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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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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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5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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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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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37화 - 가책

DUMMY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 자가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허나 자신의 말에 한 치의 거짓됨도 없다는 신문 장수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무언가가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정녕 그의 그 말이, 그 뜻이었다니.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그 말, 그것은······.


“뭐, 뭐라고요?!”


“거 딱 보니 아가씨 나이도 어려 보이건만, 대관절 어느 난장맞을 놈이 그딴 식으로 혀를 놀린거요?”



“아, 아니 그게······.”


어떻게든 해명을 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말할 방도가 없었다. 독사 장교와 함께 식사를 하던 와중 노어를 가르쳐달라 하였더니 뜻도 알려주지 않고 말을 하였다. 독사 장교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부터 이러한 말을 한 것까지, 그 어떤 사소한 것조차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여즉 믿을 수가 없었다. 늘 차갑고 웃음조차 띠지 않던 그의 입에서 대체 무슨 말이 나왔다는 말인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코쟁이 놈들이 어디 좀 음침한가. 아가씨도 조심하시오. 가뜩이나 내 나라 없는 것도 서러운데, 그걸 알면 더 무시하기 일쑤이더이다.”


“아······.”


신문장수에게 어찌 인사를 했는지도 모른 체, 정화가 혼이 전부 나간 얼굴로 관저까지 터덜터덜 걸음하였다. 행여 밖으로 나갈 일이 있다면 누군가가 알아볼 새라, 늘 고개를 숙이거나 모자를 눌러 쓰고 다녔으나 그럴 겨를도 없었다. 혹여 제 마음을 알아채고 장난을 친 것일까? 허나 약 1년 간 보아왔던 히로유키는 결코 그런 실없는 농담을 즐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 또한 마음을 한 번도 표한 적이 없었다. 정녕 그 또한 진심일까? 허나 그럴 연유 또한 없었다. 이미 가질 것을 전부 가진 인사가 어찌하여 가진 것 없는 저를 연모하겠는가? 그저 농이었으리라. 허나 지금껏 보아온 그는······.

관저의 문 앞에 다다른 정화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곱게 땋아내린 귀밑머리 틈새로 잔머리가 어지럽게 삐져나왔다. 결국 모든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끊임없이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궁금증은 돌고 돌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아······.”


“정화야?”


걸음을 발로 걷는지, 손으로 걷는지조차 모르고 홀린 듯 관저 안으로 몸을 넣던 그의 손목을 붙잡은 것은 설이었다. 화들짝 놀란 정화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설과 눈을 마주하였다.


“어딜 다녀오는 거야?”


“우정국······. ”


“머리는 또 왜 그래?”


“아, 급히 다녀 오느라······.”


“그래? 뭐, 마침 잘 됐다. 너 배고플텐데 밥 먹자.”


“아, 아니 그게······.”


당황한 심경에 그만 팔에 힘이 들어갔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얼굴에 떠오른 것은 설의 당황한 표정을 발견한 직후요, 저도 모르게 설의 팔을 뿌리친 이후였다.


“아······”


“미, 미안, 내가 놀라서 그만,”


“너 그러고 보니 도련님 오실 시간 됐나? 식사 차려야 하지 않아?”


설의 말에 문득, 주방에 금일 히로유키의 저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두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어째서 되는 일이 없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니, 아니야 오늘 늦게 오신다 하였어. 가자. 내가 미처 말을 못 해서 주방에서 도련님 식사 가지고 갈게, 난 그거 먹으면 돼.”


잠시 얼어 있던 설의 표정에는 이내 다시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여급들은 전부 식사를 하러 갔고, 주방에 남은 것은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히로유키의 식사 뿐이었다. 늘 하루에 2번씩 들던 목반이었으나 그 거칠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손 끝에 닿자마자 가슴에 무언가가 사무쳤다. 그리움일까, 연정일까.

차오르는 눈물을 닦고,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금 곱게 땋아 내렸다. 밥그릇 속의 온기가 식기 전, 늘 제 끼니를 책임졌던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이게 얼마만인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으나, 금년에는 처음이었다.


