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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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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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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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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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0화 - 백야

DUMMY

1916년 4월 29일


동이 트기도 전에 총독부로 출근한 히로유키는 정오가 되자, 식사도 하지 않고 건물을 나섰다. 그림을 그리기라도 한 듯 늘 정적인 그의 얼굴과, 일말의 흐트러짐조차 없이 각이 잡혀 있는 제복에서는 어두운 빛이 맴돌았다.


“히로유키 중위!”


총독부의 문을 나서는 히로유키를 붙잡아 세운 것은 그의 또다른 상관들이었다. 육군 소좌 나카지마 히사오와 다이고 겐지였다. 히로유키가 평소와 같은 낯빛으로 둘을 향해 경례를 붙이자, 나카지마가 자연스럽게 경례를 받았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소좌님.”


“그래, 오랜만이네.”


비릿한 웃음은 입술에서 시작되어 얼굴 전체에 번졌다. 키도, 얼굴도 전부 다르게 생겼지만 두 소좌의 웃음만큼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히로유키의 동공이 차게 식었다.


“연해주로 간다는 것이 사실인가?”


“쿠사카베 중좌께서 허락하셨습니다만, 아직 명확한 시기가 정해지지는 않았습니다.”


“허락이라니, 허면 누가 제의했단 말인가?”


“제가 청했습니다.”


히로유키의 담담한 말에 두 소좌가 서로를 힐끗 돌아보았다. 석연치 않다는 낯빛을, 그들은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연해주는 척박한 땅이라 하지 않았나? 어린 시절을 보낸 땅이니만큼 그 추위는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말이지.”


“맞습니다. 혹한의 척박한 땅이지만 별 수 없지요, 제가 아니면 갈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는 그 말을 하며 상관 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읊조리듯 낮게 내뱉은 마지막 말이 꽤나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래, 자네가 아니면 또 누가 가겠는가? 우리는 자네만 믿음세.”


“그럼. 겐지의 말이 옳지.”


“총독 각하께도 안부 전해주시게나. 헌데 그러고 보니, 자네는 이 이른 시간에 벌써 퇴청하는 길인가?”


“글쎄요,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총독부에서의 퇴청은 맞지만 오후에 종로경찰서로 가야 하니 말입니다.”


“아, 그래. 그러고보니 그 사이 풀려났던 배길성이 다시 체포되었군그래.”


히로유키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직접 조사하러 가는 길인가?”


“예. 물을 것이 많아서 말입니다.”


“고생하게, 그럼 자네도 늦어서는 아니 되겠지?”


다이고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어깨를 토닥이자, 히로유키가 다시금 경례를 붙였다. 이어 경례를 받자마자 나서는 그를 보는 두 소좌의 입가가 약속이나 한 듯 차갑게 식었다.


“경부 직책을 달았다니, 우습기 그지없군.”


다이고가 떫은 표정으로 짧은 숨을 내뱉었다.


“아라요시는 어여삐 여기지 않겠는가? 군인인 동시에 경부직까지 겸한다니, 총경 (지금의 경찰서장.) 으로서는 행복하기 그지없겠지.”


“하, 거 참. 총독의 아들이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말이지. 다른 중위들은 우리의 그림자조차 못 밟고 있는데 억울하지 않나?”


“자네는 이미 다른 이들에게 충분히 하고 있으니 그만 아쉬워해도 되네만.”


아쉬움이 묻어나는 미소가 한없이도 잔혹했다. 소름이 끼칠 법도 하거늘, 누구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경례는 좀 받아주지 그러나. 자칫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손해는 자네가 볼 것이 아닌가? 정식 핏줄은 아니더라도 총독의 아들이네.”


“망할 조센징 같으니라고.”


다이고가 욕설과 함께 바닥에 탁, 하고 침을 뱉었다. 못마땅한 표정과 눈길은 여전히 히로유키가 사라진 방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헌데 정녕 저 자가 자진해서 연해주로 가기로 한 것이 사실인가?”


“방금 그렇게 말했지 않은가?”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지.”


“믿기지 않을 연유가 있겠는가? 총독의 하나뿐인 아들일세. 고운 것만 보고 자에게서 애국심이 아니 나올 수야 없겠지.”




종로 경찰서 앞에 도착한 히로유키를 향해 경례를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그의 시선은 머무르지 않았다. 되려 경례를 하기도 전에 그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나아가 그 많은 이들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한 길만 눈에 뵈는 듯, 그는 망설임 없이 지하로 걸음하였다.

서대문 감옥만큼이나 어둡고도 스산한 지하의 고문실은 지상에 비견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오싹했다. 역겨운 피 냄새와 퀴퀴하게 묵은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지하는 깊고 넓었으나, 저 멀리 구석에서도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내딛는 발마다 고인 물이 튀어 제복 밑단에 튀었다. 그 어떤 더럽고 징그러운 모습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히로유키가 익숙한 듯,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을 열어 젖혔다. 그의 차가운 눈 속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흰 옷에 드문드문 묻은 핏자국과 무언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잔뜩 부어 반쯤 감긴 두 눈. 총독부가 독립군 사이에 심어둔 밀정, 배길성이었다.


“주, 중위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누군지 잘 아시잖습니까, 예?”


히로유키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가 몸부림을 치며 빌었다. 의자에 묶인 두 손을 모으기라도 할 것처럼.


