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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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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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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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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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5화 - 도시락

DUMMY

1916년 5월 17일


이른 아침부터 총독부 관저 2층에서는 종종거리는 발소리가 야트막이 울려 퍼졌다. 아침 상을 차리기도 전에 먼저 나간 히로유키에게 통보조차 듣지 못한 정화는 별 수 없이 그의 식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총독의 아들씩이나 되는 이가 받는 상 치고는 단촐했으며, 군인의 밥상치고는 양이 많지 않았다. 여인인데다 그리 많이 먹지 않는 제 배에 딱 맞을 정도라면 이 자에게는 필경 부족하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간 함께 지내며 보아온 히로유키는 어디 하나 아픈 구석은 없었다. 다만 기력이 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밥상을 비운 정화가 목반과 그릇을 한 켠에 제쳐두고 익숙한 듯 청소를 시작했다. 한 시진이 조금 안 되었을까, 주름 하나 잡히지 않고 빳빳하게 펴진 이불부터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손으로 대충 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으리라.

청소를 시작하기 전, 한 쪽에 밀어두었던 목반을 들고 정화가 주방으로 내려갔다. 바삐 설거지를 마친 다음,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정화가 앞치마를 둘러매었다. 2층으로 올라간 이후로 제 손으로 음식을 할 일이 없었던지라 심경이 불안하였다. 어떤 음식을 해야 하려나, 어찌 요리해야 입맛에 맞으려나.


“뭐야, 남정화야?”


옷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들어오던 설이 정화를 발견하고 놀란 듯 물었다. 마찬가지로 놀란 정화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척이라도 내지, 좀!”


“네가 어쩐 일로 주방에 있어?”


“도련님 사흘 간 출장 가신대. 해서 도시락 싸려고.”


“지금 날씨가 이리 더운데 사흘치 도시락을 싸려는 건 아니지?”


“아이, 무슨 소리야.”


“출장 가는 곳에서는 밥조차 아니 준대? 왜 네게 그런 번거로운 일을 시키는지, 참.”


“나, 나야 모르지······.”


정화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려 부러 손을 바쁘게 놀렸다.


“헌데 넌 어찌 된 일이야?”


여급들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설은 직접 일을 하지는 않았다. 행여 잘못 돌아가는 일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족했기에, 그야말로 주방에 발을 들일 연유는 더더욱 없었다.


“시장 좀 다녀오느라 한 끼도 못 먹었거든. 간식으로 국수 했다길래 국시꼬랭이 (국수를 만들 때 면 반죽 끝의 뭉툭한 부분을 잘라 남은 것. 주로 구워서 간식으로 먹는 경우가 많았다.) 라도 남았나 해서 들렀지. 넌 먹었어?”


“아니야, 나는 배가 불러서 말이지. 도련님께서 아침을 안 드시고 가셔서 내가 대신 비웠거든.”


“간만에 많이 먹었으니 다행이네.”


평소에도 비슷하게 먹는다는 말은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히로유키와 가까워질수록 감춰야 하는 것도 많아지니, 설을 볼 때마다 가슴 속 무언가가 오므라들었다 펴지며 뒤틀리는 심경이었다.


“언제 즈음 나갈 참이야?”


“숨 좀 돌리고 반 시진만 있다가 가려고.”


“날이 덥더라, 조심해. 정화 너희 오라버니는 잘 계셔?”


“오라버니야 뭐 잘 있겠지. 그러고 보니 근자에는 내가 편지를 쓰지 못해서 연락을 통 못 했네.”


“네 말 들으니까 고향 가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난 여지껏 우리 조카 얼굴이랑 이름도 모르네.”


“오라버니에게 부탁해서 전화 한 번 더 쓸래?”


“아니야, 전보도 비싸잖아. 안 그래도 내일 즈음 편지 부치려 했는데 생각난 김에 저녁에 써야겠다.”


정화가 설에게 고기 부침 한 조각을 먹여주며 말했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어때? 맛있어?”


“네 요리 실력이 어디 가겠나. 고단할 텐데 뭘 또 그리 정성스럽게 해?”


