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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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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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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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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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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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징계위원회 (2)

DUMMY

한참 안쪽 복도로 들어가 청장실을 지나니 목적지가 보인다. 청장실보다도 안쪽에 위치한 제4회의실은 주로 보안 이슈가 있을 경우, SEL 경찰 고위직 간부들이 이용하는 회의실이다.


금속으로 된 문 앞에 서자, 자동 인식 시스템이 킴의 홍채를 확인한다. 양방향 자동문이 열린다. 안쪽은 다른 문이나 창문 없이 사방이 회백색 벽으로 막힌 공간이다. 킴은 한쪽 벽 가운데 홀로 놓인 의자에 앉는다.


맞은편에는 킴을 둘러싸듯 아치형으로 배치된 9개의 의자가 있다. 착석해 있는 사람은 5명으로 모두 진회색 제복 차림이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참석자들이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에 홀로그램으로 입실 현황이 뜬다. 아직 입실하지 않은 참석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전송된 알림이다.


5분 빠르게 맞춰져 있는 킴의 아날로그 손목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다. 비어있던 4개의 자리 중 3개의 자리를 검정 정장 차림의 홀로그램들이 채운다. 출입문이 다시 한번 열리고, 제복 입은 사람 하나가 들어와 마지막 빈자리에 앉는다. 9개의 자리 중 한가운데다.


킴의 뒤쪽 벽면 스크린에 [SEL 표준시 09:00:57 전원 착석 완료] 표시등이 은은한 푸른 빛으로 비친다. 표시된 숫자는 끝자리에서 초당 1씩 더해가며 시각을 반영한다. 9인의 중앙,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킴을 마주 보며 입을 연다.


“안녕하십니까. 셀(SEL) 경찰청장 서문 진 입니다. SCS 국제정보부 소속, 킴 킴 요원의 징계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개회가 선언되자, 의자의 배치를 따라가듯 길쭉하고 둥글게 떠올라 있던 홀로그램 테이블이 몸체를 위쪽으로 늘린다. 반투명하고 둥근 형태의 칠판이 된 홀로그램에는 킴의 사진과 약력, 현재 신체 상태와 소지품 목록, 금일 회부 사유인 위반 행위가 나열된다.


세밀하게 분석된 정보들 가운데 가려진 정보가 있다. [소속: SCS 국제정보부(Worldwide Intelligence Service, 약칭 WIS)] 옆에 명시되어야 할 [부서] 항목이 [! Access Denied(접근 거부)]라는 사각형 표시로 가려져 붉게 빛난다.


“킴은 지난 3월 15일 밤에서 3월 16일 새벽, 셀 시(市) 정부 네트워크에 비허가 접속을 했고, 본인 권한 외 정보를 열람했습니다.”


홀로그램에 나열된 정보와 진의 목소리는 다른 언어권에 있는 검정 정장인들의 스크린과 무선이어폰에 각자의 언어로 자동 번역되고 있다.


“정부 네트워크의 보안을 뚫고 침입해서 정보를 탈취한 행위는 명백한 불법 해킹입니다. 관련 업무 지시가 있었는지 위스(WIS)에 확인을 요청했으나, ‘확인 불가’라는 답변을 받았고···”

“C’è qualche ragione particolare per cui dovremmo ripetere questa storia? Tutti noi qui, sappiamo cos’è successo.”


검정 정장의 홀로그램 중 하나가 뚱한 뉘앙스로 진의 말을 끊는다. 등받이에 한껏 기대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우람한 남자다. “이 이야기를 되풀이할 까닭이 있습니까?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압니다.” 원본 음성에 약간의 시간차를 둔 번역 음성이 각자의 이어폰에 겹쳐서 들린다.


킴은 정직 기간에 어떤 전자식 기계도 소지할 수 없다는 처분을 받고 있으므로, 이어폰 또한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남자의 발치에 띄워진 [ROM-42N-12E]라는 글자를 응시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릴 뿐이다.


‘WIS 유럽 지부장, 줄리오 로씨(Giulio ROSSI).’


