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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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44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8.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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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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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49화 - 상처

DUMMY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반쯤 풀린 눈, 헝클어진 머리칼, 정처없이 흔들리나 차마 보듬어줄 수 없는 작고 가녀린 손, 그리고 균형을 잡지 못한 채 푹 쓰러져 있는 고개까지 어디 하나 안쓰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한 눈에 보아도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어 보였으나, 그럼에도 더 말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반드시 마음 속에 담아 둔 것을 전부 말해야 한다 생각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난한 집안에서 학문을 바라는 이가 태어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있겠습니까?”


첫머리부터 가슴에 비수를 꽂는 듯 하였다. 정화의 이야기인지, 유석의 이야기인지도 알 수 없었으며, 그들의 앞길을 자신이 막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딸이라면 그 안타까움과 애끓는 한은 두 배가 될 것입니다. 허나 자식이 괴로운 것만큼은 보지 못하는 아버지께서는 계집임에도 불구하고 여고보까지는 반드시 보내주겠다 하셨습니다. 오라버니가 이미 학문을 마쳤음에도 그리하셨습니다. 집안이 가난함에도 큰 결심을 하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며 다짐했습니다. 졸업만이라도 하자, 졸업만이라도 해서 반드시 경성으로 가자. 우리 형편에 제국대학 (일본이 제국대학령에 의거하여 설립한 9곳의 국립대학을 이르는 말.) 까지는 언감생심이니, 여고보만 나와도 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이다. 집안을 일으킬 수는 없을지라도, 내가 한 이 공부가 헛되지만은 않도록 하자······.”


손 끝이 오므라들어 탁상을 파고들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곳을, 손톱이 뚫을 것만 같았다. 걱정이 앞선 히로유키가 손을 바닥으로 내려 주고자 손을 뻗었으나, 정화는 그조차도 매몰차게 내쳐버렸다.


“허나 그것마저도 전부 헛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오라버니가 잘만 이끌어가던 가게를 어떤 왜놈 하나가 가로챈 뒤로는, 삼순구식 (삼십 일 동안 아홉 끼니밖에 먹지 못한다는 뜻으로, 몹시 가난함을 이르는 말.) 이 무엇인지를 원치 않아도 알게 되더이다. 아버지는 그 일로 인해 화병이 나서 마지막 순간까지 괴로워하다 돌아가셨습니다. 남은 식구 입에 풀칠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학업이 중하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일을 먹고 살기 위해 그만 두는 것이 그리도 허망하고 우습더이다. 다행스럽게도 관영 언니가 학당 장학금으로 받은 학비를 대신 내어주었기에 그나마 조금 더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언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잠시 말을 멈춘 정화가 깊은 숨을 들이켰다. 들이마시는 숨결이 떨리더니만, 이내 부르르 진동하던 몸이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듯, 히로유키도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또 다시 뿌리쳐질 것을 알면서도, 걱정 어린 손길이 움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요.”


씁쓸한 미소가 얼굴 전체에 번졌다. 벌써 2년은 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고소(苦笑)를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항상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아주 오래 된 무언가를 떠나보낸 듯한 그 기분을 애써 외면하고자 고개를 돌려보아도, 늘 공허함을 숨길 수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아플 정도로 선명하게 체감한 오늘 같은 날에는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조실부모하였다, 돈이 없어 여고보마저 졸업하지 못했다, 기운 가계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내 날개를 스스로 잘라야만 한다는 그 말을 웃으며 내뱉기까지 속이 얼마나 난도질 당했을지,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지 아십니까? 본디 내 스스로에게 내는 상처가 더 아픈 법입니다. 스스로가 가엾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부러 더 많은 상처를 내었고, 피가 전부 말라 흐르지 않을 즈음이 되어서야 거짓된 웃음 뒤로 눈물을 감출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숨소리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다름 아닌 히로유키의 것이었다.


“오라버니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나와 비견하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로 갖은 고생을 다 하였기로서니, 단 한 번도 내게 슬픔을 토로한 적이 없던 사람입니다. 사기를 치고 가게를 가로챈 것은 오라버니가 아닌 그 죽어 마땅한 왜놈이거늘, 내 어찌 오라버니를 원망하겠습니까? 늘 나를 자식 이상으로 챙겨주었기에, 나는 일찍 잃은 아버지가 오라버니로 태어났다 생각하여 돌아가신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시대가 이러할 진데, 감히 어찌 탓하오리까.”


봇물 터지듯 말이 이어졌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인지, 말이 나를 조종하는 것인지, 평소 같았으면 그의 앞에서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나는 속이 넓은 것일까, 그간 이 많은 것들을 어찌 눌러서 담아두었을까. 신이하다 못해 하찮고도 우스울 지경이었다.


“나의 또 다른 아버지였던 오라버니, 나의 세상이었던 언니. 그 둘이 어떠한 고초를 겪었는지, 누구로부터 그러한 수모와 고난을 겪었는지 멀쩡히 알면서도 나는 그들을 배반했습니다. 은혜는 입을 대로 입어놓고서, 감히 추악하게도 인륜을 저버렸습니다. 그 둘이 누구의 손에 스러졌는지 버젓이 알면서도, 내가 마음 속에 누구를 품었습니까? 이 더러운 마음 속에 대체 누가 들었습니까?!”


참고 참았던 것은 절규로 튀어나왔다. 목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질 때까지 울부짖을 때 즈음이면, 귓가에는 제 목소리일지라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면, 이전보다 더욱 처참히 무너진 상태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오열하고 있었다. 눈 앞에는 여전히 목석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를 놓고서는.