“호, 혹여나 맛없다고 혼나면 어떡해······.”


애써 시선을 피하고자 정화가 다급히 찬장으로 다가가 깨소금을 꺼내었다. 부디 제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어유 고생이 많다, 정말. 맛 좋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대체 이게 뭔 고생인지, 참.”


찌뿌둥한 다리를 연신 두들기던 설이 쪼그려있던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가?”


“청소 어찌 했는지 좀 보러 가려고. 이만 들어가 쉬어. 출장 갔으면 당분간 몸 좀 편하겠네, 부럽다, 얘.”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 말해. 손 남으니까 얼마든 도와줄게.”


정화의 걱정 어린 말에도 설은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설이 사라진 자리를 보던 정화가 뒤늦게 제정신을 되찾고 하던 일에 다시 열중하였다. 도시락을 맨 나중에 만들걸 그랬나, 행여라도 밥이 식는다면 어찌하려고.

밥을 섞는 주걱을 쥔 손이 멈추었다. 죄책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듯 하였으나, 잊을 만 하면 되살아나서 제 숨통을 옥죄었다. 잊어서는 아니 될 사실을 잊었다는 사실에 숨은 갑절로 막혀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어느 한 쪽은 끊어내야 할 일이거늘, 잘못된 걸 알면서도 누구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가슴이 아팠다. 어찌하여 제게만 이러한 시련이 닥치느뇨. 괴로운 심정과 더불어 제 몸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더더욱 현실을 참담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두려운 것인가. 독약을 섞어도 모자를 판에, 이 자가 느낄 맛이 그리도 중하던가. 정녕 연모라는 건,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던가.

정신을 차려 보니, 제 몸은 이미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불편한 마음을 한 켠으로 제쳐둔 채로 문을 나섰다. 양 손에는 정성들여 싼 도시락과 히로유키의 옷가지 등 여러 짐들이 가득한 채로. 제법 무게가 있었고 서대문 감옥까지는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였으나, 마음이 복잡하여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관영의 면회 이후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총독부였다. 연유가 무엇이느냐 묻는다면 두려움이리라. 제 혈육이 스러져간 곳에 맨정신으로 다시 올 자신이 없었기에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연유로 망설임없이 걸음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정화가 언제 괴로웠냐는 듯 다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의 정체를 마주하였다.


“어, 도련, あっ、すみません, 旦那様! (아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


평소 집 안에서만 대화를 나누던 것이 습관이 되어 급히 국어로 바꾸어 말한 정화에게 히로유키가 조선어로 답하였다. 입을 틀어막으려던 손이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지나가던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여긴 괜찮다.”


그의 말에 정화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지나가는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헌데 일찍 왔구나. 혹여 오래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지금 막 인력거를 잡으려던 참이었어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히로유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 많은 짐을 들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걸 전부 혼자 들고 온 것인가? 관저에서 총독부까지는 멀지 않았으나, 걸어다니기에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헌데 예까지는 어찌 온 게냐?”


“걸어서 온 것이온데······.”


“이걸 전부 들고 말이냐······?”


히로유키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여인의 몸으로 이 정도의 체력을 가진 자를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겉으로 봤을 때는 체구도 작고 여리여리한 정화였기에 히로유키가 아닌 누구라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예, 그럼요. 헌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며칠 있으면 돌아갈 터인데 짐이 이리도 많다니······. 아니, 그보다 내가 네게 줄 짐도 있거늘, 그건 어찌 들고 가려 하느냐? 집에 차가 없는 것도 아니거늘 어찌 이리도 온 것이냐.”


“아, 괜찮습니다. 일이 더 없어서 천천히 걸어가면 되어요.”


순진무구한 눈과 무던한 어투로 답하는 정화를 바라보는 히로유키의 입에서 많은 감정이 뒤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답지 않게 많은 말을 내뱉고서는 복잡한 듯한 눈빛으로 그가 정화를 어루만졌다.


“······ 인력거는 두 대를 잡거라.”


“다른 분도 오십니까?”


“네가 타고 가야지.”


“제가요······?”


정화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돈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인력거를 어찌 타란 말인지, 제 주인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여린 몸으로 이걸 들고 그냥 갈 참이었더냐?”


