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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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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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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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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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위원회 (5)

DUMMY

“경호를 붙여주면 되겠습니까? 어차피 2인 1조가 본래 수사 원칙이니, 필요에 따라 조수로 이용해도 됩니다. 내정자는 없으니까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반영해 주겠습니다.”


어이없다는 듯이 보면서도 진은 성실한 답변을 내놓는다. 킴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팔짱과 꼰 다리를 푼다. 바른 자세로 고쳐 앉은 킴이 진을 뚫어져라 본다.


“청장님도 됩니까?”

“······진심입니까?”


진이 직접 경호해 줄 수 있냐는 킴의 물음에, 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상대를 업신여기는 듯도 하면서, 여유가 넘치는 것 같기도 한 웃음이 흐른다. 요구사항을 어디까지 들어주려나 떠볼 요량으로 던진 말인데, 진지하게 받는 낌새라 약간 의외다.


“후회할 텐데.”

“농담입니다. 그만큼 능력 좋고, 믿을 만한, 그런 사람을 붙여주셔야 한다, 그런 의미죠. 뭐, 자세한 나머지 얘기는 위스 없는 자리에서 계속하는 걸로 하실까요?”


킴은 뱉었던 말을 재빨리 갈무리한다. 어지간한 건 뭐든 들어주겠다는 태도를 보아하니, 당장 수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곤란한 대형 사건이긴 한 모양이다.


킴의 손가락이 스마트링을 두드린다. 길게, 짧게, 다시 길게, 길게. 모스 부호 Y(-.--) 신호다. 스마트링에 띄워진 [Accept (Y) – Denied (N)] 홀로그램이 [Accept]를 확대한 후 닫힌다. 전송된 수락 회신은 SLPD 인사부 배정실로 수신된다.


“수락했습니다. 이건 내려가면서 위스에 반납하겠습니다.”


킴이 WIS 요원용 스마트링을 손가락에서 뺀다.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려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는 과정이다. 지금부터 킴은 SLPD 소속 촉탁 수사관이다.


“SCS 국제정보부 킴 킴 요원의 징계위원회를 종료합니다. SLPD 촉탁 수사관 킴은 저와 함께 인사부로 이동하겠습니다.”


진의 선언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을 흔들며 인사한 WIS 지부장들의 홀로그램이 꺼진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5인은 각자의 업무로 돌아가기 위해 흩어진다. 킴은 진을 따라간다. SLPD 디바이스와 공무원 카드를 받아야 하고, 간단한 업무 설명도 들어야 한다.


“저 궁금한 거 있습니다.”

“뭐지?”


킴이 진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말문을 뗀다. 진의 말투는 휘하의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것과 다름없는 하대로 바뀌어 있다. 엄밀히 구분하자면 촉탁이긴 하지만, SLPD의 일원으로 대하겠다는 태도다.


“저도 그 칙칙한 옷 입고 출근해야 합니까?”

“그게 중요한가?”

“엄청요.”


진은 잠시 말없이 걷는다. 그는 킴을 신뢰하지도 않고, 이 상황이 전부 우연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패션에 연연하는 양 허세 부리는 것에도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촉탁 수사관이 제복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은 딱히 없다. 원한다면 제복을 지급해 주겠지만, 사복을 입어도 상관없다.”


달리 의도가 있는 거라면, 무슨 의도가 깔려 있는지 지켜보면 될 일이다. 진은 킴의 자율 복장을 허가한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미디어에 주구장창 보도되겠단 느낌이 오거든요.”


킴은 진의 대답을 반긴다. 오늘 이 건물로 눈에 띄는 복장의 킴이 들어온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WIS는 징계위원회를 앞둔 킴에게 예쁘게 입고 오라고 했고, 고가의 아이템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건 충고다. 지금 상황에서 킴이 살아남을 방법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다.


세간의 이목이 쏠릴 사건을 맡은 이상, SEL 시국은 국제보호종인 킴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 킴은 군중의 시선이 집중될수록 SEL의 법정최고형으로부터 안전하다.


“언론 노출은 통제할 거다.”


진의 말에, 킴은 그게 통제가 되겠냐 싶지만 꼬집어 말하지 않는다. 그보단 진이 언론을 통제하려는 이유 쪽이 궁금하다.


“SLPD 전원 담당 부적격 판정 때문입니까? 그놈의 객관적 사실 기반 어쩌구가 연관 정보 연결 짓다가 어처구니없는 판정을 내리는 경우는 종종 보고되던 사례입니다. 충분히 해명 가능한 일을 억지로 숨기다간 음모론만 넘쳐날 텐데요.”


드문 일이긴 해도, 그런 건 아예 없는 일도 아니다. 시국의 경찰 전원이 담당 수사관에서 배제되었다는 건 분명 사람들의 불신을 살 만한 판정이다. 그러나 무슨 일에서든 명령값의 전제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있다.


“롬(ROM) 시국에서 일어난 양조장 도난 사건 아십니까? 배정 프로그램 활용 초창기 땐데.”

