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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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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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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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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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위원회 (4)

DUMMY

전량 회수된 PM37은 경찰 무기고에 보관 중이고, 자원 재활용 사유로만 반출된다. 무기고 반출에서부터 재활용 센터의 원료 추출 완료까지 모든 과정이 경찰의 관리 감독하에 이루어진다.


불법 개조와 유통을 거친 것이 아니라면, 해당 PM37의 유출과 사용에 경찰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객관적 데이터 기반에서, 배정 프로그램은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사용자 감식은?”

“진행 중이긴 하지만, 아마 최종 사용자 확인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료가 너무 다양하게 검출돼서 감식팀에서도 난감해하는 중입니다.”


한창때는 보급과 반납과 대여를 숱하게 거치고, 회수 후에는 비슷한 상태인 물건들과 한데 섞여 무기고를 나뒹굴던 구형 모델. 별별 인간의 유전자와 지문이 잔뜩 뒤범벅된 물건이다. 감식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 사건의 단서가 될지는 미지수다.


“저거 안 써본 애들이 몇 년 차부터지?”

“젠장, 이건 신삥들이 맡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잖아.”


사회적 파장 등급 A인 사건은 최소 9년 차 경력자부터 수사를 담당할 자격이 주어진다. PM37의 보급 중단 시기는 7년 전이다. 9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면서 PM37을 써본 적 없는 SLPD 경찰은 없다.


[담당 수사관 배정 가능 SLPD: 0명]


마침내 프로그램이 결과값을 산출한다. SCS 연합 협정으로 운영되는 공공 AI의 판정. 연합에 소속된 시국은 이를 임의로 무시할 수 없다. 이의 제기 등의 절차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연합 정부는 물론, 각 시국의 장관들까지 소집된 자리에서 논의를 거치게 되므로, 회의 일정을 잡는 데만 최소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린다. 당장 수사를 시작해야 하는 현 사안에는 적용하기 곤란하다.


“청장님, SCS 기관에 지원 요청합니까?”


깊게 한숨을 내쉰 인사부 경찰 하나가 진을 돌아보며 묻는다. 시 직속 공무원들이 단독 처리 불가능한 사안에 부닥치면, 연합의 중앙기관 요원들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지금처럼 수사관이 필요한 경우, 수사 능력이 있다고 분류되는 기관의 요원 중 사건 관할 시국에 거주 중인 이들에게 수사 촉탁 제안이 전송된다.


“해.”


진이 긴 침묵을 깨고 답한다. 지시받은 경찰이 키보드를 조작한다. [to: SCS 중앙 정부 요원 — curreunt location: SEL-37N-127E — request: 수사 촉탁 — Y/N] 창이 구성된다. Y를 입력하자 SLPD 수사관 판정 창이 축소되고, SCS 요원들의 현황이 나열된 대기 화면으로 전환된다.


제안받은 요원들은 수락 전까지 구체적인 사건 데이터를 열람할 수 없다. 그러나 [from: SLPD — request: 수사 촉탁]이라는 제목이나, 본 수사를 담당할 시 예상되는 양상을 분석한 자료가 제공된다.


예를 들면, 언론의 주목도가 얼마나 높을 것인지, 수사 과정이 노출될 때마다 정치적 집단의 공격 가능성이 있는지,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미칠 영향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따위가 수치화되어 확률로 표기된다.


잠시 후, 온갖 이름으로 발신된 [re: Denied] 메시지창이 스크린을 도배한다. 거절을 회신한 요원들의 프로필이 회색으로 물든다. 스크린 앞에 선 경찰들의 얼굴은 잿빛이다.


“진짜 너무하네.”


누군가는 중얼거리고, 누군가는 이마를 짚고, 누군가는 입가를 매만진다. 이 건물은 SEL 시 정부 직속 기관과 SCS 연합 정부 산하 기관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무 시설이다. 같은 건물 쓰면서 매일 로비에서 스치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매몰찰 수가 있나 싶다.


“설마······. 전원 거부?”


공공 AI가 SLPD 경찰 전원을 이 수사에서 배제하고, SCS 요원 중 SEL 거주민 전원이 수사 요청을 거부한다면. 그건 사회적 파장 A급 사건의 해결 능력이 없는 국가라는 평가치로 반영된다. SEL 시의 국가 운영 능력 신뢰도 하락이 일정 수치에 도달하면, SCS 연합에서 퇴출당하거나 다른 시의 속국으로 지배받는다.


“아직 전원은 아니지.”

“그래, 그렇지. 아직······.”


수락과 거절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마지막 인물이 대기 화면 가운데를 차지한다. 현재 전자식 기계 소지 금지 조치 중이라, 제안을 확인하긴커녕 이런 게 왔는지도 모르고 있을 인물이다.


