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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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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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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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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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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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6화 - 야 류블류 찌뱌

DUMMY

정화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말마저 입에 담는다면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듯 하여서. 허나 입술이 자꾸 달싹였다. 그 어떠한 상황보다 더욱 가슴이 떨렸다.


“······ 감사합니다.”


결국 그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허나 그조차도 후회가 되었다.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내뱉어도, 내뱉지 않아도 후회가 될 법한 말이었던가. 오도 가도 못하는 이 상황에서 대체 어찌해야 할 지를 알 수가 없었다.


“늘 감사한 것이 많구나.”


“······ 도와주셨으니까요.”


“그런 것에 감사하지 마라.”


“허면 당연한 것이라 여겨야 하나요?”


괜한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이 자가 친일파만 아니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화가 났다. 당신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리 괴로워할 연유도 없었을 텐데. 나는 어찌하여 당신과 같은 자를 마음에 품었을까. 알면서도 그리하였으니 나 또한 다를 바 없는 파렴치한 자인 걸까.


“······ 실은 지금도 익숙치 않아요. 관저를 한 발짝만 벗어나면 도련님에 대해 온갖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그건 하나같이 전부 무서운 것들이어요.”


“무어라 하더냐?”


“······ 차마 제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우니까요.”


거짓이었다. 차마 그의 표정에서 슬픔을 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지금껏 자신이 본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떼일지라도 우기고 싶었다. 저조차도 놀랐다. 내가 이 자를 이리도 깊게 연모하였었나.


“허나 적어도 제가 근 1년간 보아왔던 도련님은 그것과 정반대입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건 도련님께서도 충분히 느끼셨으리라 사료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시 한 번 하고자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쌓이고 쌓였던 말들이 뭉쳐 가슴을 짓눌렀다. 답답해서 속이 터져버릴 듯 하였고, 눈가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


“앞서 말씀드렸잖아요, 감사드린다고요.”


“그것은 네 진심이 아니잖느냐?”


“······ 어째서 제게 이렇게까지 잘 해주시나요?”


결국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결국 이리 말할 것이라면 무엇 하러 뜸을 들였는지, 스스로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과는 다르게 입가가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인면수심이란 이런 걸까. 대체 무슨 자격으로 눈물을 흘리는가.


“······ 네가 믿고 싶은 것을 믿거라. 무어가 되었든, 그것이 옳은 것이다.”


정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이 옳은지도 알면서도 옳지 않은 것을 따르고 있으니 인면수심이요, 그러한 스스로를 더 이상 똑바로 바라볼 수 없으니 대체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하나.


“금일은 더 시킬 일이 없으니 들어가 쉬거라. 저녁은 먹고 늦게 들어올 것이니 짐을 받으러 나오지 않아도 된다.”


“알겠습니다.”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였으나,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허나 히로유키를 향한 정화의 눈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애써 모질게 고개를 돌리려던 히로유키도 차마 그러지 못하고 정화를 알 수 없는 눈으로 계속 바라보았다. 도무지 꿰뚫어볼 수 없는 눈빛, 그 눈빛 속에는 분명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찰나였으나, 분명히 다정함을 보았다. 대체 그의 진심은 무엇일까. 가슴이 콩닥거렸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 우정국에 다녀와도 되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듯, 히로유키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술 사이로 피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도 웃음도, 동족을 고문할 때조차 표정 하나 변치 않던 독사 장교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언제는 묻고 다녀왔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제법 누그러진 어투에는 언제 그랬냐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자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일까. 애써 침착한 체 하며 정화가 방을 나왔다. 한숨 소리가 막을 새도 없이 흘러나왔다. 큰 눈에 잔뜩 고여 있던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방 안 창틀에 몸을 기대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한숨이 멈출 줄을 몰랐다. 어느새 여명이 사라지고 햇빛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 태양은 어떤 심경이길래 이다지도 밝을까. 시린 두 눈에 주홍빛이 차올랐다.




오라버니에게.


오라버니, 나 정화야.

편지 잘 받았어. 조카가 무사히 태어나서 다행이야. 아프지 말고, 건강 잘 챙겨. 새언니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몸 건강히 있다가 다시 만나자. 내 봉급은 받는 즉시 부칠 테니까 걱정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제아무리 힘든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사람답게는 살아야 하지 않겠어? 돈은 부족하면 언제든 다시 부쳐줄테니 오라버니도 다시 만날 그 날까지 잘 지내.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아.


- 1915년 1월 5일

남정화




편지를 곱게 접은 정화가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하루 빨리 관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하였으나, 도무지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장 급한 것은 돈이었다. 조선인으로서, 그것도 조선인 여인으로서는 결코 적게 버는 돈이 아니었다. 친일파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선인으로서 그 정도 돈을 번다 하면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였다. 게다가 몸까지 이리 편안하다니, 떠날 연유가 추호도 없었다. 허나 정화에게는 책임져야 할 식구가 셋이나 더 있음이요, 갚아나가야 할 유석의 빚도 있었다. 삼순구식할 정도는 아니기로서니, 하루하루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으로써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원망스러운 만큼, 사랑하는 마음 또한 컸으니까. 어찌하여 이런 자를 연모하게 된 것인지, 지금도 스스로가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우정국까지 어찌 걸어갔는지, 유석의 편지를 어찌 부쳤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빛을 잃은 두 눈이 허공을 헤짚었다. 어지러운 삶 속에서 이 처지를 구원해 줄 동아줄이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이었을까. 대체 어찌해야 할까?

순간 머릿속에 또 다른 가족 하나가 떠올랐다. 윤관영.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나의 세상이었다. 그와 같은 운명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연 관영과 같은 용기를 낼 수가 있을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를 내 손으로 쏠 수가 있을까?

