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악신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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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볶음밥
작품등록일 :
2024.08.02 02:07
최근연재일 :
2024.08.12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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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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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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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하산하거라

DUMMY

트리스탄은 몸을 바짝 웅크리며 곧 밀려올 충격에 대비했다.


질끈-!


타이밍은 대충 예상했고, 마지막 순간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의아함에 트리스탄은 꽉 감은 눈을 살짝 떴다.


대비를 늦추진 않았다. 때로는 엇박자로 가격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홉뜬 트리스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찬란한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가 아니었다.


낡고 해진 외투.


분명 이방인에게 건네준 외투가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


그때 망나니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감히 귀족의 행사를 방해하려 드느냐?”


“귀족? 귀족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너희에게 이 소년을 때릴 자격이 있는 것인가?”


“물론이다! 나의 아버지는 이 게이탄 영지의 합법한 주인이자, 모든 영주민을 다스리는 귀족이다!”


“...그런가? 하지만 이 아이는 그저 내게 물을 주려 했을 뿐이다. 차라리 나를 때리는 것은 어떻겠는가?”


등세극은 자신이 이곳에서 이방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일을 벌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소년이 맞는 것만큼은 그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네놈! 감히 귀족에게 반말을 지껄여? 수상한 놈이로군! 모자를 벗어보아라!”


아무래도 일이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언어는 통하였지만, 그렇다고 말이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등세극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이여. 나를 따라오지 않겠는가?”


트리스탄은 그 순간 자신에게 운명적인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방인이 그에게 보여준 것은 크게 없었다.


그는 이방인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었고, 이방인은 기사의 앞을 가로막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고요한 이방인의 눈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선택은 능히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트리스탄은 작게 이방인에게 물었다.


“당신을 따라가면···. 저는 무얼 할 수 있나요?”


그때, 옆에 있던 다른 기사가 이방인에게 칼을 뽑아 들어 휘둘렀다.


“이놈이 감히 도련님을 앞에 두고!!”


하지만 그가 흉맹하게 휘두른 검은 이상할 정도로 쉽게 이방인의 손에 막혔다. 어떻게 막은 것인지는 트리스탄의 시점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방인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상태로 말했다.


“그건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정해야 할 일이지.”


조금은 무미건조한 것 같았던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이방인은 분명 그에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트리스탄은 그의 건조한 웃음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웃음이 저렇게 삭막할 수 있을까?


“당신을 따라갈게요.”


소년은 선택했다. 그리고 이방인은 소년의 선택에 호응했다.


퍼억-!


“커억-!!”


그가 기사 두 명을 제압하는 것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잡고 있던 주먹과 칼을 밀쳐내며 동시에 주먹을 내지른 것이었다.


쿵-! 콰앙-!

초라하게 땅바닥에 넘어진 두 기사의 갑옷 중앙이 주먹의 형상대로 푹 패어있었다.


“끄으으···.”


기사들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족이라 했는가? 너도 맞을 테냐?”


“히익-?!”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흘러가는 그림에 조금씩 뒷걸음치던 게이탄 자작가의 망나니 도련님은 말머리를 돌려 빠르게 도망쳤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등세극이 소년에게 물었다.


“가족이 있느냐?”


“없어요.”


“그럼 챙길 것만 가볍게 챙기거라. 이곳에 남아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잠시만요!”


낡은 판잣집에 들어간 트리스탄이 챙겨서 나온 것은 한 자루의 목검이었다.


****


눈이 듬성듬성 묻은 트롤의 거대한 동체.


“크르르르-!!”


녀석이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두꺼운 입술이 펄럭이며 사방으로 침을 튀겨댔다.


쿠웅-!!


사람의 몸통보다도 두꺼운 주먹이 눈 덮인 대지를 강타했다.


휘오오오-!!


그 충격으로 사방으로 휘날리는 눈발.


그 사이로 한 소년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소년은 누더기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는 제멋대로 길게 자라 지저분했다.


하지만 추레한 행색과 다르게 소년의 움직임은 가볍고 경쾌했다.


소년은 눈밭을 밟고 도약해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트롤이 포효하며 주먹을 휘두르고, 사방으로 어지럽게 휘날리는 눈보라 사이에서 소년의 눈은 별빛을 담은 듯 형형한 빛을 발했다.


푸우욱-!!


검이 트롤의 두꺼운 목에 박혀 들어갔다.


푸화아악-!!


그리고 마침내 반대편 목에서 검이 빠져나오며 트롤의 거대한 머리가 눈밭에 떨어져 내렸다. 이어 더 이상 땅을 지탱할 수 없던 트롤의 거대한 동체가 뒤로 넘어갔다.


쿠우웅-!!


눈밭에 무너진 트롤 옆에 가볍게 착지한 소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치기가 담겨있었다.


“쳇. 트롤 고기는 맛이 없는데···.”


트리스탄은 쭈그려 앉아 트롤의 다리 살을 일부 베어냈다.


“그래도 고기가 없으면 안되지!”


베어낸 다리 살을 눈밭에 내버려 둔 트리스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듯한 혹한의 환경. 놀랍게도 그는 이곳에서 살아왔다. 그의 스승과 함께.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기에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스승은 분명 이상한 사람이었다.


