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36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7.20 21:30
조회
12
추천
1
글자
12쪽

41화 - 양과자

DUMMY

1916년 5월 12일


* “예상보다 좀 늦어졌지만, 아마 금일로부터 반년 안에는 발령날 수 있을 걸세.”


퇴청을 위해 총독부를 나서는 길에, 쿠사카베가 히로유키에게 말했다. 바쁜 발걸음만큼이나 어투도 제법 빨랐다. 자택이 아닌 유곽으로 제일 먼저 걸음하기로 하였으니, 색마의 몸이 달을 만도 하였다.


* “지난 수 개월 간 발령만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았을텐데, 그리 달갑지 못한 소식을 들고 와서 내 미안하군.”


* “가당치 않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잊지 않고 신경 써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 “곧 있으면 혼인을 할 자보다 바쁜 이가 있겠는가?”


순간 차갑게 굳는 그의 표정이 쿠사카베에게는 멋쩍어 짓는 것으로 여겨졌으리라. 그저 말없이 서 있는 것이 대답하기 난처한 신세를 구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 “총독께서 한없이 기뻐하시겠군그래. 자네와 같은 아들이 있다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성 싶어.”


* “······ 과찬이십니다.”


* “자네도 이만 들어가 보게. 가뜩이나 피곤할 터인데 쉬어야지.”


* “살펴 가십시오.”


쿠사카베는 히로유키의 경례를 끝으로 정문을 나섰다. 놀라울 정도로 재빠르게 사라지는 그를 히로유키가 아무 말 없이 응시하였다. 그러기를 잠시, 그 또한 정문 밖으로 몸을 옮겼다. 기사를 기다릴까 싶었으나, 그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구석진 곳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익숙한 듯, 좁은 골목 틈새를 거침없이 헤쳐나갔다. 이따금씩 몸과 마음이 고단할 때 남몰래 찾던 작은 술집으로 가려나 싶었으나, 정처 없이 거닐던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양과자점이었다.

평소 관심 없는 것에는 일말의 시선조차 두지 않는 그였으며 양과자처럼 단 것은 입에도 댈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도무지 그 작은 가게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늘 입을 토끼마냥 오물거리던 동그랗고 작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보드카는 독약 같다며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으면서 와인을 맛보고 생기가 돌던 크고 맑은 눈. 작은 몸 어디로 전부 들어가는지, 식사 때면 늘 남기지 않고 그릇을 싹싹 비웠으나, 그 모습조차도 다. 그러던 이가 근자에 들어 무슨 일인지 늘 깨작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는 했다. 갈수록 야위어가다 바스라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러고 보니, 꽤 오래 함께 식사를 했음에도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 참······.”


우스웠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주제넘게 연모를 논하는가. 도리어 그 여린 가슴에 상처와 두려움만 한가득 남겼으면서, 염치도 없지. 게다가 정화의 유일한 혈육마저······.

죄책감과 자조에 휩싸여 고개를 털었다. 그러기를 잠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손에는 양과자가 가득한 봉투가 들려 있었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눈에 띄는 것은 이것저것 전부 담다 보니 우스울 정도로 많은 양을 사고 말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긴장이 되었다. 행여라도 싫어하려나? 아니다, 단 술을 좋아하였으니 필경 단 것도 좋아하겠지. 소리없이 봉투를 열어보았다. 미학에 큰 뜻을 두지 않는 제 눈에 보기에도 아기자기하니 예쁜 음식들이었다. 이러한 것을 싫어하는 여인은 없겠지, 하는 생각에 한층 마음이 놓였다.



“다녀오셨어요?”


정화가 여느 때처럼 안온한, 그러나 제법 밝은 얼굴로 히로유키를 반겼다. 늘 어두운 모습만 보던 와중 낯설기 그지없었다. 도통 웃지 않는 히로유키였으나, 얼굴에 차마 감출 수 없는 환한 기색이 번졌다.


“아침에는 늦는다 하시더니, 일찍 들어오셨네요.”


