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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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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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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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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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Not 내추럴 (3)

DUMMY

“다음 동선은 뭐야?”


음성 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모건이 묻는다. 킴 역시 도면이 올 동안 마냥 기다릴 생각은 아니지만, 모건이 먼저 다음 단계를 재촉할 줄은 몰랐다. 모건의 태도 변화에 킴은 그만 저도 모르게 웃는다.


물론 모건 입장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빨리 처리하고 따로 얘기하러 가자는 의도라는 건 킴도 안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보디가드로만 여겼던 모건이, 어쩐지 정말 수사 파트너가 되어가는 듯이 느껴진다.


“다음 어디 볼 거냐니까? 뭘 쪼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상 도우미 로봇은 침실 입구 쪽에···.”


킴이 침실 쪽으로 가려는데, 경찰 한 무리가 들어온다. 그들은 피해자의 시신을 검시과로 이동시키기 위해 욕실로 향한다. 통로가 북적인다. 킴은 그들이 지나갈 동안 잠시 기다린다. 오가다 눈이 마주친 경찰들과 살짝 고개를 움직여 눈인사한다.


경찰들이 이동형 캡슐에 피해자를 싣고 되돌아나가자, 막혔던 길이 트인다. 킴은 침실 입구 옆 벽면으로 간다. 사망 신고를 마친 후 지정된 자리로 되돌아간 기상 도우미 로봇이 비치되어 있다.


“이게 기상 도우미라고?”

“네. 데이터상으론 이게 맞습니다.”

“취향 참, 괴상한데.”


붙박이 가전제품에 지나지 않는 다른 로봇들과 눈앞의 로봇에겐 차이점이 있다. 인간처럼 잡는 동작이 가능한 손과 길쭉한 팔다리가 달린 기종이다.


“엄청 옛날 공사판에서나 쓰던 기종 아냐? 사다리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작업하던 그거.”


이 로봇은 건축 현장이나 공업 현장에 사용되던 모델이다. 층을 오르내릴 기동성을 위해 인간의 관절 기능이 탑재됐지만, 비용면에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라 그리 오래지 않아 다른 기종으로 대체되었다. 지금은 이동 반경에 레일을 깔고, 레일 위를 이동할 수 있는 기종을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다.


“저도 왜 이런 걸 썼는지 궁금하네요. 취향 문제는 아닐 거 같은데.”


피해자가 보유한 로봇은 모두 기능에 충실한 기종이다. 인간의 외형을 흉내 낸 휴머노이드 또한 이 집엔 없다. 잠을 깨워 주는 용도에 필요한 기능은 몇 안 된다. 실내를 이동하고, 알람을 울리고, 접촉해서 흔들어댈 수 있는 정도면 된다.


“뭐, 정말 사다리 탈 일이 있었던 걸지도요.”


킴은 지하 공간의 존재를 의식하며, 침실 안으로 들어간다. 창가에 걸린 얇은 커튼으로 스민 햇살이 침실 전체를 비춘다. 침대 옆쪽 바닥에는 작은 러그가 깔려있다. 보송보송한 털로 된 푹신한 재질이다.


“기상 도우미 로봇은 먼저 침실로 들어와서, 피해자의 부재를 인식했습니다. 청소 로봇은 피해자가 출근한 후에 작동하게 설정되어 있어서, 이 방이 마지막으로 정리된 건 금요일입니다.”


청소 로봇의 작동 시각은 평일 오전 9시 10분. 국회나 의원실의 출근 시각은 공무 시설과 마찬가지로 평일 오전 9시다. 청소 로봇은 월요일인 오늘, 피해자가 출근한 10분 후에 작동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깨끗한 걸 보면, 아마 주말 동안 침대에 누운 적이 없던 것 같고······.”


침실은 어질러진 곳 없이 깨끗하다. 침대 위 이부자리도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마치 금요일에 정리한 상태가 주말 내내 유지된 것처럼.


“그건 불가능해.”

“예?”


인상을 잔뜩 찌푸린 모건의 반박에 튀어나온 킴의 목소리는 반사적인 물음이다.


“주말에 집에서 침대에 안 눕는다니, 절대 불가능이잖아. 이부자리 정도야 본인이 정리했겠지.”

“흠···. 기계가 다 해줄 건데 굳이 직접 했을까요?”

“그게 아니면, 집에 없었던가.”


킴은 순순히 수긍하며 침실에서 나온다. 조리 로봇은 주말 동안에도 식사를 만들었지만, 지하에도 식사할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면 말이 된다.


“기상 도우미 로봇은 가까운 욕실이 아니라, 서재를 먼저 확인했습니다. 다음으로 거실을 둘러봤고, 욕실은 마지막이었습니다.”


침실 입구로부터 가장 가까운 건 욕실 입구, 다음은 서재 입구다. 킴은 로봇의 동선대로 서재로 먼저 향한다.


“우선순위에서 욕실이 마지막이었던 건, 거기 있다면 깨울 필요가 없다는 확률값이었을 겁니다. 그런 경우엔 보통 깨어 있는 상태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거나 했을 테니까요. 반대로, 침실 다음으로 잠든 빈도가 높은 곳은 서재였단 거겠죠.”

