 켄과 척의 묘리, 그리고 검의 신탁을 빌어도 조우하기 어려울 정도로 까다로운 녀석들이야. 하지만,"


'그 검이 있다면...'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계의 균형을 궁구해 온 연로한 기사의 입 위로 희망에 찬 미소가 그려졌다.


"이 싸움을, 반드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앨런."





*




노란 들판 위로 완만하게 솟아오른 작은 언덕.

그곳의 비탈에 자란 수양버들 아래, 무덤 하나가 있었다.

주인 없는 무덤.

무려 15년의 세월 동안 비어 있었지만 오늘로써 주인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무덤과 그 안에 담긴 넋은, 무덤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위령의 애도를 받고 있었다.

세워진 비석은 이러한 말을 담고 있었다.


- 템파 소로우혼. 여기, 자유를 찾아 떠난 과거의 기사가 잠들었다. 공화력 1534년 향년 34세. -


"편히 쉬어라, 템파."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곤, 고개를 숙여 눈 밑에 큰 그늘을 드리웠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가장 쉬운 선택은 그것을 증오하는 것이지. 하여.. 난 아무런 말없이 내 품을 떠난 너를 오랫동안 미워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이 들어, 이렇게 십 년을 넘게 빈 무덤만을 지키고 있었지."


남자는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마주친 두 손은 다부졌고, 굵게 불거난 핏줄이 팔뚝까지 성겨 있었다.


"허나 이제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애도한다. 꿈은 광증이며, 광증은 긴 꿈이라 하지. 이승에서 못 이룬 네 꿈, 연인의 애정과... 가정의 건사. 하늘에선 신께 인정받고 아름답게 꽃피우길 바라마."


마스터 퀸린. 남자는 템파의 스승이었던 자로, 이 대륙과 공화국에서 명성을 널리 알리는 오러기사였다.


"오러의 은총이 함께 하길."


퀸린의 추도사가 막을 지었다. 널따란 어깨에 시원하게 벗어진 민머리로 부각되는 그의 강인한 이목구비는 긴 세월의 침식 속에서도 무뎌지지 않은 고수의 풍모를 유지했다.


"오러의 은총이 함께 하길."


이어서 또 다른 한 남자도 추도했다. 마스터 쉬리더. 검의 신탁을 좇아 정의를 집행하였고, 제자에 이어 이제는 그 스승에게까지 척살의 령을 인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진 자였다.


"마스터 퀸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맞잡은 채 쉬리더가 말했다.

그는 문득 해가 저물어가, 이 들판과 무덤가를 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네."


퀸린은 슬픔을 갈무리한 채, 가급적 입매를 굳건하게 정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되었습니다. 그전에 마스터 쉬리더."

"말씀하세요."

"검을.. 마지막으로 검을, 겨뤄볼 수 있겠습니까?"


쉬리더의 눈이 놀라움으로 번뜩였다. 허나 그 소요는 곧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눈가를 주름지는 아련한 미소로 자리 잡았다.


"그래. 아마 50년 전이었을까... 그때 우리가 한 번 겨뤘더랬지."


쉬리더의 말에 퀸린이 헛 하고 웃었다. 그렇게 드러난 두 사람의 표정에선, 어쩐지 옛 추억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청운의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격식을 갖추었던 말투도 편하게 바뀌었다. 퀸린이 말했다.


"맞아. 우린 둘 다 젊었고 재능이 넘쳤으며, 혈기왕성했었지. 그래서인지 둘 다 도통 지려고 들지 않았어."

"지독했지. 내 생에 손에 꼽는 혈투였다랄까. 내 장담하건대, 우리 두 스승들께서 나서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둘 중 하나는 어디 하나 불구가 되거나 죽었을 거야."

"하하하."


먼 뒷산으로 해가 빨갛게 숨어 들면서, 두 사람의 밝은 얼굴도 환하게 빛났다.


"쳇, 이럴 때 술이나 한 잔 있으면 좋으련만."

"동감이야."


쉬리더는 생각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 사람과 술 한 잔도 기울이지 않은 채 정신없이 지나 온 이 삶이, 참 팍팍했다고.


"오늘, 그랜드 마스터께 전언을 받았네."


쉬리더가 말했다.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 내 제자 앨런. 그 아이가 '선택받은 자'라고."

"첫번째 눈물..."


퀸린의 목소리가 벅차오르는 듯 터져 나왔다.


"뱀의 머리를 베어 낼 그 전설의 검을, 아이가 얻게 되었단 말인가?"


하, 하하하하!


갑자기 퀸린은 하늘을 향해 크게 웃어젖혔다.