“일이 좀 있었다.”


“식사는 자셨어요?”


“오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구나.”


“오라버니에게서 편지가 왔거든요. 한동안 연락이 잘 되지 않아 걱정했는데, 잘 지내고 있나봐요.”


정화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드리웠다. 하루 온종일 온갖 고민들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쳤으나, 저 미소 하나에 모든 응어리가 눈녹듯 사라지는 듯 하였다.


“다행이구나.”


“헌데 도련님, 당분간 늦으시나요?”


“아니다. 아마 다음 주부터는 일찍 들어올 것이다.”


히로유키가 제복 상의를 벗으며 답하였다. 그제야 뒤를 돌자, 정화가 언제나처럼 말랑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 너를 번거롭게 하였구나.”


“아니어요, 할 일을 하는 것 뿐인걸요.”


멋쩍은 듯 어깨를 살짝 올렸다 내리는 정화를 향한 눈빛이 슬펐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이상 늘 함께 식사하였으며 갈수록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기로서니 정화의 눈에서는 자괴감이, 히로유키의 눈에서는 애련이 더욱 짙게 묻어났다.


“허면 내일 식사는 평소처럼 올릴까요?”


“평소처럼 올리거라. 대신 점심과 저녁은 따로 챙겨놓지 마라.”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요?”


“먹고 들어올 것이다. 아라요시 가문과 식사를 한다는구나.”


“중한 일이 있으신가봐요.”


“혼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하더구나.”


정화가 그만 옷을 받아들던 손짓을 멈추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허공에 머문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그게 내일이었구나······.

오사무가 부러 날을 당겨 잡은 뒤, 히로유키는 배길성의 일을 핑계로 혼담을 늦추었다. 불령선인에 대한 일인지라 이를 악물고 노기를 삭혔을 그 모습은 보지 않아도 뻔하였다. 다만 양 쪽 집안의 일인지라 날을 신중히 맞추려다 보니 오사무에게 일이 생기고, 또 우여곡절 끝에 날짜를 잡고 나면 아라요시 댁 영애가 귀국이 늦어졌다. 간신히 다시 잡은 날짜 또한 히로유키의 출장으로 인해 다시 엎어지고 말았다. 이쪽에서 미루고, 저쪽에서 미루다 보니, 어느새 넉 달이 아닌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약혼이라는 말이 슬슬 양쪽 집안 사람들에게 인륜지대사가 아닌, 언젠가는 하게 될 무언가로 변모하고 있는 참이었다.


“······ 듣고 있느냐?”


“아, 아아! 송구합니다······.”


넋을 놓고 있던 정화가 표정을 감추려 부러 허리를 깊이 숙였다.


“밤이 깊어야 들어올 것이다. 짐은 따로 받으러 나올 필요 없으니, 곤하면 먼저 자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들어가 쉬거라.”


“저, 도련님······.”


공적인 상황에서만큼은 특별한 말을 더 얹는 편이 아닌 정화가 이례적으로 히로유키를 먼저 불렀다. 히로유키가 늘 그렇듯 변화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게, 그러니까······”


정화가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 때가 아니라면 소용이 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끄러움 때문일까, 주제넘는다 생각해서일까, 그도 아니라면 죄책감 때문일까.


“걱정 마라.”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으나, 실로 바랐던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제 마음을 읽는 것처럼.


“무엇을요······?”


“네가 더 잘 알 텐데.”


뒤이을 말을 바라기라도 한다는 표정으로 히로유키가 정화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만 정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러니까, 저는 단지, 원치 않는 혼례를 할 도련님이······.”


나오려던 말은 다시 막혀버렸고,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물던 정화의 눈이 이내 히로유키의 것과 마주쳤다. 그의 눈 속에 든 건, 제 머릿속을 헤집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도무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검은 호수 속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허망함이었다.


“······ 걱정되어서요······.”


