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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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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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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커와 세탁소

DUMMY

37화











쿵!


나는 돌려차기로 로커의 턱주가리를 후려쳤다.

하이킥을 맞고 뇌에 충격을 받은 로커가 쓰러졌다.

실신 KO.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도 녀석의 뇌까지 강화시키진 못했나 보다.


“꺄아악!”


우리 둘의 다툼을 파티 중의 재밌는 놀이로 즐기던 구경꾼들이 놀라서 물러났다.

여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얘들 문화권에서 발로 사람 머리를 후려치는 건 처음 봤을 테니까.

게다가 존 로커가 워낙 거구라 전봇대가 쓰러지는 것처럼 실신 장면이 박력 넘쳤다.


“저 친구 깨어나면 이렇게 전해줘. 우리 세탁소에 팁은 필요없다구~”


나는 구경꾼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콜택시를 타고 유유히 숙소로 돌아왔다.

밤새 시끄러울 전화기를 꺼놓고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대에서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데 그때 생각이 났다.


“젠장. 매덕스를 만나고 싶어서 파티에 간 건데. 매덕스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왜 망할 하얀 고릴라를 만난 거냐. 어이가 없네.”


***


다음 날 아침.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마이너 캠프 훈련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4이닝을 던지는 날이라 유연성 운동부터 꼼꼼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론지 감독이 나를 불렀다.

감독이 선수에게 직접 지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중대한 사항이라는 뜻.


“건우. 당장 메이저 캠프로 가보게. 슈어홀츠 단장의 호출이야.”

“무슨 일이죠?”

“무슨 일인지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거 같은데.”

“이제 파티장 일 때문인가요?”

“그럼. 뭐겠나. 어서 가봐.”


마이너 캠프를 나와서 옆에 있는 메이저리그 캠프로 향했다.

항상 철망 너머로 봤을 뿐.

직접 안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척-


“외부인 출입 금지입니다.”


마이너 캠프와 달리 출입구를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턱짓으로 나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린빌]

너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아니라 그린빌 브레이브스 유니폼을 입은 외부인이라는 뜻이었다.

경비원들이 인터폰으로 한참 확인을 한 후에야 문을 열어주었다.

메이저리그 캠프로 들어와서 직원들을 붙잡고 슈어홀츠 단장을 찾았다.

그런데 직원들 반응이 황당했다.


“건우 선수! 오셨군요. 어제 사건 얘기 들었어요!”

“아. 그래요.”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브레이브스 직원들이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가 이렇게 속삭였다.


“정말. 잘하셨어요.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우린 당신의 행동을 지지합니다. 그건 정의로운 응징이었어요.”

“...”


나를 처음 본 브레이브스 직원들이 이 정도 반응인 걸 보면 로커 녀석이 평소 주변에 어떤 짓을 하고 살았는지 눈에 훤했다.


똑- 똑-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구단 회의실에 들어갔다.

마이너 캠프에서는 볼 수 없는 넓고 깨끗하고 냉방이 잘되는 회의실에 슈어홀츠 단장과 바비 콕스 감독 그리고 전설의 투수 코치 레오 마조니가 있었다.

90년대 최고의 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만든 삼인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셋의 표정을 보니 나와는 다른 이유로 두근대는 거 같았다.


“저를 부르셨다구요.”

“건우 군. 앉게. 직접 보니까 정말 어리군.”

“이 어린 친구가 그 로커 녀석을 한방에...”


실제로 만나보니 재밌는 3인방이었다.

슈어홀츠는 어제 파티장에서도 느꼈지만 바늘 하나 안 들어갈 냉혈한 같았고 바비 콕스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으며 레오 마조니는 괴짜 이탈리아 삼촌 같았다.

나를 처음 보는 콕스와 마조니는 내가 로커를 한 방에 눕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백건우 선수. 어제 당신의 폭행으로 존 로커는 턱뼈가 골절되어 밤새 긴급수술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회복까지 최소 3개월 이상 팀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보기보다 턱이 약한 친구였네요.”

째릿-


슈어홀츠는 애써 무표정했는데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어려운 영어 단어를 쓰며 외국인인 나를 압박했다.


