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죽이기 (Kill the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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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CE
작품등록일 :
2024.01.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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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7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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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드래곤의 기억 (4)

DUMMY

-디스펠



당연하지만 처음에는 그 틈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작정 밀어 넣은 마나가 이미 완성된 마법 위에서 서서히 또 다른 마법으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모래성이 한 귀퉁이의 충격으로 손쉽게 무너지듯이, 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은 순식간에 전체를 무너뜨려 나갔다. 쳐져 있던 결계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나에게는 디스펠이니 뭐니, 이런 마법에 대한 지식은 없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벽에 대었던 손을 몇 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건 다른 누군가의 손이 아닌 분명한 내 손이어서 조금 안심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내가 의도한 마법이었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본능적인 무언가였다.



"...일단 감사 인사는 할게."



여전히 들을 사람 없는 중얼거림이었지만, 이 정도라면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여기에 같이 존재하는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내 고맙다는 말도 받아 주겠지.



신중한 마음으로 다시 여러 번 벽을 확인했지만 정말로 결계는 풀려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에서야 서둘러 높은 벽을 타고 올라서 넘어 들어갔다.



벽 안쪽은 바깥에서 봤던 것처럼 나무로 지은 가건물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드래곤을 왕성 안까지 들이는 것이 원래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는지, 또는 계획보다 더 일찍 들여오게 된 건지 확실히 임시로 급하게 지은 티가 났다.

가건물과 바깥 벽 사이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있었고, 둘러보니 드래곤 나이트의 건물과 연결되는 통로의 쪽문이 보였다. 다행히 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금장치도 틀림없이 통로 쪽에 있을 거다.

그리고, 쪽문 바로 앞에는 가건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끼익···



단순한 구조의 걸쇠를 올려 젖힌 후 여닫이 문을 천천히 밀었다. 그다지 정교하지 못한 나무 문의 경첩이 움직이며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건물 안은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열린 문으로 달빛이 조금이나마 들어왔다. 눈을 끔뻑거리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미약한 빛에 적응시키고 나니, 간신히 건물 안을 조금씩 볼 수 있었다.

두 마리의 드래곤. 그곳에는 취임식 때 봤던 그 드래곤들이 수레에 실린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안녕, 루비. 건강해 보이네.



드래곤이 내게 건냈던 그 말. 그저 내가 정신을 잃으며 들은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목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가건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왼쪽에는 목이 없는 드래곤이 있었다. 목 뿐만이 아니라 몸 여기저기에 이미 말라붙은 핏자국이나 깊게 패인 칼자국, 단단해 보이는 비늘을 뚫고 피부가 뭉텅이로 파여 나간 흔적이 보였다.

오른쪽에는 한 다리가 잘린 드래곤이 있었다. 역시나 이 드래곤도 몸이 성치는 않았다.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드래곤 나이트와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옆으로 놓고 보니 오른쪽의 드래곤이 덩치가 더 작았다. 덩치가 작다고는 해도 상대적인 표현으로, 실려 있는 수레만 해도 집이라도 옮길 듯한 크기의 거대한 수레였지만.



"......"



환청이었든 아니든··· 나에게 말을 걸었던 그 드래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멜이 말했듯 정말로 이미 죽은 드래곤이었다. 갑자기 눈을 뜨거나 말을 걸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는, 그저 드래곤의 사체일 뿐이었다.

오멜의 신뢰를 깨면서까지 이곳에 오면서 나는 내심 한 번 더 나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랐나보다.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그리고 나에게 새겨진 나이트메어의 표식이라는 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힌트라도 주기를 내심 기대했나보다.

그러나 그런 소설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드래곤은 살아나지 않는다. 오멜이 말한 대로였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나?'



무심결에 드래곤의 얼굴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마나의 기척이 강하게 느껴져서 손을 멈칫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들어올 때 바로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가만히 보니 가건물의 천장 네 귀퉁이에 돌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어두워서 바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미약한 빛을 내고 있는 거로 보아 마법석이었다.

전등으로 사용되는 종류의 마법석도 아니니 틀림없이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마법석일 거다. 바깥 벽의 결계는 이미 해제하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마나의 파동은 드래곤에게 직접 걸린 다른 마법이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보호 마법이겠지. 엄청나게 귀중한 샘플이니까 물리적인, 마법적인 보호와 더불어 사체가 부패하지 않게 할 필요도 있을 거다. 이런 마법이 있어서야 드래곤을 함부로 만질 수는 없다.