히로유키의 이름을 떠올리자, 문득 앞서 그가 말한 노어가 다시 떠올랐다. 알 수 없는 묘한 말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입을 통해 노어를 들은 것이 벌써 수 번이지만 여전히 억양도, 발음도 모두 적응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짐작을 해 보고 싶었으나 늘 무미건조한 그의 어투는 그 어느 때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드문드문 기억나는 것은 유독 귀에 박히던 몇몇 발음이었다.


“뭐였지? 야, 루블······ 룹류? 찌비아 였나······. 아!”


순간 낯선 사내와 부딪힌 정화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휘청였다. 넘어질 뻔한 그를 붙잡아 세운 이는 중년의 신문장수요, 행색이며 부딪히자마자 내지르는 말이 영락없는 조선인이었다. 소매치기인가도 싶었으나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정화가 매무새를 다듬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많이 파셔요.”


“조선인이오?”


귀티나는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제법 단정한 양장을 입은 정화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제법 놀란 듯, 사내가 되물었다.


“예, 그렇소만······.”


“아 이거 반갑소. 조선인이라니, 내 맘같아서는 조선글로 된 신문이라도 드리고 싶지만 여기는 왜놈 글로 된 것만 있어 아쉬울 따름이오.”


“그거라도 하나 주세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알아야겠어서요.”


“나이도 어린 아가씨가 국어를 잘 하시나 보오.”


“아······.”


대답 대신, 정화가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근처는 집값이 싸지 않을 터인데 어디 사시오? 근방에 학당이 있는가?”


“아, 그게······.”


정화가 난처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끝을 흐렸다. 차마 총독부 관저라는 말은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행여라도 제게 손가락질하는 이가 있을까? 알아들을 수 없이 수군대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 하였다.


“전 여급이어요. 이 근처 찻집에서 숙식하며 일해요.”


찻집이라는 말만 제한다면 온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숙식하며 일하는 여급이었고, 히로유키에게 차를 나르는 것 또한 주어진 일이었으니까.


“아 그렇소? 어디서 일하시오?”


“구석진 곳이라 모르실 터인데······.”


“그래서 왜글을 읽을 줄 아시는군그래.”


다행히도 신문 장수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연유야 알 수 없으나, 정화가 왜글을 읽을 줄 아는 것에 그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간만에 신문 읽는 조선인을 만나서 반갑기 그지없으니 내 아가씨에게는 특별히 값을 안 받겠소.”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제값은 받으셔야죠. 제아무리 왜놈들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조선 땅이었던 세월이 훨씬 긴데, 여기 조선인이 어디 저 밖에 더 있나요.”


“아니 신문이라고는 왜놈 말로밖에 안 되어 있는데 조선인들이 읽어봐야 얼마나 읽겠소? 읽어봤자 친일파 놈들이거늘, 어디 그 놈들을 조선인이라 할 수 있소? 부끄러워서, 원······. 아무튼 조선글로 된 건 팔지도 못 하니 내 원통해서 그러는 거요. 그러니 다른 생각 말고 그저 받아가시오. 이런 걸 돈 받고 팔기도 아까워서 그러오.”


또 다시 정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신문 장수는 저를 신여성 정도로 생각하는 듯 싶었으나, 실상은 아니었으니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려요.”


정화가 한사코 손사래를 쳤으나, 신문 장수는 정화에게 신문 한 부를 욱여넣다시피 쥐어주었다.


“왜인들은 신문을 많이 사 가나요?”


“왜놈들이야 많이 사 가지. 간혹가다 저기 청인들이나 아니면 아라사인들이 오기는 해도 조선인은 영 드물더군그래. 영특한 이들이라면 당초 배달을 시키지만서도, 정작 읽는 이들은 그들 뿐이라오. 먹고 살기 바쁘니 어디 신문 읽을 시간이 있나.”


신문 장수가 혀를 끌끌 찼다. 정화가 그만 어정쩡한 제 몸짓을 감추려 부러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뒤늦게 그의 뇌리에 하나의 단어가 박혔다. ‘아라사’. 가능성은 희박하기로서니, 혹여 이 자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아저씨, 노국인들도 신문을 사 가나요?”


“많지는 않지만 간혹 있다오.”


“허면 노국 손님 만나면 노어로 말씀하세요?”


“알아듣는 건 숫자밖에 없소. 아진, 드바, 뜨리 (1, 2, 3의 러시아어 표현 (Один, Два, Три).) 이런 거 말이오. 할 줄 안다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이 일 시작할 적에 호객하라고 두어 마디 외워놓은 건 있소.”


“저, 그럼 혹여 ‘야, 루블······ 치바’ 가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이것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요.”


“거 젊은 아가씨가 외국 말을 잘도 아네그려. 여급을 하기에는 아까운 인재구먼.”


신문장수가 실없는 웃음을 던지자, 정화가 그를 따라 어색한 웃음을 함께 지어보였다.


“헌데 그런 말은 어찌 아는가? 혹, 가게 찾은 노국 손님이 아가씨에게 그런 말도 하였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는 정화를 바라보는 신문 장수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졌다. 모로 봐도 정화를 향한 노기는 아니었으나, 되려 불안해진 정화가 모으고 있던 양 손을 더욱 세게 부여잡았다.


“이런 몹쓸 놈을 봤나, 진짜군그래.”


“무슨 뜻이길래 그러십니까?”


“야 류블류 찌뱌, 이런 말 아니었소?”


“아아, 맞는 것 같아요! 헌데 그게 대체 무엇이길래······.”


“연모한다는 뜻이오.”


작가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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