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41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7.27 21:30
조회
12
추천
1
글자
13쪽

43화 - 밤은 길고

DUMMY

* “허면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총독님. 아니, 이제는 사돈 어른이라 불러야겠군요.”


아라요시가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였다. 가벼운 목례를 하는 히로유키의 눈에 총경과 악수를 하는 총독과, 한없이 제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이 들어왔다. 불쾌했다. 이 모든 상황이 찝찝하고 불결하게만 느껴졌다. 현명은커녕, 저를 단지 소유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여인을 지어미로 두고 살아야 하는 여생이 그 어찌 가엾지 아니하랴. 식사 내내 연거푸 비우던 술잔보다 입이 썼다.


* “그럼요. 다음 번에는 총독부 관저로 초대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후 차에 오른 오사무의 표정이 일순간에 뒤바뀌었다. 노기와 울분 외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그의 진노는 아들이 겪어야 할 노고가 아닌, 제 계획을 조금이라도 흐트려놓은 것에 대한 괘씸함에서 시작되었으리라.


* “교활한 놈. 결국 잔머리를 굴려 원하는 것을 얻어냈구나. 내 네가 발령이 나도록 둘 것 같으냐?”


* “발령 얘기까지 꺼낸 마당에 갑자기 취소가 되었다 하면 총경께서도 곱게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따님 유학까지 준비하고 계셨,”


타악-


히로유키의 머리가 휘청였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제 머리에 제법 묵직한 무언가가 던져졌다. 피는 흐르지 않았으나 잠시 동안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 “닥쳐라. 네놈이 원하는 대로 둘 것 같으냐? 어떻게든 내 앞길을 가로막으려 발버둥치는 배은망덕한 놈.”


* “제가 지금껏 했던 일들 중, 아버님께 누가 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 “저 뻔뻔한······! 우리 가문이 없었다면 길거리에 나앉아 돈이나 구걸하고 있었을 놈이 주제도 모르고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네 더러운 피가 흐르는 년놈들에게 잘 하는 것처럼 어디, 네놈 혓바닥도 뽑아주랴?”


무릎 위에 얹은 손이 바짓자락을 찢어질 듯 강하게 쥐었다. 이마에 힘줄이 도드라졌고, 하얗게 물든 주먹은 지진이 난 양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 “······ 맹세코 아버님께 불경하게 굴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부디,”


* “내 앞에서 그딴 소리를 하지 마라. 누가 네 아비냐? 호적에 네놈을 올린 것이, 진정 너를 어여삐 여겨서라고 생각하느냐? 골빈 놈.”


알고 있었다. 자신을 양자로 들이는 것을 누구보다 반대했던 자가 오사무라는 사실을. 그는 그저 선친의 유언을 거스르지 못했을 뿐이었다. 조선인을 양자로 들여 망국의 백성들을 포용하는 척, 제 이익보다 나라의 안녕을 앞세우는 정치인인 척은 할 수 있었어도, 다른 핏줄을 진심으로 아끼는 척만은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한 자를 아버지로 여길 연유는 추호도 없었으니, 분노할지라도 눈물이 날 연유가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

1각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관저에 도착한 차의 문이 열리고 히로유키가 먼저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즉시 몸을 비틀거렸다. 미간을 찌푸린 그의 옆에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거친 숨을 내쉬며 발갛게 달아오른 주먹을 풀지 않은 오사무가 보였다. 한 척은 더 작아보이는 이의 팔이 어찌 6척 장신의 관자놀이에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아버지라는 자로부터 얻어맞은 것보다 중한 사실은, 보는 눈이 꽤나 많았다는 것이리라.


* “머리 검은 짐승을 거두지 말라더니, 다 너 같은 놈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아들 하나만 있었어도 너같은 조센징을 호적에 올릴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지.”


잠시 눈을 감던 히로유키가 흐트러진 옷깃을 고쳐 입었다. 달빛 아래 비친 그의 눈은 오사무를 싸늘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 “저, 저 더러운 눈깔을 봐라. 네 그림자를 보는 것조차 역겹다. 따로 부름이 있기 전까지 1층에는 발도 딛지 마라. 내 말을 어겼다가는 가문의 장래이며 필요 없이 그 직위부터 전부 박탈해버릴 테니 네 뿌리를 똑바로 기억하라는 말이다.”


