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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礎(고초)
작품등록일 :
2024.05.08 10:22
최근연재일 :
2024.09.19 06:3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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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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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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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4

DUMMY

은근히 가슴이 쿵덕쿵덕 뛴다. 팽욱은 소리 없이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잠자는 척 움직이지 않았다.


"장소광! 아가씨가 너 만나러 친히 오셨어."


영화소저 시비인 취앵이의 작고 가는 목소리가 창살을 타고 흘러 왔다.


곧이어 달빛에 세류요의 여인 모습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사뿐사뿐 감옥 창살에 다가들었다.


"소광도령! 제 오라버니 때문에 고초가 심하시군요."


감정에 복받쳤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


"··· 이렇게 막무가내로 맞기만··· 후~ 소광도령에게 정말 저는 뭐라 어떻게 죄송하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진정 미안하고 죄스럽다는 표정과 감정이 어둠 저편에서 창살 안쪽으로 넘실넘실 파도처럼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아!'


돌아누운 팽욱, 그녀의 마음에 담긴 진실의 깊이에 찡한 감동이 물밀 듯 밀려왔다.


싸르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코끝을 자극하는 향긋한 여인의 체향. 번쩍, 눈을 떠 보니 그녀가 창살을 부여잡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심장이 거친 박동을 일으키며 요동쳤다.


'미··· 미치겠네.'


팽욱의 이런 미묘한 상태 변화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녀는 작고 앙증맞은 입마저 벌려 그의 혼을 홀딱 빼앗아 버렸다.


"다친 곳은 어떠신지요? 많이 아픈가요?"


얼어붙은 멍청한 사내의 마음을 그녀가 어찌 알까.


"아씨! 소광이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나 봅니다. 어차피 그렇게 말씀하셔도 못 알아들을 텐데, 얼른 주고 가시죠. 아씨!"


누구에게 들킬까 두려웠던 취앵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 깜빡했네. 취앵아! 가져온 건 이리 내어놓거라. 얼른!"

"알겠습니다. 아씨!"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데 지금 넣어 줘도 괜찮을까?"

"냄새 맡으면 금방 깨어날 거예요, 아씨, 원래 소광이는 음식 냄새만 맡으면 귀신같이 알아보고 찾아오잖아요?"

"하긴 그도 그렇구나."


빙그레 미소짓는 그녀, 기억 속 옛일에 흐뭇한 표정이다.



"아! 아!"

영화가 찾아오면 소광이 반갑다며 하는 말이다.


소고기로 다진 우육을 누가 볼세라 꼭꼭 묶어 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소광이는 귀신같이 달려와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사람들 눈을 의식해 따라 오라 손짓하며 앞장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들린 쿵 소리. 깜짝 놀라 돌아보니 소광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데 하필 위치가 물이 고인 곳.


흙탕물이 얼굴에 튀어 지저분했다.


피식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다급히 부축해 일으켜줬더니 대뜸 고기 담긴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고기!’”


그런데 디딘 발이 또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는데. 지저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는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스럽던지 그녀 역시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호!"




그녀가 소리 없이 피식, 뜻 모를 웃음을 짓자 취앵이는 갸웃하며 초조한 신색으로 재촉했다.


"아씨! 너무 늦었는데 그만 가시죠?"

"응? 응! 그래 가자!"


여전히 누워 꼼짝 않는 팽욱을 보며 왠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시선으로 물끄러미 보던 영화는 일어나 광문을 향해 걸어갔다.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사르륵, 사르륵, 쾅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 두 여인. 팽욱은 그제야 일어서 보자기를 끌렀다.


그가 좋아하던 우육(牛肉) 볶음이 백색 자기에 소담스레 담겨 따뜻한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고 옆에는 소홍주 한 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제 팽욱 그도 이젠 어엿한 18세 청년. 장씨와 함께 일하며 주량이 꽤 늘어 소홍주 몇 병 정도는 개 눈 감추듯 먹는 편이었다.


따뜻한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자 문득 처음 술 먹던 날의 추억이 떠올랐다.




"소광아 식사시간 된 것 같은데 그만 쟁기 놓고 밥 먹자"

"응 알아···. 져"


밭을 경작하며 소 쟁기질하던 장씨와 소광은 흠뻑 젖은 땀을 훔치며 밭고랑을 건너 커다란 낙엽송 그늘 밑에 자리 잡고 앉아 싸 온 식은 밥을 꺼내 먹기 시작했는데 보니 멀리서 영화 소저와 두 시비가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낯선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씨가 여기엔 무슨 일로 오시는 거지?"

"엉, 아! 아!"

"그래 아씨가 오시는 구나"


주인집 소저가 오자 두 사람은 황급히 일어나 읍하며 물러섰다.


"아씨 오셨습니까?"


두 사람의 인사를 받자 다소곳이 마주 인사한 그녀는 시비를 불러 가져온 음식을 꺼내라 지시했다.


"취앵아! 갖고 온 음식 꺼내 놓거라."

"예, 아씨"

"무슨 일로 여기까지 걸음을 하셨는지요. 아씨!"

"날씨도 화창하고 좋아 밖에서 요기나 하려고 음식을 장만했는데 아저씨와 소광 도령 생각에 겸사겸사, 갖고 왔어요."

"장원 안에도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광도령이 밭에서 일한다기에 밭일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서 보려고요."

"허허, 밭일이야 뭐, 볼 것이 있겠습니까. 땀내 나는 남정네들···."


순간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장씨는 실수를 직감하고 급히 입을 닫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서로 어색했던 상황을 반전시킨 건 그녀, 재치 있게 젓가락을 들며 환하게 웃었다.