“틀린 것 같진 않은데, 넌 좀 편견이 있는 거 같아. 욕실에서도 충분히 잠들 수 있어.”


서재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마주한 건, 책장은커녕 종이로 된 책은 한 권도 없는 공간이다. 책상과 의자는 커다란 유리창을 등진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유리창은 두터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화창한 날씨임에도 서재 안은 약간 어둑하다. 킴은 오늘 처음 쓰는 SLPD 디바이스에서 플래시 기능을 찾으려 헤맨다. 모건은 왼손에 낀 검정 장갑을 벗고, 손날 쪽 버튼을 누른다. 딸깍 소리에 이어, 금속 손에 탑재된 플래시가 손날 방향대로 하얗게 빛을 뿜는다.


“메카닉은 편하네요.”

“부러우면 너도 하나 달던가.”

“플래시 임플란트 하나 달자고, 국제보호종에서 제외되긴 좀.”


한 박자 늦게 팔찌 디바이스의 플래시 기능을 켠 킴이 서재를 둘러본다. 책상다리 하나의 밑동엔 희미한 빛무리가 있다. PM37이 발견된 위치에 생성해 둔 홀로그램이다. 소지 자체가 불법인 무기라 실물은 곧장 수거해 감식 중이다.


“스턴 글러브는 여기서 한 짝만 발견.”


서재 입구와 책상 사이, 방의 중심에는 크고 두꺼운 러그가 깔려 있다. 킴은 자세를 낮춰 러그를 만져본다. 사람 한두 명 누워도 될 만큼 넓은 데다 무게감도 있어서, 발을 조금 잘못 디뎌도 들썩이지 않을 감촉이다.


“근데, 여기만 분위기가 너무 다르죠?”


지나오며 본 현관, 거실, 주방, 욕실과 침실까지 모든 실내 공간의 취향은 한결같았다. 커튼이나 식탁보는 가볍고 하늘하늘한 재질이었고, 이불이든 러그든 죄다 부드럽고 포근한 걸로 깔려 있었다. 이곳, 서재만 다르다.


“그러게. 이런 건 침실에나 달아놓지, 쓸데없이 여기다 달아놨냐.”


창문에 달아둔 건 암막 커튼이고, 러그는 타일카페트에 가까운 뻣뻣한 재질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할 용도가 아니라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외부에 비치지 않도록 차단한 건가.’


그때 킴의 손목에서 띠링, 소리가 난다. 킴이 SLPD 디바이스에 새로 수신된 메시지를 확인하려 터치한다. 홀로그램이 3D 도면을 띄운다. 아까 요청했던 지하 도면이다. 형사과 1팀이 수사부 에이스라더니, 센스 있게 지상층을 포함한 도면을 보내왔다.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킴이 입꼬리를 올린다.


“빙고.”


이 단독주택은 실내가 50평대, 마당이 20평대다. 20평대 지하 공간과 겹치는 지상층의 실내는 이 서재가 유일하다. 킴은 러그를 들어 올리고, 모건은 여기 뭐가 있단 건가 싶어 바닥에 플래시를 비춘다.


목재 바닥에 사각형으로 파인 홈이 있다. 일반적인 출입문의 반절 정도 크기다. 사각의 선분 중 하나의 안쪽엔 손가락만 한 홈이 파여있다. 킴이 그 음각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바닥이 위쪽으로 들려 올라온다. 들어 올려진 틈새로 손을 옮겨, 끝까지 열어젖힌다. 90도 각도에 세워진다. 해치 도어(Hatch Door)다.


“여기 있었네요, 사다리.”


모건의 플래시가 입구에서 시작되는 수직형 사다리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비춰나간다.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통로는 몹시 어두컴컴하다.


“음, 상당히 위험한 냄새가 나는데요.”


킴이 확인한 도면에서 이 지하 공간은 지표면 2.2미터 아래에서 시작한다. 벙커의 천장, 벽면, 바닥재 등의 벽체 두께가 각 0.5미터, 벙커 실내 공간의 높이가 3미터이니, 이 사다리의 길이는 최대 5.7미터가 되는 셈이다.


“내려갈 거야?”


플래시 하나에 의지해 어둠 속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게 두려운 건 아니다. 도착한 공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 위험한 요소다. 만약 그곳에 집주인이 설치해 둔 함정이 작동한다거나, 트랜스휴먼 살인자가 기다리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면, 내추럴 휴먼인 킴이 즉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네. 먼저 내려가실래요? 전 SLPD에 수색팀 지원 요청 좀 해놓고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강 소율 의원의 집 지하에 있는 공간은 20세기 말에 지은 걸로 추정되는 방공호의 일부다. 21세기 초반에 발견되어 문화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던 곳인데, 160여 평의 공간과 20여 평의 공간이 연결된 구조였다.


22세기 현재, 160여 평의 너른 공간은 시 소유로 남아있고, 20여 평의 작은 공간은 사유지로 전환되어 있다. 지하 공간의 소유권이 수직으로 인접한 지상 토지에 편입된 것이다. 20평짜리 벙커의 최종적인 소유주는 물론, 지상 주택의 주인인 강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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