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악신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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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볶음밥
작품등록일 :
2024.08.02 02:07
최근연재일 :
2024.08.12 02:13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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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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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소년을 만나다

DUMMY

시간의 흐름도, 그 어떤 오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얼마나 표류했을까?


영원히 끊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던 의식의 끈이 서서히 다시 맞추어져 갔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후각이었다.


쿱쿱한 습기의 냄새. 그리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비릿한 피의 냄새.


지옥에라도 떨어진 걸까?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촉각이었다.


어딘가에 누워있는지 등과 허벅지에서 딱딱하고 차가운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미각, 아니 통각이었다.


입속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뻑적지근한 고통 그리고 타들어 갈 것만 같은 지독한 갈증.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청각이었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주위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 막아라! 미친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 반드시 지켜라! 거사가 머지않았다!!


의아했다. 들려오는 소리 자체는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었다.


중원어는 아니었다.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언어.


어째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일까?


- 카앙!


병장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그 소리를 들었을까?


마침내 시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막이라도 쓰인 듯 전경은 흐릿했다. 하지만 시야는 곧 천천히 회복되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신체에 대한 통제권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등세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추레한 늙은이였다.


늙은이의 얼굴에는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지만 그리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리고.


‘색목인?’


눈물이 글썽거리는 늙은이의 눈은 선명한 벽안이었다.


지끈-!


지독할 정도의 두통에 등세극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때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


“아아···. 위대하신 마왕이시여. 저 아스크렌은 당신의 충직한 종입니다.”


마왕? 무슨 소리일까?


“뭐···?”


늙은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부복하여 두 손을 천장을 향해 들어 올리고 있었다.


“미천한 종이 당신을 이곳으로 소환하였습니다! 부디···! 부디···!”


소환? 무슨 소리인가? 자신은 이미 죽었···?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동굴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이 세상을 멸망시켜주소서!”


턱-!


들려오는 늙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발을 내려 땅을 디뎠다.


맨발의 감촉. 아니, 그냥 나체 상태였다.


갈증에 헛기침을 몇 차례 하니, 언제 움직였는지 늙은이가 그에게 대접을 내밀었다.


점성이 있는 붉은 액체가 출렁거리는 대접을.


코로 훅 밀려 들어오는 피비린내.


‘미친 늙은이로군.’


여전히 바깥에서는 서로를 저주하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아스라이 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언어가 입에서 절로 새어 나왔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천박한 나디아의 종들이 당신의 소환의식을 방해하기 위해 몰려와 저희가 저지하고 있나이다!”


마치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듯한 늙은이의 어조.


늙은이는 한동안 그에게 장황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은 대륙 북부에 있는 카이산 왕국이라는 것과 그를 소환한 것은 몰로크라는 흑마법사 단체라는 것.


그 밖의 것들은 그의 지식으로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미천한 종에게 당신의 진명을 알려주십시오!”


등세극은 늙은이의 말을 무시한 채 물었다.


“나를 이곳에 소환했다고?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일방적으로 말을 무시했음에도 늙은이는 여전히 감격에 겨운 듯했다.


“그, 그렇습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어째서 그딴 것을 원하는 것이지?


비참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그의 원한은 특정한 인물 혹은 단체를 향했을 뿐. 그 외의 인물이나 세상을 향한 적은 없었다.


어째서 이 늙은이는 충분히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원한을 세상에 투영하는가?


그의 물음에 늙은이는 당황한 듯 보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


등세극은 늙은이를 외면하며 조용히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이상했다.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단전 대신 심장 주위에 기운이 몰려있는 것도. 그 기운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것도.


차가운 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걸 왜 네가 정하려 들지?”


“예?”


“그건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 물론입니다. 저는 그저 당신의 옆에서 도울 따름입니다!”


“이해를 못 하는군. 비켜라.”


그는 늙은이를 지나쳐 환한 빛이 들어오는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환한 빛에 눈이 부셔왔다.


“크으윽!! 이단자들을 모두 처단해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불신자 놈들! 네놈들은 죽어도 평안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카아앙-!!


서로를 향한 저주와 욕설 그리고 병장기가 마주치는 소리가 뒤섞여 어지러웠다.


요상한 복장과 생김새.


한쪽 무리는 검은색의 특이한 장포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는 이들은 꽤 다양한 복색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인이었다. 마치 전신이 철로 이루어진 것 같은 괴물. 괴이한 생김새였지만 내부에 생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아 사람인 듯 보였다.


어느새 뒤따라 나온 늙은이가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은 철인을 향해 있었다.


“갑옷을 입은 저놈들이 바로 당신의 소환을 저지하려던 불신자입니다!”


그때 한 철인이 그를 바라보며 철로 이루어진 몸을 파르르 떨어댔다.


“네놈들이 기어코 악마를 소환해냈구나!!”


“나, 나디아시여! 이럴 수가!”


싸움이 멎어 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무리의 인원들은 서로 물러섰다.


흑색 장포를 입은 이들은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극진한 예를 표했으며, 반대로 철인이 속한 무리는 경악과 절망 그리고 공포라는 감정에 물들었다.


