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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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42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7.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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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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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39화 - 창살 없는 감옥

DUMMY

* “자네, 무슨 일인가?”


회의를 마치고 방을 나서려던 히로유키를 붙잡아 세운 것은 쿠사카베였다. 늘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만 띠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드물게 웃음기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보름 뒤 아라요시 가문과 정식으로 약혼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늘, 구태여 험한 땅으로 떠나려 하는가?”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약혼은 분명 3월 초하루였다. 대체 언제 이리 앞당겨졌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한층 짙어진 빛깔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부러 날짜를 허투루 알려주었구나. 자신에게 하등 관심없던 이가 이럴 때는 제 일정을 무서울 정도로 잘 꿰고 있었다.


* “허심탄회하게 터놓아 보게나. 무슨 일이 있는 겐가?”


* “오해의 소지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전 다만 나라를 생각할 따름입니다.”


* “부러 무리하지 않아도 되네. 말마따나 그 쪽 세력이 제국의 군대에 준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면 진즉부터 말이 많았을 게야.”


*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허나 어디까지나 제가 원한 일입니다.”


* “그 또한 연유가 있지 않겠나?”


* “······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워도 뿌리가 변할 리는 없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게다가 아버님의 그늘에 가려 특혜를 입었다는 말이 많으니, 제 속에 독이 없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내고자 합니다.”


속내를 터놓는 히로유키의 표정은 제법 담담했다. 되려 쿠사카베의 표정이 한층 어두운 기색을 표했다.


* “약혼자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 “아직 약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허니 엄밀히는 약혼자가 아닌 셈이지요.”


담백하고도 과단한 어투로 말을 꺼낼 때면, 그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설령 오사무라 할 지라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쿠사카베가 실소를 지었다.


* “이미 정해진 이상, 약혼은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늦게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하게 될 일이오나 정말 연해주 쪽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 “총독 어른과 상의는 한 것인가?”


* “아직은 아닙니다. 허나 제국을 위한 일이라면 반대하실 연유 또한 없을 겁니다.”


* “허면 내 따로 말하지는 않음세. 내게 불이익이 없도록 해 주게나.”


너스레를 떨었지만, 쿠사카베는 오사무가 누구보다 아끼는 이 중 하나였다. 단순히 섭섭하다는 연유만으로 내치기에는 후지와라 가문조차 망설여야 하는, 소위 뒷배가 좋은 이가 불이익을 당할 연유는 추호도 없었다.


* “감사합니다.”


짧고 굵은 인사말을 남기고, 히로유키가 총독부를 나섰다. 여느 때처럼 차에 올라 말없이 관저로 돌아가는 길에도, 짐을 정리하고 책상 앞에 앉아 서신을 쓰는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남정화.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던 손이 멈추었다. 그때의 그 눈물은, 한이 서린 그 눈빛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찌하여 자신을 그리 바라보았을까.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어떠한 설움에 잠겼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송아지같은 눈망울의 떨림과 울음이 적신 그 목소리는 벌써 며칠 째, 제 눈 앞에 아른거리고 귓가에 메아리쳤다.

벌써 함께 말을 섞지 않은지 며칠 째인지 몰랐다. 여급을 매도하는 오사무와 간혹 그의 수족이 되고자 하던 여급들 사이에서 정화는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존재였다. 허나 보이지 않는 시선들보다 더 견디기 힘든 정화와의 어색함에 며칠이 마치 몇 년처럼 더디게 흘러가는 듯 하였다. 여느 때처럼 식사라도 함께 한다면 말이라도 붙여보련만, 정화는 늘 손틈새로 흩어지듯 빠져나갔다. 방 안에 남고자 하지 않는 이를 차마 붙잡아둘 수는 없으리라.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이는 마주치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았다. 누가 먼저 시키지 않으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였기에, 정화랑 서먹해진 며칠간은 식사 때 말고는 입을 열 일이 없어 말하는 법을 잊을 지경이었다.

허나 금일만큼은 반드시 담판을 지으리라. 아무리 늦어도 한 식경 안에는 정화가 올라올 것이다. 지난 열 달 간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고, 정화가 단순히 자신을 피한다는 연유만으로 해야 할 일을 미루어두는 편은 아니었으니. 다만 시간은 제 속도 모르고 도무지 흐를 줄을 몰랐다. 한 식경이 마치 30년과도 같았다. 초조함에 손바닥이 젖어들고, 애꿎은 회중시계만 달칵거렸다. 이 시계가 고장나기 전까지는 들어오겠지. 어떤 말부터 꺼내야 어색하지 않게, 끊김 없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으려나. 밥 한 그릇을 비우는데 걸리는 시간이 속절없이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끼이익-


바라고도 바랐던 소리였으나, 시계를 여닫는 소리에 묻혀 잠시 한눈팔던 히로유키가 그만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표정도, 몸짓도, 미처 다물지 못한 입술까지 그 어느 것도 숨기지 못한 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어정쩡하게 틈을 좁히던 입술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 어찌 그러십니까?”


“아······”


기다렸다고 하면 어찌 반응할까. 연유가 어찌 되었든, 저 큰 눈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이 고이는 것만큼은 자명했고,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 아니다.”


결국 원했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정화가 무심한 눈길로 손에 든 식사를 내려놓았다.


“밥이 하나구나.”


“부족하시다면 더 올리겠습니다.”


“······ 어찌하여 나를 피하느냐?”


