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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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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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8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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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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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4화 - 독주

DUMMY

창문을 덮은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이 두 눈을 간지럽힌다. 매끈하던 이마가 사이를 좁히며 옅은 주름을 자아냈다. 작게 신음하며 눈을 뜨자, 머리가 지끈했다. 도대체 몇 개월 만의 술인지, 마지막으로 마셨던 곳이 어디였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술을 마시고 몸이 아프다는 것을 평생토록 느껴본 적이 없거늘, 대체 홀로 얼마나 마신 겐지.

허나 어젯밤의 일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다. 눈을 비비려고 들어올리던 히로유키의 오른팔에 무언가가 걸렸다. 잠결에 이불이 움직였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정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밤 사이 고단하였는지 세상 곤히 자고 있는 정화를 보자마자 그가 화들짝 놀라 움찔하였다. 도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길래 이 아이가 여기서 자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었다. 분명 둘이 함께 탁자 앞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 이후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실오라기같은 기억 한 줄이라도 부여잡아보자. 어젯밤 나와 이 아이 사이에 있을 법한 일이 무엇일까? 그래, 술을 마신 것까지는 확실하다. 그리고 몇 마디 신세 한탄을 했지. 그 다음에는······.


‘당신이 싫습니다.’


······ 기억 나 버렸다. 애써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환청과도 같은 말이. 울음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 하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눈길이 다시 제 팔을 베고 누운 여인에게로 향하였다. 그 사이 모든 기억을 떠올렸으나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도 내 발로 침대로 간 기억이 없거늘, 이 작은 몸으로 날 여기에 뉘인 건가. 착잡한 마음에 입술을 앙다물자, 끈적하면서도 미끌한 무언가가 입가에 느껴졌다. 손가락을 갖다 대어 보니, 자신은 바른 적 없던 연고가 묻어나왔다. 그리고 제 앞에 놓여있는 손바닥만한 연고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여인. 뚜껑조차 닫지 못한 채 예서 이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다는 건 필경 지쳐 쓰러지듯 곯아떨어진 것일테지. 늘 단정하던 머리가 흩어져 잔머리가 이마를 가로질러 얼굴 반쪽을 어지러이 덮고 있었다. 이미 내어준 오른팔을 천천히 머리에 둘러 감고는, 작은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 주었다. 행여 아까 움찔하다 곤히 잠든 이를 깨웠을까 조심하며 여인보다 예쁜 손가락으로 정돈해주던 중, 늘 검은 물결처럼 휘날리던 귀밑머리 이마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 귀 뒤로 넘겨 땋은 머리.

가 딱딱하게 바삭거린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 묘한 자국이 있다.


“······ 울었구나.”


비스듬히 기댄 눈가 옆 침대보가 여즉 마르지 않았다. 문득, 잔상만 남아 있던 어젯밤의 서러운 곡소리가 어찌 흘렀을지가 눈에 선하였다. 작은 몸에 모든 이의 고민과 슬픔을 눌러담는 것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헝클어진 머리가 다시 한 번 휘날린다. 창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이 감정을 모르겠다. 울어야 할지 그저 평소처럼 있을지, 안아주어야 할지, 그대로 이러고 있을지, 심지어는 깨워야 할지 재워야 할지조차도. 떼어 줄 머리카락은 더 없었지만, 여전히 손은 갈피를 못 잡고 공중을 배회하고 있었다. 녹빈 검은 귀밑머리.

에 닿으려던 커다란 손이 문득 멈추었다. 내가 어찌 감히······.

문득 이 작은 아이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꽤나 불편하게 침대에 걸쳐져 있었으나, 세상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평소에도 이리 불편하게 잠에 들었으려나. 알 도리가 없으니 그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문득 제 앞에 놓인 이가 ‘여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작은 체구에 커다란 눈망울에 한가득 담긴 순수함에 늘 아이라 생각하였으나, 너무도 어리게만 보았던 건 아닐까. 귓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차마 해서는 아니 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히로유키가 정화를 가뿐히 안아들었다. 데리고 가서 처소에 뉘일까 싶었으나 사방으로 꺾인 팔다리를 곧게 펴주고, 목 밑에는 베개를 받쳐주었다. 아무렇게나 떨어진 신발도 정돈하여 발치에 가지런히 놓았다. 하얗고 도톰한 이불까지 덮어준 히로유키가 침대 한 켠에 걸터앉았다. 분칠 하나 하지 않았음에도 곱고 뽀얀 살결에 손끝이 굼질거렸으나, 역시 그 뿐이었다.


“······ Пожалуйста, не плачь.”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읊조린 후, 그가 책상으로 향하였다. 언제나처럼 그의 손에는 ‘죄와 벌’이 들려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상하리만큼 몸이 개운했다. 웃풍이 들이칠 법한 날씨였음에도 더없이 포근했다. 이불이 유독 보드라웠고, 베개도 폭신했다. 희미하게 들리는 새의 지저귐이 얼마만이던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뜬 정화가 다음 순간, 그만 발딱 몸을 일으켰다. 제 처소에서 절대 느낄 수 없는 이 모든 촉감과 공기, 그것은 다른 여급들의 처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지금 제 몸이 뉘여있는 이 곳은······.