“도난이 일어난 양조장 반경 50m 거리에 그 양조장이 와인을 공급하는 식당이 있었고, 도난 당일 CPRM이 거기서 회식을 했다지.”


진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킴이 꺼낸 화제는 ‘22세기 공공 AI의 가장 황당한 판정 사례’ 중 하나다. 진은 이 화제에 순순히 말을 받아준다.


“기억하시네요. 그 시각이 범행 추정 시각과 겹친다고, 회식에 참석한 CPRM 군경 전원이 부적격 판정 났었죠. 얼마나 황당한 판정입니까. 그게 공개됐을 때 CPRM을 비난한 여론은 없었습니다. 뭐, 비슷한 경우가 생길 때마다 논의를 거쳐 업데이트를 해왔으니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지금도 그런 일은 충분히 발생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킴의 말은 AI의 판정만으로 사람이나 현상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어필이다. 하지만 그 정도론 진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그렇게 열린 견해를 갖고 있다니, 판정 사유에 위스의 간섭이 있었는지도 잘 밝혀내 줄지 기대되는군.”

“판정 사유가 뭔진 몰라도, 꽤 일리 있는 이유였나 보죠?”


SCS 연합 기관의 요원들이 전부 이 수사의 촉탁을 거절한 게 WIS의 농간인지, 그저 각자의 사정과 의지가 맞아떨어졌는지는 킴도 모른다. 다만 킴이 구제된 일련의 정황이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다.


“만약, 위스의 개입이 아니라면.”


WIS의 개입 여부는 조사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킴에겐 조사가 시작된 후에 알면 늦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경찰이 범인이나 공조자일 가능성, 있습니까?”


킴이 걸음을 멈추고 묻는다. 한 걸음 앞선 자리에 멈춘 진이 킴을 돌아본다.


“공공 AI는 그럴 가능성을 바탕으로 판정했지.”

“저는 청장님 판단을 묻는 겁니다.”

“달라질 게 있나?”


진의 저 비웃음 섞인 반문은 긍정이다. 아까의 침묵보다 더 진한 긍정이다. 킴은 범인이 수사의 추이를 지켜보며 방해할 가능성을 인지한다. 수사관이 살해당하는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둔다.


“SLPD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냐는 지점이 달라지죠.”

“감식은 걱정할 거 없어. 분석 데이터는 관리자 권한이 없으면 조작할 수 없으니까. 자네도 해봐서 알 텐데? 열람은 했지만 입력, 수정, 삭제, 그 무엇도 못했지.”

“······그 얘기 말고요.”


수사 파트너 선정을 고려하던 킴은 느닷없이 들어온 진의 공격에 울컥한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는 반박을 하고 싶지만, 믿어줄 리도 없거니와 자세한 내막을 발설할 수 없어 포기한다.


“2인 1조 말입니다. 안전을 위한 파트너를, 용의자 중에 고르시진 않겠죠? 그런 위험은 미리 사양하겠습니다.”


진은 WIS와 킴을 불신하니, 킴이 데려오는 사람을 파트너로 붙이지 않을 것이다. 킴은 SLPD를 신뢰할 수 없게 됐으니, 진이 경찰을 파트너로 붙여주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


“왜 그렇게 안전에 집착하지? 이것보다 더 위험한 일도 많이 해봤을 거 같은 사람이.”


진의 냉소적인 태도에 킴은 도리어 차분해진다. 쏘아붙일 말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 당신이 날 죽여놓고 ‘아, 이런 걸로 죽을 줄 몰랐네. 내추럴이 이렇게까지 약할 줄이야.’ 하며 사고사로 위장한대도 사람들은 쉽게 믿을 거라는 종류다.


그러나 이 상황에 진과 적대감을 키우는 건 도움이 안 된다. 파트너를 선정하는 일에도, 사건 수사 조력에도. 킴은 가급적 상대를 자극하지 않을 문장을 고른다.


“그러니까 집착하는 겁니다. 내추럴 휴먼이 어떤 황당한 사인으로도 죽을 수 있는지, 제가 얼마나 연약한 몸뚱이인지 잘 아니까.”

“그놈의 연약 타령,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진의 비아냥에, 킴과 진이 서 있던 복도의 갈래 중 한쪽에서 나온 인물이 걸음을 멈춘다.


“그 지나가던 개는, 나 말인가?”


말꼬리를 잡힌 진이 돌아본다. 킴은 그 사람을 단번에 알아본다. 로비 카페에서 스쳤던 여자다. 그땐 입고 있던 흑색 데님 자켓을, 지금은 벗어서 손에 들고 있다. 더운 온도는 아닌데, 열받는 일이라도 있었나 싶다.


‘행정복지센터가 아니었네.’


킴은 여자가 나온 방향을 본다. 안내표지를 보니 감찰부 사무실로 가는 통로다. 민간인이 경찰청 감찰부에서 열받고 나올 일이 뭔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 라벤더색 면역 억제제가 체온 상승 작용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날 개 취급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닌 거, 나도 아는데. 내가 언제까지 참아줄 것 같아?”


진과의 사이는 몹시 나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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