“······ 오라버니가 죽었습니다. 새언니와 함께 조달을 먹고 죽었다 합니다. 애써 모은 작은 땅마저 당신들이 빼앗아가서, 돌도 되지 않은 아이가 굶어 죽었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그 뒤를 따라갔다 하더이다. 이게 당신들의 뜻입니까? 젖먹이 아이를 굶겨죽이고 부모마저 자진 (자살.) 토록 하여 이 땅에서 살아 숨 쉬는 조선인들이 마지막까지 고통받다 비명횡사하는 것이야말로 당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입니까?”


피맺힌 한을 품어야만 나올 수 있는 그 말은 지난 6년간 그토록 알아내고 싶던 의문이기도 했다. 같은 인간에게 도무지 저지를 수 없는 일을 어찌 그리도 잔인하고 치밀하게 행하였는지를 진심으로 되묻고 싶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난, 난······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내 피붙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면서도, 서대문 감옥에는 언니가 아닌 내가 들어가야 마땅했습니다. 내가 당신처럼 왜놈에게 빌붙어 좋은 처지를 누리며 민족을 배역한 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애환은 곧 자신을 향한 화살로 되돌아왔다. 나 스스로를 향해 겨눈 화살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떠한 것보다도 날카로웠다. 늘 측면에서만 바라보던 화살을 처음으로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촉이 이리도 날카로웠구나. 스치기만 해도 죽을 것 같았으나, 그것을 내 손으로 내 심장에 꽂아넣는 것이, 그럼에도 아프다고 비명 한 자락, 신음 한 줄기조차 내뱉지 않는 것이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도련님께서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보시었어요?”


힘겹게 꺼낸 다음 말조차도 목에 들어온 검이요, 관자놀이에 겨눈 총구였다. 어떠한 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더럽고도 추악한 짐승같은 놈일 뿐이니.


“피가 섞인 이가 짐승 축사보다 못한 지옥 속에 사는 모습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라만 보셨습니까? 마지막 남은 가족 둘이 죽었는데 장사조차 치르지 못하고 앓아보셨어요? 하기사, 나기는 조선인으로 났어도 시기 좋게 왜놈의 편에 붙어먹었으니 어디 그럴 일이야 있겠어요······. 그저 길 가는 조선인 하나 잡아다 네놈이 불령선인이다, 하며 두들겨 패고 혀만 잡아 뽑으면 천하가 당신의 발 밑에 길 터이거늘, 천하를 당신 아래에 놓고 멋대로 호령하는 것이 무어 어렵겠습니까. 태어나서 해 본 가장 큰 고민이라고는 왜놈 핏줄이 아니라서 어찌 편안히 출세하려나 싶은 정도였지요? 행여라도 총독과의 불화에 대한 말들이 퍼져나가 발목을 잡을까, 그런 같잖은 걱정이나 하며 한가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냈나요?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많은 조선인들을 죽인 것 정도야 훈장으로 여기고 뿌듯해하였지요? 난 당신과 같은 족속들을 죽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일, 만일······!”


속에서 들끓는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퍼지며 수 년간 가슴을 짓누르던 말들을 꺼내었다.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끊어 뱉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벌겋게 충혈된 두 눈에서 흐르는 것은 눈물이 아닌 독기였고, 그것에서마저 붉은 빛이 감돌았다. 분명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했으나, 눈빛의 총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 당신이 어찌 알겠습니까. 단 한 번도 나처럼 살아본 적이 없잖습니까······. 단 한 번도 다른 처지에 놓인 이들을 바라보고자 하지 않았잖습니까······.”


울음이 점차 잦아든 목소리가 느릿해졌다. 감은 눈꺼풀 사이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머리가 깨지라는 심정으로 상에 이마를 쿵쿵 박아댔다. 큰 소리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흐느낌이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그 틈을 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그 소리에 묻히기를 바라며. 수많은 것들이 오가는 표정이 그제서야 장막 사이로 드러났다. 점차 느려지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히로유키는 여전히 가슴 아픈 표정을 풀지 못하였다.


“차마 알지 못할 겁니다, 그 심경을······”


말을 미처 맺지 못한 채 정화가 상 위에 기절하듯 엎어졌고, 상 위에 고인 눈물 소이 속에 히로유키가 비추었다. 언제나처럼 말없이, 그는 가녀린 여인을 바라보며 특유의 날카롭지만 슬픈 눈빛으로 정화의 애처로운 어깨를 어루만졌다.

토닥 토닥, 그것은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다미 위에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절하듯 잠들어 움직이지 않는 이의 것일 리는 없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젖어든 채로 떨리고 있었다. 행여라도 간신히 잠든 이가 깨어날까 마음 편히 눈물을 흘리지도 못했다.


“······ 잃어보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저 이 부질없는 마음이, 잠든 틈에만 전할 수 있는 진심이 꿈에서라도 닫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술의 기운을 빌려 하고픈 말을 쏟아낸 만큼, 오늘은 부디 구슬피 울며 밤새지 말고 깊이 잠들어다오. 그 모든 고통은 내가 안고 불편히 잠들 테니.


“모든 순간을 함께 했던 소중한 이를······.”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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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1화 - 진실 24.08.24 10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9 1 12쪽
» 49화 - 상처 24.08.17 8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4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2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1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3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3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5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7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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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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