“어? 남정화?”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정화를 본 옥선이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외치자, 그 안에 있던 수십쌍의 눈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뭐야, 정화라고? 정말이네?”


“정화야, 대체 이게 얼마만이야? 너 그간 여기 내려오지도 않고 뭐 했어?”


“설마 언니, 독사 장교에게 감금당한 건 아니죠?”


“어휴 정신없으니까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 다들.”


숟가락도 놓고 정화를 요란스레 반기는 여급들을 설이 나직히 말렸다. 덕분에 ‘독사 장교’라는 말에 흠칫하던 정화의 몸짓이 감춰졌다.


“너 근데 오늘 정말 무슨 일이야? 한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예까지 어쩐 일이야?”


“아, 도련님께서 금일 늦게 귀택하신다 해서요.”


정화가 천천히 밥을 뜨며 대답했다. 한 술을 뜨자마자 허기가 져서, 그만 가슴 속 고민도 잊고 허겁지겁 밥을 떴다.


“정화 언니, 그간 식사 때 보이지도 않더니 어떻게 된 거에요? 도련님이 언니 밥도 못 먹게 해요?”


“아니야, 일이 바빠서 나 혼자 저녁 늦게 주전부리 주워 먹었어.”


“정화야, 가까이서 보는 독사 장교는 어때?”


계속해서 히로유키에 대해 캐묻는 여급들이었으나, 숙경의 질문에 그만 먹던 딤채 (김치.)가 얹힌 기분이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너 안 괴롭혀? 작은 실수만 하더라도 혀를 뽑는다는게 사실이야?”


“그랬으면 얘가 어찌 살아있어?”


“아 어찌 그래? 정화같이 영특한 애면 한 번 실수를 안 하지. 안 그러니, 정화야?”


정화가 민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넘어가지 않는 밥을 애써 삼겼다.


“그냥 뭐······ 무섭죠, 말수도 없고.”


“그럼, 오죽하겠어?”


“헌데 언니, 뭔가 변했어요. 옛날에 비해 좀 바뀐 듯도 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일? 일은 무슨······. 내가 바뀌긴 무엇이 바뀌어?”


“그러게? 정화야, 너 분위기가 바뀌었어.”


변했다니, 난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벌써 수 개월 전 유석을 만났을 때도 듣지 못했던 말에 정화가 무심결에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물잔 속에 비친 제 얼굴이 흔들리더니, 곧 선명해졌다. 어쩐지 미워져 돌아서려던 그 얼굴은 제법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런 표정을 지어 본 적이 있었던가. 화가 났을 때만 지었을 법한 그 표정이 어느새 평상시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변했구나, 내가.


“옛날엔 한없이 순하고 잘만 웃던 아이였는데 조금 낯설다, 얘.”


“어머, 얘! 벌써 그 날을 잊은 거야? 난 정화가 그리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봤어.”


듣다 못한 설이 밥상 밑으로 손을 넣어, 부러 한 층 더 경박한 어투로 소리를 지르는 종선의 허벅지 살점을 떼어낼 듯 꼬집었다. 비명을 지르려던 종선을 흘겨보며, 설이 부러 주의를 돌리려 헛기침을 하였다.


“두어 달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나? 그때보다 조금 야윈 것도 같고. 아니 그래도 명색이 너 하나가 도련님 관련한 모든 걸 다 챙기는데 밥도 안 주면서 짐승처럼 부리는 거야?”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저 그냥 1층서 지낼 적에 살던 것처럼 지내고 있어요.”


“잘만 웃던 네가 언제 이리 얼굴이 핼쓱해졌어. 가뜩이나 피부도 하얀데, 이젠 그걸 넘어 창백해졌잖아.”


“하하, 우리가 어디 햇빛을 볼 일이 있나요. 집 안에만 있으니.”


정화가 멋쩍은 표정으로 하염없이 국그릇을 휘저었다.


“해서, 도련님은 어때? 대체 이름만 들어도 공포스러운 자 옆에서 무슨 수로 버티는 거야?”


“그냥 뭐······.”