[SCS 국제정보부 — agent: 킴 킴 — status: 읽지 않음]


진은 화면 속 인물을 응시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재밌네.”








재개된 징계위원회는 처음과 같은 인물 구성이다. 진이 킴에게 스마트링을 내민다. 킴의 정직 동안 압수 중이던 WIS 요원용 기기다. 킴은 링을 받아 왼손 검지에 끼고, 오른손 검지로 두드려댄다. 킴의 지문을 인식한 링이 홀로그램을 띄운다. SLPD의 수사 촉탁 건이 펼쳐지고, 킴의 눈동자 움직임에 맞춰 스크롤이 내려간다.


“그러니까, 이 수사를 맡으면 저를 사면해 주겠단 겁니까?”


스크롤이 끝에 도달하고, [Accept (Y) — Denied (N)] 문구가 킴의 대답을 기다린다. 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낀다. 꼬아 앉은 다리를 반대로 바꾼다.


“정확히는 ‘맡으면’이 아니라 ‘해결하면’이고, ‘사면’이 아니라 ‘기록 삭제’입니다. 킴 요원의 범죄 행위는 내 권한이 아니라 시장 권한으로도 완전한 사면이 불가하니까.”


진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킴은 오션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버스를 멈추거나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그것이 현 상황을 비유한 거라면, 킴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제 소속은 어떻게 됩니까? 여전히 위스?”

“SLPD 수사본부 형사과의 촉탁 수사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위스 요원으로서의 권한과 활동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공공 AI는 수사 자격이 있는 인물을 판별한 것뿐이다. 킴이 SCS 정보부 요원이기에 그렇게 분류된 건 맞지만, SEL시 관할 사건을 수임하는데 WIS 요원 신분은 필수요건이 아니다.


“위스가 킴 요원의 범법 행위에 대해 명확하게 해명한다면 모를까.”

“WIS agent Kim is suspended indefinitely. This is enough, right? I can’t wait for this boring committee to be over. I need to feed my cat.”


진이 WIS의 해명을 요구하는 뉘앙스를 풍기자, 자날리가 잽싸게 받아친다. 킴 요원은 무기한 정직이다, 이러면 됐냐, 이 지루한 위원회를 빨리 끝내고 싶다, 고양이 밥 줘야 한다······. 진중한 이야기를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로 맺어버린다.


오션도 줄리오도 킴의 무기한 정직이란 처분에 반발하지 않는다. 킴은 아시아 지부 소속이다. 이건 부재중인 아시아 지부장이 미리 해둔 결정일 것이다.


“무기한 정직은 또 뭐야. 그냥 해임해 주시죠? 있는 정 없는 정 다 털려서 이젠 별로 위스 소속하고 싶지도 않네요, 난.”


눈살을 찡그리며 킴이 투덜거린다. WIS와 갈라섰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런 익살스러운 발언들에도 미소 짓는 SLPD 경찰은 없다. 진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어있기 때문이다.


“Oh, no! Please tell your boss when he comes back. Writing reasons for dismissal is a real headache, which is not under my···”

“아, 나 지금 번역기 없는 거 알면서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말이 빨라. 뭐 별 쓸데없는 말인 거 같으니까 됐고요.”


킴의 해임 발언에 자날리는 아시아 지부장이 돌아오면 그에게 말하라며, 해임 사유 작성에 골머리 썩기 싫다고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킴은 듣기 귀찮다는 듯 말을 자른다.


“수락하기 전에 물어볼 게 있습니다. 이 제안이 저한테까지 왔다는 건, 다들 담당 부적격 판정이거나 제안 거절이었단 건데. 이걸 저 혼자 수사하라는 겁니까?”


“물론 부검이나 현장 감식, 증거품이나 CCTV 분석 같은 일들은 전부 우리 SLPD의 각 부서에서 협조할 겁니다. 담당 책임자가 필요한 거지, 인력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아뇨, 아뇨. 흠, 뭐랄까. 분석 데이터 보아하니 어지간히 성가신···아니, 위험한 수사 같은데요. 이걸 저 혼자?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내추럴로 안 살아보셔서 모르시겠지만요, 저처럼 연약한 내추럴은···”


‘연약한’이라는 단어가 번역되자마자 곳곳에서 풉, 하는 웃음이 터진다. WIS 지부장들이다. 킴은 제 말을 끊은 비웃음을 한 번씩 노려보곤 다시 말을 잇는다.


“저 같은 연.약.한 내추럴은 말입니다. 생각보다 되게 쉽게 죽을 수 있거든요? 이거 저보고 목숨 걸라는 거랑 마찬가지입니다. 수사하다가 중간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끽, 하면 어쩝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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