“그건 아니지만,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무엇보다 전 돈을 들고 나오지 않았는걸요.”


“······ 설마 내 너를 그런 식으로 괴롭히겠느냐? 돈은 대신 내 줄 테니 우선 2대를 잡거라.”


히로유키가 답답하다는 듯 탄식을 내뱉으며 명하였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정화가 금방 정신이 들었는지, 때마침 저 멀리 지나가는 인력거 2대를 잡았다. 히로유키가 인력거 하나에 오르는 동안 정화는 남은 인력거 하나에 그에게서 받은 짐을 실었다. 정화가 양쪽 인력거에 짐을 모두 싣고 나자, 히로유키가 그에게 작은 꾸러미 하나를 건네었다. 한 눈에 보아도 잠시 인력거를 타는 것 치고는 많은 돈이었다.


“감사합니다······.”


“집에는 사흘 뒤 열 점에 도착할 것 같구나. 늦은 시간이니 먼저 잠을 청해도 된다만, 혹여 깨어있다면 1층으로 내려와 짐만 받아다오.”


“예, 알겠습니다. 저 도련님······.”


“왜 그러느냐?”


정화가 쭈뼛거리다 한참 손에 쥐고만 있던 꾸러미 하나를 건네었다. 아침 내내 설의 질문 세례를 애써 무시해가며 싼 도시락이었다. 히로유키가 떨떠름한 얼굴로 도시락을 건네어 받으며, 이것이 무어냐는 표정으로 정화를 바라보았다.


“······ 늦은 시간까지 시장하실 듯 하여서요. 약소하게나마 준비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시면 아니 됩니다.”


“······ 고맙구나.”


“조심히 다녀오셔요.”


정화가 발갛게 상기된 고개를 돌리며 몸을 급히 피하였다. 히로유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저씨는 조선총독부로 가 주시고 아저씨는······.”


인력거꾼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나,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슬쩍 히로유키를 쳐다보자, 그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는 정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제 입에서 원하는 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출발하지 않겠지.


“후지와라 관저로 가 주세요.”


정화가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남은 말을 뱉었다. 그제서야 인력거 하나가 출발하였고, 정화는 허리를 숙여 히로유키에게 인사를 올렸다. 멀어지는 인력거가 점이 될 때까지 한참을 서서 바라보는 정화의 눈빛은 알 수 없었다. 두 눈에 비친 이른 노을이 아스라이 반짝였다. 뒤에서 메아리치는 재촉에야 급히 뒤돌아 인력거에 오른 정화의 얼굴은 알 수 없었다. 체력이 차고 넘쳐서도 있겠으나, 부러 인력거를 타지 않은 것은 필경 다른 이를 고생시켜 제 편의를 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키가 갑절은 커진 기분이었으나, 연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어깨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결국 관저 앞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기고 인력거꾼에게 돈주머니를 전부 건넨 채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간 정화였다. 한숨을 내쉬며 관저 안으로 들어섰다. 히로유키의 방에 남은 짐을 놓아둔 정화가 빈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하루 일과가 이리도 일찍 끝나다니, 대체 얼마만에 있는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도 여름치고는 제법 시원했다. 평온했다. 이리도 안온할 수가 있을까. 헌데 어찌 이리도 가슴이 불편할까.

잠시 멍하니 탁상에 앉아 있던 정화의 눈에 오랜 신문이 하나 들어왔다. 히로유키가 다 보고 멀리 제쳐 둔 것이었다. 날짜를 보아하니 꽤나 오래 된 듯 싶었다. 평소에는 신문이나 순보 (열흘에 한 번씩 펴내는 신문이나 잡지.) 를 읽지 않으나, 어찌 된 일인지 눈에 띄었다. 매일 순보며 호외며 빠짐없이 읽는 설과 달리 자신은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아는 내용이려나, 싶었으나 제목 첫머리부터 정화를 경악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조선국 토지조사 시작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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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1화 - 진실 24.08.24 10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9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7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4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 45화 - 도시락 24.08.03 12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1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2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2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4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6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1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7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5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1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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