“문제는 존 로커가 이번 시즌 우리 팀의 마무리를 맡을 예정이었다는 겁니다. 백건우 선수. 당신의 폭력 행위로 우리 브레이브스의 시즌 구상이 캠프에서부터 무너졌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다리를 꼬고 귀를 파며 태연하게 굴자 슈어홀츠의 분노가 최고조를 찍었다.


“몰라요? 지금 모른다고 했어요? 감히 팀의 최고 책임자인 내 앞에서?”

“그건 정당방위였습니다. 어제 파티에 왔던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누가 먼저 시비를 걸고 누가 먼저 주먹을 휘둘렀는지 말입니다. 아니면 뭡니까. 마이너리거는 메이저리거가 주먹을 휘두르면 그냥 맞아야 한다는 겁니까? 이렇게 피해자인 사람 불러놓고 죄인처럼 몰아세우기 전에 정확한 사건 조사부터 해야 하는 게 순서 아닐까요? 팀의 GM 제너럴 매니저라면 말입니다.”

“뭐. 뭐야?”


정곡을 찔린 슈어홀츠가 겨우 이성을 챙기며 반격했다.


“건우 선수. 우리는 지금 프로로써 당신 때문에 망가진 시즌 구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일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책임이요? 책임은 공공장소에서 소수인종인 나에게 대놓고 인종 모욕을 가한 로커가 져야죠. 피해자인 내가 왜 책임을 집니까?”

“...”

“존 로커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입니다. 단장님은 폭탄이 시즌 전에 터진 걸 나한테 고마워해야 합니다.”

“건우 선수. 좋게 생각했는데 실망입니다. 도대체 이런 궤변이 어디 있습니까!?”


슈어홀츠가 논리로 안되니까 이제는 언성을 높이며 겁을 주려 했다.


“압니다. 단장님과 코칭스태프의 마음을요. 빅리그에서는 어쨌든 매일 매일 이겨야 하니까. 선수가 평소 인종차별 발언을 입에 달고 살아도 경기력 향상 약물을 빨아도 당장 야구만 잘한다면 쉬쉬하며 모른 척하고 싶겠죠.”

‘!’


이번에는 바비 콕스와 레오 마조니까지 움찔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존 로커는 지나쳐요. 선을 한참 넘었다는 뜻입니다.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망치는 암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이쯤에서 한번 쳐맞는 게 로커를 위해서도 좋았어요. 아. 이런 개소리를 내뱉고 다니면 턱뼈가 박살나는구나.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돌고래보다 낮은 아이큐라도 학습효과가 생기죠.”

“건우 선수. 자네가 아무리 궤변을 늘어놓아도 1군 주전 마무리를 부상 아웃시킨 책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단 차원에서 당신에게 벌금과 피해 보상금을 청구할 겁니다.”

“하아~ 그래요?”


나는 슈어홀츠와의 싸움이 마지막 단계에 왔음을 느끼고 비장의 카드를 펼쳤다.


“그러세요. 저도 기자들을 불러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그날 파티에서 정확히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요. 로커가 나에게 했던 인종 모욕 조롱들과 그걸 지켜보며 함께 웃던 브레이브스 1군 선수들과 관계자들 또 인종차별 피해자이자 정당방위를 한 마이너리그 선수에게 오히려 책임을 떠넘기고 피해 보상금을 청구하겠다며 협박하는 구단의 행태.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인종 모욕 사건을 전 미국인들이 관심 있게 지켜볼 겁니다. 우리 스프링캠프에 ESPN이 아니라 CNN 방송팀이 오겠네요.”

“...”


천하의 슈어홀츠도 반격하지 못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는 [흑인 노예제도]의 원죄가 있는 인종갈등 문제에 민감한 도시였다.

나는 나를 건드리면 애틀랜타 한복판에 핵폭탄을 터트리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등판해야 하거든요. 당신들이 가치 없고 소모품으로 여기는 마이너리그 경기라도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단 1달러도 당신들에게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팀에서 쫓아내고 싶으면 하세요. 다만 내 입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 그리고 로커가 깨어나면 알려주세요. 우리 부모님은 세탁소를 운영하지 않는다구요. 피 묻은 셔츠는 본인이 알아서 빨라고 하세요. 그럼.”


