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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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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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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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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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위원회 (1)

DUMMY

1. 징계위원회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딛는 발소리들이 로비를 가득 메운다. 사람들의 복장은 크게 두 갈래다. 셔츠부터 자켓, 바지, 넥타이, 구두까지 온통 검정 일색인 정장 차림. 아니면 푸른 빛이 도는 진회색 제복에 검은색 벨트를 차고 군화를 신은 복장.


그 두 갈래와 동떨어지는 옷차림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린 색상의 테일러드 자켓과 바지, 갈색 구두, 하얀 셔츠와 아이보리색 넥타이 차림인 남자가 정문을 통과해 들어온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그 남자를 한 번씩 돌아보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로비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다.


로비 우측 벽면 쪽에 있는 개방형 카페로 향하며 슬쩍 들어 올린 손목에는 기계식 무브먼트로 돌아가는 구형 시계를 차고 있다. 시곗바늘은 8시 45분을 가리킨다. 카페는 출근 전 들린 손님들로 북적인다. 바쁘게 주문을 받고 음료를 내주는 카페 직원들은 베이지색 반소매 셔츠에 밤색 앞치마를 매고 있다.


직원 중 하나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을 한다. 명령값에 의해 만들어진 표정이 아니다. 인간이다.


“킴!”

“안녕, 오랜만.”

“커피?”

“응.”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직원의 왼쪽 가슴에 달린 금속 명찰에는 [정 이든 JUNG Ethan]이라 새겨져 있다. [AND-PBR-BSN-814] 같은 형식의 코드가 쓰인 다른 직원들의 명찰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든은 킴이 어떤 커피를 원하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전자데이터적 기억 능력이 없어도 킴의 메뉴는 헷갈릴 일이 없다. 언제나 같은 커피를 주문하기 때문이다. 킴은 커피가 준비될 동안, 카운터를 겸하는 바 테이블(Bar table) 한쪽에 몸을 기댄다.


로비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커다란 원통형 스크린에는 뉴스가 흐르고 있다. [강 소율 의원, 인종분류법 개정안 발의 예고···굴지의 대기업 재운그룹 최재익 회장, 비(非) 인간 판정 여부 화두에 올라] ··· 소리 없는 영상과 자막으로 이루어진 그 뉴스에 킴이 잠시 시선을 둔 사이, 이든이 커피를 내어주며 묻는다.


“복귀한 거야?”


킴은 뉴스에서 시선을 떼고 바 앞으로 몸을 돌린다. 하얀 접시 위에 같은 색의 에스프레소 잔, 은색 티스푼이 놓여있다. 킴은 바 한쪽에 놓인 설탕통에서 작은 집게로 노란 각설탕 하나를 집어 들며 답한다.


“아니, 아직.”


이든은 ‘하긴.’ 하는 표정으로 킴을 본다. 커피에 설탕을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젓고 있는 킴의 복장은 도저히 이 건물로 출근하는 이의 것이 아니다.


“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음, 보안 사항이 얽혀 있어서. 비밀.”


킴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커피를 후룩 비운다. 내려놓은 잔에는 덜 녹은 설탕이 옅게 가라앉아 있다. 킴은 반납할 접시 위에 은색 1셰디(SCD) 동전 하나를 올려놓는다.


“커피 잘 마셨어.”


이든은 한쪽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그 동전을 구시대의 유물 보듯 한다. 셸터 시국 연합(United Shelter City States, 약칭 SCS)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맞지만, 이곳 SEL 지부에서는 카드를 스캔해서 연동 계좌로 자동 지불하는 게 보편적이다. 동전이나 지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카드는?”

“정직 중엔 공무원 카드도 정지라서.”


이 카페는 이 건물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전용으로 운영되고 있어, 민간 ID카드로는 지불할 수 없다.


“그냥 방문처를 알려줘.”

“보안 사항이라니까.”


방문객의 이용료는 방문처의 사무원이 접객비로 처리하곤 하지만, 킴은 다른 사무원과 동행하지도 않았고 보안 운운하며 방문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지불수단은 현금뿐이다.


“하아···. 이런 건 세금 신고가 너무 번거로워. 도로 가져가. 내가 사는 걸로 할 테니까.”


고작 1셰디의 현금 매출 신고 때문에 은행이니 국세청이니 일 처리하는 건 성가시다. 그렇다고 내역을 누락할 순 없다. 음료 추출기는 판매 관리용 단말기에 입력한 주문 내역과의 연동으로 작동하고, CCTV는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검토된다. 단 1셰디의 매출이라도 누락은 탈세 혐의로 이어진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난 돈 냈어.”