과거의 나를 믿고 다시금 손을 들고 마나를 정렬시켜서 드래곤의 사체 위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 전과는 조금 달랐다. 꽤 마나를 많이 흘렸다고 생각했지만 결계의 마나가 쉽사리 흐뜨러지지가 않는다.

마법석에 의지하는 결계이다 보니 마법석을 던져 깨부수면 쉽게 해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야 기껏 침입을 탐지하는 마법을 해제한 의미가 없어진다.

'나 여기 왔다 감' 이라고 낙서하는 꼬맹이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디스펠



'안 됐어. 이제는 내 마나도 아슬아슬한데···'



여전히 마법이 해제되지 않는다. 밑 빠진 독에 물이라도 붓는 것처럼 내 마나가 빨려 나갈 때마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할 수 있는 만큼은 시도해 봐야 한다. 이를 악물고 마나가 소진되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할 정도로 마나를 밀어 넣었다.



-디스펠



"...됐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마나를 쏟아붙고 난 후에야 간신히 마법을 해제할 수 있었다. 다시 돌려 놓아야 하니 마나의 느낌을 기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드래곤의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취임식에서 나와 마주쳤던 그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그 얼굴의 단단한 비늘에 내 손가락 끝이 닿는 그 순간이었다.



"이제 일어나거라."



등 뒤에서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건 심장만이 아니었다. 두 다리가 순식간에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놀라야 할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몸을 겨우 돌려 등 뒤를 바라보자, 거기에는 드래곤이 서있었다.

수레 위에 묶인 목이 없었던 드래곤- 아니, 멀쩡하게 목이 있는데다가 네 발로 일어서서 또렷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드래곤이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니. 오늘부터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알아요, 알아요. 내려갈 거예요···"



드래곤의 알 수 없는 말에 한 다리가 없는 드래곤이 대답했다.

그러나 몇 번을 눈을 비비고 봐도 잘려 나갔던 그 다리는 놀랍도록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마치 머리가 다시 생겨난 드래곤과 같이.



"올리비아는요?"

"벌써 내려갔단다."



작은 드래곤은 기지개를 펴듯 자리에서 일어나 날개와 긴 꼬리를 뒤로 힘껏 젖혔다.

마을로 내려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 대화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고 혼란스러웠다.



"거기, 물러서라!"

"저, 저요?"

"마법에 휩쓸린다! 당장 진영으로 복귀하도록 해!"



그러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웬 남성의 소리가 들려 무심결에 반응했다.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니 저 멀리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기사단장님? 오멜? 로웨나님?"



사울로 기사단장님과 로웨나 부단장, 그리고 오멜 외에도 여러 중무장한 기사들이 진형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주뼛거리며 오멜에게 다가갔다.



"오멜··· 미안, 나 여기에 오면 안 됐었는데···"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던 오멜이었지만 분명 이번에는 화를 낼 거다. 걸려 있는 결계까지 해제하며 드래곤 나이트가 관리하는 곳에 무단으로 침입한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오멜은 내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기에 손끝, 오멜은 떨고 있었다.



"...오멜?"



그 순간, 드래곤 나이트의 앞에 마법진이 새겨지며 순식간에 화염 소용돌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강력한 마나의 움직임이었다. 로웨나가 손을 뻗어 맞대응 하여 불길이 진영을 덮치지는 않았지만, 공간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정렬되는 마나의 흐름만으로도 몸이 얼어붙었다.



-크아아아!



드래곤이 포효했다. 공간이 폭발하며 기사단을 한 번 더 덮쳐왔다.

기사단장님은 마법을 계속해서 전개하는 로웨나를 돌아보았다.



"로웨나, 버틸 수 있나?"

"예, 뭐··· 아직은요. 겁먹은 멍청이가 도와준다면 좀 더 편할 것 같지만요."

"......"



로웨나의 노골적인 말에도 오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작전 중에 아군을 탓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아. 로웨나, 너는 이제 정비하거라. 네 마법이 이번 작전에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내가 이어받을 테니."

"고마워~ 역시 믿을 만한 건 바나밖에 없다니까."



바나라고 불린 키가 큰 중년의 여성이 로웨나의 옆으로 다가와 이어서 방어 마법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마법석 배치 부대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나?"

"이제 약속한 시간입니다만··· 곧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

"로웨나, 대기하도록."

"네에."



바나라는 마법사가 로웨나 대신 드래곤의 광역 마법에 대응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에 기사단장님 옆의 기사가 무언가를 들여다보다가 외쳤다.



"전 부대 준비 되었습니다!"

