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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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37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7.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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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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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DUMMY

눈물로 희미해졌던 세상이 점차 밝아진다. 안개 속에 가리워졌던 기억이 서서히 드러난다. 몸을 뉘인 이 곳이 어디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불편했다. 넓은 침대 끄트머리에 불안스레 걸쳐서 몸을 구긴 채로 자는 잠이 깊을 리 만무하였다. 어김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방과는 비교하는 것조차 우스울 정도로 편한 이부자리에서 이리 불편한 잠을 청하였으니 제법 이른 시간에 눈을 뜰 수 있었으리라.

눈을 비비며 잠을 깨우던 정화가 방문을 나섰다. 히로유키가 밤사이 어디서 잠을 청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아침을 거르고 외출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잠귀가 제법 밝은 제 귀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간밤에 방에도 들어오지 않은 듯 하였다. 주방에 내려가려던 정화를 자리에 묶어둔 것은 다름 아닌 문이었다. 무언가가 걸린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번 덜컥이기를 반복하던 도중, 느닷없이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하여 바깥을 살피려는 정화의 몸이 일순간 앞으로 젖혀졌다.


“꺄악! 헙······!”


비명을 지르다 말고 정화가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제 몸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허나 당황하기는 상대 또한 매한가지였는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무, 무엇 하느냐 거기서?”


히로유키가 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으로 물었다. 그가 불안한 어조로 말을 더듬는 모습은 실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1년이 넘게 그의 곁에서 일을 하면서도 처음 보는 광경에 정화의 눈이 더 커졌다.


“어찌 거기에······?”


“들어오려던 참이었다만······.”


아닌 척 애를 썼으나, 모로 보아도 문 앞에 기대어 졸다가 갑자기 일어선 모양새였다. 발뺌할 수도 없는 것을 내뱉고서도 멋쩍었는지 히로유키가 붉어진 얼굴을 돌리고는 작게 헛기침을 하였다.


“설마, 거기서 주무셨나요······?”


“무슨 소리냐?”


“그 앞에, 거기 쭈그리고 앉아서는······!”


“잠이 덜 깼나 보구나. 간 밤 사이 깊이 잔 모양이지.”


“허면 어디서 주무셨어요?”


계속되는 히로유키의 발뺌에 정화가 다소 노기를 띠며 캐물었다.


“알 거 없다.”


“그러다 들키면 경을 치는 건 접니다! 혼나는 정도가 아니라, 쫓겨나거나 어디 하나 부러져도 할 말이 없는데 잘 아시는 분이 어찌······!”


울컥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히로유키의 기세에 억눌려 그만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제발 그러지 마셔요······. 좋은 침대에 누워 잔다고 잠마저 깊이 자는 건 아니잖아요······.”


정화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감추려 이를 악물었다. 어찌 보면 떼를 쓰는 어린 아이 같기도, 어찌 보면 자식을 혼내는 어머니 같기도 하였다. 히로유키가 당황한 듯, 정화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커다랗고 긴 손 끝이 무언가에 닿은 양 움찔거렸다.


“······ 내가 좀 불편하게 잔다 하여 네게 무슨 일이 생기는 일은 없을 게다. 허니 안심하거라.”


“그런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다시 목소리가 커질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울음소리가 섞여 나는 걸 어떻게든 감추고자 하는 몸부림이었을 뿐.


“······ 제 마음이, 그냥 편치 않아요······. 허니······.”


뒷말은 차마 더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이미 저 말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짐작했을테니. 정화가 난감한 인상을 쓴 채 갈팡질팡하며 한참을 망설였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고, 그저 고요한 적막만이 이어졌다.


“······ 알았다. 다시는 널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마. 미안하게 되었구나.”


지난번처럼 술을 마신 때도 아니었으나, 어투와 내용이 더없이 다정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정화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자 하였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 입을 벙긋벙긋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은 딱히 부탁할 것이 없구나. 가서 일을 보거라.”


“······ 허면 아침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정화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한 식경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을까, 그 사이 히로유키는 밤사이 갈아입지도 못한 옷을 대충 개켜두고 목욕을 마친 후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방 안에 들어선 그의 눈에 탁상 위에 쟁반을 올리는 정화가 들어왔다.


“밥이 한 그릇이구나.”


“부족하시면 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리 하거라. 그 밥은 네 것이다.”


한 두 번 하는 말이 아니었고, 이 반응이 나올 것을 예상치 못한 바 또한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런 날까지 함께 식사를 권할 줄이야. 매번 작게나마 거절의 의사를 표했음에도 어찌 한 번을 안 넘어갔을까. 그리 말하기에는 겸상해 온 시간이 길어 제법 우습기는 하였다.


“······ 저는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으니 가져오너라.”


말도 안 되는 대답으로 응수하는 히로유키의 표정을 본 정화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따 끼니를 때울 시간이,”


“내가 가져오랴.”


“······ 가져오겠습니다······.”


결국 한숨을 쉬며 방문을 나서는 정화였다. 이제는 주방에서도 자연스레 제 식사를 함께 차려놓았다. 당연히 제가 먹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겠지만, 그저 왜 굳이 번거롭게 두 번이나 상을 차려야 하는지 답답해할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도련님께서 몸이 고단하시어 드시는 양이 많아졌고, 원체 깔끔하시어 수저도 한 벌씩 더 놓아달라 신신당부를 했다며 둘러대는 건 정화의 몫이었다. 아무도 히로유키의 말에 토를 달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감사한 순간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쟁반을 들고 온 정화가 그것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


“어디 아픈 것이냐?”


“······ 아닙니다, 먹겠어요.”


양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나, 말소리는 오가지 않았다. 어색하고 무겁기 그지없는 적막이었다.