주위를 둘러보자마자 경악이 들어찬 비명이 튀어나왔다. 죽기 싫어서 그리도 몸부림을 쳤거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대체 어제 제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깨질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그제서야 서서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제 만취한 히로유키를 침대에 끌고 가 눕힌 다음, 그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설마 그대로 잠든 것인가? 무엇보다 이 곳 방 안에는 정화 홀로 있었다. 다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점이나 되었으려나. 확실한 건 지극히도 늦게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벽시계가 크게 울렸다. 허공이 진동하는 듯한 그 느낌에 목덜미에 파스스, 소름이 돋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9점이라니, 게다가 간밤 사이 잠든 곳은 독사 장교의 침대 위였다. 지난 수 개월 동안 한 번도 그에게 위협받은 적이 없기로서니, 이번만큼은 실로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을 법한 상황이었다.


“일어났느냐?”


대체 방 주인은 어디를 갔나, 싶었던 그 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정화가 다시 한 번 내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일어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였다.


“도, 도련님, 이게 대체······.”


면회를 보내달라 청하던 순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떨렸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도련님, 그, 그것이······.”


“내게 할 말 없느냐?”


히로유키의 말에 머리에 큰 돌이 떨어지는 듯 하였다. 그가 자신이 아닌 이와 말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였으나, 어째서 그의 별명이 독사 장교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는 어투에 눈빛도 간간이 번뜩였다. 고문보다 두려운 것은 필경 크고 짙은 저 두 눈이리라.


“도련님, 제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다시는 이렇게 늑장부리지 않겠습니다. 제발 죽이지 말아주세요, 아니, 아아니, 아니 차라리 죽여주세요! 혀를 뽑히고 목숨을 부지하면 전 앞으로 못 살아갑니다. 손가락 잘린 여인은 불구라고 시집도 못 갑니다. 쫓겨나서 돈도 못 벌고 손가락질 받을 바에야,”


“그만.”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한 번만,”


“그만.”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비는 정화의 말허리를 히로유키가 단호히 잘랐다.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던 정화의 몸이 모든 것을 멈추더니만, 이내 사시나무 떨 듯이 떨기 시작했다.


“내 어제 과음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만, 네가 이러는 양을 보아하니 지금 정신이 온전치,”


“아니요, 아니요 당치 않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니요, 결단코 그럴 일은······!”


“허니 들어가 쉬거라. 하루면 멀쩡해지겠지. 금일은 쉬면서 고단한 몸을 풀고, 내일부터 다시 일을 하거라.”


“······ 네?”


“혹여나 싶어 말한다만, 간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불안해 말거라.”


기억을 못 한다는 이가 간밤 사이의 일을 어찌 알랴. 허나 단 한번도 그가 제게 몹쓸 짓을 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껏 보아왔던 히로유키는 실수로라도 제게 몸조차 스치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는 실수하면 혼날 줄 알거라. 알겠느냐?”


“아, 아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인 후, 정화가 도망치듯이 방을 빠져나와 처소로 향했다. 안도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흐르던 눈물은 곧 참회로 바뀌었다.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던 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떠는 와중에도, 어제의 그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기어코 히로유키를 가슴 속 깊은 곳에 품고 만 것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랐다. 함께 술을 마시며 속내를 터놓으면서였을까, 그가 관영의 면회를 순순히 허락했던 그 때였을까, 본의 아니게 그의 벗은 몸을 보았을 때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내 앞에서는 조선어를 쓰라 했던 그 순간이었을까.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지금 제 마음속에 자리한 이를 결코 연모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독사 장교였다. 비록 단희마냥 그 얼굴을 보고 연모를 하는 이는 여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곳 여급들 중에 그런 이가 한둘 정도는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나 다른 이도 아니고, 남정화는 그리해서는 아니 된다. 왜놈의 손에 모든 것을 빼앗긴 오라버니와 그들에게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고서도 다시 한 번 손에 총을 쥐는 언니를 두고서, 나는 그리해서는 아니 된다.

입가에 어제의 그 씁쓸하고도 단 술의 맛이 감돌았다. 와인, 이라 하였던가. 그가 봣카라 부르던 그 술의 독한 맛도 생각났다. 쓴 것만 입에 대다 조금이나마 달콤한 것이 닿으니, 두번째 술은 쓴 줄도 몰랐다. 입 안의 씁쓸한 기가 전부 사라질 때까지 홀짝거리다 보니 어느새 잔은 비워졌음이요, 그제야 제가 취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눈 앞에 쓰러지듯 잠든 이를 지금껏 걱정했던 연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어제의 그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적어도 제 마음이 어떤지 돌아볼 기회는 없었을까. 차라리 몰랐으면 하였다. 그 자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몰랐으면 하였다. 괴로움의 연유를 알 수 없는 것이 매국노를 마음에 품는 것보다야 나으리라. 어제의 그 술은 정녕 독주였던 걸까. 버젓이 독주인 것을 알면서도 입에 댄 스스로가 그리도 우습고 역겨웠다. 대관절 무엇이 탐나 감히 입에 대었으며, 무엇을 위해 죽고자 하였던가. 영예롭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이의 무덤 앞에 누군가가 꽃을 놓아주랴.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셈이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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