"로웨나! 시작해라!"



로웨나는 자신의 흘러내린 긴 금발을 한 번 손으로 쓸어 넘긴 후, 자신의 지팡이 끝을 멀찌감치 대치하고 있는 드래곤을 향해 조준하였다.



-오버플로우.



그 순간, 고막이 찌그러지는 것 같이 공간에 강한 압력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압력이 점점 강해져 버티기 힘들다 싶을 그 순간, 마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불쾌하다. 불쾌한 기분이 온몸을 휩쓸었다. 토할 것 같았다.



-크아아아악···



"드래곤이···"



그것은 비명 소리였다. 드래곤이 지르는 비명이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드래곤이 전개하는 마법은 즉시 멈추었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눈과 코에서 멀리서 보아도 보일 정도로 흥건하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돌격하라!"



기사단장님의 말에 기사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오멜···"



나는 다시 오멜을 돌아보았다. 오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은 줄곧 바닥이었다. 손의 떨림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내 뒤에 있는 작은 드래곤과 눈이 마주쳤다. 드래곤은 이전과는 다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는···



"......"



-끼익···



뒷걸음을 치다 가건물의 벽에 등이 부딪혔다. 그 충격으로 열고 들어온 문의 경첩이 삐걱거리며 스르륵 열렸다.

호흡이 가쁘다. 누군가 내 목을 조여 오는 것 같다. 아니, 이미 누군가 내 목을 쥐고 있었고 나는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뛴다. 심장이 뛰다가 뛰다가, 견디지 못해서 터질 것 같은 공포감이 나를 엄습했다.



"하, 하아··· 하앗···"



그렇게 한참 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채 벽에 몸을 기대고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심장은 터지지 않았고, 호흡도 천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된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니 이번에는 식은땀에 범벅이 되어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틀림없이 감기 걸리겠다.


바닥에 주저앉아 안개라도 낀 듯 멍한 정신으로 나는 바보같이 이런 사소한 것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작가의말

네 번째 타이틀의 끝입니다.

그야말로 이번 화는 타이틀 제목 그대로의 내용이었네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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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09. 흠이 없는 검정 (5) 24.06.03 9 0 12쪽
42 #09. 흠이 없는 검정 (4) 24.05.30 7 0 12쪽
41 #09. 흠이 없는 검정 (3) 24.05.27 8 0 12쪽
40 #09. 흠이 없는 검정 (2) 24.05.23 8 0 11쪽
39 #09. 흠이 없는 검정 (1) 24.05.20 7 0 11쪽
38 #08. 게일포트 (5) 24.05.16 8 0 13쪽
37 #08. 게일포트 (4) 24.05.13 7 0 11쪽
36 #08. 게일포트 (3) 24.05.09 8 0 11쪽
35 #08. 게일포트 (2) 24.05.06 5 0 12쪽
34 #08. 게일포트 (1) 24.05.02 7 0 11쪽
33 #07. 산맥의 오아시스 (5) 24.04.29 7 0 14쪽
32 #07. 산맥의 오아시스 (4) 24.04.25 7 0 11쪽
31 #07. 산맥의 오아시스 (3) 24.04.22 8 0 12쪽
30 #07. 산맥의 오아시스 (2) 24.04.18 5 0 14쪽
29 #07. 산맥의 오아시스 (1) 24.04.15 9 0 14쪽
28 #06. 죽음의 꼬리를 삼키다 (5) 24.04.11 8 0 13쪽
27 #06. 죽음의 꼬리를 삼키다 (4) 24.04.08 7 0 11쪽
26 #06. 죽음의 꼬리를 삼키다 (3) 24.04.04 6 0 13쪽
25 #06. 죽음의 꼬리를 삼키다 (2) 24.04.01 7 0 11쪽
24 #06. 죽음의 꼬리를 삼키다 (1) 24.03.28 6 0 13쪽
23 #05. 날개 (5) 24.03.25 9 0 14쪽
22 #05. 날개 (4) 24.03.21 7 0 11쪽
21 #05. 날개 (3) 24.03.18 9 0 11쪽
20 #05. 날개 (2) 24.03.14 11 0 13쪽
19 #05. 날개 (1) 24.03.11 8 0 11쪽
» #04. 드래곤의 기억 (4) 24.03.07 8 0 12쪽
17 #04. 드래곤의 기억 (3) 24.03.04 6 0 13쪽
16 #04. 드래곤의 기억 (2) 24.02.29 9 0 14쪽
15 #04. 드래곤의 기억 (1) 24.02.26 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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