악에 받친 듯 소리치던 오사무가 이를 갈며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동안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히로유키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스름한 빛에 가려졌으나, 그의 얼굴에 있는 힘줄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눈치를 보던 하인들마저 전부 사라지자, 잠시 동안 눈을 질끈 감던 그가 관저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미 불이 꺼진 계단을 지나는 동안에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형언할 수 없는 굴욕과 모멸감은 분노로 변모하여 숨소리조차 거칠게 휘몰아쳤다. 미처 속을 가라앉힐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방문을 열어젖히자, 그를 맞이한 것은 뜻밖의 존재였다.

11점이 넘은 늦은 시간에 이 곳에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하였다. 허나 방문 앞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려 오던 타닥 타닥 소리는 정화가 내던 것이었다. 장작이 타는 소리인줄로만 알았으나 작은 발이 동동거리며 바닥을 치고 있었다. 탁자 앞에 앉아 무료한 듯 등을 지고 있던 정화가 몸을 돌렸다. 혹여나 싶어 흘리듯 당부하였거늘, 늦은 시간까지 잠을 청하지 않았구나. 곤할 터인데.


“도련님, 이제야 오셨,”


정화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 히로유키가 정화의 등에 제 몸을 기대며 와락 껴안았다.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여 당황하는 정화의 어깨에 그의 가슴팍이 닿았다. 무릎을 꿇은 채 정화의 어깨에 기댄 그의 눈빛이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 도, 도련님, 어찌 이러셔요······? 대체 밖에서,”


“······ 무거우냐.”


“아, 아니요······.”


“허면 잠시만 이러고 있자······.”


히로유키가 긴 팔로 정화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정화가 할 말을 잃은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뿌리칠 마음도 없었으나, 차마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두꺼운 옷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와 작지만 분명하게 어깨를 울리는 알 수 없는 진동만 느껴질 뿐이었다. 울고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독사 장교가, ‘그’ 후지와라 히로유키가 저를 껴안고서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 아무런 일도 없었지.”


“헌데 어찌,”


“안 되겠느냐······.”


히로유키가 나른한 목소리로 정화에게 속삭였다. 한참을 얼어있던 정화가 이윽고 어깨를 감싼 팔을 제 것으로 당겨 안았다. 지극히 약하였으나,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분명하였다.


“······ 보고 싶었다, 네가 너무도······.”


그의 입으로 이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 짐작이라도 했으랴. 정화의 작고 마른 손이 히로유키의 커다란 손을 살포시 쥐었다.


“주인 나으리께서 또 뭐라 하셨나요?”


대답이 없었으나,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정화의 어깨를 조금 더 세게 안음으로써, 그는 이미 대답을 한 셈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아라요시 경부 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답은 여전히 없었으나, 히로유키의 팔을 감싼 정화의 손길이 그의 팔을 점점 더 가까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냥······. 별 연유 없다.”


한참 만에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에는 억눌린 목소리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말 없이도 그의 심장을 통해 모든 것이 전해졌다.


“Пожалуйста вог, спасите мне в этом войне и дайте миру.”


“노국 말이잖아요, 제가 못 알아듣는······.”


“······ 몰라도 된다. 허니 애써 알려 하지는 마라······.”


히로유키가 피식,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 연유를 물어도 될까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가 이리도 서글픈 연유를요.”


“연유라······.”


한없이 다정한 말, 그 속에 가시가 있을지, 아니면 이제 막 눈이 녹기 시작한 봄처럼 겉만 따스한 것일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전적으로 이 아이가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에 달렸겠지. 가시에 찔려도 좋고, 속이 차가울지언정 겉이 따뜻하다면 품 속 깊이 끌어안고자 하였다. 그리고 내심 그 속마저 따뜻하기를 조금은 바라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나를 어찌 여길까, 내가 생각하는 것의 절반, 그 절반만큼이라도 나를 생각해줄까.


“아니, 그 또한 묻지 말아다오. 그저 아무런 연유 없이 한 번만······. 딱 한 번 정도만 이렇게 있어 다오.”


정화는 대답이 없었다. 그조차 또 다른 질문이 될까 두려워서. 그저 가만히 그의 어깨에 등을 기대며, 몸의 힘을 조금 풀 뿐이었다. 문득, 정화의 가녀린 어깨가 떨려왔다. 우는 것이 아니었으나, 제 어깨를 짓누르는 작지만 분명한 떨림. 제게 기댄 히로유키의 속에서 무언가가 소리없이 들끓고 있었다. 사람의 속이 끓는 때는 단 한 순간 뿐이리라. 그리고 이 자는 지금······.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허나 손이 저도 모르게 제 어깨를 감싼 길고 커다란 양팔로 향하였다. 토닥토닥 하는 소리가 방 안에 도담하게 울려퍼졌다. 측은지심, 그것은 우습게도 또다시 모든 상황을 무마하였다.