이든은 입술을 삐죽이다가 1셰디 동전을 제 앞치마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자신의 ID카드를 꺼내 스캔한다. 킴은 이든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카페를 나선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여자의 어깨가 카페를 나가던 킴의 팔뚝과 부딪힌다. 금속성의 단단함이 옷자락 너머로 느껴진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굳이 따지자면 물리적으로 타격을 입은 건 킴 쪽이지만, 반사적으로 먼저 사과한다. 여자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다음 미련 없이 가던 길을 간다. 검정 일색의 복장이지만 정장도 제복도 아닌 옷차림의 여자다. 장갑, 티셔츠, 데님 자켓과 바지, 모든 옷이 검다.


킴은 고개를 갸웃한다. 이 건물에서 처음 보는 행색이다. 복장으로 보아 출근하는 공무원은 당연히 아니고, 어지간한 방문객은 공무 시작 30분 후인 9시 30분부터 출입이 가능하다.


현관의 보안시스템은 홍채인식으로 작동한다. 입장자의 신분과 용무, 시간 등을 기반으로 입장 허가 여부를 판별하고 문을 열어준다. 아무런 소란이 없었으니 비허가 입장은 아닌데, 무슨 일로 들어온 사람인지 쉽게 추리되지 않는다.


호기심이 생긴 킴은 잠시 그 낯선 여자를 지켜본다. 여자의 약간 껄렁한 걸음걸이가 아까 킴이 서서 커피를 마셨던 바 자리로 향한다. 한 직원이 여자 앞으로 가서 뭐라 묻지만, 여자는 코드가 쓰인 명찰을 달고 있는 직원을 무시한다. 두리번거리며 직원들의 명찰을 읽던 여자가 이든을 불러 무어라 주문한다.


이든은 바 안쪽 기계에서 투명한 잔에 투명한 액체를 받아 온다. 기포가 올라오는 걸 보니 탄산수다. 여자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일회용 앰플 하나를 꺼내 잔 안에 붓는다. 무색의 물이 투명한 라벤더 색으로 물든다.


‘요즘 같은 세상에 면역 억제제? 어지간히 구식인 임플란트를 달고 있는 모양인데.’


면역 억제제는 본래 투명한 색이지만, 상비약으로 유통되는 일반의약품에는 복용자의 혼동이나 오용을 방지하기 위해 식용 색소를 첨가한다. 즉, 저 여자는 의사 처방전 없이도 구매할 수 있는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다.


그만큼 가난하거나, 의사와 마주하기 싫거나, 뭐든 몹시 귀찮은 모양이다. 어쩌면 셋 다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공무 건물을 방문한 용무라면, 십중팔구 행정복지센터의 지원사업 따위다. 입장 시간이 이른 것쯤이야, 사정상 미리 약속된 거라면 불가능도 아니다.


판단을 마치자 흥미가 사라진 킴은 시계를 본다. 어느새 8시 54분이다. 킴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그동안 여자는 잔에 담긴 것을 한 번에 마셔 비우고 탁 내려놓는다. 음료값 계산을 위해 내미는 카드는 민간 ID카드다. 이든이 무어라 설명하며 카드를 돌려주자, 여자는 카드를 회수하며 이름과 방문처를 말한다.


이든은 약간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곧 들은 대로 [방문객: 한 모건 — 방문처: 49층]을 단말기에 입력한다. 방문객이 사무원 동행 없이 카페에 방문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층이기에, 이든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승인 요청 버튼을 누른다. 승인 대기 화면은 4초 만에 승인 완료 화면으로 전환된다.


로비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가득 찬다.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 약간 늦을 것 같은 느낌이다. 킴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합류하며, 새 옷이 구겨지는 촉감에 인상을 찌푸린다. 킴이 누르는 버튼은 49층이다.








49층에 내린 킴은 직진한다. 정면의 벽에는 [SEL 경찰청 SEL Police Department — 청장실 · 감찰부 · 인사기획부]라고 양각으로 쓰인 간판이 붙어있다. 그 아래의 카운터는 긴 테이블 형태의 스크린으로, 킴이 검지손가락을 짚자 곧장 지문을 스캔해 낸다. 스크린에 [킴 킴 KIM Kim 님, 보안검사 캡슐로 이동하십시오.]라는 안내 문구와 화살표가 뜬다.


킴은 카운터 좌측 끝에 있는 보안검사 캡슐 안으로 들어간다. 바닥에 그려진 발바닥 모양에 맞춰 바로 서자, 홍채인식과 전신 스캐닝이 진행된다. 스캐닝이 끝나자, 캡슐 입구였던 허공에 [검사 완료. 제4회의실로 이동하십시오.]라는 문구와 화살표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난다.


홀로그램을 그대로 통과한 킴이 복도로 나아간다. 제복을 입은 경찰 몇을 스친다. 로비에서와 마찬가지로 킴의 복장에 돌아보는 이들이 간혹 있지만, 말을 거는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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