처음 기사들에게 구타를 당하던 그를 구해주었을 때 이미 스승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의 스승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트리스탄은 어쩌면 그의 스승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스승은 무력을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으나, 한번 그가 손을 쓸 때면 트리스탄은 멍하게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을 제외한다면 스승이 자신의 무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처음은 그에게 검술을 알려주겠다고 했을 때였다.


5년 전이었다. 스승은 네가 앞으로 배울 검이라며 목검을 넘겨받아 가볍게 휘휘 휘둘렀다.


스승의 움직임은 단순했지만, 그 결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돌풍은 주위의 환경과 맞물려 거대한 눈 폭풍을 일으켰다.


트리스탄은 한동안 일대에 드러난 붉은 바닥을 보며 전율해야만 했다.


두 번째는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엘프가 그들이 지내던 동굴에 찾아온 것이었다.


트리스탄은 그때 찾아왔던 엘프의 말을 기억했다.


- 너는 누구지? 동족인가 싶어 찾아왔는데 고작 인간이라니.


그때 스승이 지어 보인 표정이란. 약 5년을 함께 지냈지만, 정말이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놀란 표정이었을까? 들뜬 표정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스승이 그 엘프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옅은 미소와 함께 스승은 동굴 밖으로 나가더니 기운을 방출해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종말이라도 찾아온 듯 설원 전역이 스승이 방출해낸 기운으로 인해 진동했다.


스승에게 검을 배우며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던 트리스탄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스승이 말한 무의 극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은 분명했다.


스승이 일으킨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 그가 품은 기운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정도였다.


“뭐, 덕분에 이렇게 좋은 검도 얻었으니.”


이후로 갑자기 친절해진 엘프가 신기한 아공간에서 검을 하나 꺼내서 선물해준 것이 지금 그가 쥐고 있는 검이었다.


찬란한 푸른빛을 띠는 검신에는 아름다운 곡선의 문양이 얕게 새겨져 있었다.


트리스탄은 그 보검을 잘 때도 안고 잘 정도로 애정했다.


“읏차! 피가 좀 빠졌겠지? 돌아가 볼까!”


트리스탄은 눈밭에 던져둔 트롤 고기를 가죽 주머니에 넣어 동굴로 돌아갔다.


****


타다다닥-!!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 모닥불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고기가 특유한 기름 향을 풍겼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구나.”


스승은 음식을 크게 가리지 않았다.


트롤 고기든, 엘크의 고기든 상관없이 맛있게 뜯어 먹는 스승의 모습을 보며 트리스탄은 물었다.


“스승님은 바깥세상에 나갈 생각이 없으신가요?”


“음?”


고기를 뜯던 스승이 트리스탄을 바라보더니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슬슬 결심이 선 모양이구나.”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스승은 한결같았다.


- 네 인생은 네가 스스로 결정하거라.


스승을 따라온 것은 트리스탄이 결정했던 것이었으며, 스승을 떠나는 것 역시도 그의 선택이어야 했다.


“때로는 반복되는 수련보다 한 번의 경험이 깨달음에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네가 나를 걱정하기엔 백 년도 이르다.”


트리스탄은 가끔 스승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의미일까? 대충 의역해보자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트리스탄은 여전히 시름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기를 집어 들지 못했다.


타다다닥-!!


“고기가 다 타겠구나. 어서 들거라.”


“예, 스승님···.”


트리스탄은 이미 한쪽 면이 타버린 고기를 집어 들었다.


한입을 베어먹었다.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한입 더 베어먹었다.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왔다.


한입을 더 베어먹었다. 트리스탄은 고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스승 역시도 먹던 고기를 내려놓고 자세를 틀어 트리스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무엇이 그리도 기뻐 보이는지 모를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며 트리스탄은 무릎을 꿇고 그 위로 상체를 포개었다.


스승이 그에게 검을 가르치기 전 농담처럼 했던 이야기였다.


스승이 제자를 받아들일 적에 제자는 스승에게 아홉 차례 ‘절’이라는 것을 올린다고 했다.


‘절’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스승은 상대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 말했었다.


늦었지만 트리스탄은 스승에게 그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트리스탄의 자세는 무척이나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스승은 여전히 옅은 웃음기를 띠고 그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트리스탄이 아홉 번의 절을 마쳤다.


“스승님, 이제 세상에 나가보려 합니다.”


“제자야,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저는···.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기사란 어떤 존재이더냐?”


“수호하는 자입니다.”


“어째서 수호하고자 하느냐?”


“......”


무엇을 위한 문답일까? 스승이 원하는 답변이 무엇일까? 트리스탄이 망설이자 스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 답을 맞추려 하지 말거라. 말하지 않았더냐? 네 생각이 중요하다.”


무용과 성실, 명예와 예의, 경건과 겸양 그리고 약자 보호.


트리스탄은 자신이 떠올린 기사도 따위는 가슴 한켠으로 밀어두었다.


“저의 심장이 그리하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것일까? 스승의 얼굴에 서린 웃음기가 조금 더 짙어졌다.


“트리스탄.”


“예, 스승님.”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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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체절명의 위기 24.08.03 71 5 14쪽
» 하산하거라 24.08.02 68 7 12쪽
2 소년을 만나다 24.08.02 80 6 12쪽
1 이름을 묻다 24.08.02 115 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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