“넌 이런 내가 어찌 보이느냐.”


“제가 감히 무슨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요.”


“나를 어찌 생각하더라도 할 말이 없겠지.”


그 말을 듣자마자 실감이 났다. 제아무리 잘 대해주었어도, 이 자는 결국 민족을 배반했다는 사실이. 무슨 짓을 해도 시원찮을 친일파, 그 중 가장 악질인 자가 바로 이 자이다. 그 전부터 가난했던 조선인들의 고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고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는 이들을 불령선인이라 낮잡아 부르며 체포하고, 고문하며, 죽이기까지 서슴지 않은 자. 같은 민족이고 조선어를 더 편히 여기면서도 자신이 조선인이라 생각하지 않는, 그런 자들이 바로 내 가족을 짓밟았다. 오라버니는 힘들게 모은 재산을 다 잃고 이제야 간신히 숨통을 틔웠다. 그리고 내 은인과도 같은 나의 언니 윤관영은 그 놈들의 손에······.

정화의 몸도 함께 떨려왔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자명하였다. 얼굴이 눈물에 젖어드는 소리가 제 귀에는 그 무엇보다도 크게 들려왔다. 진동하는 어깨 위에 놓인 팔이 그것을 모를 수 없었고, 이내 몸을 더 강하게 감쌌다.


“······ 아직도 날씨가 춥지.”


전에 없이 다정한 한 마디가 가슴을 울렸다. 날씨가 춥다면서 그의 손은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다, 라는 소리가 돌멩이를 던진 호수 속 일렁이는 파장마냥 시나브로 다가왔다.


“네, 너무······.”


근자에 그에게 들었던 말 중 가장 다정한 목소리요, 가장 따뜻한 한 마디였다. 이런 어투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였던가. 마음 한 켠을 고요히 어루만지는 그 말에, 참았던 탄식이 새어나왔다. 목 안에서 울컥하는 소리가 바스라졌고,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넘쳐 흘렀다.


“······ 너무 추워요······.”


“불을 더 때 주랴.”


“······ 불이 도움이 될까요.”


“더 추운 것보다야 낫겠지.”


대답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자신도, 울음이 잦아들 자신도 없었으니. 그저 아까 그 자세로 가만히 서서 온 힘을 다해 울음을 참을 뿐이었다.


“······ 잠시 나갔다 오마. 그 사이 한 숨 자거라. 잠이 모든 걸 바꾸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잠시 동안은 모든 걸 잊게 해 주지 않느냐.”


“도련님은······!”


이런 일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냐는 말이 혀 끝에서 맴돌았으나, 또다시 ‘그’ 두려움에 막혀 나오지 못하였다. 이를 악물고 말을 삼켰으나, 목구멍으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였다.


“······ 괜찮으신가요······.”


이게 과연 내 진심이었을까. 확실한 건 거짓된 마음은 아니었다.


“······ 쉬거라.”


히로유키가 정화의 어깨를 다독인 다음 방문을 나섰다. 전에 없이 서글픈 표정을 하고서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정화가 침대에 걸터앉아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치맛자락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방 문은 굳게 닫혔으나, 그 너머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애끓는 통곡을 목 너머로 삼키는 소리가 문틈 새로 새어나왔다. 문에 기대어 방 바깥에 주저앉은 이는 차마 한숨조차 편히 내쉬지 못하였다.

속이 쓰렸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무거운 숨결이 쏟아졌다. 문득 들었을까, 싶어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참았던 것을 다시 내쉬었다. 참아서 달라지는 것이 있으랴. 밤은 길고, 한숨은 깊을 것인즉.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물빛 안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수정 사항 공지드립니다 24.07.11 17 0 -
공지 공모전 이후 연재 공지 24.06.10 34 0 -
공지 6/6 이후 연재 공지 24.05.31 25 0 -
59 58화 - 과거 (7) :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24.09.17 1 0 11쪽
58 57화 - 과거 (6) : 그 날의 진실 24.09.14 4 0 12쪽
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5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8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6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7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0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9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7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4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2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1 1 12쪽
»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3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3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4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6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1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7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5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1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