나는 일어나서 한국식으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을 나왔다.


***


백건우가 떠난 회의실은 조용했다.

존 슈어홀츠, 바비 콕스, 레오 마조니.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를 거물 셋이 한국인 더블A 선수 한 명 때문에 어쩔 줄을 몰랐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인지...”

“원래 동양인들은 예의가 바르고 윗사람들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른다고 하지 않았나.”

“백건우의 언행을 보면 빅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거물 선수 같아요. 당당하고 빈틈이 없고 자신의 영향력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요.”

“맞다. 보라스. 그 망할 놈이 조언을 해줬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슈어홀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많은 선수의 값을 매기고 사고팔고 방출했던 그의 촉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백건우를 적으로 돌리지 마라.]


단순히 보라스의 조언을 들었다고 그런 상황 대처능력이 나올 수는 없었다.

백건우에게는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일단 새로운 마무리 투수를 구해보죠.”

“그러자구.”


슈어홀츠 못지않게 콕스와 마조니도 찜찜했다.

백건우의 지적대로 ‘일부’ 선수들이 약물을 쓰고 있다는 걸 둘도 알고 있었다.

99년 빅리그 현장에서 ‘약물’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일부’가 약물을 쓴다는 걸 ‘누구나’ 알았지만 그걸 입에 담는 건 금기시 되었다.


그냥 [너희들은 프로니까 각자 알아서 하고 책임은 너희들이 지는 거]라는 공기가 빅리그를 지배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 더블A 선수가 마치 빅리그를 손바닥 내려다보듯 하며 떠든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백건우의 이번 사건이 향후 브레이브스에서 그의 입지를 어떻게 바꿀지는 미지수였다.


중요한 건.

백건우 덕분에 빅리그 투수진에 한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다.


***


“들었어? 브루스 첸이 다시 메이저 캠프로 불려갔대.”

“그 녀석. 건우 덕분에 완전 땡 잡았네.”


다음 날.

나의 불꽃 하이킥에 덕을 본 사람은 나에게 첫 홈런을 선사했던 브루스 첸이었다.

이제는 메이저 캠프는 물론이고 마이너 캠프까지 [존 로커의 세탁소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건우! 넌 멋진 놈이야!”

“대신 패줘서 정말 고맙다. 로커 새끼 정말 밥맛이었어.”

“로커가 나보고 살찐 원숭이라고 놀리는데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어. 맞을까 봐 무서워서 뭐라고 못했지만.”


알고 보니 메이저리그를 왔다 갔다 했던 유색인종 마이너 선수들은 하나도 빼지 않고 로커에게 놀림을 당했다.

특히 흑인, 히스패닉 선수들의 분노가 상당했는데 로커의 덩치와 메이저리거라는 지위에 쫄아서 어쩌지를 못했었다고 했다.


“우리 마스터의 태권도 킥은 최고라니까! 끼아호~”


모든 사건의 제공자인 호세 녀석은 내 속도 모르고 좋다고 어설픈 발차기를 하며 난리였다.

로커 덕분에 클럽하우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마이너 선수가 ‘감히’ 메이저리거 그것도 팀의 핵심 마무리 투수를 혼내줬다는 게 통쾌한 모양이다.


“건우! 나도 태권도 배우고 싶어.”

“그날 존 로커의 턱을 어떤 식으로 갈긴 거야? 이렇게? 이렇게? 숀 마이클스처럼 스윗 친 뮤직으로~~ 팍!!”


다들 태권도를 흉내 내며 장난을 치고 있는데 클럽 매니저가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체격.

교수님처럼 점잖게 생긴 얼굴에 왠지 모를 광기가 느껴지는 멍한 표정.

컨트롤의 마법사.

브레이브스 투수왕국의 왕께서 빈민굴에 행차하셨다.


“그렉... 매덕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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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커와 세탁소 +10 24.09.05 10,635 30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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