등세극은 고개를 돌려 주위 풍광을 살폈다.


낯설었다. 눈에 보이는 초목은 중원의 것이 아닌 듯 보였으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중원에서 보던 태양과 비슷한 해가 하나, 그보단 조금 작은 듯한 해가 하나.


“이곳은 진정 중원이 아니구나···.”


그것이 몰로크 결사단이 소환해낸 이름 모를 마왕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


척박한 땅이었다.


대륙 북부, 카이산 왕국이라 하였던가?


처음 깨어났던 곳은 그리 춥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등세극이 무작정 걸어서 도착한 곳은 땅조차 얼어붙어 있어 농업이 불가능할 것 같은 땅이었다.


“어···?”


맨발로 딱딱한 땅을 한참을 걸은 그가 마침내 마주친 것은 어린 소년이었다.


그를 마주친 소년은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소년의 눈이 등세극의 몸을 한차례 훑었다.


처음 보는 검은 머리.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


잘 단련된 몸. 아니, 그걸 떠나서 북부에서 어떻게 나체로 서 있는 걸까?


몹시 수상했다.


도망치려는 소년의 기색을 읽은 등세극이 나직이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물 한 모금뿐이다. 물을 좀 줄 수 있겠느냐?”


잠시 망설이던 소년이 그에게 손짓했다.


“따라오세요.”


소년이 그를 이끌어간 곳은 작은 마을이 보이는 언덕이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나무 사이에 그를 숨게 한 소년은 혼자 마을로 들어갔다.


시간은 꽤 걸렸다.


하지만 소년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소년은 그에게 작은 가죽 물통과 기다란 넝마를 내밀었다.


“물이에요. 물통은 드릴 테니까 가지고 다니세요. 그리고-”


등세극은 즉시 물통의 뚜껑을 열어 입을 가져다 댔다.


쫄쫄쫄쫄-!


미칠듯한 갈증이 해소되며 짜릿한 전율이 온몸에 흘렀다.


좁은 입구 때문에 감칠맛 나게 흘러나오는 물맛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순식간에 가죽 통을 쥐어짜서 비워낸 등세극은 입가를 닦으며 소년을 바라봤다.


“...이거라도 걸치세요.”


그제야 그는 소년이 내민 넝마가 옷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슬쩍 넝마를 펼쳐 팔이 들어가는 구멍을 찾은 그는 팔을 넣어 옷을 걸쳐 입었다.


땅에 쓸릴까 말까 할 정도로 기다란 외투였다.


“고맙구나···.”


“주세요. 물이라도 더 담아드릴게요.”


이 소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조용히 가죽 물통을 소년에게 건넸다.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을 팔던 가판의 주인장.


그래서일까?


그는 소년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가죽 물통을 건네받은 소년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진의를 파악하려는 것일까? 신중한 성격임은 분명했다.


소년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입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장고 끝에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작은 한숨이었다.


“후···. 아니에요! 곧 물을 채워드릴게요. 기다리세요!”


그는 다시 마을로 달려가는 소년을 지켜봤다. 굳이 나무 뒤로 숨지 않았다.


소년이 들어간 것은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판잣집이었다.


척박한 땅이니만큼 풍족하게 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소년이 다시 집에서 나왔을 때였다.


말을 탄 세 명의 인물들이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 명은 우스꽝스럽지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다른 두 명은 일전에 보았던 철인이었다.


문제를 제공한 것은 소년이었다.


달려 나오다 사각에서 다가오던 일행을 보지 못하고 부딪친 것이었다.


철인 중 하나가 말에서 내려 소년에게 다가갔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소년을 부축하기 위함일까?


철인은 소년을 부축하는 대신 그 팔을 들어 소년을 후려쳤다.


퍼억-!


거리는 멀었지만, 등세극의 귀에는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


실수였다.


어디서부터 실수였던 것일까?


소년의 이름은 트리스탄이었다.


트리스탄은 낯선 이방인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멋들어진 기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왜?


지키고 싶었다. 다른 이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힘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방인을 만났을 때 자신의 하나뿐인 가죽 물통과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외투를 건네준 것이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싶었다.


그의 나이 12세.


이제는 곧 그도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방인을 바깥에 기다리게 하는 것에 미안함을 느껴 서두르던 것이 문제가 될 줄이야.


하필이면, 게이탄 자작가의 망나니를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트리스탄의 눈앞에는 그가 평생 꿈꿔왔던 기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네놈이 미친 것이 분명하구나! 도련님이 말에서 떨어지셨다면 어찌 책임을 지려고 감히!!”


꽤 세게 부딪치고 넘어진 탓에 어지러웠고, 기사에게 손찌검까지 당해 머리가 멍했다.


그럼에도 트리스탄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놈이?!”


어차피 망나니 도련님을 만난 순간, 매질을 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저 매질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빌고 또 비는 수밖에.


이번엔 기사가 한쪽 발을 뒤로 쭉 빼는 것이 보였다.


큰일이었다. 몸이 건사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부디 견뎌낼 수 있기를.’


트리스탄은 몸을 바짝 웅크리며 곧 밀려올 충격에 대비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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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을 묻다 24.08.02 114 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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