“······ 약혼은 미루기로 하였다.”


“예? 참말로요?”


적막을 비집고 무심하게 내뱉은 말에 정화가 반색하였다.


“그렇다마다.”


“주인 나으리께서 허락하시던가요······?”


“거의 쫓겨날 뻔 하였지.”


“하하······.”


일본은 물론 조선 땅에서조차 발 붙이고 살기 힘들다는 말을 저리 태연하게도 하였다. 마치 갈 곳이라도 정해둔 것처럼. 멍청한 웃음이라도 흘리지 않으면 이 분위기를 무마할 수 없을 듯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당분간은 이 집안에서 약혼 이야기가 나올 일이 없을 듯 하구나.”


궁금하다는 말로는 그 간절하고도 절박한 마음을 전부 보일 수가 없었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가. 허나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두려움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 그것은 필경 연민이었다. 더 이상은 예전만큼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시에 안쓰러웠다. 그를 안쓰러이 여기는 것만으로도 천인공노할 죄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허나 그 어떠한 천벌을 받기로서니, 잠시라도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도련님은 괜찮으셔요?”


“내가? 원치도 않는 약혼이었는데 뭐가 문제더냐?”


“······ 주인 나으리께서 노하셨을 터인데 괜찮으시냐는 말입니다······.”


“내가 그리 예쁨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래도요······.”


여전히 조심스러운 정화의 목소리에 히로유키가 얼굴에 가벼운 빛을 띠었다. 스쳐 지나갈 듯한 찰나였으나 물 위에 동동 떠오른 달처럼 해사한 웃음에 잠시라도 불편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기왕지사 미움받을 요량이라면 내 하고 싶은 것 하나 즈음은 이뤄야 하지 않겠느냐?”


“하하, 그렇지요······.”


어색한 웃음 뒤로 이어진 것은 어색한 침묵이었다. 숟가락이 움직이는 소리만 달그락거리며 허공을 메웠다. 저 웃음을 짓기까지 저 자도 오랜 시간이 걸렸겠지. 그 마음을 감히 어찌 헤아리겠는가. 가난한 집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자신과 부유한 곳에서 홀대를 받아 온 그. 다음 생에 어떠한 삶을 선택할지 묻는다면 아마 이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끊이지 않는 고민을 해야만 할 것이다.


“너도 알지 않느냐. 이 집에서 약혼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제아무리 총독이라지만 내 약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불이익을 보는 것은 내가 아니겠지.”


참으로 영특한 자였다. 이 살벌한 곳에서 제 입지를 저 정도로 키워나간 것만으로도 보통을 아닐 터. 그의 모든 행동에는 한 치의 우연도 없었다. 제게조차 소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전부 알 수는 없었으나, 평소 성정을 보아서는 그의 숨소리, 걸음걸이 하나마저도 철저히 계산되어 있으리라. 정화가 그를 연모하면서도 두려운 심정을 전부 떨쳐내지 못하는 연유 중 하나였다.


“······ 그저 이 모든 것이 무탈히 지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요한 방 속에서 둘만의 시간이 흐른다. 어떠한 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머릿속을 메우는 생각에는 끊임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낼 수도, 이 이상으로 다정한 말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각자에게 처한 상황 때문일까.


“혹 사흘 뒤 일이 바쁘더냐?”


침묵을 깬 것은 히로유키였다. 잠시나마 복잡한 생각은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자 하였던 것일까.


“아닙니다, 도련님께서 출타하신 동안 청소만 마치면 되어요.”


“허면 몇 점 즈음 되겠느냐?”


“통상 두 점 즈음에 시작하여 한 시진 정도 걸립니다. 헌데 제가 필요하시다면 미리 끝내놓겠어요.”


“오냐. 허면 사흘 뒤, 일을 마치면 석 점 반까지 서대문 감옥 앞으로 나오너라. 내 일찍 퇴청한 후 출장을 가야 하는데 네 도움이 좀 필요할 듯 싶구나.”


“알겠습니다. 며칠 계실지 언질해 주신다면 여벌 옷을 챙겨두겠습니다.”


“그 날로부터 사나흘 정도 있다 올 것이다.”


“그리 길게요······?”


정화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되물었다. 늘 짙은 기색이 역력하던 히로유키의 낯빛이 묘하게 부드러워졌다.


“출장을 어디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되어요?”


“총독부다.”


“······ 예?”


“합숙하여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어 그렇다. 사정 상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짐을 챙겨달라 한 것이다. 멀리 가지는 않으니 걱정 말거라.”


총독부 관저에 사는 이가 총독부로 출장을 간다니, 웃지 못할 일이었다. 헛된 걱정을 한 것이 우스운 듯, 정화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우습더냐?”


“아닙니다, 그저 과한 걱정을 한 제 스스로가 황당무계하여서요.”


답지 않게 해맑은 정화의 깔깔거림에 히로유키가 잠시 당황하더니만 이내 함께 실소를 터뜨렸다.


“서대문 감옥에서 총독부까지 시간이 빠듯하다. 허니 늦지 않도록 미리 인력거를 불러 두고 짐만 받아가서 정리해 다오. 더 필요한 것이 생긴다면 늦어도 그 날 출근 전까지는 알려줄 터이니 미리 부탁 좀 하마.”


“알겠습니다. 이만 상을 치우겠습니다.”


한결 마음이 놓인 표정으로 정화가 상을 정리하였다. 비록 사나흘이라지만 무엇을 어찌 챙겨야 할지, 벌써부터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한 고심이 표정에 훤히 드러나는 것도, 소리 없는 옅은 웃음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로.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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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7화 - 눈물 24.08.10 14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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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5화 - 도시락 24.08.03 11 1 13쪽
»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1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2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2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4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6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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