“전 결코 아닙니다. 이미 총독부에서 심어둔 밀정인 것이 자명하거늘, 어찌 저를 추포하십니까, 예?”


“자네, 아라사에 가 본 적이 있었던가?”


길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로유키가 질문을 던졌다. 나긋하면서도 차가운 어투에 등골에서 피가 섞인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그럼요. 중위님의 명을 받들기 위해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조선에서 태어나 아라사에서 자랐고, 제국에서 다시 태어났네. 어느덧 조선 반도에서 지내 온 세월이 제법 길어졌으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


벽에는 크기부터 모양, 색깔까지 하나같이 제각각인 정체 불명의 녹슨 기구들이 걸려 있었다. 어떠한 용도로 사용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쇠냄새와 함께 풍기는 짜고 비린 냄새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인지는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들을 찬찬히 훑으며, 히로유키가 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백야를 본 적이 있는가?”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의 태도 하나하나가 공포스러워 겁에 질린 이가 자신이 당할 일이 두려워 정신을 놓고 있다 그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제 실수를 깨달은 길성의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때 나는 그것을 보며 세상에 영원한 빛이 있으리라 생각했다네. 허나 그 뒤를 이어 반드시 속절없는 암흑이 찾아오지. 백야와 극야를 모두 겪으며 나는 인생을 배웠네. 헌데 내 어찌 이 이야기를 자네에게 하는지 아는가?”


“모, 모르겠,”


“빛만을 좇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어둠을 탐하기 마련이지.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빛을 좇는 체 하며 이중 삼중으로 무장하였을지 내 어찌 아나?”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애처로운 비명은 뒤로한 채, 히로유키가 벽에 걸린 쇠도리깨를 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여전히 끈적거리는 혈흔이 눌러붙어 있었다. 손발이 모두 결박된 길성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발버둥을 쳤다. 저승사자의 현신인 듯, 히로유키의 손끝에서부터 한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길성의 목을 옥죄었다.


“주, 중위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자네도 이미 여러 번 해 보아서 잘 알지 않는가, 고문의 목적은 자네를 죽이기 위함이 아닐세. 나는 의사를 이곳에 묶어 두어서라도 자네의 숨을 붙여놓을 거야. 자네만큼 불령선인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이가 또 어디 있다고 내 섣부른 판단을 하겠는가?”


말을 마친 히로유키가 있는 힘껏 쇠도리깨를 휘둘렀다. 굉음과 함께 곤 (쇠도리깨 (편곤)에서 추에 해당하는 부분) 이 왼쪽 어깨에 박혔다 떨어졌고, 이윽고 뜨겁고 검붉은 액체로 물들었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 위로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뚝뚝 울려퍼졌다. 울부짖는 길성을, 그는 여전히 무심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흐릿하고 멍한 눈 속에 광기와 더불어 짙은 분노가 꿈틀거렸다.


“상황 판단을 잘 하게나. 자네가 사실을 토설한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자네를 풀어줄 의향이 있어.”


“허나 정말, 정말입니다. 저는 총독부에 모든 정보를 넘겼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정보를 주는 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말을 하지 않았군.”


“그것은,”


“지금 당장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네. 보아하니 그 의자에 앉은 이의 심경과 혓바닥은 서로 뜻을 맞추지 않아도 괜찮더군.”


다시금 그의 곤봉이 고개를 들었다.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허공에 뜨거운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반대쪽 어깨에 또 다른 흉터가 생기기 직전 들려온 말에, 히로유키의 입꼬리가 서서히 솟았다.




“······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정화의 손끝이 차게 식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그의 질문에 숨통이 막혀오는 듯 하였다. 무릎 위에 포개어 모은 두 손이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 아니다. 내 괜한 소리를 하였구나.”


“도련님, 어디 멀리 떠나시나요?”


“당장은 아니다. 그저 혹여나 싶어서 물었을 뿐이다.”


정화가 불안한 눈빛을 히로유키에게서 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의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어두운 낯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던 히로유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영흥이나 연해주의 칼바람에 비해서는 훨씬 부드러웠으나, 오늘따라 뼛속 깊은 곳이 아렸다.


“행여 아래층으로 가야 할지라도 급여는 지금과 변함없을 것이다. 그리 일러 둘 테니 걱정 말거라.”


“어디로 가시나요?”


“블라지바스똑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식 발음.).”


“······ 그게 무언가요?”


“아, 조선 말로는 연해주라 하더구나.”


무심결에 노어를 내뱉었던 히로유키가 실수했다는 듯,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잠시 피하였다.


“······ 멀리 가시네요.”


마음 속에서는 다른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부디 가지 말라고. 목소리가 제법 서글펐는지, 히로유키가 정화를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우습지 않느냐. 노어를 할 줄 안다는 재능을 높이 사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거늘, 정작 고생을 자초하는구나.”


히로유키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각질 하나 없는 그의 입술이 쓰디 썼다. 그의 자조적인 대답에도 정화의 표정에 어린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은 아니라 하였으나, 먼 훗날 오게 될 그 시간마저 그리움 속에 머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하게 아려왔다. 머리칼, 이마, 눈썹, 콧날까지 눈으로 하나 하나 어루만졌다. 수십년 후에도 전부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정성스럽게.

여전히 히로유키의 입가에 걸려 있는 미소가 더욱 서글픈 빛을 띠었다.


“······ 다시 돌아오실 건가요?”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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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1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2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 40화 - 백야 24.07.16 13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4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6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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