에둘러 말하기는커녕 정곡을 향한 질문에 마치 바늘에 찔린 듯, 정화가 흠칫 놀라 황급히 시선을 피하였다.


“······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녕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금일은 자리에 앉거라.”


“허나 식사를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지금 내려간다면 오해를 살 것입니다.”


“오해였더냐?”


자리에는 둘 뿐이었으나, 모두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얼어붙은 정화도, 고작 다섯 자밖에 되지 않은 짧은 말을 내뱉은 히로유키도.


“하실 말씀이 있다면 듣겠습니다. 아래층에서는 제가 끼니를 때울 겨를조차 없이 사는 줄로 압니다. 하여 갑자기 나타나지 않아도, 괜한 꼬투리만 잡히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 그 날은 내 진심으로 미안했다.”


느닷없는 사과에 정화가 할 말을 잃은 듯 히로유키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잠시 거리를 두던 며칠 사이에 병이라도 도진 것인가.


“무엇이 말입니까?”


“······ 알지 않느냐.”


어색하고도 싸늘한 침묵이 둘의 사이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 누구도 구체적인 사정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모든 상황을 납득시키는 한 마디였다.


“조금 더 일찍 말하지 못한 것이 죄스럽구나.”


“······ 어찌 할 도리가 없잖아요. 저도, 도련님도.”


“아예 무를 수는 없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이 일은 내 의사가 그리 중요한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서 말이다.”


너무도 담담하고 무심한 어투에 누구의 일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허나 어찌 된 영문인지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동시에 제 눈 앞에 있는 이가 한없이도 가련해 보였다.


“허나 미룰 수는 있겠지. 달포가 좀 넘게 남았으니, 시간이 조금 더 가까워지면 그때 다시 한 번 미뤄보마.”


“······ 그 한 마디를 하려고 기다리셨습니까?”


한참을 기다리던 정화가 허무한 듯 기운빠진 목소리롤 물었다.


“저도 물을 것이 있었거늘, 답이 제법 명확해졌으니 더 묻지 않아도 될 성 싶습니다.”


“무엇이냐?”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답하라.”


조곤조곤하던 어투에 다시금 날이 돋았다. 늘 말갛고 순하던 두 눈이 어느새 도끼눈이 되어 있었다.


“저 또한 궁금했습니다. 허니 도련님께서도 궁금해하셔요.”


“무엇을 말이냐?”


“어찌하여 제게······”


그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발을 뻗지 못하였다.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던 그 낯선 발음. 그 낯선 말이 정녕 그 뜻인지 한없이도 묻고 싶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만 맴돌았다.


정녕 나를 연모하나요?


“······ 아아아······.”


“감추지 말거라.”


좌절하는 정화를 히로유키가 되려 두둔했다. 연유조차 알지 못하면서. 세상 천지에 이만큼 비참한 일이 또 있으랴.


“······ 때로는 평화를 지키는 것이 거창한 행동이 아닌 짧은 침묵일 수도 있습니다. 전 단지 평화를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평화라······.”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네게는 지옥이었더냐?”


지옥, 그래 이 곳은 지옥이었다. 창살이 보이지만 제 눈앞에는 없으며, 따뜻한 잠자리가 주어지고 삼시세끼를 곯지 않는 지옥. 이 곳은 낙원이요, 동시에 감옥이었다. 그 감옥에서 맛본 향긋한 독에 취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우며 매혹적인 지옥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고통과 행복이 공존하는 곳을 지옥이라 할 수 있으랴.


“······ 그에 관해서는 더 묻지 않지. 허나 한 가지만 물으마. 앞으로는 어찌하고자 하느냐?”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 또한 알지 않느냐.”


한참을 망설였다. 과연 앞으로도 여기 남아 있으려나? 이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계속 눈 가리고 아웅할 것인가?


“제가 관저를 떠날 일은 당분간 없을 겁니다.”


묻는 편이 우스웠다.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등지고 건넌지 오래였다. 당장 내일 천벌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안도하였으나, 곧이어 숨통이 막혀왔다.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언제 어떻게 꺼내야 이 맑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을까. 이 여인이 앞으로 겪게 될 아주 작은 아픔이라도 대신 떠안고 싶은 심경이 굴뚝같았다.


“······ 일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하여 더더욱 불가한 일입니다.”


언제나 날카롭던 두 눈은 오늘따라 외롭고 쓸쓸했다. 부디 그 연유 때문만이 아니라 말해달라고,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애원하고 있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자를 보고서도, 정녕 그 별칭이 독사 장교라 할 수 있을까.

저 눈빛은 무엇이길래 나를 이다지도 아프게 만드는가. 시리고도 쓰라린 가슴 한 켠이 찌르르, 찌르르 울었다. 간절히 청컨대, 부디 나를 그리 바라보지 마시오. 차가우면서도 가련한 그 눈빛을 볼 때마다 단단해져야 할 내 마음이 자꾸 문드러지니.


“······ 고단하겠구나.”


“아닙니다.”


“식사는 어찌 들지 않았느냐?”


정화가 밥그릇을 쳐다보았다. 들 생각은커녕, 언제 자리에 앉았는지도 잊고 있었다.


“아······.”


“끼니를 거르면 없던 병도 생긴다. 허니 몸을 잘 챙기거라.”


“네······.”


“······ 정화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히로유키의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은 언제 들어도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아래층으로 가야 한다면 어떨 성 싶으냐?”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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