속마음은 ‘안쓰럽다’ 였으나, 막상 튀어나온 건 사뭇 다른 말이었다.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며 제 주인이 단단히 일러 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거늘, 알면서도 기어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꼴은 자신이 보아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예상했던 바 또한 아니기에, 방 안에는 삽시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제 입으로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입 밖으로는 허망한 숨만을 내뱉는 정화를 히로유키는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걱정 말거라.”


제법 밝은 어투에 정화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히로유키를 바라보았다.


“원치 않은 일이라 하지 않았더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방에 있는 이 중, 그것을 원하는 자가 있을까. 허나 단 둘이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아프면 아픈 줄도 모른다 하였던가. ‘혼담’이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제 심경이 어떠하였는지를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가슴을 뜯어내어 속내를 보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허나 도련님의 속사정과는 별개로,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잖아요······.”


“방법이 있다. 다만 네게 보여줄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구나.”


“무엇인가요?”


“내일 저녁이면 알게 될 것이다. 이만 들어가거라.”


“저, 그래도······.”


나긋한 목소리에 뒤따르는 궁금증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크고 검은 눈동자에 가로막혀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연정을 품은지 한참이 지났기로서니, 아직도 이런 상황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셔요······.”


“참, 잊을 뻔 하였구나.”


“예?”


히로유키가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품 속에서 옅은 갈색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받아든 봉투 안에서는 달고 고소한 내음이 풍겼다. 산골에서만 자란데다 지난 1년 간 관저 밖에서 무언가를 사먹어 본 적도 손에 꼽는 정화에게는 낯선 향기였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봉투가 서걱이며 몸을 비볐다.


“······ 이게 뭔가요?”


“오는 길에 팔더구나.”


제법 무심한 어투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정화가 히로유키의 얼굴과, 양과자로 가득 차 터지기 직전의 봉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걸 전부 다 제게 주시는 건가요······?”


“요즘 따라 밥그릇도 거의 비우지 않더구나. 행여 입맛이 돌지 않나 싶어 단 것을 좀 사 왔으니 굶지 말고 다니거라. 몸이 상해서야 되겠느냐.”


단 향이 코 끝을 찌르자, 눈 앞이 아득해졌다. 꽃향기보다 단 향이 음식에서 풍길 수도 있었구나. 그보다 더 달콤한 말이 귓가에 내려앉자, 그만 목이 메었다. 속 안에서 부드럽게 일렁이는 무언가가 제법 뜨거웠다.


“감사합니다······.”


“들어가 보거,”


“저, 헌데 도련님은 안 드시나요?”


눈치를 보던 정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순진무구한 얼굴은 말갛고도 선하여,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물며 마음이 있는 상대는 어떠하겠는가. 찰나였으나,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양이 많아서 그러느냐?”


“그렇기도 하지만, 홀로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그렇지요.”


일 없다 하려 했으나, 옥구슬 굴러가듯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듣고서는 도무지 그러할 수가 없었다. 말마따나 우스울 정도로 양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웬만큼 먹성이 좋은 이도 물려서 절반 이상 남길 양이었으니.


“허면 하나만 주고 가려무나.”


히로유키의 말에 정화가 봉투 안에서 양과자 하나를 꺼내었다. 하얗고 작은 손 위에 얹어진 양과자가 꽤나 커 보였다.


“보아하니 같은 것이 2개 있더군요. 그리고 이게 제일 곱게 빚어졌어요.”


“······ 고맙다.”


히로유키의 입꼬리가 희미한 능선을 머금었다.


작가의말

무슨 방법인지 나도 알고 싶다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물빛 안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수정 사항 공지드립니다 24.07.11 17 0 -
공지 공모전 이후 연재 공지 24.06.10 34 0 -
공지 6/6 이후 연재 공지 24.05.31 25 0 -
59 58화 - 과거 (7) :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24.09.17 1 0 11쪽
58 57화 - 과거 (6) : 그 날의 진실 24.09.14 4 0 12쪽
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5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8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6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7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0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9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7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4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1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0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2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2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4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6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1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7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5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0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