대충 얼버무리려 하였으나, 저를 향한 수십개의 눈동자 속에 어린 궁금증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 헌데 제게 관심이 없으세요. 저도 그렇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 켠이 무거웠다. 가슴 속에 얹힌 무언가를 바늘로 쿡쿡 쑤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 중, 단 한 치의 사실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니까. 온 몸에 힘이 풀려, 차마 더 눈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화 언니, 숙경 언니가 한 말 나도 궁금해요. 그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자 옆에서 정녕 어찌 버텨요? 나였으면 2층 계단 근처만 가도 숨을 못 쉬었어요. 정녕 안 무서워요?”


“글쎄, 이젠 관저 온 지만 1년이 다 되어가니 잘 모르겠네······.”


애써 에둘러 말하였으나 질문은 도무지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은 표정을 숨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잠시라도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는 말하지 않은 정보조차 캐일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결국 도련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방을 치워야 한다는 핑계로 도망치듯 탈출한 정화가 2층으로 다급히 피신했다.

할 일은 없었다. 말 그대로 급한 불을 끄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였으니까. 늘 불편했던 곳이었고 때로는 참을 수 없는 긴장감에 제 숨통을 옥죄어왔던 곳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오늘만큼은 그 공간이 그리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히로유키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오늘따라 차가운 밤공기에 그리움의 향기가 물씬 풍기웠다. 이제는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만히 머릿속에 그를 그린다. 날카로운 듯 둥근 눈매에 늘 차갑지만 알 수 없는 다정함이 서린 눈동자, 숯조각으로 그린 듯 짙고도 가는 눈썹을 한 오라기씩 정성스레. 골짜기처럼 깊이 파인 얼굴의 굴곡 하나하나조차 아름답기 그지없던 그의 곧은 콧날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투명하게 광채가 나던 피부에 붉은 입술까지, 마치 그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차갑지만 따스함이 배어나오던 얼굴을 그리느라 끼익, 하는 소리를 들을 새도 없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묘한 기운에 고개를 들자, 지금껏 두 손을 초조히 부여잡고 그리던 그 얼굴이 목전에 놓여 있었다. 반가움 위로 번지는 원망, 그건 그리움이었다.


“······ 안 자고 무엇 하느냐?”


“진심이신가요?”


울분과 설움이 섞인 목소리로, 정화가 히로유키를 향해 나직히 외쳤다.


“······ 무엇이 말이냐?”


“······ 아니어요.”


당황한 얼굴을 히로유키는 감추지 못하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였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 아이가 어찌 저리도 슬픈 눈을 하고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 그 말을 하려고 여지껏 기다린 것이냐?”


“기다렸다 하지 않았어요.”


“허면 어째서 그리도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느냐?”


“큰 소리에 놀랐을 뿐이어요.”


매정한 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목소리 끝이 떨리고 말았다. 힘을 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사선으로 튼 고개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넘쳐 흘렀다.


“······ 시간이 늦었다.”


늘 그렇듯, 그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직하고 단정한 목소리에는 정화를 향한 걱정도 분명히 어려 있었다.


“헌데 아까 무슨 말을 하고자 것이냐?”


그의 말에 잠시 놓았던 정신이 돌아오는 심정이었다.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하고자 하였던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것도 아주 단단히 미친 것임에 틀림이 없다.


“······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았어요.”


“지금 내게 거짓을 고하느냐?”


“아, 아니어요······.”


정화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천천히 물러가는 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히로유키가 드물게 두렵게 느껴졌다.


“허면 말하라. 무슨 뜻이었더냐?”


“······ 제게 역정내지 않는다 약조해주세요.”


“약조하마.”


“혀를 뽑지 않겠다고도 약조해주세요.”


“약조하마.”


“······ 정녕 약혼을 하실 건가요?”


작가의말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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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7화 - 과거 (6) : 그 날의 진실 24.09.14 4 0 12쪽
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5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8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6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7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0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9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7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4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1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0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2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2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2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4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6 2 14쪽
» 37화 - 가책 24.07.06 11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7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5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0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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