"기쁘군. 진심으로 기뻐! 자네의 제자가 정녕, 수 천년 동안 이어져 온 마도의 길을 끊게 될 예언의 종착자란 말인가!"


퀸린은 더욱 크게 웃으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외쳤다.


"제자여, 들었느냐? 이제 곧 이 세상이 균형으로 바로잡힐 것이다. 인간의 심장을 먹는 잔학무도한 마법사들이 없는 세상. 정의와 질서가 주축을 이루는 세계! 제자여, 기뻐라하!"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이 기쁨과, 아주 오랜만에 되찾은 고양감을 즐겼다.

어느새 뉘엿뉘엿 저물던 해는 죽어갔고, 대지 위에 어스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느물거리며 웃던 쉬리더의 표정이 점점 점잖으면서도, 조금은 음울한 것처럼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미하게 남아 있는 웃음으로, 쉬리더는 말했다.


"그래. 세상에 파장 없는 잔치는 없는 법이라지."


스르릉-


쉬리더의 검의 맑은 검명을 울리며 검집 밖을 벗어났다.


"이제 슬슬, 우리의 이야기도 마무리할 시간인 듯 하이."


툭툭 손을 털어 내는 퀸린. 그도 쉬리더와 함께 마주 웃었다.

그리곤 버들나무 한켠에 고이 뉘어져 있는, 거대한 언월도를 집어 들었다.


"좋아. 잘 부탁하네. 마스터 쉬리더."

"훗, 쉽지 않을 게야!"


어느새 쉬리더는 검을 허리춤으로 끌어당긴 채, 그 몸 스스로 신속의 형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다져 온 내력이 그의 몸 위로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자네가 가진 압도의 형, 그 극의를 한 번 보여주시게나."


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양손으로 꼬나 쥔 언월도를 허공 아래로 훙 갈라 보이며, 일체의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미소로 화답했다.


"가세."


들녘 한 가운데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늘 위로 점점 선명해지는 달빛과 함께, 두 사람의 칼이 흰빛을 그리며 춤을 춘다.

그 검엔 오래 전 잊고 있었던 청년들의 옛 향수이자, 현재의 삶에 종착점을 맺는 작별의 인사가 담겨 있었다.




*




엘쉬나는 울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로 열 네살의 나이였으며, 이제 막 생일을 맞이한 참이었다.

허나 그녀의 탄생을 반겨줄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졌다.


"아빠... 아빠..."


사냥을 나갔던 그녀의 아버지가, 얼마 전부터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움과 혼자 남겨진 슬픔이 사무쳐 그녀의 정신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며칠이 더 흐르면서, 그녀의 내면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 찾아라.


- 아버지와, 인간의 심장을.


이제 엘쉬나는 울지 않았다.

다만 그녀와 함께 있던 지팡이를 손에 그러쥔 채, 마법으로 만개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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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령관 에고시 (1) 23.12.06 155 5 11쪽
25 천재의 묘수 23.12.06 145 6 16쪽
24 그가 제일 잘 하는 것 23.12.05 211 8 13쪽
23 마법의 식물 23.12.04 247 10 10쪽
22 영주의 야망 +1 23.12.03 333 10 16쪽
21 새로운 동료 23.12.02 353 11 17쪽
20 쇠꽃의 비밀 +1 23.12.01 399 10 10쪽
19 첫 번째 임무 (2) 23.11.30 396 10 16쪽
18 첫 번째 임무(1) 23.11.29 430 13 15쪽
» 마법을 베는 검 (2) 23.11.27 521 15 21쪽
16 마법을 베는 검 (1) +1 23.11.26 498 12 14쪽
15 검의 성소 (5) 23.11.25 498 24 20쪽
14 검의 성소(4) +1 23.11.24 506 17 15쪽
13 검의 성소(3) 23.11.23 533 15 19쪽
12 검의 성소(2) 23.11.22 557 14 18쪽
11 검의 성소(1) 23.11.21 595 17 14쪽
10 의회 소집 +2 23.11.20 627 19 10쪽
9 검의 신탁(3) 23.11.19 647 21 20쪽
8 검의 신탁(2) 23.11.18 654 23 12쪽
7 검의 신탁(1) +2 23.11.17 721 27 14쪽
6 훈련 +1 23.11.16 823 29 17쪽
5 당기는 손, 밀어내는 발 +1 23.11.15 920 27 13쪽
4 네 능력이 참 유용하구나 +1 23.11.14 1,075 25 14쪽
3 심장을 먹는 마법사(2) +4 23.11.13 1,285 34 16쪽
2 심장을 먹는 마법사(1) +4 23.11.13 1,517 38 19쪽
1 모두에게 천재로 불리웠다. +3 23.11.13 2,344 5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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