ROM 시국의 군사 경찰 조직인 CPRM(Carabinieri e Polizia della città ROM) 출신인 인물. 어떤 사건에서든 단죄에 관한 한 자비가 없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아시아 지부장이 부재한 지금, 킴을 도와줄 확률이 있는 참석자들은 WIS의 타지역 지부장들이지만, 줄리오를 구원투수로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아, 로씨 지부장님. 지루한 시간 낭비라는 점에서 무척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회의의 공정성과 회부된 요원의 정확한 인지를 위해서 누락할 수 없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은 본인의 말이 끊겼던 것에 불쾌한 기색이 전혀 없다. 줄리오의 발언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요원 하나의 징계위원회에 고위급 인물들이 줄줄이 모인 이 상황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WIS에서는 킴의 행위와 조직의 연관성 확인을 거부했으니, 보편적인 상황이었다면 징계위원회가 아니라 형사 재판이 열렸을 것이다.


“킴의 범법행위는 우리 셀 시국법을 적용하면, 발각 즉시 돔(Dome) 바깥으로 추방입니다. 감형 사유가 있더라도, 위험등급 1급 직종에서의 종신 노역형이 선고되죠.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킴에겐 적용할 수 없습니다.”


사형이나 다름없는 추방형. 기계들이나 맡는 비인간적 노동을 평생토록 해야 하는 노역형. 그런 판결이 즉시 내려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킴의 특이 사항 때문이다.


“킴은 ‘국제보호종’이니까요.”


현재 인종분류법에 의하면 인류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기계적 개조를 거친 메카닉 트랜스휴먼(Mechanic-Transhuman). 인공적 유전자 편집을 거친 제네틱 트랜스휴먼(Genetic-Transhuman). 둘 모두에 해당하는 하이브리드 트랜스휴먼(Hybrid-Transhuman). 어떠한 인공적 변형도 거치지 않은, 천연 형태가 보존된 인간인 내추럴 휴먼(Natural-Human).


이 중 내추럴 휴먼은 윤리적, 학문적, 기술적 사유로 인해 국제법으로 보호되는 인종이다. 내추럴 휴먼이 범죄를 저지른 경우, 현지 시국 기관과 SCS 기관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비공개 회의에서 처벌을 결정하게 된다. 일정 수위 이하의 처벌을 내리도록 하는, 보호 차원의 절차다.


“거기다, 위스 요원의 처벌은 위스 징계위원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위스는 킴 요원을 해임하지 않는다고 고지했습니다. 이런 복합적 사유로 인해, 우리 셀 시국과 위스는 지난 2주 간의 논의 끝에 공동 징계위원회를 열기로 합의했습니다.”


진의 눈빛을 응시하며 킴은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에 교차한다. 다리를 꼬아 앉는 자세에, 바지 한쪽의 밑단이 딸려 올라간다. 넥타이 색과 맞춘 듯한 아이보리색 양말이 드러난다. 킴의 동작을 인식한 홀로그램 시스템이 그의 발목에서 포착한 물건의 정보를 자잘하게 분석해 낸다.


[양말(Socks), 100% 베이비 캐시미어(Baby Cashmere), 250 셰디(SCD), 소니아 양장점 제품(Product by Sonia’s Boutique), 주문 제작: 2주 소요(Custom made: takes 2 weeks), 한정판(limited edition) ··· ]


9인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는다. 불쾌하다는 듯 살짝 찌푸리거나,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저 양말은 앞서 나열되었던 킴의 소지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다들 대충 넘겨 읽었던 것이다. 정직 기간은 킴에게 반성의 시간이 아니라, 고급 브랜드에 주문을 넣고 상품을 기다리는 시간 따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금일의 징계위원회로 킴 요원의 처분을 결정하게 됩니다. 지금 이게 무슨 자리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킴 요원?”

“물론입니다.”


킴의 행동에 잠시 말을 멈췄던 진이 다시 준비된 말을 맺는다. 킴은 담담하게 답한다.


“Then, why don’t we discuss the disposition right away? Here’s my opinion, ‘If you go to Rome, Follow the Roman law.’ What’s yours?”


마른 체구의 금발 여자 홀로그램이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연다. [NYC-40N-74W]라고 표기된 인물, WIS의 북아메리카 지부장이다. 바로 처분에 대해 논하자면서, 본인의 의견으로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를 인용한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재촉하기까지 한다.


‘오션 스미스(Ocean SMITH)도 도와줄 생각이 없다?’


킴은 이곳에 참석한 지부장들 셋 중 둘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면, 나머지 하나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다는 데서 인상을 찌푸린다.


참석자들이 저마다 의자 팔걸이에 설치된 버튼을 누른다. 사람들 머리 위로 홀로그램이 뜬다. [동의], 9명 전원이다. 킴은 즉시 깨닫는다. 여기 킴의 편은 없다.


‘이건 미리 짜인 판이다. WIS는 나를 버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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