"식기 전에 빨리 드세요. 식으면 맛이 없답니다."


그녀를 의식한 장씨는 소광에게 젓가락을 주며 말했다.


"소광아 너도 이젠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술 한 잔 먹을래!"

"술?" "그래, 술!"


장씨는 가득 따른 술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먹자마자 일각도 지나지 않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소광. 놀랐는지 사레까지 들려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사내 녀석이 술 한 잔 제대로 못 먹어 이 난리냐!"

"아, 아니다."


소광은 아저씨의 질책에 오기가 났는지 앞에 있던 소홍주를 병째 들더니 벌컥벌컥 단숨에 비웠다.


"어, 어, 이놈이 미쳤나, 술은 안주하고 천천히 먹는 거야!"


깜짝 놀란 장씨가 빼앗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소광.


"아, 아찌, 어···, 어지럽다."


올라온 취기로 얼굴이 빨갛다 못해 창백하게 변한 그는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쿵, 하고 쓰러졌다.


"어이쿠! 이놈아 독한 술을 그렇게 마시면 견디겠냐! 하여튼 멍청한 놈이 아씨만 있으면··· 똥고집은 있어서···."


의식하지 못하고 내뱉은 장씨 말에 순간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영화 소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쫓기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처음 술을 마시던 그때 생각이 아스라이 떠오르자 팽욱은 즐거웠던 추억에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허기졌었는데 음식 냄새가 코를 찔러 오자 그는 허겁지겁 술을 반주 삼아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아무래도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져 더욱 맛있었는지 몰랐다.


그는 빈 그릇과 술병을 챙겨 보자기에 정성껏 싼 후 창살 밖에 조용히 내어놓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광문이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구부정하게 허리가 굽은 초로의 중년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둠을 헤치고 다가왔다.


"소광아! 소광아, 자고 있니?"

"응? 아, 아니다."

"오, 이제 깨어났구나!!"


장씨였다.

자신도 얻어맞아 기동이 불편할 텐데 걱정에 찾아온 모양이다.


"이 녀석아! 아저씨가 얼마나··· 후~ 3일 만에 깼어.”

“삼, 삼일? (그럼 시간이 그렇게나?)”

장씨의 목소리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아, 아저씨! 이제 괜찮··· 아요!”


괜찮다는 그의 말 뒤 불쑥 주름진 손이 창살 사이를 비집고 다가왔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보듬는 거친 손. 꺼끌꺼끌 거친 촉감이 투박하지만 따뜻하게 다가왔다.


“여기 너 먹으라고 우육 싸 왔다. 백씨 아줌마가 맛있게 만들었으니 식기 전에 어서 먹거라."


보자기를 풀어 음식을 창살 안에 밀어 넣었다.


"아, 아찌···잘··· 먹겠···."


정신이 돌아왔지만 왜 그런지 예전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장씨에게 바뀐 모습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자연스레 행동하며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손과 손을 타고 전해오며 뜨거운 정도 함께 밀려왔다.


"불쌍한 녀석! 그렇게 험악하게 맞았으니 얼마나 아프냐! 말도 못 하고 꾹 참고 두들겨 맞았으니···."


늙은 장씨의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볼을 타고 흘렀다.


태연한 척 있지만, 아저씨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 눈에도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볼을 타고 흘렀다.


'아저씨!! 정말 고마운 아저씨,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날 친자식 이상으로 돌봐 주시고··· 한없는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하나.'


그도 말없이 손을 꽉 움켜잡았다.


"소광아! 자, 자 얼른 먹거라, 누가 찾아올까 두렵구나···."


주름진 얼굴로 어서 먹으라 손짓하는 아저씨.


팽욱은 가득 차버린 배 사정을 알면서도 맛있게 또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불안과 안도가 수시로 교차하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일각 정도 머물다 갔다.


"소광아! 절대 반항하지 말고 착하게 있어야 한다, 알겠지?"

"응, 응,"


돌아서 가는 장씨의 허리는 바싹 꼬부라져 있었다.


아직 60도 되지 않았는데. 팽욱은 정신이 돌아왔으면서도 왜 안 그런 척 한 것인지. 왜 그랬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좋은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는 또 다른 자아의 표현임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일 뒤늦게 깨달았다.




부엉!

부엉!

메말라 갈라진 괴이한 부엉이 소리가 창살 틈을 파고들었다.


소리는 장씨와 팽욱의 얼굴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머물며 천천히 음미하다 이내 숨죽여 빠져나갔다.


사랑하는 짝, 귀여운 새끼, 아니면 그 모두를 잃고 찾아 헤매듯.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적을 깨는 맑고 청아한 금음(琴音) 소리, 처량한 그의 신세를 대변해주려는 듯 밤하늘을 하늘하늘 수놓았다.



"아! 두보(杜甫)의 고달픈 밤···.“


"죽양침와내(竹凉侵臥內)

대숲의 서늘함 방안까지 스며들고

야월만정우(野月滿庭隅)

달빛은 구석구석 뜰 안을 비춘다.

중로성연적(重露成涓滴)

맺혀진 이슬은 방울 지어 떨어지고

희성사유무(稀星乍有無)

드문 별은 깜박깜박 조는 듯 반짝인다.

암비형자조(暗飛螢自照)

반딧불이 어둠을 스스로 밝혀 날고

수숙조상호(水宿鳥相呼)

물가에 깃든 새들 서로를 부른다.

만사간과이(萬事干戈裏)

세상만사가 전쟁 속에 있으니

공비청야조(空飛淸夜操)

한갓 맑은 밤 지나감이다.”



<5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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